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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몽(白日夢)

소년시절

by 최연수

난들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일이 어찌 없었으랴. 그러나 어렸을 적부터 어떤 소원이나, 희망을 밖으로 나타내지 못 하고 자랐다. 기대했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면 눈물만을 흘렸는데 그나마 마음 놓고 울지 못했다.

여의주(如意珠)를 가지고 빌면, 갖고 싶은 것 가질 수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뜻대로 된다는데, 용(龍)의 턱 아래에 있다는 이 구슬을 내가 어떻게 구한다는 말인가?

도깨비와 친하면 도깨비 방망이를 얻어서, “금 나오라 뚝딱” 하면 금이 나오고, “은 나오라 뚝딱 하면 은이 나온다” 하는데, 도깨비바늘이 옷에 붙어도 기겁을 하는 내가,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저 고목(古木) 나무의 도깨비불을 어떻게 찾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일본 동화의 ‘こぶとり(고부도리)’나 우리 동화의 ‘혹부리 영감’은 모두가 도깨비로부터 보물(寶物)을 얻는 이야기인데, 나야 혹이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노래나 춤을 잘 추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일본 동화 ‘꽃피우는 할아버지(はなさかぢぢい)’에는, 개가 땅을 파며 짖는 곳을 팠더니 보물이 나왔 듯이, 우리가 기르고 있는 저 검둥이도 흙을 파면 나도 파봐야지. 그러나 우리 집 저 검둥이는 똥개인데 보물 묻힌 곳을 알 수 있을까? 우리나라 전래(傳來)동화 ‘흥부와 놀부’를 보면 착한 흥부에게 제비가 박 씨를 물어다 주었는데, 나도 제비를 잘 돌봐주면 날 도와줄까? 그리고 장화홍련전에 나오는 그 두꺼비 같이, 장마철 두꺼비가 집에 들어오면 부와 재수를 몰고 온다 했고, 그 허물을 뒤주 밑바닥에 붙여놓으면 쌀을 퍼내고 퍼내어도 항상 넘친다고 했다. 그래서 두꺼비 꽁무니를 살금살금 따라다니면서 허물벗기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 헛된 일이었다.

이웃집 중국집에서 기르는 *수금조(漱金鳥)는 진주 가루와 거북이 머릿골을 먹이면 좁쌀만한 금 부스러기를 토해낸다는데, 그래서 저 집은 저렇게 잘 사는 것인가? 그 새를 어디서 구하며, 진주와 거북이 머릿골은 또 어떻게 구한다는 말인가? (후에 안 사실은 종달새임)

그런데 잘 사는 부자(富者)들은 왜 저렇게 잘 살며, 우리는 왜 이렇게 가난할까 하는 것이 풀리지 않은 의문이요, 우리도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늘 궁금했다. 부지런히 일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고 하지만, 내 딴으로는 이만큼 부지런히 집 안 일을 돕고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아무런 효과(效果)가 없지 않은가?

저 하늘의 별만이 내 마음과 소원을 알아주겠지. 나는 참으로 별을 좋아했다. 깊은 밤 밖에 나와 하늘을 쳐다보면 바늘 끝 하나 들어갈 수 없도록 촘촘히 박혀있는 별들은 갖가지 생각을 일으켰다. 아이들은 별똥별이 떨어질 때 사라지기 전에 자기의 소원을 세 번만 아뢰면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해봤으나 과연 이루어질 것인가? 이른 아침 남산에 올라가 동쪽 하늘을 쳐다보면 유난히 반짝이는 별 하나가, 꼭 나만 내려다보며 손짓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소원을 알고 들어줄 것 같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것은 샛별(金星)이라 했다.

어느 날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막 다리를 건너려는데 맞은 편 강 언덕에서 눈이 부시도록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오직 나만이 보았을 것이다고 생각했다. 하늘의 별이 떨어져 있거나 그 어떤 보물(寶物)임에 틀림없다 생각하고 헐레벌떡 뛰어가서 찾아보았다.

그러나 한참 찾다보니 깨진 큰 거울 조각이었다. 깨진 그 거울처럼 내 꿈이 깨어졌을 때의 허전함을 달랠 길이 없었다.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하였고,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지만 내 꿈은 이런 백일몽이었다. 후에 내 필명(筆名)을 성인(星人)이라고 했던 것도, 별에 대한 나의 꿈이 그만큼 빛나게 아롱졌기 때문이다.

그 옛날 아버지로부터 공기총 선물을 받아본 이후 장난감이라곤 사본 일이 없다. 해방 후 쫓겨 가던 왜놈 빈집에서, 굴러다니는 일본 인형(人形) 몇 개 주워 가지고 노는 일 외에는 장난감을 가져본 일이 없다. 팽이나 대나무썰매, 구슬, 딱지, 공(실을 감은 공), 콩주머니, 공기돌, 제기, 물총, 고무총 외에 갖고 논 것이 없는 것 같다.

일제 때는 방공(防空) 연습이다 근로(勤勞) 봉사다 하여 즐겁게 놀아본 일이 별로 없고, 해방이 되면서 비로소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어 놀았는데, 축구(蹴球)를 가장 많이 했다. 축구공이란 새끼줄이나 노끈을 둥글게 감아서 차는 것, 심지어 돼지 오줌통(방광) 차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고무신이 미끄러워 공을 차는 게 아니라 고무신이 공중 높이 뜰 때가 많았다. 그러나 나는 발가락을 크게 다친 이후로 무서워서 하지 못했다. 몸집도 작은 데다가 몸바탕도 허약하며 마음도 여려서 축구 같은 몹시 힘들고 거친 운동이 나에게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바닥이 빨리 닳을까 봐 마음의 짐도 되었다. 콩 주머니나 실공으로 ‘찐뽕’이란 걸 많이 했는데 야구와 비슷한 것이었다.

여름에는 탐진(耽津)강에서 물놀이하며 멱을 감은 게 즐거웠다. 신흥리로 가는 길목에는 백년소(백년沼)가 있어, 큰 아이들은 다이빙(diving)을 즐기고 낚시질을 했지만, 나는 깊은 물이 무서워 강바닥이 맑게 비치는 아래 강에서만 놀았다. 흰 차돌을 던져놓고 물속에서 찾아오는 놀이, 물속에서 거꾸로 물구나무 서는 놀이를 하였다. 수영복도 없이 발가벗은 채 여자 애들과 함께 물장구치며 놀았는데 부끄러운 것을 몰랐다. 물 들어가는 것을 막는다고, 흔히 쑥 잎을 뜯어서 귓속에 쑤셔 넣었는데, 어느 날 먹다 남은 배씨로 막았다.

“니 귀에서 배나무가 난다. 배 따 묵고 좋겄다.”

누나가 골려대는데, 좋기도 하고 겁도 났다. 씨를 빼내려고 손가락을 넣으면 매끈매끈해서 나오기는커녕 더 깊이 들어가 이제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이 일 때문에 큰 야단을 맞았음은 물론, 또 병원 신세를 졌다.

가까운 산에 올라가 노는 것이 즐거웠다. 나무에 올라가 매미, 사슴벌레, 풍뎅이를 잡았다.

“풍뎅아 풍뎅아, 빙빙 돌아라”

“땅갭아 땅갭아, 쿵쿵 찧어라”

풍뎅이 머리를 돌려놓고 다리 관절을 끊어서, 거꾸로 뉘어놓으면 뱅글뱅글 도는 게 재미있었다. 땅개비(방아깨비)를 잡아 뒷다리를 잡은 채 쿵덩쿵덩 방아 찧는 것도 재미있었다. 마당 빗자루로 고추잠자리를 보는 대로 잡거나, 밤이면 반딧불이를 잡아다가 공부를 한다고 진(晋) 나라 차윤(車胤)의 흉내를 내기도 하였다.

독서할만한 책이라곤 전혀 없었다. 일제 때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에도 교과서마저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아 공부했으니 다른 책이 있을 리 없다. 6학년 때 더러 부잣집 아이 몇몇이 부독본(副讀本)을 사서 보았으나, 나에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재수(再修)할 때 입학시험 문제집과 중학 강의록(講義錄)이 나에게는 첫 부독본이며, 삼촌(鍾根)이 동생에게 보내준 ‘어린이나라’ 잡지가 유일한 책 벗이었다. 위인전(偉人傳)을 읽는다거나 재미있는 동화(童話)와 소설을 읽을 기회가 없었으니, 무슨 꿈인들 꾸어 봤으랴.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화분 정물화와 불조심 포스터(불난 집 아이가 깡통을 차고 빌어먹는)가 뽑혀 뒤편 작품난에 붙게 된 영광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환쟁이(화가)는

배고프다며 그리지 못하게 해서 늘 몰래 그리곤 했다. 밀가루에다 물감을 섞어 그림물감을 만들어봤는데 물론 실패(失敗)였다. 크레용 한 토막이 얼마나 귀한지 아까워 발발 떨면서 살짝 살짝 연하게 색칠했으니, 그게 어찌 그림다운 그림이었을까? 그림을 오려서 인형(人形) 놀이를 했으며, 종이를 접거나 오려서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빼무락질’이라 했는데, 이것도 죄인처럼 숨어서 해야만 하였다. 재수(再修)하던 해, 지폐(紙幣)를 한 장 심심풀이로 그려봤다. 제법 세밀하고 묘하게 그렸는지 속은 사람도 있었다. 친구들이 한 번 써보라고도 하였다. 그 때는 가짜 돈을 만드는 것이 범죄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 했다. 해방이 되자 카페(cafe 프)와 빠(bar) 안에 걸려 있었던 풍경화(風景畵)와 정물화 (靜物畵) 그리고 알몸의 유화(油畵)가 내 눈길을 끌었는데, 세상이 시끄러워지면서 카페도 빠도 자취를 감추고, 이후 이발소에 걸린 액자나 극장(劇場) 앞에 그려진 간판 밖에 다른 그림을 본 일이 없었다.

악기(樂器)라고는 만져본 일이 없다. 보리피리나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었을 뿐, 학교에서의 오직 하나인 악기는 풍금(風琴=organ)이었는데, 나 같은 아이들은 감히 만질 수 없고, 피아노(piano)는 그림에서나 보았다. 노래는 좋아한 편이었으나, 숫기가 없어서 누구 앞에서 가슴을 펴고 제대로 불러본 일도 없다.

“ 삼천리 강산에 새 봄이 왔구나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

창가(唱歌=음악) 시험에는 마지못해, 이런 4마디짜리 한 도막 형식의 짧은 노래를 중얼거리듯 부르고는,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재빨리 자리로 들어가서 엎드려 있었다.

해방 후에는 가을에는 운동회, 봄에는 학예회(學藝會)가 열렸다. 5학년 가을 운동회 때 매스게임(mass game)이란 걸 처음 보았다. 메가폰(megaphone)으로 ‘울밑에서 봉선화’를 부르는 여선생의 구슬픈 노래를 따라, 손가락에 흰 꽃을 매단 여자 아이들은, 일본이라는 찬바람에 시들었다가, 해방이라는 새봄을 맞아 다시 피어나는 군무(群舞)는 인상적이었다. 이듬해 봄 학예회 때의 2부합창 ‘반달(푸른 하늘 은하수)’과, 우리 학급 아이들이 하는 ‘거지 형제’ 연극도 또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이렇게 연극(演劇)과 유희(遊戱) 따위가 좋았는데 한 번도 뽑혀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동네 조무래기들을 모아놓고, 툇마루에서 연극과 무용을 했다. 기둥 사이에 새끼줄을 걸고, 어머니들 치마로 막(幕)을 만들어 무대(舞臺)를 만들었는데, 내가 각본(脚本)을 쓰고 연출(演出)과 연기(演技)도 했다. 그래서 가시나(계집아이) 라는 별명도 또 얻었다. 운동보다는 예술 방면에 관심과 흥미가 많았는데, 그러나 이런 일을 부모님이나 다른 사람들이 칭찬을 해주기는커녕, 못난 짓 한심한 짓으로 여기었다. 몽상가(夢想家)인 나에게는 이런 것도 꿈이라면 꿈이었는데, 여름 한낮 낮잠 자다가 꾼 백일몽(白日夢)에 지나지 않았다.

*수금조(漱金鳥)....중국 위나라 습유록(拾遺錄)에 나오는 전설의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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