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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전염병

소년시절

by 최연수

해방이 되면서 ‘옴’이라는 피부 전염병(傳染病)이 나돌았다. 일본에서 배를 타고 돌아온 재일동포(在日同胞)로부터 번지기 시작했다고들 했다. 마치 쫓겨나다 시피 짐짝처럼 실려서 여러 날 현해탄(玄海灘)을 건너온 동안, 목욕은커녕 옷인들 갈아입을 경황(景況)이나 있었으랴. 이

가 득실거려도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고 했다. 우리 고모네 식구들도 그랬다. 일자리를 찾아 일본에 건너가서 밥벌이를 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거의 빈손으로 돌아 왔는데, 가져온 선물이 기껏 ‘옴’이었다. 고종 사촌 동생들이 아주 심했는데, 어린 행자를 늘 업고 봐주던 나에게 곧장 옮겨진 것이다. 그는 온종일 입을 다물 줄 모르고 울어댔다. 어린 애가 그 가려움을 어떻게 참을 수 있었겠는가? 무른 살에는 어김없이 옴이 번졌는데 심항 경우에는 고름과 진물이 마를 겨를이 없었다. 별 뾰족한 약이 없어, 소금물에 잠그거나 기왓장 가루와 수은(水銀)을 짓이겨서 발라도 좀처럼 낫지를 않았다.

옴은 발진티프스열. 재귀열과 함께 이(虱 슬)가 옮기는 전염병이라는데, 쌀 한 톨만한 이의 새끼치기는 기하급수(幾何級數)를 넘어설 정도였다. 한 마리 잡으면 열 마리가 더 생긴 듯 득실거렸다. 의복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여자들 머리칼에도 구슬 꿰어놓은 것 같이 서캐(이의 알)가 하얗게 붙어 있었다. 뜨개질 옷에는 한결 더 해서 화롯불에 옷을 쬐어야 모조리 기어 나오고, 이음매에 슬어 놓은 서캐는 인두로 지져야 할 정도였다. 학교에서 의자에 앉아 있으면 어디서 나왔는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옮겨 다니며 피를 빨았다. 재수 없으면 ‘재수 옴 붙었다’ 할 정도로 골치 아픈 병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톡톡 튀는 벼룩이와, 밤에만 나와 설치는 빈대도 골칫거리였다. 목욕을 자주 하거나 옷을 자주 갈아입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위생(衛生) 상태에서 피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미군(美軍)들이 들어와 D.D.T.라는 흰 가루약을 몸속에 들이붓 듯해서 가까스로 없어지게 되었고, 빈대는 연탄을 때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해방 되던 이듬해 여름 장티푸스(腸窒扶斯)와 콜레라(cholera)가 겉잡을 수 없이 휩쓸었다. 콜레라는 호열자(虎列刺)라는 법정전염병인데 높은 열이 나면서, 배가 끓고 우유 같은 것을 토하고 쌌다. 병이 나면 의례 죽어나갔고, 환자가 있으면 가족과도 떼어놓았다. 그 집 주위는 금줄을 쳐놓고 통행이 금지된 저주(咀呪)의 마을이 되었다. 파리가 옮긴다는 바람에 분무식(噴霧式) 파리약이 바닥나고, 끈끈이 파리약이 천정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재래식 변소(便所)마다 구더기가 득실거리며, 쓰레기 더미와 사람과 가축들의 똥 덩이가 여기저기 널려 있는데, 손을 쓸 수가 있었으랴. 종소리가 달랑거리면 어김없이 리어카에 시체가 실려 나갔다. 이것을 보기만 해도 걸린다는 바람에 숨기도 했다. 건너편 동네에 들어온 호열자가 우리 동네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아낙네들은 밤낮없이 바가지를 거꾸로 엎어놓고, 툇마루를 빡빡 문질러댔다. 개구리들이 우는 소리에 확성기(擴聲器)를 대놓으면 그럴 것이다. 소도 하늘을 쳐다보고 웃을 수밖에 없는 어처구니없는 이 광경! 예방접종(豫防接種)이 없던 시절 이렇게 비위생적이고 미신적인 방법만이 전부였다. 소독(消毒)을 한다고 했는데,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찬 바람이 나면서부터 수그러졌다.

어느 해 여름에는 또 말라리아(malaria)가 번졌다. 학질(瘧疾)이라고 하는 이 병에 나도 걸렸다. 하루 걸러 춥고 떨리는데, 여름인데도 온돌방에 군불을 지피고 이불을 둘러쓰고 있어도 이가 맞부딪칠 정도로 떨었다. 학질모기가 옮긴다는 법정전염병으로 죽는 비율은 그리 높지 않았으나 고통은 말할 수 없었다. 이(虱)를 김치에 싸서 먹는다거나, 뱀을 잡아 목에 감아주어 깜짝 놀라면 낫는다는 말이 떠돌았다. 그래서 새끼줄이나 허리띠를 물에 적셔 잠자는 환자의 목에 감아주기도 했다. 간신히 괴로운 일을 벗어나면 ‘학질 뗀다’ 는 말이 이래서 생겼을 것이다. 참으로 고약한 병이요, 별다른 약을 써보지 못한 채 어쩌다 나도 학질을 떼었다.

한센스병을 점잖게는 나병(癩病)이라 했고, 보통 문둥병이라고 했다. 해방이 되면서 치안(治安)이 불안한 틈을 타서 소록도(小鹿島)에 따로 떼어 수용된 환자들이 육지로 풀려 나왔다. 장흥교 다리 밑에 나병 마을이 들어섰다. 이들은 깡통이나 쪽박을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얻어먹으면서 살았다. 그 문드러진 손, 눈썹 없이 우그러진 얼굴이 애처롭기보다는 싫고 징그러운 감정이 앞서서, 우리 아이들은 이들을 짐승처럼 피해 다녔다. 어린애를 꾀어가서 잡아먹는다, 푸대접하는 사람에겐 고름과 진물을 묻힌다, 가까이 다가가서 말만 해도 옮는다는 갖가지 소문이 떠돌면서, 으슥한 골목에서 마주치면 까무러칠 정도였고, 오솔길에서 만나면 죽을상이 된 채 비명을 지르며 곤두박질하듯 도망쳤다.

짓궂은 우리 아이들은 그들 깡통이나 쪽박에 모래를 뿌리고 달아나기도 했고, 다리 난간(欄干)에서 나병 마을에 모래를 뿌리고 줄행랑치기도 했다. 치안이 잡히면서 그 집단 마을은 어디론지 물러갔으나, 그 무리에서 떨어진 사람들의 떠돌이는 한 동안 사라지지를 않았다. 구약 성경을 보니 그 당시 이스라엘도 천벌(天罰)로 여겨서 천한 대접을 받았던 모양이다. 좀처럼 낫지 않는 이 병에 걸린 것만도 억울한데, 예나 지금이나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 그들의 원통함과 슬픔이 뼈에 사무쳤을 것이다.

폐병(肺病)도 흔한 전염병이었다. 우리 이웃집 아주머니도 두 분이나 이 병으로 돌아가셨다. 파리한 얼굴과 깡마른 모습으로 기침하면서 다니는 사람들은, 젊은이 어린이 할 것 없이 어김없이 환자들이었다. 부유한 집 사람들인데도 완전히 치료를 못하고, 일생동안 몸을 버려 사람 구실을 못한 몹쓸 사람처럼 살았다. 계절에 관계없이 전염이 되었는데, 따로 떼어 놓지를 못한 탓인지 가족들이 차례차례 걸리는 일도 흔했고, 가까이 지내는 친구 사이에도 옮기므로 꺼리어 피하는 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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