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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것질과 뜨개질

소년시절

by 최연수

하루 세 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군것질을 마음대로 했으랴. 왜정 때 가장 맛있는 おこし(오꼬시=거여粔籹), せんべい(센베이=전병煎餠), ようかん(요깡=양갱羊羹) 따위를 먹어보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제사 명절 때의 떡이나 밤, 대추, 곶감, 배도 그 때 뿐 먹기 힘들었다. 감과 살구는 비교적 흔하게 먹을 수 있었으나 떨어진 감도 버리지 않고 소금물에 우려먹었다. 사과 능금은 비교적 귀했으며, 귤은 아주 귀(貴)했고, 바나나(banana)는 그림으로만 보았다. 여름에 참외와 수박, 일년감(tomato)은 비교적 쉽게 먹었고, 딸기는 작은 재래종 딸기뿐이었다.

“ 엿 사시오, 깨엿 콩엿 호박엿, 핀엿 사시요!”

엿 장수 가위질 소리가 나면 동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무리 마른침을 삼키며 손가락을 빨아도, 돈이 없으면 엿장수는 파리 날리듯 아이들을 쫓기 마련이었다. 구멍 뚫린 양은그릇이나 쇠붙이를 가져오라고 했으나 가져올 것이 있어야지. 가래엿을 부러뜨렸을 때 잘린 자리의 구멍 수로 내기를 하는 엿치기가 흔했는데, 늘 잘 이긴 사람들이 있어서 신통하게 바라보았을 뿐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었다.

외가에서 가져온 고구마나 옥수수도 점심 대용(代用)으로만 먹었으며, 감자도 아플 때나 사 먹을 수 있어서 어떤 때는 좀 아팠으면 한 적도 있었다. 올벼쌀이나 볶은 콩, 깡밥(누룽지)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꺼내먹거나, 수수깡을 잘라서 씹으며 단물을 빨아먹는 일, 삐비(이른 봄 피기 전 연한 풀잎꽃) 뽑아 먹는 일, 늦은 봄 감꽃을 목걸이로 걸고 다니며 빼어먹는 일, 야산에 나는 산딸기, 보리똥(보리수나무 열매), 오돌개(뽕나무 열매 오디) 따 먹는 일이 흔한 주전부리였다.

“ 뻥 ”

뻥튀기 장수가 해방 후 처음 나타났는데, 그 작은 강냉이 알이 희고 크게 부풀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귀를 막으며 기다리고 있다가, 뻥 터지면 주위에 흩어진 것을 주

워 먹느라고 야단이었다. 해방 후 아이스케이키(ice cake)가 처음 나왔다. 한 여름에 얼음을 먹는다는 것은 참으로 희한(稀罕)했다. 설탕물을 얼린 딱딱한 얼음덩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를 사먹기 위해 얼음집 앞에서 한참 동안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했다.

“아이 새끼야, 얼른 가자!”

“아이스 케이키 얼음과자!” 라는 말을 이렇게 외쳐대면서, 나무 통 속에 넣은 얼음과자를 어깨에 메고 다니며 팔았는데,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팔고 다니는 우리 반 아이가 부럽기도 했다.

밀기울을 빚어서 밥 위에 얹고 쪄낸 개떡, 쑥과 찹쌀가루를 섞은 버무리를 먹었으며, 밀가루칼국수로 쑨 팥죽을 가장 맛있게 먹었다. 설탕이 귀해서 대용품인 사카린(saccharine)을 쳐서 먹었으며, 물 국수도 사카린만 쳐서 먹었다. 외가(外家)의 어떤 머슴은 꾀병으로 배가 아플 때 이 사카린 물만 마시면 낫는 묘약(妙藥)이기도 했다.

‘없다 흥글흥글(흐물흐물)’

이것은 내가 누나에게 붙인 별명(別名)이었다. 누나가 내 별명을 부르면 나도 질까봐 그렇게 맞섰다. 어머니가 조금도 남김없이 누룽지를 긁어내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보면 매번 누룽지가 남아있어서 야단을 맞곤 했다. 커서 알고 보니까 솥 밑바닥에 눌어붙은 데다 물을 부어놓으면 불어서 흐물거리는 것을....누나는 내가 얼마나 얄미웠을까? 그리고 동생에게는 ‘해벤덱해벤덱 쌕쌕’이라는 별명을 주었다. 그는 낙지, 오징어, 쭈꾸미 따위만 있으면 희번덕거리며 먹다가, 과식하면 식식거리기 때문이었다.

가을에는 벼메뚜기를 잡아다가 번철(燔鐵)이나 솥뚜껑을 엎어 볶아먹기도 하고, 번데기는 고급 군것질 감이었다. 여름에는 시냇가에서 잡아온 고둥을 삶아서, 꽁무니를 펜치(pincers)로 깬 후, 옷핀으로 빼어먹기도 하였다. 아이들은 겨울에 초가지붕 처마를 쑤시고 다니면서 참새들을 잡아 구워먹었는데 나는 구경만 하였으며, 지렁이를 미끼로 냇가에서 낚시를 하거나, 유리 병 안에 된장을 풀어 피리 잡이를 했는데, 따라다니며 시중이나 들었을 뿐 나 스스로 해본 일이 별로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찌를 바라보며 우두커니 앉아있는 낚시질이 따분해서 별로 즐겁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먹는 이야기를 지루하도록 하였구나.

* *

의.식.주라 했으니 의복 이야기를 아니 할 수가 없지. 그러나 너무나 단조(單調)로운 의복이라 이야기 거리가 없다. 어렸을 적에는 거의 내복(內服)을 입지 않았다. さるまた(사루마다=사각panty)를 국민학교 4학년 때 비로소 입었던 것 같다. 더구나 왜정 때는 바지 호주머니를 기워 입었다. 추위를 이기라고 학교에서 손을 넣지 못 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무명 옷 몇 벌 가지고 사철 입는 것이다. 빨래나 목욕을 자주 하지 못 해서 겨울에는 이(虱-슬)가 많았다.

그 때는 염색(染色) 집이 호황(好況)이었다. 명절이 되면 염색한 울긋불긋한 옷을 입었는데, 어머니는 사온 물감으로 집에서 물감을 들여 누나의 옷을 해 입혔다. 염색이 얼마만큼 고르게 되느냐는 것이 솜씨의 기준이었다. 명주옷이 고급 옷감이었는데, 염색한 후 다듬잇돌과 홍두깨에 놓고 방방이로 다듬이질하는 것이 여간 힘 드는 것이 아니었으며, 숯불로 다리미질 할 때는 온도의 조절이 가장 힘 드는 일이었다. 해방 후 어느 해 추석날 딱 한 번 한복을 해 입었는데, 소변보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을 뿐더러, 어쩐지 어색하고 부끄러워서 밖에 입고 나가지를 못했다.

해방 후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헌 작업복(作業服)을 염색해서 고쳐 입거나, 헌 담요를 염색해서 외투(外套)를 지어 입은 것이 최고급 의복이었다. 상수 동생이 1학년 때 이 헌 담요로 오우버(over-coat)를 처음 지어 입었는데, 이내 불타버렸다. 모본단, 양단, 공단, 호박단 등 비단은 혼수(婚需) 감으로나 사용했으며, 막내 이모 결혼할 때 꽃무늬가 있는 인조견(人造絹)치마 저고리를 양단의 대용(代用)으로 선사했다. 나일론(nylon)이나 비닐론(vinylon) 같은 화학섬유 합섬섬유(合纖纖維)는 아직 알려지지도 않은 때였다. 양말 한 켤레면 전구를 끼워 넣은 채 얼기설기 기워서 신었는데, 겨울엔 너무 발이 시려 교실 바닥에서는 외가에서 보내온 짚신을 덧신고 있었다.

의복 이야기라면 뜨개질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왜정 때였으니까 여남은 살 쯤 되었을 것이다. 일본 아이들이 입고 다니는 あみもの(아미모노=編み物)가 참 멋지게 보였다. 누나가 이것을 배운다기에 늘 누나와 경쟁관계에 있던 내가 지고 싶지 않았다.

“넌 못해. 남자들은 안한다니께”

누나가 말릴수록 더 하고 싶어 어깨 너머로 배우기 시작했다. 남이 쓰다 버린 실들을 모으고 이어서 뜨는데, 내가 누나보다 훨씬 잘 배웠다. 우선 내 손이 여자 같이 가냘픈 데다가, 눈썰미가 있어서 코 늘리기와 줄이기, 안뜨기와 겉뜨기 등 기본적인 것만 익혀도, 편물(編物)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으면 그 방법과 기술을 누구에게 따로 전수(傳受) 받을 필요가 없었다. 여러 사람과 밤에 불을 끈 채 내기를 했는데도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 해방이 되어 일본에서 귀국한 고모는 내 손재주가 대단하다면서, 쓰다 남은 털실들로 간단한 허리띠 목도리를 떠보라고 하였다. 우선 털실이 좋을수록 쉽고 재미있었다. 이렇게 해서 양말로 장갑으로 조끼로 발전해 갔다. 내 손놀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누나는 일찍이 손을 놓아버리고 자기는 자수(刺繡)를 배우겠노라고 했다. 이에 또 질세라 수놓기도 따라잡았다. 번번이 발목을 잡힌 누나는 아예 편물과 자수 모두와 담을 쌓은 채, 아예 나더러 해달라고 했다. 동네 계집아이들로부터 주문이 들어왔다. 양말 장갑 따위는 식은 죽 먹기였다. 하루에 양말이나 장갑 한 켤레는 거뜬히 떴으니까. 좋아서 그저 해주었는데 실을 좀 얻는 게 수입이었다. 상수 동생의 스웨타(sweater) 바지를 떠 입힐 정도가 되었을 때는 유명해졌다. 신기하게 여긴 외할머니께서 손수 물레로 자아서 만든 무명실을 많이 대주셔서, 외숙의 양말 등을 떠 드렸다. 그 당시 버선만 신던 외딴 시골에서 이런 양말은 특허(特許)감이었다.

그런데 이웃 중화요리 집 왕서방의 양말은 그런대로 잘 떠드렸는데, 또 조끼를 떠달라는 것이 아닌가? 어렵지 않게 생각하고 덤벼들었는데 웬걸, 드럼(drum)통만한 굵은 허리를 한 바퀴 돌고나면 손에서 진땀이 났다. 자동차 헛바퀴 도는 것 같이, 아무리 손을 놀려도 늘지 않고 제 자리 걸음만 하는 것이다. 맥이 빠지고 지쳐서 못 하겠노라고 했더니, 벌써 짐작했다는 듯이 아주머니는

“삼년 겨른 노망태기’란 속담 몰라?”하며 웃었다. 왕서방도 따라 웃으면서 벽에 결려있는 만리장성(萬里長城) 액자를 가리켰다.

“저 만리장성 같이 잘이 해. 쌀이쌀이 해...”

하면서 바늘 코가 저 만리장성만큼은 늘어져 있어야 한다는 게 아닌가? 나를 시험하는 것인지, 교훈을 주자는 것인지..... 천천히 느긋하게 하라면서 맛있는 자장면(酢醬麵 중)을 주셨다. 그리고 자장면 국수발을 뽑아내는 장면을 구경시켜 주었다. 한 번도 끊어짐이 없이 그 가는 국수 가락을 수 십 가닥 뽑아내는 재주는 참으로 놀라웠다. 구슬땀을 뚝뚝 떨어뜨리면서도 즐겁게 일하는 모습! 결국 간신히 고무뜨기만으로 중단하고 말았지만, 그 사건은 내 인생의 좋은 교훈이 되었다.

그 후 편물 기계가 등장한 후 손 뜨개질은 의미가 없어졌다. 학교에서 실과(實科) 시간에 기초적인 것만 가르쳐줄 정도로 한 동안 잊고 있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자 손이 간지러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대석의 양말, 장갑, 모자, 스웨타, 바지, 오우버 코우트.....배워보겠다는 아내에게는 사는 게 싸고 좋다면서 가르쳐주지 않았다. 최근까지도 아내의 스웨타 2벌, 은진의 모자.....소문이 널리 퍼져 별종(別種) 인간으로 여겼다. 그러나 손자 신영의 양말 장갑 등속을 떠주었는데,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서 이제는 손을 놓았다. 잡념(雜念)을 잊고 무료(無聊)한 시간 보내기는 참 좋은 일거리지만,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 것도 힘들고, 눈도 침침하며 어깨도 결러서 지금은 돈이 생겨도 할 수 없다. 자랑은 아니지만 아기 낳는 것만 아니라면 여자들이 하는 일은 뭐든지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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