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시절
1947년에 6학년으로 진급했다. 정규 사범학교(師範學校)를 졸업하고 새로 온 길(吉)ㅇㅇ선생이 담임을 맡았다. 그는 학생들은 공부나 해야지 사상(思想)에 물들어선 안 되며, 어른들의 정치운동에 휩쓸리지 말라고 가르쳤다. 이것을 빌미로 좌익 선생들은 좌익 아이들을 부추기었다. 그들이 등 뒤에서 시키는 대로 담임선생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흔들리는데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겠느냐고 대들었다.
이때 5학년인 누나 반에서 연구수업(硏究授業)이 있었다. 그런데 예습(豫習)하라는 숙제가 모두 공산주의 사상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내용이었다. 누나는 철없이 아버지께 숙제를 가르쳐달라 하였고, 아버지는 이 자료(資料)를 경찰서에 넘겼다. 이 문제로 인해서 담임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게 되고, 이를 눈치 챈 담임은 누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아이들 가슴에 멍이 들면서 학교가 참으로 어수선했다.
“선생님, 왜 선생님은 여자만 좋아하십니까?”
그 때 18살인 J라는 아이가 걸걸한 목소리로 첫 말대포를 쏘았다. 그는 부산면에서 전학해 왔는데, 첩의 아들이란 말도 있었고, 후처의 아들이란 말도 있었다. 아무튼 아버지 같은 그 형님들은 의사 등 교육수준이 높은 인테리(intelligent) 좌익이었다. 그는 특히 말솜씨가 좋았으며, 노래와 운동도 잘 했다. 오만 잡동사니 상식이 풍부해서, 그야말로 모른 것 빼고는 다
아는 우리들의 백과사전이었다. 우리더러 불거웃(음모=陰毛)도 안 난 우멍거지(포경=包莖)들이라며, 연애와 결혼 강의를 하고, 심지어 성과 임신에 관한 사진과 삽화가 있는 형님의 의서(醫書)를 가져와서 몰래 보여주기도 했다.
“느그들 용개질(용두질) 할 줄 모르지야?”
이렇게 공부 시간에 수음(手淫)하여 용개물(정액=精液)을 몰래 돌리기도 한 괴짜였다. 키는 자그마했으나 야무지고 똑똑해서 그 인기는 대단했다. 그 주위에는 항상 아이들이 모여들었으며, 그를 따르는 아이들은 마치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였다.
“내가 무신 여잘 좋아한단 말여?”
“남녀가 평등한디, 왜 여자를 앞에 앉히고, 소제(掃除)도 안 시킵니까?”
“여자들은 임시 우리 학급에 온 손님 아니어? 여자들은 약자가 아니어?”
“선생님은 방과(放課)후에도 여자들만 냉겨 놓고.....”
거침없이 조목조목 따지며 덤비는 그 말에 우리는 숨을 죽였으며, 선생님도 시원스레 대답을 못 하고 얼버무렸다. 더욱 기세가 오른 그는 담임을 한 구석으로 몰아세우는데, 약속이나 한 듯이 졸개들은 박수를 치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6학년 3학급 중 한 반이 여자 학급이었는데, 담임인 김선생이 병환(病患)으로 오래 결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반을 두 개의 남자 학급으로 나누어 보내게 되었는데, 담임선생님은 그들을 앞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청소 배당도 안 했던 게 사실이다. 그는 이것이 여자만을 치우쳐 사랑하는 짓이요, 남녀평등 사상을 저버린 잘못된 짓이라고 따지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안 계신 휴식 시간에는, 총각이 되어 여자와 연애하는 것이라면서, 교육자의 자격이 없으므로 교단에서 내어 쫓거나 담임을 바꾸어야 한다고 부추기었다.
교장선생까지 끼어들어 타일렀으나 이미 힘은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우익으로 불도장 찍힌 길선생을 따돌리기기 위해, 붉은 손이 등 뒤에서 시키는 것이 뻔했는데, 이를 잠재울 길이 없었다. 막판에는 드러나게 수업을 방해하는 바람에 수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드디어 학급 자치회가 열리고, 다수결에 따라서 동맹휴학(同盟休學)이 결의되었다. 국대안(국립서울대학설립안)반대를 비롯한 동맹휴학이 유행하던 시절, 하루만의 휴학을 해본 후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2단계로 무기한 휴학을 한다는 것이다. 그 날은 가랑비가 뿌리고 있었다. 학교에 가지 않은 나를 보고 부모님은 어디 아프냐고 하였다. 나는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했더니 바른대로 말하라고 소리를 높였다. 간신히 입술을 떼어 휴학한다고 하니까 버럭 화를 내며 빨리 학교 가라고 재촉했다. 무거운 발걸음을 끌다시피 옮기는데, 장흥교 앞에 서있던 그 패거리들이 가로막으며
“이 간나구 쌔끼, 오늘 휴학한 걸 몰랐냐? 가기만 해봐 쥑여부릴 거다!”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나를 붙들어 읍사무소 뒷마당으로 끌고 갔다. 거기에는 우리 학급 아이들이 거의 모여 있었다. 죄인이나 잡은 듯이 그들은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았다. 우리는 자경이의 지휘 아래 줄을 서서 학교로 갔다. 그리고 교문 앞에 서서 구호를 외쳤다.
“자격 없는 길✗✗선생 물러가라!”
“ ✗✗✗교장선생은 반성하라!”
그들은 피켓(picket)까지 만들어 흔들었다. 이윽고 교장이 나와서 간절하게 달랬다. 일단 교실에 들어와서 이야기를 나누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꾐에는 빠지지 않겠노라고 시위대는 뒤로 돌아서서 다시 읍사무소까지 행진을 하였다. 사람들이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 어느 누구 하나 가로막는 사람이 없었다. 뒷산으로 올라가서 누가 뭐라도 흩어지지 말자고 부추겼다. 교장이나 담임이 와서 요구를 들어줄 때까지 흩어지면 안 된다고 했다. 대열(隊
列)은 삐비정 야산(野山)으로 향했다. 분위기가 예사스럽지 않아, 나는 슬그머니 대열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도망쳐왔다. 집에서는 야단이 났다. 아버지는 그들 부추김에 넘어가지 말라면서 이 곳 저 곳에 연락들을 취했다.
얼마 후 경찰이 동원되고 아이들은 학교로 이끌려 와 벌을 서고, 주동자(主動者)들은 붙잡혀 경찰서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곧 잘 타일러 그들이 돌아왔지만, 이 후유증(後遺症)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우익 아이들에 대한 좌익 아이들의 따돌림은 갈수록 깊어갔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우리나라 문제가 미소공동위원회에서 해결을 보지 못하고, 국제연합(United Nations)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 무렵 김구선생이 좌우합작 연석회의에 참석하여 38선을 넘어가, 김일성 들러리만 섰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좌익의 테러(terror)로 온 나라가 어지러웠으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침내 UN의 감시 아래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좌익들은 섬에서 배로 실어온 투표함을 빼앗아 바닷속에 빠뜨리고, 산길에서 트럭으로 싣고 온 투표함을 빼앗아 불태우기도 했다. 우리 아버지가 미는 고영완(高永完)씨가 떨어져서 몹시 아쉬웠으나, 곧 국회가 문을 열어 헌법을 만들고, 첫 대통령으로 이승만(李承晩) 박사를 뽑았다. 이어서 8월 15일에는 대한만민국 정부가 세워졌으며, UN이 승인을 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좌익의 저항은 끈질겼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식 날 교장은 38회 졸업생이니까 너희들이 커서 38선을 없애라고 훈시(訓示)했는데, 그들은 책상을 부수고 유리창을 깨며 38선을 부순다고 소란을 피웠다.
곧 이어 중학교 입학시험에 누나와 함께 응시(應試)했다. 남녀공학인 중학교에 여학생 지원자가 모자라, 나이가 많은 여자들은 5학년 수료(修了)만으로도 특별 전형(銓衡)으로 입학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누나는 붙었으나 나는 떨어지고 말았다. 바로 국민학교 입학 때의 모습이 다시 되풀이 된 셈이다. 누나와 나의 학년이 또 한 번 뒤바뀐 것이다. 국민학교 때는 철없어 서 떨어져도 오히려 기뻤으나 이번에는 그게 아니었다. 하늘이 무너진 듯 했다.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떨어진 아이들 가운데 하필 내가 끼어있다니...담임도 이해가 안 된다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버지는 대뜸 공산당 놈들의 간사한 장난이라면서 곧장 중학교로 달려갔다. 답안지(答案紙)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채점(採點)한 시험지는 이미 태워버렸다고 했다. 출제한 원지(原紙)라도 보여 달라 했으나 역시 태워버렸다.
아버지는 헛수고를 한 채 분을 참지 못하고 돌아오셨다. 그 당시 장흥중학교는 좌익의 못자리라고 하였다. 우익 학생연맹이 좌익 학생동맹의 기세에 눌려 오금을 펴지 못하였는데, 그들 뒤를 좌익 교사들이 받쳐주고 있었다. 우리들의 동맹휴학도 사실은 그 좌익 선생들과 학생동맹이었다고 알려졌다. 그들이 꾸민 계략에 따라서 내가 떨어졌다는 것이 아버지의 판단이었는데, 아무튼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오기(傲氣)로 내년엔 광주에 가서 시험 봐라!”
“..........”
“열심히 공부해서 복수(復讐)를 해야 돼. 만약 또 떨어지면 독학(獨學)해야 해! ”
“..........”
나는 천근 만근 되는 짐을 진 것 같았다. 광주로 유학(遊學)간다는 것은 그 무렵에는 하늘의 별 따기였는데, 시골서도 떨어진 촌놈이 어떻게 광주에 가서 붙는다는 말인가? 등허리가 구부정해지고, 부끄러워 밖에도 못 나갔다. 교복을 입고 교모(校帽)를 쓰고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외면을 했고, 누나를 보면 부럽다 못해 눈물이 나왔다.
아버지는 ‘중학입시문답집’ 이라는 두꺼운 책과 월간 ‘중학강의록’이라는 두 권의 책을 사다
주셨다. 합격하면 좋고, 그렇잖으면 독학(獨學)을 하라는 이중전략(二重戰略)이었다. 교과서 외의 책으로는 처음 사본 것인데,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이 뿌듯했다. 장님이 눈을 뜨면 이럴까? 책갈피 사이에다 ’노력! 희망!‘이란 종이쪽지(book mark)를 끼어 넣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