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 용 돌 이

소년시절

by 최연수

아버지는 해방이 되자 목공(木工)일을 그만 두었다. 구멍가게를 했는데 그것도 이내 집어치웠다. 집주인은 집세를 내지 않는다고 비우라고 다그치면 아버지는 허리를 굽실거리며 쩔쩔매곤 했다. 경방단(警防團)은 의용소방대(義勇消防隊)라고 고쳐 불렀는데, 아버지는 의용소방대에 그대로 머물면서 소방대 사무실로 이사를 했다. 그 곳에서 새로이 대서소를 차렸다. ‘崔鍾敏行政代書所’라는 오동나무 간판(看板)을 써 달았다. 글씨체가 빼어난 조부님께서 써주신 것이다. 법원이나 관공서(官公署)에 내는 서류를 대신 써주고 그 수수료(手數料)를 받는 직업인데, 사법서사(司法書士=법무사)가 아닌 행정서사(行政書士=행정사)가 되었다. 글자를 모르는 문맹(文盲)이 많았고, 문서 양식(樣式)을 몰랐기 때문에 대서소(代書所) 신세를 져야만 하는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10대 미혼 시절에 일본인 변호사 사무실에서도 허드렛일 했던 적이 있으며, 그 때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과 글씨를 잘 쓰기 때문에 대서소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먹고 사는 일보다는 정치(政治)에 관심이 깊었다. 일본 천황 사진이 걸렸던 자리에는 조선의 항일(抗日) 독립(獨立) 투사(鬪士)들의 사진들로 바뀌고, 그들 관련 책자들을 즐겨 읽었다. 너더댓 살 밖에 되지 않은 상수 동생도 이들의 투쟁 이야기들을 술술 외울 정도였으니까 분위기를 알만했다

그런데 해방의 감격은 잠깐이었다. 우리나라 땅덩이는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어지고, 우리 민족은 좌우익(左右翼)으로 갈리었다. 미국과 친하면서 자유민주주의가 옳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우익(右翼)이라 했고, 소련과 친하면서 공산주의가 옳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좌익

(左翼)이라 했다.

아버지는 우익 쪽이었다. 미국 망명길에서 돌아온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이끄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독촉)와 중국에서 광복군(光復軍) 활동을 하다 돌아온 이법석(李範奭)장군이 이끄는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족청)이 우익 단체였는데, 아버지는 처음엔 양 쪽 다 관계하였다. 그러나 독촉은 나이든 사람들이 중심이 된데다가, 주로 과거 일본과 친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이유로 관계를 끊고, 젊은이가 중심이 된 일제(日帝)와 관계없는 순수한 민족적 단체인 족청(族靑)에만 몸을 담았다. 우리 집은 족청의 사무실이 되고, 아버지는 총무(總務)를 맡아 전적으로 그 일에만 매달렸다. 가정 살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우리는 한 줄기 단군의 피다.

죽어도 또 죽어도 겨레요 나라.

내 뻗치는 정성 앞에 거칠 것 없다....

단기(團旗)를 앞세우고, 푸른 제복(制服)을 입은 피 끓는 청년들은 당가(團歌)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였다. 아버지는 그 앞줄에 서서 지휘를 했다. 서른 대여섯 살 한창 나이로 한강 백사장(白沙場)에서의 군사훈련도 받고 오셨다. 이북에서 넘어 온 청년들의 모임인 ‘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도 합쳐 커다란 힘을 나타내었다. 당장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미.영.소)에서 결정한 신탁통치(信託統治)를 받느냐 안 받느냐는 문제로 여론(輿論)이 갈리자, 우익은 반탁(反託)을 주장했으며, 반면 좌익은 반탁에서 갑자기 찬탁(贊託)으로 돌아섰다. 두 시위대(示威隊)가 길가에서 마주치면 주먹다짐까지 했다. 그 당시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 중국은 죽어가고 일본은 일어나니 조선아 조심해라.’ 라는 말이 유행했다. 잔잔해지지 않은 그때의 소용돌이 사회 모습을 잘 빗대는 말이었다.

해방이 되자 장흥농림(農林)학교가 장흥중학교(中學校)로 바뀌었는데 이 중학생들도 찬탁과 반탁으로 갈리었다. 우익 학생들은 ‘학생연맹’으로, 좌익은 ‘학생동맹(學生同盟)’으로 모여들었다. 한 학교 한 운동장에서 한쪽은 반탁 집회가 열리고, 건너편에서는 찬탁 집회가 열렸다. 길거리 시위에 들어가자 돌팔매질과 대창 휘두르기 등 패싸움으로 번져 많은 부상자까지 나왔다. 감정이 머리끝까지 오른 좌우익은 이제 원수처럼 맞서서 죽자 사자 힘겨루기를 하게 되었다.

학제(學制)가 바뀌어 9월에 5학년으로 진급했는데, 새로 맡은 담임인 장(張)선생은 좌익이었다. 수업 시간에 드러내어 미국과 우익을 욕했다. 4학년 누나의 담임인 박(朴)선생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밖에도 많은 선생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버젓하게 공산주의(共産主義) 사상을 머릿속에 집어넣었으며, 따라서 많은 학생들은 이에 맞장구를 쳤다. 우리 반 학생들은 나이든 학생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아는 것도 많고 힘도 세었다. 이들이 학급을 휘어잡았는데, 선생님이 안 계신 휴식 시간에는 교단(敎壇)에 올라가 연설을 하기도 하고, 같은 패들은 박수를 치며 “옳소!”를 소리쳤다. 그리고 우익 학생들을 윽박질렀다. 힘에 밀린 우리들은 꼼짝도 못했다.

“야, 니 아부지 족청이지? 맬치같이 빼빼 말라갖고 멀 안다고...”

“니들 다 망해, 곧 망해. 돌리지 마!”

이와 같이 국민학교까지 공산주의의 붉은 손이 뻗쳤는데, 이들을 뒤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은 물론 좌익 선생들이었다. 끼리끼리 잘 모여서 수군수군 비밀 얘기하는 모습, 뭘 시키는 듯 웬

종이쪽지가 오가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학교가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선전(宣傳)장이 되어버렸다. 순수하게 교육하려는 선생님들을 따돌리는 것을 환히 느낄 수 있었다. 장선생님은 그림을 잘 그려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는데, 나도 그림을 좋아하고 잘 그려서 그 분을 좋아했지만, 그는 남모르게 나를 미워하는 것을 느꼈다.

특별활동 시간에 나는 ‘작문부’에 들어갔다. 그 게 무엇을 하는 줄도 모르고 들어갔는데, 담당 박선생이 동시와 동화를 읽어주는 것이 대단히 좋았다. 그러나 틈틈이 공산주의 사상을 씨 뿌리었다. 소설을 이야기해준다고 좌익 작가(作家)들이나 이북으로 넘어간 작가들의 작품을 골랐던 것이다. 그 때 ‘병아리’와 ‘가로수’ 등 몇 편의 동시를 지었는데, ‘가로수’는 대단한 칭찬을 받았다. 내가 우익의 아들인지 알고 있었으나 칭찬은 해주었다. 그 후 책읽기와 글짓기에 취미를 붙이게 된 것은 아마도 그 때의 칭찬이 힘이 되었던 것 같다.

정부 세우는 문제를 놓고 좌우익은 또 맞부딪쳤다. 우익은 이북은 벌써 인민위원회를 만들었으니, 38선 이남(以南)만이라도 단독(單獨)정부를 세워야 전국의 공산화를 막는다고 주장하고, 좌익은 통일정부를 세우지 않으면 영원히 갈리게 된다고 주장했다. 좌익 아이들은 자기들 말이 옳다고 이치를 밝혀가며 주장했다. 얼핏 보기엔 그들 주장이 옳은 것 같아, 이를 되받아 따질만한 우익 아이들은 한 아이도 없었다. 다만 그들의 힘에 눌려 쥐 죽은 듯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니 아부지, 검정개.노랑개하고 친하지야? ”

검정개는 검정 제복(制服)을 입은 경찰(警察)이고, 노랑 개는 국방색 제복을 입은 국방경비대(國防警備隊=국군의 전신)를 가리키는 그들만이 쓰는 말이었다. 우익이 그들을 빨갱이로 부르는데 대한 앙갚음이리라. 좌익은 소련의 붉은 깃발을 떠받들었다. 망치는 노동자요, 낫은 농민이라고 했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붉은 깃발 아래 뭉쳐, 백색 테러(terror)와 싸워야 한다고, 노래 부르듯이 그들은 우리를 놀려주고 따돌렸다. 학교 가는 일이 마치 소가 도살장(屠殺場)에 끌려가는 것과 같았다.

keyword
이전 21화붉은 마수(魔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