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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파(新派)

소년시절

by 최연수

일어로 극(劇)을 ‘しばい(시바이)’라고 했는데, 왜정 때 본 극은 かみしぼい(가미시바이=그림 연극)와 말 시바이(곡마단=曲馬團)였다. 그림 연극은 일본의 전래(傳來) 동화 몇 편이었고, 말 시바이는 처음 보았는데 그야말로 대만원이었다. 천막 안 둥그런 마당에서 펼쳐지는 말 타기의 신기하고 묘한 재주 뿐만 아니라, 그네 타기, 통 굴리기, 철봉 등 어느 것 하나 놀랍지 않는 것이 없었다.

해방이 되면서 요술(妖術)과 마술(魔術)이 들어와 아이들의 혼을 빼앗았으며, 서커스(circus)도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한 번은 통 굴리기를 하다가 떨어뜨려, 통 속에 들어있던 여자 꼬마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얼마나 불쌍했는지.

활동사진(活動寫眞)이 처음 들어와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공짜였기 때문에 이를 보기 위해서 2,30리 길에서도 모여들었으며,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저녁도 굶은 채 일찍 나갔다. 운동장 한 가운데 스크린(screen)을 설치했기 때문에 양쪽에서 볼 수 있었는데, 어느 자리가 좋은 자리인지 사람들 말만 듣고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야단이었다. 해가 떨어지고 어두워졌을 때는 구경꾼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다행히 영사기(映寫機)가 우리 쪽에 놓여졌는데, 앞자리에 앉아있는 우리들은 쳐다보느라고 고개가 떨어질 지경이었다. 앞자리가 좋은 자리인 줄 알고 우쭐대었는데 그게 아니지 않는가?

‘義士 안중근’이었다. 안중근의 독립(獨立) 투쟁(鬪爭)을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활동사진(活動寫眞)으로 본다는 것은 흥분이었다. 의사(醫師?)가 어떻게 독립운동을 했을까? 무성영화(無聲映畵)였기 때문에 변사(辯士)의 해설과 함께 사진(寫眞)이 활동을 했다. 그 쉰 듯한 특유의 목소리는 구경꾼들을 사로잡고도 남았다.

“보십시오, 저 앙큼한 이등박문의 쌍판을! 저 놈을 쥑이지 못하면 천추(千秋)의 한(恨)이 되지 않겄소?”

침을 삼키며 가슴 죄는 우리들은 빨리 총을 쏘아주기를 목마르게 기다렸다. 머뭇거리는 듯한 안중근을 향해

“얼른 쏘시오!”

하는 고함이 여기저기서 빗발쳤다.

“탕 탕 탕! 드디어 안중근은 권총을 빼들고 저 원수의 가슴에 총을 쏘았습니다.”

박수 소리가 천지를 뒤흔드는 듯 했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히로부미)이 쓰러지는 이 속시원한 장면을 볼 때까지 나는 고추를 잡고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사람이 빽빽한데, 어떻게 헤치고 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손에 땀을 쥐는 이 아슬아슬한 장면을 두고.... 터지려는 오줌보를 어쩔 수 없어, 옷에다가 그만 싸고 말았다.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후 ‘윤봉길 의사’의 활동사진은 산업조합(産業組合) 창고에서 올려졌다. 입장권을 사야했

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은 적었으나 관심은 더 한 것 같았다. 필름(film)이 낡아 희미한데다가 자주 끊어지는 바람에 손님들이 짜증이었다.

“달빛이 새어드는 방안에 누워서, 윤봉길 선생은 김구 의사에게 기필코 성공하기를 부탁했다.”

변사의 해설은 배역(配役)이 바뀌어서 구경꾼들이 휘파람으로 빈정거렸는데, 이런 실수를 곧잘 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상하이 훙커우(홍구=虹口=현 노신공원) 공원에 마련된 てんちょうせつ(天長節-일왕 생일) 기념식장 단 위에서, 목에 힘을 주며 앉아있는 일본 장군들을 향하여 누군가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일본 헌병들이 도시락 통에 감추어온 폭탄을 들출 때의 그 아슬아슬함! 빤히 아는 사실이었지만 심장이 콩당콩당 뛰었다.

나는 활동사진보다는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신파가 더 좋았다. 일본 것을 답습한 연극을 신파(新派)라 했고, 이런 극단을 유랑극단(流浪劇團)이라 했다. 북 소리에 맞추어 나팔(트럼펫=trumpet)이나 손풍금(아코오디언=accordion)을 연주하면서, ××극단과 연극 제목을 쓴 깃발을 나부끼며 분장(扮裝)을 한 배우들이 거리를 지나면, 우리들 조무래기들은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임금님의 행차(行次)나, 개선장군(凱旋將軍)의 입성(入城)을 구경한 듯. 돈이 없는 사람들은 그 행진만으로 눈요기를 해야 했다. 금융조합(金融組合)이나 산업조합 창고에 가설(假設) 무대를 만들어서 연극을 했는데, 해방 후의 연극은 춘향전, 심청전, 흥부와 놀부전 등 전래 소설이 큰 흐름을 이루었으며,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같은 주제의 ‘심순애와 이수일’ ‘백만원의 현상금’‘홍도야 우지마라’ 등 현대극도 몇 편 있었다.

‘심청전’ 공연 때의 일이다. 징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큰 막이 올라갔다. 가운데 작은 막 앞에는 심봉사와 청이가 쭈그리고 앉아있다. 게딱지같은 움막집 앞에 거적을 깔고.

“아부지, 동냥 갔다 올랍니다.”

“그래라. 쯔쯔쯔쯔. 어린 너를 내보내다니...”

심봉사는 눈물을 흘렸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막 시작되었는데 벌써부터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치는 아낙네들이 보인다.

“동냥 좀 주시요.”

누더기 옷에 쥐꼬리처럼 머리를 묶은 심청이, 그 비좁은 구경꾼들 사이로 다니면서 돈을 빌었다. 혀를 차면서 바구니에다 동전을 넣어주기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기도 한다. 꽤 모은 것 같다. 나는 그 때 ‘입장료를 받았으면서 두 겹으로 돈을 버는구나.’고 생각했다. 가장 궁금한 것은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지는 것인데, 바다는 어떻게 꾸미며, 배는 어떻게 띄우며, 청은 어떻게 빠지는 것일까? 드디어 무대가 푸른색 전깃불로 바뀌고, 바퀴 달린 배가 천천히 굴러오는데, 선풍기로 바람을 일으켜 돛이 제법 흔들린다. 북 소리가 나더니 청이가 천지신명(天地神明)께 두 손 모아 기도한 후 치마를 둘러쓰고 배에서 무대 바닥으로 쾅 하고 뛰어내린다. 그리고는 막이 내린다. 싱거웠다. 다음 막이 오를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기다리다 못해 우리들은 막을 들추며 구경을 하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다음 장면을 꾸민다. 객석(客席)에서는 빨리 막을 올리라고 아우성인데, 막이 오르고 보니 그게 바로 용궁(龍宮)이다. 물고기 그림들을 가느다란 명주실로 주렁주렁 메달아 놓은 것이다.

춘향전이 들어왔다. 다들 아는 이야기지만 어른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이것은 판소리로 창극(唱劇)을 했는데, 역시 춘향이 그네 타는 장면을 어떻게 할까가 나의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그러나 이것도 싱겁게 처리되어버렸다. 춘향이가 한 쪽에 서서 춤을 추듯이 앞뒤로 움직이는 정도로 얼버무린 것이다. 나는 속임수다고 생각했다. 나 같으면 그네 줄 하나쯤 메었다면 훨씬 실감이 날 텐데....그리고 이몽룡보다는 방자가, 춘향이 보다는 향단이의 연기가 돋보였다.

그리고 내가 만약 연극을 가르치고 연기(演技)를 한다면 이렇게 고치겠다는 생각도 했다. 내 나름대로 보는 눈이 높아진 것이다.

‘백만원의 현상금’ 연극은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창고를 극장으로 뜯어고친 것인데 제법 짜임새가 있었다. 으슥한 오솔길에서 유령(幽靈)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불안과 겁을 주는데, 이 정체(正體)를 알아서 잡는 자에게는 백만 원의 현상금(懸賞金)을 준다는 줄거리다. 임신부(姙娠婦)와 어린이들은 입장할 수 없다고 했는데, 나는 들어갔다. 조명(照明), 무대 장치도 제법 잘 되었으며, 연기도 괜찮아서 관중을 모았으나 무용(舞踊)이 유치해서 국민학교 수준으로 보였다. 내가 무용을 잘 했기 때문에 한눈으로 평가(評價)되었다.

‘홍도야 우지마라’가 공연되었을 때이다. 배우들이 대사(臺詞)를 잊고 어리둥절하면 배경(背景) 막 뒤에서 읽어주는 것이다. 무대 앞줄에 앉아있는 나에게는 또렷이 들려와서 극적(劇的) 효과가 줄었으며, 또 그런 걸 처음 알고 나니까 시시하기 그지없었다. 오랏줄에 묶여간 오라버니와 헤어질 때 홍도가 우는 것이 너무 어색해서 오히려 웃음이 났다.

그 당시 가장 인기를 모은 것은 ‘여성국극단(女性國劇團)’에서 한 ‘왕자 호동과 낙랑 공주’이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여자가 남자로 꾸미어 여성들만의 배역(配役)으로 했는데, 대단히 잘 했다. 나도 그렇게 멋있는 연극을 해봤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화려한 의상과 분장으로 거리를 누비며 퍼레이드(parade)하던 그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 그토록 유창(流暢)하게 구사(驅使)하던 대사(臺詞)와 멋있는 연기(演技)는 또 어디로 갔을까? 공연을 마치고 장비(裝備)와 소품(小品)들을 엉성하게 도라쿠(트럭=truck)에 싣고, 화장을 지운 배우들이 그 틈새에 끼어 지치고 짜증난 듯한 모습으로, 혹은 꾸벅꾸벅 졸면서 떠나는 모습이 너무 초라했다. 그 동안 우러러 보이던 인상(印象)들이 불현듯 지워지면서, 공연히 내 마음이 쓸쓸해졌다. 내가 출연 배우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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