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시절
1948년 10월 19일. 추석(9.17)도 지나고 제법 날씨가 쌀쌀해졌다. 정부가 세워진지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전라남도 여수(麗水)에서 국군의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열차를 타고 올라가 곧 순천(順天)까지 손아귀에 넣었다. 제주도의 4.3사태를 누르기 위해서 여수에 있는 제14연대를 보내기로 한데 대한 반발이었다. 군부대 안에 이미 몰래 들어와 엎드려있던 남로당들의 조직적인 반란으로서, 이들의 야만스러운 행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기세가 하늘을 찔러 서쪽으로 밀려오는데, 정부가 세워지면서 몰래 숨어 지낸 좌익들이 거들고 일어나 폭동으로 번졌다. 우익 인사를 죽이고, 불 지르며, 빼앗아가고....그들의 세력은 순천, 광양, 벌교고흥까지 뻗쳤다. 이제 보성(寶城)을 쳐들어온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보성 다음에는 장흥이 아닌가?
성안이 술렁거렸다. 우익 인사들은 안절부절못하여 왔다 갔다 하고, 과거 분홍색을 띠었던 사람들까지도 들떠있는 모습들이 뚜렷했다. 촉각(觸覺)을 곤두세운 우리들은 피난 보따리를 꾸리고 대기했다. 광주(光州)로 피난할 계획이었다. 시시각각(時時刻刻) 들려오는 소식이 불리해지자 경찰서 가까운 어느 친구 집으로 몸을 숨겼다. 반란군(叛亂軍)이 성안에 들어올 경우 경찰들을 따라 피난 가자는 것이다. 하룻밤 그 집 현관에서 새우잠을 잤다. 잠이라 하기보다는 두려움에 떨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날이 밝아지자 10월 25일 여수.순천 지구에 계엄령(戒嚴令)이 선포된 후, 다행히 반란군의 세력이 꺾이고 꼼짝 못하게 억누르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국군과 경찰이 함께 반란군을 뒤쫓고 있다는 것이다.
별 일 없이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 불씨는 쉬 꺼지지 않았다. 쫓겨가는 반란군과 그 패거리들은 지리산(智異山)으로 스며들어가 아지트(agitation point)를 만들어 게릴라(guerrilla)전을 펴기 시작했다. 장흥은 유치면(有治面)의 험한 산골짜기에 숨어 있다가 어둠을 타고 밤마다 나타나, 이 곳 저 곳 지서(支署)를 습격(襲擊)하고, 우익 집에 불을 지르며, 식량 된장 고추장 등을 마구 빼앗아 갔다. 이들을 공비(共匪)라고 불렀다. 낮에는 이들을 없애기 위해 군.경(軍警) 합동으로 산을 습격하고, 밤에는 공비들이 이를 복수(復讐)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 왔다. 그들은 통신을 못 하도록 전화선을 끊고 전봇대를 잘라버리며, 운송을 방해하기 위해 다리와 길을 끊어버렸다. 이 밀고 밀리는 소용돌이 속에서 좌익도 우익도 아닌 많은 양민(良民)들이 희생당했음은 물론이다. 90년대에 베스트 셀라(best-seller)였던 ‘태백산맥(조정래 지음)’을 읽었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로서 대단한 수작(秀作)이지만, 좌익과 공비들을 지나치게 미화(美化)한 반면, 경찰이나 우익을 매도(罵倒)해서 소송에 휘말리었다. 무죄 판결은 났지만 독자들이 정사(正史)로 알까봐 거부감이 생기고, 넌픽션(non-fiction)이란 이름으로 역사를 왜곡(歪曲)시키지 않았나 그의 사상이 미심쩍기도 하다.
이후 우리 집은 또 이사를 했다. 성밖 강 건너 동교리(東橋里)로 갔는데, 이곳은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민족청년단이 개편) 사무실이 있고, 아버지는 역시 총무(總務)로 모든 일을 맡다시피 하였다. 외딴 곳이라 밤이 되면 무서웠다. 큰 창고가 딸린 집인데 바람이 불면 빈 창고가 덜커덩거리는 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초저녁 먼 산에 봉화(烽火)가 올라가면 밤중에 어김
없이 공비들의 습격(襲擊)이 있었다.
그 후 아버지는 청년단 일을 그만 두고 광주에 가 계셨다. 일제(日帝)를 도우면서 나라를 팔아먹고, 독립운동가를 족치며 못 살게 군 친일파를 처벌(處罰)하기 위해 조직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전남지부에 취직되어 하숙을 하고 계셨다. 누나도 좌익의 소굴(巢窟)인 장흥중학교에 둘 수 없다고 광주여중으로 전학을 시켰기 때문에, 어머니와 나 그리고 1학년에 입학한 동생 세 식구만 있었다. 원래 겁이 많은 나는 밤만 되면 으스스해서 변소도 제대로 가지 못 했다. 어머니는 저녁만 드시면 동생을 데리고 이웃 종석이네 집으로 마을을 나가, 늘 나 혼자 집을 지키며 공부를 했다.
그 곳 주위는 논밭이 많고 지저분했다. 그래서인지 유달리 뱀이 많아 골치가 아팠다. 창고 안에 짝짓기를 한 구렁이가 기다랗게 늘어져 있는가 하면, 몇 마리가 함께 똬리 틀고 있기도 했다. 하루는 쫓기는 꽃뱀이 아궁이 속으로 들어갔다. 그 때도 불을 지피는 일은 내 몫이었는데, 불을 땔 때마다 그 꽃뱀이 뛰쳐나올 것 같아 몸을 사렸다. 그 후 겁이 없어지면서 뱀이 나타나면 돌멩이를 던지거나 막대기로 때려서 죽였다. 한 번은 막대기로 감아 공중 높이 던져 땅 바닥에다 내리친다는 것이, 그만 일제 때의 저포(紵布=모시) 공장(그 당시에는 빈 집) 지붕으로 떨어져 기왓장 틈으로 들어 가버린 것이 아닌가? 그 뱀이 앙갚음하기 위해 다시 찾아올 것 같아 늘 마음을 조이고 있는데 꿈에도 가끔 나타나서 나를 괴롭혔다. 밥상을 받으면 의례 눈에 어른거려 밥맛을 잃고 숟갈을 놓기도 했다.
“뱀이 설치믄 재수 없다는디...”
그 때도 살림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께서 보내준 돈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앞에 제재소(製材所)가 있어 날마다 원목(原木)들이 달구지에 실려 왔다. 달구지가 들어오면 동생과 함께 낫을 들고 나가 소나무 껍데기를 벗겼다. 이것을 말려서 땔감으로 쓰거나, 나무를 켜고 남은 조각들을 주워다가 도끼로 패어서 땔감으로 썼다. 그런데 어머니는 늘 나더러 일을 잘 못 한다고 나무랐다. 특히 도끼질을 잘 못 한다고 호통이었다. 밥상을 내다가 실수하여 그릇을 깨뜨렸을 때, 동생과 놀다가 돌팔매질을 실수하여 그 가슴팍이 맞았을 때 죽일 듯이 쫓아다니던 일....혼자 재수(再修)하고 있는 것만도 서럽고 속상했는데, 일마다 꾸중을 듣다보니까 정말 살고 싶지 않았다.
“누님, 엄니 의붓엄니 아녀?”
“너도 그런 생각을 했어? 나도 그런 적 있었는디, 그건 아녀.”
방학을 하고 돌아온 누나에게 하소연했는데 누나는 나를 위로했다. 참고 열심히 공부만 하라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늬 엄니는 따로 있어. 갈치 장사가 늬 엄니인디 가난해서 다리 밑에 베린 것을 줏어다가 키운 거여’라는 말을 종종 들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야속할 때는, 바로 그 갈치 장수가 진짜 우리 어머니가 아닌가 생각을 해봤다. 아 무튼 재수(再修)한 일년 동안의 세월은 남의 집 머슴살이 같았다.
그 후 아버지는 맥없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950년 6월 20일까지 활동하기로 된 반민특위가, 1949년 8월 31일 앞당겨 와해(瓦解)되었기 때문이다. 1949년 6월 6일 친일 경찰들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함으로서, 1년도 채 못 되어 간판을 내리게 되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묵인(黙認)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한민당(韓國民主黨)을 등에 업고 정권을 쥔 이대통령은 김성수(한민당)와 결별(訣別)했는데, 또다시 이범석의 족청(族靑)편 사람들의 힘을 꺾고, 대한청년단을 그 손아귀에 넣었다. 그 후 아버지는 정치 신의(信義)를 헌 신짝처럼 내던진 이승만을 등지고 평생 야당(野黨=한민당→민주국민당→민주당)의 깃발 아래 서게 되었다.
* 4.3사태...1947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UN 감시하의 5.10총선거와 정부수립 방해를 위해 남 로당(南勞黨)이 일으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