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광주(光州)행 버스를 탔다. 어렸을 적에 목포 여행을 한 후 두 번째 장거리 여행인 셈이었다. 도청(道廳)이 있는 전남(全南) 제일의 도시에 간다는 설렘과, 유명(有名)한 중학으로 시험을 보러 간다는 불안이 함께 가슴에 꽉 찼다. 한편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낯선 풍경을 바라보노라니, 지난 1년 동안의 재수생 생활이 주마등(走馬燈)같이 지나갔다. 두문불출(杜門不出)하다시피 혼자서 공부하던 외로움과, 어머니로부터 일을 못 한다고 핀잔 받던 서운함과, 밤이면 출몰(出沒)하던 공비들에 대한 공포(恐怖)며, 뱀에 대한 혐오감(嫌惡感)....남성으로서의 제2차 성징(性徵)이 나타나면서 부터의 이상야릇한 부끄러움과 두려움 같은 감정 등, 예민(銳敏)한 감성(感性)의 사춘기(思春期) 시절을 이렇게 보냈다.
그 때 나의 위안은 월간지 ‘어린이나라’ 이었다. 우체국(郵遞局)에 근무하던 삼촌((鍾根)이 상수 동생에게 우송(郵送)해주던 잡지였는데 참 재미있었다. 국민학교 시절 특활시간 글짓기부에서 동요(童謠) ‘가로수’로 칭찬 받던 일 때문인지 글들이 좋았다. 동화 ‘노마와 망원경’ 에 감동을 받기도 했으며, 동요들이 좋았다. 나도 그와 같은 잡지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창간호(創刊號)가 종간호(終刊號)로 되었지만 ‘어린이세계’ 라는 잡지를 만들었으며, ‘아동십일간보’라는 제호(題號)의 신문도 만들었다. 10일 만에 나오는 신문이라는 뜻이다. 순보(旬報)라는 말을 아직 몰랐으니까. ‘용감한 소년’이란 동화와 ‘장래의 희망과 성공을 바라보는 삼남매’라는 긴 이름의 소년소설도 썼다. 나와 우리들 삼남매를 각각 주인공으로 하는 자서전(自敍傳)적인 것이다. 독자라고는 이웃집 6학년 Y와 N 뿐이었는데, 썩 재미있다고 했다. 그들은 조숙(早熟)했는지 이성(異性)에 눈을 떴다. 제재소(製材所)에서 일하는 범수라는 청년과, 젊은 술집 접대부(接待婦)와의 밀회(密會)를 짓궂게 뒤쫓아 다녔는데, 나도 두어번 그들을 따라가 몰래 엿보기도 했다. 보리밭. 빈 창고.
드디어 광주에 도착하여 아버지와 누나의 마중을 받았다. 과연 광주는 큰 도시였다. 넓은 도로, 즐비한 고층 건물, 연이어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행렬과 붐비는 인파(人波)...전에 아버지가 하숙하셨던 수기동(須奇洞)으로 갔다. 동룡(東龍)이와 서구(西龜) 쌍동이 집이었다. 그 집에는 광주 서중생(西中生) 하나, 광주사범생 둘이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 모두 5학년 어른들이었다. 먼저 특차(特差)로 뽑는 광주사범(光州師範)학교 시험을 보았다. 학교는 당시 시외 광산군(光山郡) 서방면(瑞坊面)에 멀리 떨어져 있었다. 우선 주위 경관(景觀)은 물론, 잘 다듬어진 정원수(庭園樹)들과, 넓은 운동장, 처음 보는 넓은 강당(講堂)과 그랜드 피아노(grand piano), 수많은 연습용 오르간(organ)이 있는 넓은 음악실과 멋진 브라스 밴드(brass band=취주악대(吹奏樂隊), 각종 표본(標本)이 진열(陳列)된 생물실, 그리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미술실....이런 좋은 환경과 시설(施設)들이 이 촌뜨기의 마음을 확 사로잡았다.
발표가 났는데 합격이었다. 아버지는 친구를 통해서 알아봤더니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면서 무척 좋아하셨다. 더구나 시골 중학교에서 공산당 농간(弄奸)으로 낙방(落榜)했던 분풀이를 했노라 하면서 대단히 만족해 하셨다. 나의 모교(母校)에서는 1년에 한 명 꼴도 합격 못 시켰던 학교였으니까 그럴 수밖에.... 그 다음 전남 제일의 명문(名門)이라는 광주서중학교에도 지원서를 내고 응시(應試)할까 말까 망설였다. 사범학생들과 서중학생은 서로 자기 학교를 자랑하는데, 겉보기에는 검정 모자에 흰 테가 있는 서중생들이, 아무 테도 없는 사범생들보다 멋있게는 보였다. 그러나 나는 미리 가본 사범학교에 매료(魅了)된 데다가,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사범학교로 결정했다.
이 소문은 금방 고향에도 퍼져나갔다. 9월. 교복을 입고 사범학교 모표(帽標)를 반짝이며 등교했을 때의 그 감격은 잊을 수 없다. Normal School 답게 상업,공업,농업 등 다른 실업학교(實業學校)학생들보다 차림새와 몸가짐이 단정(端正)했다. 긍지(矜持)를 가지고 열심히 공부했다. 재수(再修)할 때 본 중학(中學)강의록(講義錄)의 위력(威力)이 나타났다. 나는 벌써 영어책을 읽고 해석까지 하는데 이제 알파벳(alphabet)을 공부하고 있으니...영어 선생님의 칭찬은 대단했다. 전 과목이 다 그랬다. 다 아는 것을 복습(復習)하는 듯 했다. 이렇게 재미있게 공부하는데 다만 하숙비(下宿費)를 제 때에 내지 못해서 늘 우울(憂鬱)했다. 주인은 하숙비로 생계(生計)를 삼고 있는데, 하숙비가 밀리니 고학(苦學)이라도 해야 되지 않느냐고 나가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상급생 형들은 맛없는 반찬이 나오면 먹지 않고 물을 붓는 등 당당했으나, 나는 담아준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주인을 쳐다보기에도 민망(憫惘)하여 고개를 떨어뜨리고 다녔다. 석주. 길영 형님들이 ‘여학생’이라는 잡지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는데도, 공연히 부끄러워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한참동안 책방 앞에서 서성거렸다.
“너 가시네 아녀?”
핀잔을 듣고 형들 앞에서도 죄인처럼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 붙임성 있게 형들을 잘 따르면 귀여움을 받았을 법한데, 친,외가 어느 쪽도 형을 두지 못했던 나는, 이들 형님들이 마치 아버지같아, 묻는 말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만큼 모든 것이 어렵고 조심스럽기만 했다.
* *
어느 날 편지가 떨어졌다. 뜯어보니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소식이다. 집이 다 불에 타 버렸다는 것이 아닌가?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 그 집이 그토록 휑뎅그렁하여 썰렁하고, 뱀이 설치면 재수 없다는데......귀엽게 기르던 토끼들은 물론 지긋지긋하던 뱀들도 뜨거운 땅 속에서나마 다 타져버렸겠지! 떨리는 손을 잠재울 수 없었다. 하숙비 내기는 더욱 어렵게 되었다. 누나는 기숙사(寄宿舍)에서 있었는데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요일이면 둘이서 만날 수 있었는데 함께 눈물지으며 걱정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 때가 아직 춥지도 않았는데 상수(祥洙)동생은 이상하게도 오우버코우트(over coat)를 입고 자겠노라 했다. 미군이 덮다 버린 담요를 마름질하여 새로 지은 외투(外套)였는데, 어서 입고 싶어서였다는 것이다. 어머니께서 잠을 자다가 어렴풋이 눈을 떴더니, 무장(武裝) 공비들이 아버지를 앞세우고 돈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이 곳 저 곳 찾는 척 하다가 잽싸게 도망을 쳤는데, 그 때 총성(銃聲)이 들리고 집에 불을 놓았다. 얼떨결에 어머니도 피신을 하고 보니까 집이 불붙고 있었다. 제 정신이 들자 자고 있는 아들이 생각났으나 이미 때는 늦었으며, 공비들과 경찰들의 접전(接戰)이 벌어져 총알이 휙휙 밤하늘을 날았다. 멀리서 환하게 불붙어 무너져 내린 집을 바라보며 타죽었을 아들을 생각하니 기절할 것 같았다.
한편 상수 동생은 너무 더워 눈을 떴더니 불 속에 갇혔다. 영문도 모르고 뛰어나와 숨은 곳이 건너편 제재소(製材所) 담장 바깥 측간이었다. 거적문 하나 걸쳐놓은 곳이라 거적을 들추어 밤새도록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동이 트면서 공비들은 다시 입산(入山)하고 세상이 쥐 죽은 듯 고요한데, 화마(火魔)가 할퀴고 간 집터에는 재만 남은 채 넋을 잃은 사람만 찾아왔다.
“워메, 내 아들 살았구나!”
이 한 마디 말 외에 또 무슨 말이 있었으랴. 구사일생(九死一生) 살아남은 가족들이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건만 알거지가 되어버렸다. 숟가락 하나 건지지 못 할 정도로 깨끗이 타버렸다. 이 싸움판에서 죽은 사람들도 있고 불타진 집이 여러 채 있었다. 이런 혼란이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수기동(須奇洞)에서 나와, 다시 광주공원 향교(鄕校)를 지나 대성국민학교(大成國民學校) 근처로 하숙을 옮겼다. 더 이상 신세를 질 수 없어서였는데 여기서도 하숙비 밀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주인 조카와 한 방을 썼고 한 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대우(待遇)가 전혀 달랐다. 도시락을 싸주는데 말없는 압력을 넣었다. 밥 양도 적었으며, 반찬이란 항상 군동내 나고 흐물거리는 무김치뿐이었다. 그러나 할 말은 없었다. 속이 상하다보니 소화불량(消化不良)에 걸려서 가슴이 늘 쓰리었다. 신물이 자꾸만 넘어와서 고통스러웠다. 한 숟갈 40번은 씹어야 한다기에 50번도 더 씹어 넘겼지만 차도(差度)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괴로운 것이 또 있었다. 주인 아주머니의 친정 아버님이 오실 때마다 한 방에서 함께 묵었는데, 회갑이 지난 홀아비였다. 이 노인이 밤이 되면 나를 껴안고 허연 턱수염으로 내 얼굴을 파묻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 음경(陰莖)을 주무르는 등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짓을 한 것이다. 너무 혐오(嫌惡)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하소연할 수 있는 사람은 누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해결책이 없었다.
“우리 자취하자. 굶더라도...”
1950년. 6.3.3.4로 학제(學制)가 또 바뀌어 4월이 새 학년이 되었다. 나는 2학년, 누나는 3학년에 진급(進級)을 했다. 광주시 변두리에다가 방 한 칸을 얻었다. 집에서 보내온 냄비와 알루미늄(aluminum) 그릇과 그리고 숟갈과 젓가락...이것이 살림의 전부였다. 불타진 집에서 무엇을 보내었을 것인가? 그래도 마음만은 편했다.
끓는 물에 메밀가루를 한 줌만 넣어도, 몇 사발 죽이 된다는 것은 2차대전 말엽(末葉)에 이미 익힌 것이다. 이런 묽은 죽 한 그릇 먹고 학교에 다녔는데 힘이 있을 리 없었다. 도시락을 가져가지 못해, 점심시간에는 학우(學友)들의 눈을 피해 학교 뒷산으로 올라갔다. 먼 하늘을 쳐다보면 불타진 옛 집터가 떠오르고, 남의 셋방에서 또 굶고 있을 부모님과 동생의 얼굴이 겹쳐 어른거렸다. 눈물이 앞을 가리면 옛시조(古時調)를 많이 외웠고, 김소월(金素月)과 청록파(靑鹿派)의 시(詩)들을 많이 읊조리며 마음을 달래었다.
이 무렵 유일하게 나를 찾아온 문ㅇㅇ이란 학우(學友)가 있었다. 그는 문학 소년이었다. 1학년 때 교지(校誌) ‘호국(護國)’에 ‘나는 문학의 품에서’라는 나의 시(詩)가 게재(揭載)된 것을 계기로 그는 나를 알게 되었고, 2학년이 되어 문예반(文藝班)에 함께 들어간 것이 인연이 되어 사귄 친구다. 그는 독서광(讀書狂)이었고, 참 가난했던 것 같았다. 운동화를 양말처럼 얼기설기 꿰매고 다녔으니 짐작할 수 있었다. 메밀 죽 한 그릇 대접한 일이 없는데도 그는 나를 좋아했다. 그를 통해서 빌려 읽은 책이 참 많았다. 소설책 시집 수필집... 그 중에서도 그는 이기영(李箕永)의 ‘고향(故鄕)’을 비롯한 소위 카프(KAPF)작가들의 책들을 많이 빌려주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습작(習作)들을 바꿔가며 읽기도 했다.
반정부(反政府)적인 비판이 지나치다 보면, 가끔 반체제적. 친공적(親共的)인 말을 해서 나를 당혹(當惑)케 하였다.
“빨간 벽돌은 가마에 넣고 구울수록 더욱 단단해진다.”
그는 이렇게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공산주의(共産主義)라면 이가 갈리는 나인데, 그의 정체(正體)가 점점 의심스러웠다. 배고프고 외로웠던 나에게 말벗이 되어주고, 문학에 대한 시야(視野)를 넓혀주는데 큰 영향을 끼쳤지만 깊게 사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6.25 이후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고, 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아주 교제가 끊어졌다. (그는 그 후 시인이 되었고, 조선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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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겨울방학! 몸이 하늘 높이 날아갈 일이었다. 누나와 함께 기차를 탔는데, 우리 식구들이 살고 있을 집이 궁금했다. 영산포에서 기차를 내려 버스를 갈아탔다. 나주→영암→강진→장흥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산길을 돌아갈 때마다 전선(戰線) 같이 불안했다. 어디서 공비들의 습격(襲擊)이 있을지 몰랐다. 마중 나온 아버지를 따라 간 곳은 기양리의 광우네 집이었다. 아버지 지기(知己)의 행랑채인 것이다. 광우네 할머니는 친할머니 이상으로 나를 반겼다. 자기 손자 광우도 공부를 잘 하는데, 나는 더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 해서 광주 학교에 다닌다고 말이다.
그런데 밤이 되어 동네가 어수선했다. 초저녁 사자산 봉우리에 봉화(烽火)가 오르더니, 공비들이 성안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어디론지 먼저 피신하고, 남은 식구들은 광우네 뒷산으로 올라갔다. 바위 틈새에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밤이 지나갔다. 이튿날 은신처(隱身處)를 살펴보면서 어이없어 웃어대었다. 꿩들이 숨는답시고 대가리만 쳐박는다더니, 우리들도 머리만 바위 틈에 밀어 넣었지 엉덩이는 그대로 드러나 있었을 터였다. 어린 아이들 숨바꼭질도 그렇게는 아니할 것이다. 성안을 경비(警備)하기 위해서 산등성이를 따라 성(城)처럼 대나무 울타리를 쳐놓았다. 밤손님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높다랗게 세웠는데, 넘는다 할지라도 아랫쪽에는 날카롭게 깎아 세운 대나무 밭이었으며, 총을 쏘아도 빗나간다는 것이다. 통행금지 시간이 되어 동쪽과 남서쪽 두 출입문만 닫으면 성안은 안전했다. 이런 혼란은 6.25 때까지 이어졌다.
* KAPF.....조선 프로레타리아 예술가동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