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의 막이 올라갔다. 무대(舞臺) 배경(背景)은
공산 종주국(宗主國) 소련 스탈린(Stalin) 수상과 민족의 태양 김일성(金日成)의 대형(大型) 사진이 나란히 걸리고, 수많은 소련의 붉은기와 낯선 북한의 노동당기와 인공기(人共旗=紅藍五角별旗)가 물결처럼 출렁댄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의 자원도 가득 찬...
박세영(朴世永)작사 김원균(金元均) 작곡이라는 그들의 애국가가 울려 퍼지며, 두 사람의 앳된 인민군이 무대 위로 등장한다. 하얀색 바지에 빨간 줄무늬가 있는 군복을 입고 개선장군이 되어 손을 흔드는데, 평화의 사도(使徒)요 인민의 해방군(解放軍)으로 등장한 이들을, 군중들은 열광적(熱狂的)인 환호로 영접한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국...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청장년층 자위대(自衛隊)가 대창을 거머쥐고 올라서며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부른다. 이윽고 외지(外地)에 나가 공부하다(이곳엔 중학이 없음) 방학을 한 유학생(遊學生)동맹, 청년동맹, 여성동맹, 젊은 여성들의 위안대(慰安隊), 그리고 인민학교 소년단의 대표들이 차례로 등단한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전사하리라...
하늘을 찌를 듯 ‘적기가(赤旗歌)’를 부르는 이들 얼굴에는 새 시대, 새 역사의 일꾼으로서의 사명감(使命感)이 두 눈에 이글이글 불탔다. 객석(客席)에서는 불학무식(不學無識)하고 남의 집 머슴살이나 하던 무산근로대중(無産勤勞大衆)들이 큰 감투를 하나씩 얻어 쓰고, 지주(地主)들로부터 빼앗은 토지를 무상(無償)으로 분배(分配)받는다는 기대에 가슴 부풀어 춤을 추는데, 무대 위 아래가 구분 없이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간다.
이 관중석(觀衆席) 뒤 한쪽 구석에서 움츠린 채 물끄러미 구경하다 말고, 어느 소년 하나가 쏜살 같이 밖으로 뛰어나간다. 이윽고 손에 돌멩이 하나를 들고 씩씩거리며 되돌아와 수류탄 던지듯이 던지려 한다. 아! 그게 바로 나다. 실황(實況)이 아니라 적어도 그런 비분(悲憤)으로 사는 것이다. 이 지상낙원(地上樂園)에서 조부님으로부터 금족령(禁足令)이 내려진 채 이산(離散) 가족이 된 우리 삼남매는, 어떤 희망도 기약(期約)도 없이 그저 끼 되면 밥 먹고, 밤 되면 자고 하는 생활이 되풀이 되었다. 조부님께서는 친구들이나 손님들과 약방에서 늘 기거(起居)하고, 안방에는 할머니, 손 위 삼촌 한 분, 세 명의 손아래 삼촌, 그리고 우리 삼남매 등 이렇게 많은 식솔(食率)들이 기거(起居)했다. 한 여름 덥기도 해서 여간 불편하지 않았으며, 눈치 밥을 얻어먹는 듯해서 설사(泄瀉)가 그치지 않아 꼬챙이 같이 말랐다. 이따금 야음(夜陰)을 타고, 매약상(賣藥商)을 하는 장터의 작은아버지(鍾實)댁에 스며들어가서, 소설책을 읽어 드리는 일을 했는데, 주로 김래성(金來成)의 탐정소설(探偵小說) 종류들이었다.
정보(情報)라고는 인민군의 영웅적인 승전보(勝戰譜)와, 리승만(李承晩) 괴뢰 정권의 최후 붕괴(崩壞)와, 전 세계의 공산 적화(共産 赤化)밖에 어떤 다른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동원된 단체들의 각종 집회(集會)와 시위(示威)로 동이 트고 해가 졌는데, 특히 학생들은 혁명 투사요, 그 전위부대(前衛部隊)였다.
성남리(城南里)의 조부님댁 앞에는 조그만 시냇물이 흐르고 그 위에는 다리가 걸쳐 있는데, 그 다리 위에 서있으면 집안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대문 앞 큰 수양버들이나 담장 언저리에 심겨진 몇 그루 나무들은 별로 가림이 되지 못 했다. 이 다리 위에서 밤낮 없이 불러대는 그들 노래와 구호는 고막(鼓膜)을 찢을 것 같았다. 밤이면 각 단체마다 학습을 받았는데, 김일성의 항일(抗日) 유격전(遊擊戰) 역사와, 해방을 시켜준 종주국(宗主國) 소련에 대한 감사와, 공산주의의 우월(優越)성 등 사상(思想) 무장(武裝)이 주류(主流)였다. 은신한 우리들은 아무 집회도 시위도 참가하지 않았지만, 귀에 못이 박힌 그 노래와 구호가 지금도 귀를 멍하게 할 때가 많다.
습관대로 일기를 쓰고 싶었으나 그럴 처지(處地)는 안 되었다. 사실대로 논픽션(non-fiction)을 쓴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冒險)이었다. 간접적인 비유(比喩)로 할 수 있는 것은 시(詩)와 만화(漫畵)였다. 틈만 있으면 시를 썼다. 명함(名銜) 만한 쪽지에 깨알만한 글씨로 눈물을 찍어 시를 썼다. 30여 편을 썼다. 물론 다음과 같은 반공(反共)적인 저항시(抵抗詩)가 대부분이었다.
流 星
흐르는 물조차
곤한 듯 코골고,
어린 뭇별들 졸고 있는
고요한 여름 밤.
타는 가슴에
뜨거운 한숨만 토하며,
바람에 날려가듯
흘러가는 별.
조국은 어디로,
유성은 어디로.
다만 하늘을 우러러
마음만의 합장.
미친 바람아
영원히 사라져라.
조국아 재생하라.
평화 종아 울려라.
마음 붙일 수 없는 세상이련만
불멸의 두 주먹 굳게 쥐고
어디론지 흘러가는
별똥별. 흐르는 별.
(1950. 7)
그리고 붉은 이리떼가 평화의 토끼 나라에 쳐들어 왔는데, 결국 멸망하고 만다는 내용의 만화(漫畵)를 필름(film)통만한 두루마리에 그렸다. 왜정(倭政) 때의 독립투사(獨立鬪士)같이, 명함(名銜)만한 태극기도 한 장 그려서 꼬깃꼬깃 접어 부적(符籍)처럼 안쪽 호주머니에 지니고 있었다. 아무도 몰래 이것을 꺼내어 보는 것만이 유일(唯一)한 위안(慰安)이었다.
“연수 너 이리 오니라. 죽을라고 환장을 했제 이게 머냐? 너만 죽는 게 아니고 식구들 다 몰살당할 걸 모르냐? ”
“..................”
“당장 태워부러! 나 보는 데서.”
조부님에게 그만 들키고 만 것이다. 마당에서 종이만 타는 게 아니라, 한숨이 타고 눈물이 함께 탔다. 나의 분신(分身)을 화장(火葬)시키는 것 같은, 아니 나 스스로 분신(焚身)하는 거와 같은 그 아픔!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아직 알 리 없어, 국사 시간에 배운 연산군(燕山君)의 분서(焚書) 사건을 떠올리며, 조부님이 그토록 섭섭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집념(執念)이란 마약 같은 것. 미련을 버리지 못 하고 슬쩍 슬쩍 빼돌렸다. 그 후로도 이 일을 끊지 못했다.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돌담의 기왓장 틈새, 장독 밑.....이 넓은 천지에 손바닥 안에 든 이 쪽지 묶음 하나 숨길 수 있는 곳이라곤 없었다. 문득 감나무 아래 깨진 채 널브러진 기왓장이 눈에 들어왔다. 빗물에 젖지 않도록 납작한 돌멩이를 놓고, 그 위에 시 묶음을 얹어 암키왓장으로 덮어두었다. 하찮은 이 기왓장에 누군들 눈길을 두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수복(收復)될 때까지, 종이쪽지들은 그 속에 엎드려 숨만 쉬고 있었다.
하늘을 찢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비행기가 날아갔다. 그들 말대로 리승만 괴뢰(傀儡) 정권이 완전히 붕괴(崩壞)되고, 인민군의 영웅적(英雄的)인 전투로 완전히 승리했다면 왜 적기(敵機)는 하늘을 마음대로 날며, 왜 격추(擊墜)시키지 못 하는가? 오직 풀리지 않는 한 가지의 수수께끼는 바로 그 사실이었다. 혹시나 하는 실오라기 같은 희망과 미련(未練)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글도 읽지 못한 할머니는 돈 있고 마음씨 좋아서 여성동맹위원장, 작은아버지(종실)는 좌익인 처남(妻男) 덕분에 자위대장의 감투를 억지로 뒤집어 씌웠다.
어느 날이었다.
“연수야, 너 그림 한 장 그려볼래?”
“.....................”
“송하(松下)에 문동자(問童子)라고.....”
여느 때 같으면 한자(漢字)를 써보라고 하셨을 텐데 뜻밖이었다. 그림 재주가 있다는 손자의 그림 솜씨를 시험해 보려고 하셨을까? 아니면 손자의 잡념(雜念)을 없애고, 우울(憂鬱)함과 무료(無聊)함을 달래주려는 배려(配慮)였을까? 소나무 아래에 있는 아이에게 네 스승은 어디 있느냐고 물을 때, 저 먼 산을 가리키며 약초를 캐러 가셨다고 대답하는 장면을 그리라는 것이다. 아마도 어느 고사(古事)에 나오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이윽고 지필묵(紙筆墨)을 챙겨 주셨다. 병풍(屛風)에서 흔히 보던 산수화(山水畵)를 떠올리며 붓을 들었다. 운무(雲霧)를 두르고 있는 심산유곡(深山幽谷)과 고산유수(高山流水), 한가로이 걸쳐있는 등 굽은 외나무다리와 용틀임하며 벋어있는 노송(老松)......한국화나 동양화의 멋과 매력(魅力)은 여백(餘白)인데, 긴장과 초조와 불안의 거미줄에 옴쭉달싹 못하게 걸려있는 내가, 산수화를 그릴만한 마음의 여백과 한가(閑暇)로움이 있을 리 없었다. 내키지 않는 붓놀림이 몹시 무디고 매끈하지 못 했다. 더구나 시와 만화를 태우라 하시던 일이 바로 엊그제인데.....
그런데 또 어느 날, 조부님께서 나를 불러 앉혔다. 심각한 표정에 지레 불안했다.
“다 틀리는 거 갚다. 니 부모 다시 만날 생각도 말고, 학교 댕길 생각도 말고, 이제 니 앞가림을 해야겄다. 삥아리 맻 마리 사줄텡게 길러서 장터에 내다가 폴아라.”
“........................”
조부님은 과거에도 어쩌다가 뵈러 가면, 학교를 그만 두라는 말씀을 하곤 하셨고, 실제로 삼촌(종오)도 국민학교를 중퇴(中退)시켰다. 변소에 앉아서 똥 한 덩어리 누고 나면 다 아는 것, 여자들이나 배우는 쉬운 언문(諺文=한글) 암클을 배우려고, 왜 학교에서 허송세월(虛送歲月)하느냐는 것이 이유였다. 차라리 한문을 배우거나, 일찍 장사를 해서 돈 벌어야 배곯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 이젠 장돌뱅이가 되라는 거구나’
‘북-개성(開城)상인, 남-병영(兵營)상인’이란 말이 있듯이, 병영은 500년 조선 시대의 경제 중심지라고 했다. 한말에는 3000여호가 살았다니 대단한 도시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장마당이 꽤 컸고, 따라서 주변 상인들이 북적대었다. 지금까지 숨어 지냈던 내가 닭장을 등에 지고 장마당에 나가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앞이 캄캄해지고 가슴이 메슥거렸다. 누가 떠밀기나 하는 듯이 나는 아무도 몰래 밖으로 나갔다. 시내를 건너서 논둑 밭둑길로 무작정 걸었다. 그 쪽엔 큰 방죽이 있다는 걸 들은 일이 있어서였다. 한참 가니 방죽이 아니라 둠벙이 나타났다.
‘ 죽어버릴까? ’
순간 누나와 동생 그리고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물이 주르륵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참 울다가 눈을 뜨니 둠벙에 손바닥만한 붕어가 가득한 게 아닌가? 강아지풀을 뜯어서 침을 묻히고 물위에 드리웠다. 어렸을 적에 개구리 잡던 장난이다. 곧 물것만 같았다. 물면 낚아채리라고 기다렸으나 붕어들이 속을 리가 없었다. 이러는 사이에 해는 서산(西山)으로 기울고, 한약재(漢藥材)를 뿌리면 반 양동이는 잡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빠져버리자는 생각은 어느새 지워지고, 붕어 잡자는 생각에만 젖어 시치미 딱 떼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그 동안 야단이 났다. 금족령(禁足令)을 어기고 말없이 외출을 했으니.....또 호된 야단을 맞았음은 물론이다. 누나는 이렇게 말썽을 피운 나에게 얼굴을 찌푸리며 몹시 못 마땅해 했다.
‘생물’시간에, 적으로부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보호색(保護色)이나 의태(擬態) 자절(自切)등이 있다고 배웠다. 그러나 차라리 벌과 같은 경계색(警戒色)으로 살다가 한 방이라도 침을 쏜 후, 스스로 죽어가는 편이 떳떳하지 않을까?
‘이 근처 어디엔가 수류탄(手榴彈)이 묻혀 있다지. 경찰들이 후퇴(後退)하면서 묻었다는데...’
이번엔 야음(夜陰)을 타서 살짝 외출했다. 그리하여 *돌담장을 끼고 돌아서 짐작 되는 곳으로 갔다. 아무 것도 심겨져 있지 않은 빈 텃밭이었다. 수류탄은커녕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유령이나 나타날 것 같았다. 장님처럼 이 곳 저 곳 흙을 헤집어 보았으나 돌멩이만 손에 잡혔다. 누구에게 들키지 않을까 식은땀만 흘러, 헛수고를 하고 돌아오니 분통이 터졌다. 상하이 홍구(虹口) 공원에서 폭탄(爆彈)을 던졌던 윤봉길 의사(義士)의 영화가 생각났다. 밤마다 궐기대회(蹶起大會)를 하는 그 곳에 수류탄을 던지고, 나도 자폭(自爆)했으면 하는 마음이 물거품이 되었다. 정말 수류탄이 묻혀 있었다면 과연 내가 거사(擧事)를 하였을까?
더위가 한 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바람이 서늘해졌다. 인공(人共) 시대가 열린지도 만 두 달, 9월에 접어들면서 목을 죄어온 듯한 낌새를 느끼게 되었다.
* 1932.4.29 중국 상하이(上海) 홍코우(虹口) 공원에서, 일본 천황의 생일 축하 식장(天長節) 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사령관, 주중 외교관들을 죽이거나 중상을 입힘.
* 돌담길...1653년 일본 나가사끼로 행하던 네덜란드의 하멜(Hamel hendrik) 일행이 폭풍으 로 표류, 제주도→병영성에 억류(7년) 후 탈출, 본국으로 돌아가 표류기(漂流記)를 써서 서 양에 조선을 알림. 그 때 하멜이 가르쳐준 네덜런드식 빗살 무늬 돌담길( 2007.6.22 근대 문화재로 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