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면사무소와 장터가 있는 영동(永東) 신작로에서 꺾어, 밭두렁 논두렁길을 따라 한참 걷다가, 바지가랑이를 걷어 올리며 비재 내를 건너서, 조그만 야산을 넘으면 강진군(康津郡) 칠량면(七良面) 송정리(松汀里)의 송촌(松村) 마을에 이른다. 여름철이면 댓잎 냄새가 짙게 풍기는 골목으로 들어서서, 큰 감나무가 있는 돌담을 돌아서면 나의 외가(外家)가 나온다. 내가 태어났을 적에는 보다 작은 오두막이었지만, 그 후 이사 온 이 집은 이 동네에서는 꽤 큰 집이었다. 외할아버지(趙東來)는 내가 대여섯 살 무렵에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외할머니와 외숙 내외(趙化九,김재님), 그리고 외사촌 동생 南容(오진),南彩(또만),南連(짜가사리),南信(부덕) 넷이 단란하게 살았다.
옛날 마을 어귀에는 솔낭구(소나무)들이 빽빽해서 송촌이라 했다는데, 지금은 나무가 별로 없는 야산(野山) 자락에 올망졸망 초가집 60여 호가 있고, 앞으로는 명월강이라는 작은 개울이 흘러간다. 들을 건너 오른쪽으로는 멀리 천관산(天冠山)이 머리만 내민 채 높이 솟아 있으며, 왼쪽으로는 단월리(丹月里)가 바라보인다. 우리는 이 마을을 ‘목단동’이라 불렀다. 그 동네는 우리 통천(通川) 최씨(崔氏)의 문중이 모여 사는 곳인데, 조부님을 비롯한 우리 종가(宗家) 자손들은 모두 외지(外地)로 뿔뿔이 흩어져 나갔고, 먼 친척만이 살고 있기 때문에 잘 가게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외가에만 드나들었다. 외할머니의 몸에서 풍기는 삼, 모시 냄새가 정겹고, 외숙 내외의 사랑과 동생들의 친절이 좋았으며, 보리밥이라도 싫건 얻어먹을 수 있어서 방학이나 농번기(農繁期) 휴가 때면 자주 갔다. 그 당시에는 버스도 드물어서 3,40 리 이상 걸어서 다녔는데, 탐진강 물줄기를 따라 둑길로 군동면 석교를 지나, 강진만을 멀리 바라보며 혼자서도 갔다.
어머니는 친정에 다녀오면 잡곡(雜穀)이나 고춧가루, 깨 등 보따리를 이고 와서 살림에 보태었다. 나를 떠나보낼 적마다 고쟁이 속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용돈을 꺼내어 쥐어주며 눈물을 글썽거리던 외할머니는 세상에 둘도 없이 부지런하고 온유(溫柔)한 어른이셨다. 지나가는 방물장수를 대접하며 쉬어가도록 한 할머니의 그 인자(仁慈)한 적선(積善) 때문에 자손들이 다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이를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 하겠지.
“열매 중에 가장 귀한 열매는 뭔지 아냐?”
“...................”
“나락(벼)이다”
“그라문 꼿 중에서 제일 귀한 꼿은?”
“무궁화지라우”
“예끼, 배웠단 놈이 그 걸 모르다니, 목화다”
이렇게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늘 강조하시던 외숙께서는, 소나기가 쏟아져도 뛰지 않은 느긋함 때문에, 할머니로부터 부지런하지 못하다는 핀잔을 듣긴 했지만, 그야말로 세상 떼 묻지 않은 전형적(典型的)인 순박(淳朴)한 농부이셨다.
친정에 다니러간 시누이에게 올망졸망 이바지 보따리를 싸주며, 이를 머리에 이고 군동면 ‘샘바우’까지 2,30리 길을 멀다 않고 배웅해주던 외숙모님도 또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후덕(厚德)한 분이었다. 온 식구가 할머니를 닮아 부지런하였으며, 네 동생들도 모두 다 온순하고 정직하며 나를 유달리 따랐다. 숫기가 없어 어른들 앞에서는 입도 뻥긋 못했는데, 외가에만 가면 내 집처럼 편안하여 마음껏 까불었다. 그래서 외숙은 *초라니 같다고 했다. 이래서 송촌은 마치 정든 내 고향 같았다.
예닐곱 살은 지났을까? 가을걷이가 거의 끝난 늦가을이었다. 외숙모님이 관산(冠山) 장에 가신 날이다. 늘 골투재를 넘어서 다니셨는데, 마중 나간다고 집을 나갔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한참 깊은 산길로 들어가는데, 웬 개가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게 아닌가? 마을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외딴 산속인데.....나도 힐끔 힐끔 그를 쳐다보며 걷고 있었지만, 개도 나에게만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길이 뚝 끊어지고 우락부락한 아저씨들이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다.
“넌 누구냐? 왜 왔어?”
“외아짐 마중 나왔어라우...”
“너 질 잘못 들었어. 싸게 다시 내려가!”
“.............”
허겁지겁 왔던 길로 바삐 내려 왔다. 그 개는 보이지 않았다. 땅거미가 내려 으스스했다. 날씨가 차지면서 아랫도리가 몹시 추웠다. 팬티도 입지 않아 고추는 자라목처럼 바짝 움츠러들고 고환은 탱자처럼 얼어붙은 것 같았다. 고추 주무르랴 발걸음을 재촉하랴.....멀리서 불빛이 하나 둘 씩 켜지면서 무서워졌다. 울음이 터지려고 했다. 집에 왔더니 외숙모는 이미 와 계셨고, 온 식구가 야단이 났던 모양이었다. 그 개는 늑대이고, 아저씨들은 맹주리 산속에서 숯 굽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큰 일 날뻔 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나는 농가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나, 외가(外家)를 통해서 농사일을 대충 알게 되었으며, 특히 농민들의 어려운 생활들을 눈여겨보았다. 외가에 가면 동생들과 함께 들로 산으로 냇가로 쏘다니며 놀고 싶었지만, 항상 바쁜 농가인지라 동생들은 마음대로 놀지 못 하고 힘든 일을 했다. 여름에는 보리밥을 소쿠리에 넣어 기둥 높이 걸어놓았는데, 개미떼 들은 용케도 기어 올라가 새까맣게 붙어있었다. 이것을 찬 물에 말면 둥둥 떠다녔다. 한 마리 한 마리 건져내도 입 안으로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얼굴을 찡그리면 할머니께서는
“개미 묵으믄 심 새. 그냥 묵어”
하시며 내 등을 토닥거리며 빙그레 웃으셨다.
정말 농촌에서는 힘이 제일이었다. 개미 한 두어 마리 먹은 힘으로 용쓰며 일을 돕는다고 했지만, 그러나 힘만 가지고도 안 되는 것이 또한 농사짓는 일이었다. 나는 집안 청소나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 곡식을 말리거나 목화씨를 골라내는 일, 동생들과 같이 소 먹이는 일을 도왔다. 벼 보리 베기는 그런대로 흉내라도 내었으나, 모 심는 일은 잘 심겨지지 않아 매양 물에 떠올랐고, 뙤약볕에서 김을 맬 때는 지열로 숨이 턱턱 막혔다. 디딜방아를 찧고 나서 쥐가 난 다리를 후들후들 떨고 있으면 꾀부린다고 웃음거리가 되고, 괭이질 삽질 특히 지게 지는 일은 힘에 부치고 요령이 없어 아예 엄두도 못 내었다. 아마도 고구마 캐는 일이 가장 신났던 것 같다. 어둠이 짙게 옷자락을 펴고, 마을에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들일을 마치게 된다. 도랑물에서 몸을 씻고, 눈앞에 떼 지어 어른거리는 하루살이를 휘저으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넓은 마당에 덕석(멍석)을 깔고 호롱불 밑에서 저녁밥을 먹는 그 맛과 즐거움! 어느 때는 내가 좋아하는 칼국수 팥죽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여름철에는 된장과 식초로 버무린 목화밭 열무김치 겉절이가 입맛을 돋우었다. 매캐한 모기 불을 피워놓고 누운 채 은하수(銀河水)를 쳐다보며 밤 깊도록 도란도란 도깨비 이야기랑, 귀신 이야기랑 하는 것도 또한 우리에겐 무섭지만 즐거운 일이었다.
* *
그런데, 이 마을에는 조(趙)씨와 배(裵)씨가 함께 사는 집성촌(集姓村)이다. 이 두 성씨의 조상은 내외사촌(內外四寸) 관계라는데,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관계였다. 해방 후 좌우익의 싸움에 이곳도 휘말리어, 조씨 문중의 몇몇 사람이 여수.순천 반란 사건에 관여(關與)한 후 입산(入山)하였다. 경찰은 배씨들을 이용하여 조씨들의 정보를 얻어내고 그 동태(動態)를 감시(監視)했으며, 입산한 좌익들은 조씨들을 통하여 배씨들의 동정(動靜)과 경찰의 이동을 감지(感知)하였다. 공비들이 밤중에 하산(下山)하여 조씨 집에서 식사라도 하고 가면, 이를 배씨가 밀고(密告)하여 조씨들은 경찰로부터 구타를 당하고, 또 하산(下山)한 공비들은 조씨들의 하소연을 듣고 배씨들을 협박 폭행하여 보복의 악순환(惡循環)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다가 6.25가 발발(勃發)하고 인공 시대가 되었으니, 하산한 조씨가 배씨들을 반동분자로 낙인(烙印)찍어 무차별 복수(復讐)를 하게 된 것이다. 나의 외가는 풍양(豊壤)조씨(趙氏)이다. 대다수 조씨가 그랬지만 특히 외숙(外叔)은 좌우익이 무엇인지 모른 채 농업을 천직(天職)으로 아시는 순박(淳朴)한 농민이다. 그러나 우익인 매제(妹弟)를 은신(隱身) 시켰다는 죄목(罪目)으로 은신처를 대라며 몽둥이로 맞았다. 무고(無辜)한 처가(妻家) 일족(一族)이 박해받는 것을 참지 못 해 자수(自首)를 한 아버지는, 그들로부터 목숨만 건질 정도로 고문(拷問) 받은 채, 바지게에 실려와 똥물을 마시고 똥을 바르며 치료를 하였다. 아버지는 그 후 목암마을로 몰래 잠입(潛入)하였다. 가까운 5촌 당숙 (薰奎=연동당숙)댁 대청마루 밑에 굴을 파고 들어가, 수복(收復)될 때까지 거기에서 생명을 부지(扶持)하였다. 한편, 제 세상이 된 송촌 조씨들은 어린이들(소년단)까지 동원되어 온갖 행패(行悖)를 부리며 배씨들을 박해(迫害)했는데, 어머니는 조씨이면서도 도저히 배겨낼 수 없어 친정을 떠나, 이 곳 저 곳 유랑(流浪)하며 걸식(乞食) 생활을 했다.
100일만에 수복이 되어 경찰이 되돌아 왔으니, 세상은 또 뒤바뀌어 배씨의 세상이 되었다. 그들도 조씨에 질세라 무차별 보복(報復)을 하게 되었다. 이 평화롭던 두메산골에는 과부(寡婦)와 노인과 어린이들만이 남은 폐허(廢墟)로 변해버렸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이데올로기(ideology)는커녕 글도 제대로 모르는 채 농사만 짓고 살아온 이 솔낭구 마을이 쑥대밭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런 소식을 들은 나는 찬바람이 스산하게 일고 있을 이 마을이 정 떨어져 오랫동안 발길을 끊고 있었다.
그 후 이 마을은 비운(悲運)의 눈물을 흘리며 외지(外地)로 떠나는 사람들의 빈 자리에, 타성씨(他姓氏)들이 또한 모여들어 전통적인 집성촌(集姓村)은 사라졌다. 1962년 7월24일부터 8월 30일까지, 10여년 만에 고시 행정과를 준비하기 위해 외가에 한달간 내려가 있었다. 남편이 군 복무중인 제수씨는 한복 모시바지와 런닝셔츠를 마련해 주는 등 정성껏 내 뒷바라지를 해주었고, 나는 틈나는 대로 귀여운 어린 조카를 봐주었다. 조씨이니까 ‘조지 워싱턴(George)’ 이라 애칭(愛稱)했는데, 증조할머니께서 ‘쬬지’라고 부르는 바람에 그만 별명(別名)으로 굳어버려, 지금도 석현에게는 미안하다. 막내 동생 남신에게 악전(樂典)을 가르쳐 주고, 뒷산에서 함께 팬티바람으로 소를 먹이며 숫기가 없는 그에게 웅변 연습을 시키기도 하였다. 길재(吉再)의 옛시조를 읊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그 후 오랫동안 발길을 끊었다가, 1994년 8월 15일, 외숙께서 타계(他界)하여 다시 20여 년 만에 이 마을을 찾았다. 6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초가지붕이 슬레트(slate) 지붕으로, 논둑밭둑길이 농로(農路)가 넓어지며, 호롱불이 전등으로 바뀌어, 문명의 이기(利器)를 사용한 가정들이 많아졌다. 마을 어귀의 아름드리 *당산(堂山)나무인 느티나무와 짙푸른 소나무가 사라지고, 그 인심 좋던 옛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내 안태(安胎) 고향이요, 내 소년 시절의 발자국들이 여기 저기 남아 있는 곳!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은 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베어지고 없구료.,
이은상(李殷相)의 시를 노래하면서, 그 옛날 어린 시절의 발자국을 따라 골목 저 길목을 두루 둘러보았다. 푸른 하늘 높이 치솟으며 새봄을 노래하던 보리밭 종달새, 처마 밑에다 둥우리를 지어놓고 부지런히 새끼들에게 먹이를 먹여주던 금슬(琴瑟) 좋은 제비 부부, 한 여름 마른 땀 흘리며 밀거니 끌거니 쇠똥.말똥을 굴리던 쇠똥구리 내외, 부슬부슬 비 오는 날 먼 들판에서 껌뻑거리며 씨름 하자고 덤빌지도 모르는 도깨비불, 담을 넘어가는 구렁이를 지켜보며 목청이 터져라 지저귀던 참새들.....이런 것이 생각났다. 마른천둥 소리를 들으면서 긴 목청으로 송아지를 부르던 엄마 소, 한낮 마당 한 구석에다 신방을 마련하고 어렵사리 흘레부쳐 밀월(蜜月)을 즐기던 신혼 돼지, 함께 잘 놀다가 별안간 머리털을 세우며 싸우던 수탉들, “야옹 야옹” 하면 어미인 줄 알고 다가오는 고양이 새끼들의 눈망울, 아직 젖내도 가시지 않은 어린 것들이 턱 밑에 수염을 달고 콩자반 같은 똥을 떨어뜨린 염소 새끼들....이런 것이 주줄이 생각났다.
불난 이웃집을 다시 지어주느라고 내 일 처럼 흙벽을 쌓으며, 지붕에 이엉을 올리던 남정(男丁)들, 반촌(班村)이랍시고 “××떡(댁)”이라는 태고를 서로 부르면서, 호롱불 아래 모여서 어런더런 기타를 치듯 삼(杉)을 삼던 동네 아낙네들, 사랑방에 모여 새끼 꼬고 가마니 짜며 입담 좋게 음담패설(淫談悖說)하던 동네 머슴들, 오가는 말도 별로 없이 모여 앉아 물레를 돌리며 솜털을 뒤집어 쓴 채 흰 머리 같은 실을 잣던 할머니들, 누룽지같은 욕지거리가 섞여야 한결 숭늉처럼 구수해진 사투리로 우물가에서 수다 떨던 젊은 큰애기들이 또한 생각났다.
최근 송정리 계동의 지석묘군(支石墓群=24기,고인돌:전남기념물제66호)으로 알려진 것 외에, 빼어난 경관(景觀)도 없고, 특별한 유적(遺蹟)도 없는 이름 없는 작은 마을이지만, 이곳은 내 마음의 고향이었다. 이제 이런 광경은 추억(追憶)의 뒤안길로 다 사라지고, 이 도시로 저 도시로 나가는 이농(離農) 현상 때문에 공통(空桶)화 되는 모습을 보며 떠나왔다. 다시는 6.25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어, 제2의 송촌이 생기지 않기를 기도하며....
*초라니...괴상한 여자 모양의 탈을 쓰고 붉은 저고리와 푸른 치마를 입고 긴 대의 깃발을 가진 악귀(惡鬼)를 쫓는 나자(儺者)의 하나.
*당산(堂山)나무...토지나 부락의 수호신으로 여기는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