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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냐 사느냐?

학창시절

by 최연수

농민들을 위한다는 그들이, 현물세(現物稅)를 징수(徵收)하고자, 아직 익지 않은 벼이삭 심지

어 조 이삭의 낱알을 세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고, 난데없는 *붉은 지폐(紙幣)를 물 쓰듯 물자(物資)들을 닥치는 대로 사재기하였다. 여성동맹을 동원하여 식량 간장 된장 고추장 소금 등을 거두어들였다. 날마다 승전보(勝戰報)를 열띠게 홍보하면서도, 젊은이들을 의용군(義勇軍)으로 징병(徵兵)해서 전선(戰線)으로 끌고 갔으며, 나이 든 장정(壯丁)들을 동원하여 산에다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한편, 호주기(濠洲機)는 거의 날마다 하늘을 누비고 다녔다. 두세 대씩 편대(編隊)를 지어 날아다니는 이 전투기를 호주기(濠洲機)라 불렀는데, 리승만 대통령의 영부인(領夫人) 프란체스카의 고국(故國)인 오스트랠리아(Australia)(사실은 오스트리아=Austria)의 비행기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호주기는 사람이 모여 있는 곳, 움직이는 달구지, 다리 등에 기총소사(機銃掃射)를 했으며 밤에는 담뱃불만 보아도 기관총을 쏘았다. 그래서 등화관제(燈火管制)가 실시되고, 낮에 모이는 일은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밤으로 모여 궐기대회(蹶起大會)를 하며, 징발(徵發)한 물자들을 달구지나 지게로 운반했다. 가끔 비행기가 삐라를 뿌리기도 했는데 절대로 줍지 못하도록 하여 궁금증만 더 해갔다.

할머니에게 가끔 놀러온 노인이 있었다. 그는 장흥 사람인데 낯이 익은 분으로 우익이었던 것 같았다. 대문 안에 들어서면 두 손바닥을 붙이고 뒤집는 시늉을 했다. 나는 세상이 다시 뒤집힐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直感的)으로 느꼈다. 비행기조차 마음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바늘 구멍만한 창구멍으로 바라보는 정도였으나, 마음껏 박수를 보내며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 하느님, 제발 살려 주옵소서!”

희망은 점점 부풀어 올랐으나 간덩이는 오히려 오그라들었다. 외래자(外來者) 보고가 우리들 가슴을 죄어왔기 때문이다. 반동분자들을 색출(索出)하기 위한 조치(措置)였는데, 우리들이야말로 외래자요 반동분자가 아닌가? 지금까지는 안전하게 은신(隱身)해 왔는데, 들려오는 소문은 이제 가택(家宅) 수색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색출한 반동분자들을 인민재판(人民裁判)에 걸어 유.무죄(有無罪)를 판결하는데, 거의 유죄 판결을 받고 감옥에 가두며, 그들 집은 방화하는 것이다. 악질분자(惡質分子)들은 즉결(卽決) 재판을 하여 공개 총살(銃殺)을 한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반동분자란 경찰.국군과 공무원, 교사, 목사, 지주(地主), 부유층(富裕層), 우익(右翼) 인사, 심지어는 교육 수준이 높은 지식층, 서울 말씨를 쓰는 사람, 오른 쪽 손가락 끝에 군살이 붙은 사람...... 여기에 해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병영면에 주둔했던 두 인민군은 주민들에게 호감(好感)을 샀으며, 특히 나이도 어려 여자들에겐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빨치산(partizan 러)이 등장(登場)하면서부터 무대는 공포(恐怖) 분위기로 반전(反轉)이 되었다. 빨치산이란 여수. 순천 반란 사건으로 연루(連累)되어 지리산(智異山)으로 올라가 그 동안 게릴라(guerrilla)전을 펴오던 소위 공비(共匪)를 그렇게 불렀는데, 그들은 새빨간 머리띠를 두른 채 긴 대창을 들고 다니던 사람들이다. 살기등등(殺氣騰騰)한 그들 눈은 늘 충혈(充血) 되어 있었으며, 고기를 껌 씹듯이 질근질근 씹고 다녔다. 그런데 이들이 반동분자 집을 수색(搜索)하러 다니는데, 대창으로 옷장, 중천장, 뒤주, 장독, 장작더미, 아궁이, 변소, 우물 할 것 없이 무차별 쑤시고 다니는 것이다. 바로 뒷집이 반동분자였는데 아무리 쑤셔도 찾는 사람이 없으니까 불을 질렀다.

삼촌과 나는 약방 마루 밑에 개구멍을 내고 기어 들어가 숨어 있었다. 뭔지 살갗에 스멀거리고 자꾸만 오줌이 마려웠다. 그만 참을 수 없어 옷에다 쌌는데, 그래도 자꾸만 찔끔거렸다. 그런대로 소변은 괜찮은데, 그러나 기침이 나오는 걸 어떡하랴. 코에 닿을 듯한 낮은 마룻바닥과, 몇 십 년 묵었을 먼지를 둘러쓴 거미줄과 눅눅한 습기가 목구멍을 간지럽히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없게 괴롭힌 것이다. 마루 밑에서 새어 나온 웬 기침 소리를 들었다면, 빨치산들

이 그냥 지나칠 리가 있을 것인가? 견디다 못해 나와 버렸는데, 이 넓은 세상에 숨을 곳이라곤 쥐구멍 한 군데도 없었다.

9월말이 되자 반동분자가 따로 없었다. 이제는 관공서(官公署) 학교 기와집....반듯하게 지어졌다는 초가(草家)까지도 모조리 불질러 온통 불과 연기로 가득 찼다. 방화(放火)가 무서워 밤에는 온 가족이 변두리로 피신해봤으나 그 곳도 마찬가지였다.

“ 연수야! 연수야! ”

“.......”

“ 나 엄니다. 문 좀 열어라.”

“?”

온통 불바다가 된 무서운 곳에, 이 꼭두새벽에 누가 나를 부른단 말인가?

유령 아니면 환청(幻聽)이리라. 그런데 할머니께서 나가셨다.

“누구시요?”

“어무니, 저요. 연수 에미요.”

할머니는 문빗장을 열었다. 아, 어머니다! 생사(生死)를 모르는지 만 두 달이나 되었는데, 어머니는 어둠 속에서의 보호색(保護色)인 검정 이불보를 둘러쓰고 유령(幽靈)처럼 나타났다. 자벌레가 의태(擬態)로 생명을 보존한 것처럼 그 동안 거지 행세(行勢)로 동냥하며 유랑(流浪)하다가, 성전면(城田面) 친척 집에 가서 며칠 동안 신세를 졌다. 그 곳에서도 빨치산들의 수색망(搜索網)이 좁혀오자, 무덥고 냄새 나는 거름더미 속에서도 숨어보고, 결정적인 위기에는 분만(分娩)하는 갓난아기 *삼신상(三神床) 쌀독 뒤에 웅크리고 앉아 은신(隱身)하기도 하여 간신히 생명을 부지(扶持)하고 있었다. 저 멀리 바라보이는 병영면(兵營面)이 불바다가 된 걸 보고, 타 죽었을 아이들이나 보고 함께 죽겠다고, 논두렁을 따라 밤새도록 기다시피 해서 왔노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은 온 가족이 살아있는 꿈같은 모습을 보면서 흐느꼈다. 우리도 울었다. 그러나 그런 감상적(感傷的)인 재회(再會)도 잠깐, 할아버지는 빨리 딴 데로 도망가라고 호통을 쳤다.

“엄니, 나 데리고 가!”

“안 돼, 다 죽어. 이 손 놔! ”

동생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꽉 붙들고 따라가겠다고 몸부림쳤다. 어머니와 함께 죽겠다고 소리치며, 만약에 떼어놓고 가면 다 일러바치겠다고 울어댔다. 우리는 동생의 입을 틀어막고 간신히 떼어놓았다. 어머니는 그 길로 또 어디론지 도망을 하였다. 아닌게아니라 나도 동생처럼 어머니와 함께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러나 살아야 한다! 기어코 살아야 한다! 저네들의 마지막 발악이니 다시 태극기를 볼 수 있겠지. 그 때까지는 살아야 한다!

빨치산들은 낮에는 산속에서 은신(隱身)했다가, 밤이면 하산(下山)하여 온갖 만행(蠻行)을 저질렀는데, 이 날은 대낮에도 행패(行悖)를 부렸다. 열네 살 난 삼촌(鍾五)은 그들의 식량(食糧)을 지게에 지고 수인산 중턱까지 잡혀갔다가, 어리다고 풀어주어 되돌아 왔다. 그대로 끌고 갔으면 빨치산이 되는 것인데.... 그들은 시뻘건 눈으로 떼를 지어 다니며 집집마다 뒤지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만 봐도 외래(外來) 반동분자(反動分子)라고 잡아갔다. 그런데 바로 이웃집에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다음은 우리 집 차례가 아닌가? 나는 순간적으로 어린 삼촌(鍾云)을 둘러업고 대문 밖으로 나가 다리 밑 개천으로 내리닫았다. 앉아서 물장난을 하였지만 시선(視線)은 열려진 대문 안에다 묶어 두었다.

‘누나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마침내 그들은 우리 집으로 들어갔다. 까무러칠 것 같았다. 누나는 외래자인데 이제 꼼짝없이 잡히겠구나....그들이 나오자마자 나는 다시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일단 뒤지고 나온 집이니까 다시는 안 들어가리라는 생각이었다.

아! 누나가 살아있었다. 걸레를 빨다가 인기척이 있어, 재빨리 우물 벽에 몸을 찰싹 붙이고 숨어있는데 그냥 모르고 나가더라는 것이다. 외래자를 대라고 했는데 아무도 없었으니, 참으로 위기일발(危機一髮)이었다. 삼신상(三神床)에 등을 붙이고 숨었다는 어머니가 생각났다고 했다.

이 날은 국군이 온다는 소문이 떠돌던 날이다. 이미 장흥(長興)에는 왔다고 했다. 하루만 무사하면 살 수 있다. 하루가 천년 같다는 말은 이런 때 쓰는 말이리라. 그 날 밤은 불꽃만 하늘을 대낮처럼 밝히고 있을 뿐, 세상이 공동묘지(共同墓地)처럼 정적(靜寂)에 휩싸였다. 거리에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새벽녘이 되자 개천 쪽에서 총 소리가 났다. 공포(恐怖)에 떨 뿐 어느 누구도 밖에 나가지 못 했다. 날이 밝자 몇 사람의 시체(屍體)가 시내 건너 콩 밭에서 발견되었다. 그 중에는 우리 집에 오면 손바닥을 뒤집던 그 할머니도 끼어있었다. 콩 밭에 은신해 있다는 정보가 누설(漏泄)되어 빨치산들에게 그만 죽은 것이다.

빨치산들이 모두 수인산(壽仁山)으로 입산(入山)하고 또 정적(靜寂)이 감돌았다. 정오쯤 되었을까?

“ 탕탕탕!”

다리 쪽에서 총성(銃聲)이 들렸다. 우리는 얼른 들창을 통해 그 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고함 소리와 함께 콩 튀는 듯한 총성이 들렸다. 어떤 사람이 다리 위에서 지휘를 하는 데, 대검(帶劍)을 한 그 총 부리에는 태극기(太極旗)가 메어있는 게 아닌가? 나는 온 몸에 전류(電流)가 흐르는 듯 하였다.

“태극기다!”

나도 모르게 소리쳤는데 삼촌은 “쉬!” 하며 떠들지 말라고 했다. 국군 복장(服裝)에 태극기로 위장(僞裝)한 괴뢰군들이, 환영 나온 군중들에게 사격(射擊)을 한다는 소문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90일 만에 다시 본 태극기가 그토록 아름답고 멋있을 수 없었다. 그들의 정체(正體)를 확인할 길이 없었는데, 그들은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마구 총을 쏘았다. 사람들은 전부 손을 들고 나오라고 고함쳤다. 여자들은 양동이나 항아리 같은 것을 머리에 인 채로 나오고, 남자들은 두 손을 번쩍 든 채 나오라는 것이다.

“예, 나갑니다.”

약방 대청마루에 숨은 삼촌과 나는 손을 들고 나가려는데 방바닥 천장에 마구 총을 쏘았다. 도저히 나갈 수가 없었다. 빨리 나오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는데 말이다.

“우리 나가요! 살려주시오!”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나갔다. 대문 밖으로 나가라고 해서 손을 들고 나갔는데 벌써 한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을 인솔(引率)하여 학교로 갔다. 반듯한 집들은 불타버리고 돌담들만 덩그렇게 볼품없이 남아 있었다. 도중에 죽어있는 인민군을 비롯해서 몇몇 시체를 보았다. 시가전(市街戰)이 있었던 것인데, 나중에 듣기는 ‘점복’이란 사람도 죽었다고 했다. 그는 배에 큰 점(点)이 하나 있어 ‘점복(点福)’이라 이름 지었다는데, 이 복점 때문에 감투도 하나 썼지만, 공교롭게도 총알이 그 점을 관통(貫通)했다고 했다. 복점이 아니라 화점(禍点)이 되고 만 것이다. 듣던 대로 병영(兵營)국민학교 역시 다 타져버리고 매연(煤煙)이 자욱한 빈 운동장으로 우리들은 끌려갔다. 도대체 그들의 정체(正體)는 무엇일까? 우리를 죽이려는 것일까? 이윽고 어떤 군인이 구령대(口令臺)로 올라갔다.

“우리는 대한민국 경찰입니다. 적치(敵治) 하에서 얼마나 고생들 하셨습니까? 우리는 여러분

을 구하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싸웠습니다.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이제는 우리를 도와 공산당들을 모조리 없애버립시다!”

그들은 전투복을 입은 경찰이었다. 만세 하는 환호(歡呼)와 통곡(痛哭)이 뒤엉켜, 하늘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망설였을 것이다. 빨갱이들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가슴을 치며 땅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실로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룻밤이면 생사(生死)가 갈리고, 한 자리에 있다가도 생사가 갈렸다. 경찰들은 즉석(卽席)에서 자경대(自警隊))를 조직하여 치안을 맡기고 또 그 다음 행선지(行先地)인 옴천면으로 떠났다. 그 날 밤 산에서 내려온 빨갱이들과 이들 자경대가 맞붙어 백병전(白兵戰)을 벌이었다. 또 하룻밤 사이에 생사가 갈리는 것이다.

날이 밝자마자 삼촌과 나는 서둘러 길을 떠났다. 치안(治安)이 잡혀있을 장흥(長興)을 향해 이 산지옥을 탈출(脫出)해야 했다. 먼 산에는 아직 인공기(人共旗)가 펄럭이고, 길가 도룡리 몇몇 집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그 공포(恐怖)의 적치(敵治) 하에서 어떻게 보관했던 태극기일까? 헛간에 감춰두어 곰팡이가 피어 있었을 것이다. 빗자루에 거꾸로 매달려 있을지라도, 태극기만 바라보면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해방 직후, 우리 집에서 인쇄해서 팔았던 저 태극기! 지난 석달 동안 부적(符籍)처럼 몸에 지녔던 태극기! 태극기의 귀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먼 산에서 우리를 향해 총이나 쏘지 않을까 은근히 불안했으나, 펄럭거리는 태극기의 응원(應援)에 용기를 얻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병영면! 두 달 남짓 숨어 있었던 곳. 10년을 감수(減壽)하면서 생사(生死)를 넘나들었던 곳. 전라병영(全羅兵營)은 500년 조선시대의 군사거점이라 했다. 성동리 일원에는 1,060m의 성곽이 있었는데, 1895년 동학(東學) 이듬해 폐영(廢營)했으며, 일제(日帝)는 이 병영성을 훼손하기 위해 병영국민학교를 세웠다고 했다. 그런데 또 붉은 이리가 할퀸 자국이 이렇게도 깊게 파이어 있는 것이다.

“고모!”

“아이고, 살아있었구나! 아부지 엄니는?”

“몰라요....”

“모르다니...”

고모는 우릴 붙들고 울었다. 3개월만의 만남인데 아직도 생사를 모른다니 기막힌 일이었다. 며칠 만에 누나와 동생이 뒤따라 왔다. 곧 이어 어머니도 살아 돌아왔다. 울음바다가 되었다.

“니 아부진 죽었능갑다. 아즉꺼지 소식이 없으니...”

또 울음바다다.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며 조부님댁에 들렀다가, 발을 끌다시피 되돌아가시던 아버지!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던가 싶어 눈물이 쏟아졌다.

10월 10일!

아, 저 사람이 누군가? 비틀비틀 사지(四肢)가 따로 노는 허수아비가 걸어 들어온 게 아닌가?

“나다!”

꺼져 가는 듯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가 아닌가? 우리는 아버지를 붙들고 울었다. 아버지는 중심을 잡지 못해 곧 쓰러질 것 같았다.

“살아 왔는디 왜 울어?”

눈 같이 창백(蒼白)한 얼굴, 초점을 잃은 눈동자, 뼈에 가죽만 입힌 듯한 몸, 그리고 해골(骸骨) 같은 머리...

아버지의 더듬거리는 이야기에는 비애(悲哀)가 짙게 묻어 있었다. 대청마루 밑에 토굴(土窟)

을 판 후 큰 장독을 묻고, 가마니를 이불 삼아 두른 채 눕기는커녕 편히 앉아보지도 못했다고 하셨다. 햇빛도 못 본 채 깊은 밤에만 몰래 나와 맨손체조를 하였으며, 넣어 주는 주먹밥만 먹으며 목숨을 이어가는데, 얼마나 고기가 생각나는지, 매어놓은 송아지를 보고 잡아먹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하였다. 어느 날 대낮에는 고약한 꿈을 꾸고 눈을 떠보니, 팔뚝만한 구렁이 한 마리가 장독 안쪽을 한 바퀴 두르고, 얼굴 바짝 앞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더라 하였다. 머리카락을 태우니까 슬슬 기어나갔지만, 불길한 예감으로 몸을 떨고 있었는데, 그 날 그 당숙댁 큰 아들이 의용군에 끌려갔노라고 하였다. 그 후 영영 소식이 끊어진 것이다.

“산 송장이재...”

어른들은 혀를 끌끌 차면서 입술을 깨물고, 우리들은 훌쩍 훌쩍 울면서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는 그 옛날의 패기(覇氣)가 다 어디로 살아졌을까? 환희의 감격(感激)은커녕 통한(痛恨)도 적개심(敵愾心)마저도 없는 듯 했다. 모든 감정이 정지(停止)되어 있는 것이다. 며칠 동안 한약을 달여 잡수시고 음식을 챙겨드리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몸을 가누었다. 다리에 힘이 생기자 외출하고 옛 동지(同志)들을 만났다. 미친 사람처럼 벌거벗고 지붕 위에 올라가 대나무 가지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는 사람, 죽었다고 상여에 매고 가다 도망쳤다가 살아난 사람...

나의 국민학교 동창 가운데도, 반동분자로 몰려 총살장으로 끌려가다 오랏줄을 풀고 탈출해서 살아난 친구, 수복 후 빨치산으로 입산하여 군경 토벌 작전에서 죽은 급우....생물 시간에 배웠던 보호색과 경계색, 의태(擬態)와 자절(自切) 등 온갖 방법으로 건진 생명들.....생명이 이토록 귀중한 것이다.

죽은 줄 알았던 동지들을 만나고 난 후부터 아버지의 얼굴에는 혈색(血色)이 돌고, 원기(元氣)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이와 같이 살아남은 자들이, 오죽하면 꽃밭의 붉은 꽃을 모조리 뽑아버리고, 장롱 속의 붉은 치마들을 죄다 꺼내어 불살라 버렸을 것인가?

옛 셋집은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아버지의 동지(同志) 위윤환(魏允煥)씨의 호의(好意)로 그 양복점 하던 가게 집에 빈 몸만 들이밀고 새 생활이 시작되었다.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세간으로 소꿉 살림이 또 시작된 것이다. 그 참혹(慘酷)한 사선(死線)을 넘어 한 식구의 희생(犧牲)도 없이 살아서 재회(再會)하였다는 것은 정말 기적(奇蹟)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이날을 쌍십절(雙十節) 국경일로 지키는데, 나는 10월 10일을 ‘재생절(再生節)’이라 이름하여 가경일(家慶日)로 지키고자 했다. 수복(收復) 후 그 악몽의 100일을 ‘흐르는 별’ 이라는 수기(手記)를 썼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일(美日) 최대 격전지였다는 *이오지마(류황도)의 성조기(星條旗)를 태극기로 바꾸어 표지 그림을 그렸다. 생생한 기록들이었는데 흐지부지 사라졌다. 어떻게 없어졌는지 참 아쉽다. 지금 쓰는 이 이야기는 그런 생동감(生動感)이 없고, 그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다시는 정치하지 마시오 잉. 당신 공산당 잡는다고 사람 잡아다가 족친 벌을 당한 거니께 ”

“그리혀. 나도 반성했응께 걱정 말어.”

그러나 미쳐 후퇴를 못 하고 입산한 공산군들은 게릴라전을 펴서 여전히 혼란했다. 여수.순천(麗水順天) 반란(叛亂) 사건 당시의 위험상황이 재현(再現)된 것이다. 이를 소탕(掃蕩)하기 위한 군경(軍警) 합동 작전이 계속되었으며, 적치하(敵治下)에서 희생당한 유가족이나 고통당했던 사람들은 복수(復讐)의 이를 갈며 이에 합세(合勢)했다. 아버지도 얼마만큼 건강이 회복되자 박해(迫害)했던 처가 동네 송촌을 찾아갔다. 경찰로부터 총대를 얻어 메고 갔다. 외할머니께서 부들부들 떨면서 아버지를 만류(挽留)할뿐 아니라, 얼어붙어 벌벌 떨면서 용서를 비는 그들의 가련(可憐)한 모습 속에서, 인공시절 당신의 얼굴을 발견하고 차마 복수할 수 없었다

고 하셨다. 다만 이름만으로도 자위대장을 했다는 죄목으로 강진 경찰서에 구금(拘禁)되어 있는 작은 아버지(종실)의 구명(救命)을 위해서 동분서주하였다.

*삼신상(三神床)...아기를 점지한다는 세 신령을 모시는 큰 독(삼신메를 짓는 쌀과 미역을 걸 어놓음)

* 붉은 지폐(紙幣)...북한은 남한에서 그들의 인민은행권을 강제로 통용시켰을 뿐 아니라, 경 제 교란을 목적으로 빨간색의 미발행 조선은행권(천원권)을 불법 발행하였다.

* 1952년 공보처에서 작성한 좌익에 의한 민간인 피살자 명단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 6만 명 중 전남이 약 4만 3500 명인데, 그 중 절반 가까이가 영광이며, 그 밖에 강진, 영암, 장흥이 특히 많았다.

* 빨치산(partisan 영)...프랑스어 parti(동지.당파)에서 유래된 말. 러시아어 partizan는 스페인 어 게릴라(guerrilla=유격대)와 같은 뜻으로 쓰임.

우리나라에서는 6.25 때 북으로 후퇴하는 인민군의 낙오병, 의용군으로서 북으로 넘어가지 못한 채 남아, 유격대 활동을 한 무리들.

* 이오지마(류황도=硫黃島) 성조기(星條旗)...제2차세계대전 격전지였던 이오지마에 상륙한 미군이 스리바치산 산정에 성조기를 세우는 조로전탈의 사진.(연출된 작품이란 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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