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유학생연맹(遊學生聯盟)이 조직되어 활동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러나 적치하의 동맹(同盟)이 연맹(聯盟)으로 바뀐 것 외에 무엇이 바뀌었을까? 엊그제만 해도 붉은 깃발 흔들던 그들이었는데, 이제 스스로 백로(白鷺)가 되어 까마귀 떼를 손가락질하는 꼴을 내가 차마 볼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카멜레온(chameleon)과 같은 무리들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오기(傲氣)로 가입(加入)하지 않았다.
9월 15일 맥아더(D.MacArthur) 장군 휘하(麾下)의 UN군은 인천상륙(仁川上陸) 작전에 성공하고, 곧 이어 9월 28일 국군은 서울을 수복(收復)하였다. 여세(餘勢)를 몰아, 10월 1일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돌파(突破) 하고, 계속 북진(北進)하여 압록강(鴨綠江) 초산 혜산진까지 이르렀다. 통일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신문은 연일(連日) 보도했다. 통쾌(痛快)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괴뢰군(傀儡軍) 잔당(殘黨)들과 빨치산들의 준동(蠢動) 때문에,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의 깃발이 번갈아 바뀌는 혼란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 와중(渦中)에서 무고(無辜)한 양민들이 희생당하기도 했다. 그나마 축제(祝祭)도 잠깐, 10월 25일 경 중공군이 개입(介入)하였다. 멍석말이 하듯 한 100만의 인해전술(人海戰術)로 아군을 몰아내었다. 아군은 또다시 후퇴를 거듭했다. 1950년 12월 20일, 서부전선의 미 3사단 병력이 흥남(興南) 철수작전(撤收作戰)에 성공하고, 이들을 따라 14,000여 명의 피난민(避難民)이 남쪽으로 몰려들었다. 서울은 다시 적에게 함락(陷落)되고 국군과 유엔군은 수원(水原)까지 밀려났다. 1951년 겨울 소위 1.4후퇴였다. 6개월만이다. 소집된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과 남으로 내려가는 피난민 대열이 한길을 메웠다. 매서운 추위에 6.25의 악몽(惡夢)이 또다시 되풀이된다는 말인가?
해동(解凍)이 되면서 개학이 되었다. 학교가 정상화되어 학생들은 속속 복학(復學)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안 형편으로 나는 가망(可望)이 없었다. 아버지는 1년간 휴학(休學)하라고 했다.
박쥐들은 새가 됐다가 쥐가 됐다가 저렇게 활개치고 사는데, 나는 왜 움츠린 채 날개를 펴지 못하는지, 간색(間色)인 분홍꽃들은 저렇게 만발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봉오리로 시들어야 하는지.....이런 역설(逆說)을 생각할수록 분통(憤痛)이 터졌다. 다행히 적의 춘계(春季)공세가 실패하고 아군이 대반격전을 개시, 전세(戰勢)를 회복하여 38도선을 경계로 톱질 작전을 하고 있었다.
우연히 광주로 간다는 트럭(truck)을 보았다. 애옥살이 같은 삶이 싫었다. 나는 무조건 올라탔다. 부모와의 의논은 물론 없었다. 자욱하게 덮인 관목(灌木) 숲은 벌써 봄기운이 돌기 시작해서 유난히 반짝이고, 갈잎 냄새가 배어나는 맑은 공기가 상큼했지만, 터덜거리며 산길을 오르는 트럭은 금방이라도 그 자리에 얼어붙을 것만 같은 긴장 속에서, 모두들 짐짝이 되어 엎드린 채 위험지대를 통과하였다. 드디어 광주! 옛날 고향 마을에서 함께 살던 정길(正吉)이 집을 찾아갔다. ‘만나’라는 빵집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다.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고 며칠 간 신세를 졌다. 빵집을 하고 있었는데도 쌀 한 톨 없는 꽁보리밥에, 마른 고추를 썰어 넣은 맑은 국물이 유일(唯一)한 반찬이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묻은 적군을 무찌르고, 꽃잎처럼 사라져간 전우야 잘 자라...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
공산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공산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자유의 인민들 피를 흘린다 . 동포여 일어나라 나라를 위해
손 잡고 백두산에 태극기 날리자.
목청이 고운 그 집 정길이는 ‘전우야 잘 자라’ 등 이런 노래를 잘 불렀다. 인공 시절 적기가(赤旗歌)와 김일성 장군의 노래로 더럽혀지고 막힌 내 귓속을, 이 노래가 깨끗이 씻어 뚫어 주었다. 나도 자주 불렀다. 부를 때마다 체증(滯症)이 내려간 듯 했다. 노래가 이렇듯 속이 후련한 것을 처음 느꼈다.
나는 학교를 찾아갔다. 실로 얼마 만인가? 공부하고 있는 학우들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교무실로 들어가시는 담임에게 복학(復學)하러 왔다고 했더니 뜻밖에도 따귀 한 대를 때렸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니가 어떤 놈인지 내가 알게 뭐야?”
“.........”
반년 만에 만났으니 몰라볼 수도 있겠지. 그래서 학급에 가면 학우들이 다 나를 알아볼 거라고 했다. 공부를 잘 했던 나였는데, 지금도 그 때 왜 다짜고짜 따귀를 때렸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유학생(遊學生)연맹원증을 제시(提示)하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 6.25 때 부역(附逆)했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면 참으로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그래도 한 번쯤은 물어봐야 옳지 않았을까?
반년 만에 다시 만난 친구들이 서먹서먹했다. 과연 그들은 적치하(敵治下)에서 무엇을 했을까? 나만큼 고생했던 사람도 또 있을까? 자라보고 놀란 놈 소댕 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있거니와, 그들이 솥뚜껑도 아닐 텐데 지레 이런 경계심(警戒心)이 앞섰다. 그러나 당장 공부가 문제였다. 그 동안 학습 진도(進度)가 많이 나가 눈알이 핑핑 돌았다. 염치 불구하고 학우들의 노우트(note)를 빌어다가 베꼈다. 그리고 암기(暗記)할 것은 암기하면서 입을 악물고 공부했다.
동명시장(東明市場) 앞 철길을 건너서 등하교(登下校)를 했다. 그런데 시장 한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서 호박떡을 파는데 시선(視線)이 갔다. 그 주위에는 먹음직한 순대도 있고, 김이 뭉게뭉게 맛있는 고깃국을 끓이는 데도 있었으나, 불그스레한 호박 줄기와 팥고물로 법벅된 그 떡이 임산부(姙産婦)처럼 유독 먹고 싶었다. 그러나 돈이 있으랴.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훔쳐 먹자’
아주머니가 힘도 없이 초라해 보였다. 만약 나를 쫓아온다면 도망갈 수 있는 도피로(逃避路)
를 알아두어야 했다. 구불거리는 골목길을 사전에 다 답사(踏査)해 두었다. 이제 *D-day만을 기다렸다. 사람이 가장 한산(閑散)한 시간을 정하였다. 다리가 떨렸으나 그 주위를 맴돌며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눈치를 챈 것인지 그 아주머니는 한눈을 팔지 않고, 떡 쟁반을 더욱 끌어안고 있는 듯했다. 입안의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렸을 적에, 동전 꾸러미 사건으로 인해서 아버지로부터 죽도록 맞았던 일이 생각났다. 그 때 내 것 아니면 절대로 손대지 않겠다고 결심했지 않았는가? 양심(良心)의 속삭임에 두 손을 들고, 그리고 용기 없는 나약(懦弱)함을 자인(自認)하며 결국 단념(斷念)하고 돌아섰다. 호박떡을 먹지 못한 아쉬움과 양심을 지킨 떳떳함이 교차(交叉)한 순간이었다.
며칠 후 누나도 올라왔다. 행방불명된 아들을 걱정하여 누나더러 찾아보라고 보낸 것이다. 학교로 찾아왔다. 누나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있었다. 그리고 누나도 복학하겠노라고 학교로 찾아갔다. 이제 이 어려운 집에 두 사람이나 신세질 수 없었다. 우리는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이 우리 학교 주위를 배회(徘徊)하면서 거처(居處)를 찾았다. 쓰러질 듯한 어떤 초가의 행랑방이 눈에 띄었다. 묵은 거미줄이 어지럽게 얽힌 헛간 같은 빈 방이었다. 주인 아저씨께 사정하여 다행히 그 방을 쓰기로 허락 받았다. 장판도 깔리지 않고 방구들장도 울퉁불퉁하며, 흙벽과 천장이 도배도 되지 않았다. 거미줄을 걷고 가마니를 얻어 깔고 들어갔다. 6.25 이전의 자취방을 찾아가 이불과 냄비와 양은 그릇 두 개를 찾아와서 다시 자취가 시작되었다. 당장 식량과 땔감이 걱정되었다. 황급(遑急)히 누나가 내려가서 부모를 설득하여, 식량과 돈과 도배할 신문지 그리고 소금 고춧가루 참기름 등 약간을 가져왔다.
말이 자취(自炊)지 죽지 못해 목숨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주인 아저씨도 우리를 딱하게 여겼으나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끔 출근하면서 방문을 열고는
“느그들 안 죽었냐? ”
한 적도 있었다. 미 군정 때 실시된 6.6.4 학제(學制)가 1951년도부터 6.3.3.4 학제로 바뀌면서 ,누나는 견딜 수 없어 중학 3년만을 졸업하고 낙향(落鄕)해버렸다. 이제 나 혼자 남게 되었다. 전기도 없어 석유 등잔불을 켜놓고 공부하다가 머리털을 그을린 적도 있었고, 그을음이 콧구멍에 쌓여서 세수할 적에는 굴뚝같은 콧구멍에서 검정콧물이 나오곤 했다. *광형착벽(匡衡鑿壁)이나 *형설(螢雪)의 공(功)이라 할 것은 없으나, 입을 악물고 밤을 새우다시피 공부한 결과, 2학년 성적은 아마 내 학창 생활 전체를 통하여 가장 우수했을 것이었다. 봄이 되면서 3학년에 진급했다. 보릿고개 넘는 일이 참으로 힘겨웠다. 무명 조각으로 거른 소금물에 고춧가루와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려 먹는 것이 반찬이었다. 그나마 보리밥일지라도 배가 등에 닿지 않을 정도로만 먹었다.
양식이 떨어져 이틀하고 한 끼 그러니까 일곱 끼를 내리 굶었던 적도 있었다. 학교 가려고 나오는데 눈앞이 캄캄해서 기둥을 붙잡고 한참 동안 서있기도 했다. 발이 땅에 닿는 것인지 떠있는 것인지 휘청 휘청 간신히 등교하였다. 휴식 시간에 책상에 엎드려 있으려니까 뒤에서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연수, 폐병에 걸린 거 아녀? ”
창백(蒼白)한 얼굴에 빼빼 말라있으니 그렇게 보였으리라. 항의도 변명도 하기 싫었다. 또 어느 날 체육 시간에는 웃저고리를 벗은 채 기합(氣合)을 받았다. 운동장을 돌며 구보(驅步)하는 것이다. 구멍이 숭숭 뚫린 런닝셔츠(running shirts)만을 입고 뛰다가 그만 쓰러졌다. 곁부축 받아 교실로 옮겨졌다. 이렇게 중병(重病)으로 오인(誤認) 받게 되어있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된장 속에서 꺼낸 고춧잎을 한 접시 갖다 주셨다. 한 입에 들어갈 정도였다. 그러나 도시락은 싸지 않으니까 아침저녁 두 끼 먹을 수 있게 반분(半
分)했다. 소금물만 먹다가 오랜만에 먹어보는 이 고춧잎은 그 어떤 요리보다 별식(別食)이었다. 저녁까지는 맛있는 식사를 했는데, 내일부터는 또 소금물을 먹어야 한다. 또 한 번 고춧잎을 먹을 수 없을까? 하는 수 없었다. 훔쳐 먹을 수밖에.
‘호박떡은 용기가 없어 훔치지 못 했으나 이건 꼭 성공해야지.’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 때 마침 세찬 바람이 불었다. 어둠을 타고 가만가만 장독대로 걸어갔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저려왔다. 장독대 옆에는 닭장이 있었다. 뚜껑을 막 여는데 닭들이 술렁거리며 기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수전증(手戰症) 환자 같이 떨리던 손을 하마터면 놓을 뻔했다. 그렇다면 뚜껑은 깨지고 일이 크게 벌어졌을 텐데...드디어 된장 속에서 고춧잎을 한 줌 꺼내는데 성공했다. 무사히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성공했다는 쾌감(快感)도 잠시, 가뭄에 오그라지는 고추잎처럼 가슴이 죄어왔다.
‘아주머니가 창구멍을 통해서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꺼낸 흔적이 나타나지는 않을까?’
‘내가 내 귀를 막고 방울 도둑질한 게 아닐까?’
이런 불안으로 잠을 이루지 못 했다. 문득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 프)의 쟌발쟌 생각이 났다. 빵 한 조각 훔친 일로 19년간의 긴 옥살이를 한 기구(崎嶇)한 운명! 나도 그런 게 아닐까 하는 불길(不吉)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호박떡 사건은 미수(未遂)에 그쳤지만 고춧잎 사건은 절도 기수범(旣遂犯)이다. 이 사건은 지워지지 않은 얼룩으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사흘 굶으면 담 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속담(俗談)이 이래서 나왔으리라. 서럽고 서러워도 배고픈 설움 외에 또 있을까? 배부른 사자 앞에서는 노루도 뛰어 논다 했는데, 기본적인 식욕(食慾)만 해결된다면 아무런 다른 욕구는 없을 것 같았다.
그 후로도 김치 먹고 싶은 생각은 여전했다. 하교(下校) 길에 남의 고추밭에 열린 풋고추를 한 두개 씩 따온 적도 있다. 그걸 썰어서 소금물에 넣어먹는 맛은 역시 별미(別味)였다.
어느 날은 하교 길에 클로우버(clover)를 한 가방 뜯어 가지고 왔다. 다듬을 필요도 없이 깨끗했다. 소금에 절여서 반찬을 하려는 것이다. 토끼도 먹는 그 연하고 부드러운 것을 사람이 못 먹을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절이려고 하니 의심이 났다. 몇 천 년 인류의 식생활(食生活)을 통해서 클로우버를 먹지 않을 때는 독성(毒性)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쓰디쓴 익모초도 약용으로 쓰이고, 억센 무우청도 식용으로 쓰이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 백과사전(百科事典)을 들추었다. 그러나 독성 여부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었다. 하는 수 없다. 버리자! 미련 없이 다 버렸다. 가을걷이가 끝나 들판이 휘휘했다. 그 해 가을은 배추 무우조차 흉년이었다. 시래기라도 주워볼까 어둠을 타고 밭두렁을 누볐으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더니, 빗자루로 쓸어간 듯이 어쩌면 그렇게 한 이파리도 남기지 않았을까? 김치! 김치! 이것은 하나의 절규(絶叫)였다.
* D-day..... 1944. 6. 6 제2차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개시일
* 광형착벽(匡衡鑿壁)...한 나라 광형이 이웃집 벽을 뚫고 그 불빛으로 독서한 고사에서 옴.
* 형설(螢雪)의 공(功)...진 나라 차윤(車胤)이 반딧불 빛으로 책을 읽고, 손강(孫康)이 눈빛으 로 글을 읽 었다는 고사에서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