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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학창시절

by 최연수

1953년. 나는 고2로 진급했다. 교련(敎鍊) 시간이 더욱 강화(强化)되었다. 우리 학교에 파견된 두 분 배속장교(配屬將校)는 지도력이 뛰어나고 인성(人性)이 후덕(厚德)해서 인기가 높았다. 고된 훈련을 시켜도 별로 불평 없이 순종했다. 6월이 되면서 더위가 시작되어 지열(地熱)로 숨이 턱턱 막히었다. 목총을 들고 학교 뒷산을 포복(匍腹)하면서 오르고, 모의 수류탄(手榴彈)을 던지는 훈련까지 했으니, 논산에서 하는 신병(新兵) 훈련과 맞먹을 정도였다. 교내에서 혹은 학교 끼리의 경연(競演)도 있었는데, 나는 지원(志願)해서 참가했다. 강인(强靭)한 의지와 인내력을 기르고자 했기 때문에.

6월 8일. 휴전회담에서 포로 교환 협정이 체결되었다. 송환을 앞둔 포로들에게는 얼마나 기쁜 소식이랴. 그러나 거제도에 수용되어 있는 인민군은 달랐다. 친공(親共) 반공(反共)으로 나뉘어 자주 난동을 피우곤 했는데, 1953년 6월 10일에는 수용소장 도드 준장을 인질로 납치 감금하고, 미군 16명과 반공포로 106명을 살해했다. 이북 송환을 거부하는 이른바 반공포로들은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리하여 6월 13일, 이승만 대통령은 25,000여 명의 반공포로들을 석방시켜 버렸다. 따라서 휴전회담은 교착상태(交着狀態)에 빠진 것이다. 북진통일(北進統一)만을 고집해온 정부로서는 쾌거(快擧)가 아닐 수 없었으나, 국제 여론은 비난(非難)으로 들끓었다.

“휴전 반대! 북진 통일!”

“협상 반대! 멸공 통일”

교련을 하다말고 우리들은 시내로 향하였다. 웃통을 벗은 채 스크럼(scrum)을 짜고 시내로

향하였다. 충장로로 금남로로, 목이 쉬도록 외치는 구호가 하늘을 찔렀다. 온 몸에서 땀이 비오듯 했다. 이 학교 저 학교가 쏟아져 나와 시내는 온통 성난 파도에 휩쓸렸다. 물론 관제(官製)데모였으나 국민적 공감대(共感帶)가 형성되어 있었다.

6월 25일. 북괴의 불법남침 3주년을 맞이한 이 날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반공포로를 석방시키고 휴전을 반대하는 우리 정부와, 적극 휴전을 추진하는 UN군의 입장이 첨예(尖銳)하게 대립되었기 때문이다. 6.25를 상기하자는 기념사(記念辭)와 구호가 충천(沖天)했다. 기념식이 끝나고 ‘6.25의 노래’를 힘차게 부르면서, 가두시위(街頭示威)에 들어갔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3년 1개월 동안 하늘을 진동(震動)시켰던 포성(砲聲)이 멎었다. 유엔군과 인민군.중공군 사이에 줄다리기 했던 휴전협정이 조인(調印)된 것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 체결과 장기경제원조에 대한 보증 등을 조건으로 가까스로 협정이 성립되었다. 휴전이 되어 사회는 안정이 되었지만, 역사적 상처는 상상을 초월했다.

국군 전사 147,000여 명, 부상 709,000여 명, 실종 131,000여 명 합 98만 7천 여명이었다. 민간인은 피학살자 123,936 명, 사망자 244,663 명, 부상자 229,625 명, 피납자 84,532 명, 행방불명 330,312 명, 인민군으로의 강제 징집자 40만 여명, 경찰관 손실 16,816 명 모두 1백여만 명, 고아 60여만 명이다. 물적 손실도 천문학적 숫자이다. 사전에도 없는 시산(屍山) 혈하(血河)라는 신조어(新造語)가 또 다시 신문에 등장하지 않아야 할 텐데...이런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텐데.....태극기 휘날리는 6.25 기념식이 해마다 퇴색(退色)해가고, 한반도기가 나부끼는 *6.15 행사만 요란해가는 걸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아리다.


<창작우화> 노 루 형 제

최연수 장로

꽃동산에 노루 형제가 살고 있습니다. 형님 노루는 陸이오이고, 아우 노루는 陸일오입니다. 형제라고는 하지만 19살 터울이라 부자 사이와 같습니다. 실제로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형 이오는 아우 일오를 아들처럼 귀엽게 키웠고, 아우도 형님을 아버지처럼 받들며 의좋게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오 형님은 심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습니다. 아우의 생일 잔치에 다녀온 후부터 웃음을 잃었습니다. 그 날 선물을 마련하여 아우네 집에 갔는데, 사슴이랑 고라니, 산토끼, 다람쥐 등 여러 친구들도 모여서 생일을 축하해 주고 있었습니다. 형은 의젓하게 어른이 된 아우가 대견하게 보였고, 친구들을 고맙게 여겼습니다. 밤이 깊어지면서 거나하게 취한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었습니다. 한데 어울리지 못한 형은 못내 아쉬웠습니다. 이쯤 되면 얼른 일어나서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데, 눈치 없이 머뭇거리다가 그만 때를 놓쳤습니다.

산 짐승이라면 형제나 다름없는데 이리들과도 사이좋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로 꽃을 피우더니, 입에 거품을 물면서 이리를 칭찬하는 놈이 있는가 하면, 혀 꼬부라진 소리로‘이리여 뭉쳐라’라는 노래를 부르는 놈도 있었습니다. 순간 이오 형의 몸에서는 빨간 두드러기가 돋기 시작했습니다.

“형님, 이게 뭡니까? 또 두드러기가 났잖아요?”

“...............”

일오 아우의 짜증 섞인 말에 형은 말을 잃었습니다. 봄에 진달래가 피거나 가을에 단풍이 들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두드러기입니다. 이 날은 붉은 포도주를 마신 것도 아니고, 빨간 사과를 먹은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형님, 세상이 변했잖습니까?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됐지 않았습니까?(창19:26)”

아우가 형을 힐끔 쳐다보며 넌지시 말을 건네자,

“손에 쟁기를 붙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9:62)고 성경에 씌어 있다는데요?”

하고 친구들도 맞장구를 치며, 친구의 형님이 딱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습니다.

“난 가보겠다.”

형은 그야말로 쫓기다시피 뒤를 돌아다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하여 집에 돌아왔습니다. 혼자 누웠으려니까 두드러기가 가려워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이날따라 박쥐 떼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날아다녔습니다. 박쥐! 새인지 쥐인지, 그나마 어둔 밤에만 날아다니는 박쥐를 이오는 몹시 싫어했습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스르르 잠이 드는가 했는데, 이오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습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이리님...”

“요놈 새끼, 넌 오늘 내 밤참이야!”

오들오들 떠는 이오의 몸은 식은땀으로 흠씬 젖었습니다.

“ 으흐흐흐”

새빨갛게 충혈된 이리의 매서운 그 눈, 비수와 같이 번뜩이는 그 날카로운 송곳니, 그 사이로 흘러내리는 검붉은 피...이오는 아버지 노루의 목덜미를 물던 그 옛날 이리의 모습이 떠올라 부르르 떨었습니다.

아, 꿈이었습니다. 꿈이 아니었다면 그만 까무러칠 뻔 했습니다. 이오는 이따금 이런 악몽을 꾸곤 했습니다. 그 때마다 이오는 두드러기가 돋고 몹시 가려웠습니다. 산양 의사는 알레르기성 홍반점이라는 피부병이라고 하였습니다. 아토피성 피부염처럼 좀처럼 낫지 않는 고질병입니다.

* *

며칠 후 형님 이오의 생일이 되었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아우가 찾아올 것입니다. 목마른 사슴처럼 아우 일오를 기다리느라고 목이 더 길어졌습니다. 그러나 땅거미가 내리는데도 아우는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혹시 오다가 늑대나 이리를 만나지나 않았을까 걱정이 태산 같은데, 비둘기 우체부가 편지 한 통을 떨어뜨리고 날아갔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봉투를 뜯는 이오 형의 손이 가냘프게 떨렸습니다.

‘아, 네가 이럴 줄이야...’

힘없이 편지를 땅에 떨어뜨린 이오 형님의 눈에서는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소쩍 소쩍”

어디선가 소쩍새 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왔습니다. 잔치집이 한결 쓸쓸합니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좇아가노라’(빌3:13)

앞머리 뒤꼬리 말 다 잘라버리고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마5:39, 5:44)

밑줄까지 그어 이렇게도 씌어 있었습니다.

“휴우”

이오 형은 땅이 꺼지도록 긴 한숨을 쉬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리에게 물려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신 후, 허리띠 졸라매며 허리가 휘어지도록 일해서 기르고 가르친 아우가, 이제 어른이 되니까 늙어가는 형님을 우습게 여기는 것 같아 여간 섭섭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힘없고 형이 못나서 이리들에게 짓밟혔지, 내가 이만큼 배우고 힘이 있는데, 감히 이리들이 싸움을 걸어오겠습니까? 서로 화해하고 형제가 되면 꽃동산이 평화의 동산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우는 가끔 장난끼 섞인 말투로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저 철없는 아이들의 어리광으로 받아들였는데, 이 말이 그의 깊은 속마음이었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래, 곱게 보자. 네 말대로 앞만 바라보자. 네가 설마 이 형을 배신이야 하겠느냐? 내 생일 잔치라야 쓴 나물에 누룩 없는 빵 뿐인데, 그 걸 먹겠다고 네가 오겠느냐?’

스스로 위로를 하면서 잊으려고 눈을 지그시 감았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또렷해진 것은 지난날입니다. 느닷없이 꽃동산에 들이닥친 이리떼들이 짓밟고, 할퀴고, 물어뜯던 그 일을 어찌 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커엉 커엉...”

멀리서 이리 짖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를 가는 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등골이 오싹하며 소름이 끼쳤습니다. 성경을 펴들었습니다.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 하였고,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행20:29)라고 씌어있지 않은가? 양의 탈을 쓴 이리를 몰라보고 양으로 착각하는 아우 일오가 생각할수록 가엾고 걱정스러워 펜을 들었습니다.

“아우 일오야, 네가 그 때 일을 겪지 않았다고 그럴 수 있느냐? 아버지가 그 일로 일찍 돌아가셨고, ‘陸씨 문중에 이리와 사귀는 놈은 陸씨 족보에서 이름을 파버리겠다’고 한 아버지의 유언을 잊었느냐? 이 형이 두고두고 이리의 잔꾀에 속지 말라고 일렀는데...이스라엘은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과, 자유를 찾아 출애굽했던 역사를 자자손손 대대로 영원히 기억하라고 했단다. 용서하되 어찌 잊을 수가 있단 말이냐? 탈을 썼다고 이리가 노루가 되겠느냐? 이리는 이리지 양도 노루도 사슴도 아니다. 이리가 풀을 먹는단 말이냐? 어림도 없는 수작이다. 네가 오지 않았다고 섭섭해서가 아니라, 이리를 몰라보는 네가 너무 답답해서 몇 자 적었다.”

다 쓴 편지를 봉투에 넣고 나니 놀랍게도 두드러기가 들어가고, 오히려 온 몸에 어떤 힘이

솟구쳤습니다. 때마침 달빛에 이오 형의 두 눈은 별처럼 빛났습니다. 진달래가 피고 단풍이 들면 두드러기가 돋아나는 연약한 노루가 아니라, 불꽃이 타고 번개가 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노루로 거듭 태어날 것이라고 두 손을 굳게 모으며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사랑하는 아우 일오를 이리 굴에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 교회‘물댄동산 04.7.25 여름호에 게제’)


* 6.15...2000.6.15 화해와 협력의 남북공동성명서 발표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국방위원장)

* *

지금도 국립현충원(國立顯忠院)을 산책(散策)하곤 한다. 순국(殉國) 선열(先烈)과 전몰장병(戰歿將兵)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은은한 진혼곡(鎭魂曲)과 함께 추념시(追念詩)가 낭송(朗誦)되고 있다. 6월 6일 현충일(顯忠日)이 되면 반짝 참배객(參拜客)들로 붐비지만, 흐르는 세월과 함께 발걸음들이 점점 뜸해지고 정적이 흐른다. 비석을 안고 오열(嗚咽)하던 백발의 할머니들은, 가슴에 아들을 묻은 채 자기도 이제는 땅에 묻혔을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10년간,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正統性)을 부인하고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 체제에 도전하는 좌익(左翼) 세력들이 고개를 들면서, 인천상륙(上陸作戰)의 영웅 맥아더(MacArthur)장군을 민족해방전쟁의 역적(逆賊)이라면서, 그의 동상(銅像)을 철거(撤去)하기 위해 몰려가 돌멩이를 던지고, 전북 순창에서는 중학생들을 인솔하여 빨치산(partizan 러) 아지트(agitation point)를 성지(聖地)인양 찾아가 추모제(追慕祭)를 지내는 등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제 이 국립현충원을 불도우저(bulldozer)로 말끔히 밀어버리자,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를 달자는 주장도 나오겠구나. 아! 이 비탄(悲嘆)을 금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양복 저고리에 태극기 배지(badge)를 달고 다닌다. 누가 왜 다느냐고 하면

“난 냉전(冷戰 )수구(守舊) 꼴통이니까.....”

하고 떳떳하게 대답하곤 한다.

관악산 기슭의 공작봉을 주봉(主峰)으로 하여 동작(銅雀)의 능선(稜線)이 병풍처럼 3면을 감싸고, 앞에는 한강이 굽이쳐 돌고 있는 이곳 43만평이 국립현충원이다. 휴전이 된 이듬해 1954년 육군 공병대에 의해서 착공했다가 1957년에 완공된 것이다. 처음에는 국군묘지(國軍墓地)라 했는데, 대통령과 임시정부 요인, 애국지사, 국가 유공자들의 묘가 들어서면서 국립묘지(國立墓地)로, 현재는 국립현충원(國立顯忠院)이라 이른다. 우리가 흑석동과 반포에서 반세기(半世紀) 가까이 살다보니까, 그 사이에 낀 이곳과 인연(因緣)이 깊을 수밖에 없다.

1960년 흑석동으로 이사 오면서, 이곳은 나의 삶의 터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가 오고 눈이 와도 거르지 않던 산책(散策)길이요, 책을 끼고 올라와 고시 공부 했던 독서실(讀書室)이기도 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울 때 막내 동생과 함께 땔감으로 삭정이를 꺾었던 곳이요, 변소를 채우지 않기 위해서 용변(用便)을 했던 화장실(화장사의 변소)이기도 하다. 처 할아버지를 만나 전도(傳道) 받았던 곳이요, 사색(思索)과 명상(瞑想)과 기도(祈禱)하던 곳이다. 들꽃과 더불어 웃음을 주고받고, 산새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떠오르는 시상(詩想)을 다듬던 곳이기도 하다. 건수 동생의 방위병(防衛兵) 근무지(勤務地)요, 맞선을 보던 나의 아베크(Avec 프) 장소요, 우리 집 방문객(訪問客)들을 안내하던 관광지(觀光地)이기도 하다. 1979년 반포로 이사 와서도, 건강을 위한 체력 단련장이요, 가족들의 피크닉(picnic) 장소이기도 하며, 정수기(淨水器)를 들여놓기 전 호국지장사(옛 화장사)에서 물을 길러오던 약수(藥水)터요, 교회 남선교회 모임의 산행(山行) 코오스(course)이기도 하다.

한편, 은로와 명수대(흑석) 학교 근무 14년 간, 현충일이 되면 어린이들을 인솔(引率)하여 참

배(參拜)와 헌화(獻花)를 통해서 반공교육하던 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그 밖에 사소한 일까지 들면 끝이 없다.

그런데 성(城)을 드나들거나 성 따라 산책할 때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기본적인 시설과 조경(造景)은 되어 있었으나 60년대 초까지도 성벽(城壁)을 쌓는 일은 계속되고 있었다. 검붉게 탄 윗도리와 비 오듯 흘러내린 비지땀! 지금은 블록(block)벽돌로 쌓았지만 초창기에는 돌담이었다. 육중(肉重)한 돌덩이를 산등성이까지 끌어올리고, 이를 어긋맞추며 쌓아올리던 공병대(工兵隊)들의 노고(勞苦)를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 그들도 지금쯤 7순은 넘었을 텐데, 지긋지긋했던 옛 추억을 잊기 위해 얼씬하지도 않은지, 아니면 옛 젊음과 건강이 그리워 가끔 찾아오는지....어찌 되었건 6.25를 상기(想起)하는 역사의 장(場)이요, 충혼(忠魂)이 깃든 성역(聖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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