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6.6.4 가 6.3.3.4로 학제(學制)가 바뀌었다. 다시 말하면 6년제 중학 과정이 중학 3년, 고등 3년으로 바뀐 것이다. 각 학교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分離) 개편(改編)되었고, 우리 학교도 광주사범학교와 병설(倂設)중학교로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다른 고등학교로 갈 수 있었다. 우리들 병중(倂中) 3년 졸업반은 진로를 위해서 암중모색(暗中摸索)을 하고 있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범학교 입학할 당시야 교사가 되기 위함이었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교사로 일생을 마친다는 것은 탐탁하지 않았다. 공부를 잘 하는 우등생(優等生)들은 전남의 명문인 인문계 광주고등학교로 가겠다고들 했다. 물론 나도 그러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대학교에도 가고 싶었다. 그러나 가정 환경은 그렇지 못 했다.
“너도 배웠응께, 너도 가르쳐야 잖냐? 그렇구럼 공부하고 잪으면 취직하고 독학 하거라.”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아서 그대로 사범학교에 진학하였다. 소위 공부를 한다는 학우들은 광주고등학교로 가버린 채, 남아있는 학생들은 열등생(劣等生)인 낙오자(落伍者)들만 같아서 자존심(自尊心)의 상처가 심히 컸다. 게다가 타교에서 새로 입학해온 학우들이랑 새롭게 교제해야 하는 일도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별로 공부하고 싶지 않았다. 학창 생활 통틀어 가장 학업성적이 저조(低調)했다. 그러나 본교 선생님들만은 우리들을 더 이해해주고 아껴준 것이 참 다행이었다. 특히 국어과를 담당했던 서종(曙鐘) 정덕채(鄭德采) 선생님은 키가 워낙 작고 외모(外貌)도 잘 생긴 편이 못 되어 학우들이 ‘꽁초보이’ 라는 별명으로 업신여겼으나, 성실하게 잘 가르쳐주신 데다가 정이 많아서 나를 퍽 사랑했고 나도 그 분을 존경했다. 특히 내가 국어과를 잘 했고, 문학에 취미가 있어서였는데, 정선생님도 문학을 좋아하고 독서를 많이 하여 서로 통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 관사(官舍)에서 사셨는데, 선생님 댁을 방문해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며, 천장에 닿을 정도로 서가(書架)에 꽂힌 많은 책들이 참 부러웠다. 2학년 때의 담임은 사범대학을 갓 졸업한 오병문(吳炳文=김영삼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선생님인데 심리학(心理學)을 가르쳤다. 결혼을 하게 되어 축하기념품을 해 드리는 문제로 학급회의가 열렸는데, ‘요강’을 해주자고 가결을 해버려서 옥신각신했다. 물론 장난꾸러기들의 방해공작이었으며, 결국 통근(通勤) 자전거를 사드리기로 번복(飜覆)했지만 해프닝(happening)이었다. 그런데 오선생님은 교과서 그대로를 가르치고, 그 내용을 그대로 판서(板書)해서 필기하도록 했다.
“선생님, 교과서 말고 다른 걸 가르쳐 주십시요. 교과서 내용은 읽으면 아는 것인데, 그걸 설명하고, 또 필기하고...시간 낭비 같습니다.”
이 건방지고 당돌(唐突)한 나의 건의에도 선생님은 불쾌(不快)한 표정 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너그럽게 수긍(首肯)하였다.
“알았어, 너 같은 사람이라야 돼. 이제부터 교과서는 치우고 내 강의안대로 할 테니까 불평하면 안 돼!”
아닌게아니라 한결 내용이 풍부하고 수준이 높아졌다. 심리학이 참 재미있는 학문이었다. 교과서를 그대로 공부한다는 것은 솔직히 싱거웠으며, 무엇인가 더 알고 싶은 것이 내 심정이었는데, 학우들 가운데는 긁어 부스럼 냈다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잘난척한다고 비꼬는 학우도 있었다. 그러나 오선생님의 훌륭함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았다.
교육학을 가르친 송규만(宋圭萬) 선생은 시골 농부 같이 털털하고, 말씀도 어눌해서 별로 인기가 없었으나, 소박한 성품이 좋았고 교육학이 재미있어서 선생님을 좋아했다. 그런데 술을 많이 마신 게 흠인데, 어느 날 전교생이 무등산(無等山) 증심사(證心寺) 행군(行軍)을 갔을 때 만취(滿醉)되어 학생들이 부축하여 내려왔다. 이 추태(醜態)를 보다 못한 이창업(李昌業)교장이 오죽했으면 죽지 않은 총으로 쏘아버렸으면 좋겠다고 했을까? 매점클럽을 담당하여 우리를 다정하게 감싸주시고 자상하게 지도해 주셨다.
교육방법과 학습지도를 가르친 김식중(金湜中)선생, 교육과정을 가르친 장병창(蔣炳昌) 부속교 교감, 논리학을 가르친 김한걸(金漢傑)선생은 그 분의 인품 때문이라기보다는 담당 교과가 좋아서 그 시간을 기다렸다. 서양사를 가르친 은용기(殷容基)선생은 중학교 때만 해도 칼날 같이 날카롭고 무서운 선생으로 모두들 그 앞에서는 벌벌 떨었는데, 자매학교인 미국 피바디사범대학 교육시찰단이 다녀가고, 선생님도 교육시찰단원으로 미국에 다녀온 후 180도로 바뀌었다. 온화하고 학생들을 잘 이해해주었으며, 유우머(humour)를 섞어가면서 서양사(西洋史) 강의를 해주어 참으로 재미있었다. 방학이면 정덕채, 오병문, 은용기, 송규만 선생님께 문안(問安) 편지를 올렸는데, 친절하게 답장까지 해주시고 격려(激勵)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그밖에 기하를 가르친 김웅배(金雄培)선생, 물리화학을 가르친 윤홍섭(尹洪燮)선생 등 땀을 흘려가며 참으로 열심히 가르쳤다. 그러나 그런 이수과(理數科) 보다는 인문사회(人文 社會)과학 분야가 좋았다. 수학 과학 등은 시험을 위해서 공부했으나 다른 교과는 교과 자체가 재미있어 관심이 많았으며, 이 때부터 정규 교과가 아닌 윤리학.사회학.정치학.경제학 그리고 법학 심지어 철학 등에 관심이 커졌다. ××학개론, ××학원론, ××학입문 등이라면 닥치는 대로 구해서 읽어보려고 마음먹었다. 내용을 이해해서라기보다는 그저 관심 때문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한자(漢字)를 많이 알고 있었다. 학우들은 시골에서 자랐으니까 서당(書堂)에 다녔으리라고들 했다. 그러나 서당에 가 본적도 없었으며, 누구에게 한자를 배워본 일도 없다. 다만 중학생 때부터 신문을 가까이 했다는 것과, 정치 운동을 하였던 아버지로부터 듣던 것이 많았던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수업 시간에 자기 담당 교과 외 딴 책을 보면 호되게 야단을 쳤는데, 나에게는 야단을 치지 않고 눈감아주었고, 몇몇 선생님은 시시한 학교 공부보다는 그런 공부를 많이 하라고 격려를 해주기도 하였다. 그래도 시험을 잘 보고 교과 성적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문 이야기가 났으니까 말이지 나는 참으로 신문광(新聞狂)이었다. 아버지께서 지방지인 ‘東光신문’으로부터 시작해서 중앙지인 ‘평화신문’ ‘동아일보’ 지국을 오래 하셔서 신문은 내 손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과장(誇張)을 좀 하자면 광고까지 빼놓지 않고 다 읽었다. 요즘은 조선일보를 구독(購讀)하고 있지만, 특히 선대(先代)부터 우리는 ‘동아일보’의 오랜 애독자(愛讀者)였다. 1975년 동아일보가 정부의 광고 탄압을 받고 있을 때, 상수 동생은 2월 19일자 광고란에 “東亞를 사랑하셨던 아버님을 추모하며, 불굴의 의지를 배울 대석.대진을 위하여. <祥과 喜>”라는 광고까지 내었다. 사설(社說)은 물론 법률관계를 비롯한 중요한 기사를 빠짐없이 스크랩(scrap)을 하면서 읽고 또 읽어야 속이 후련했다. 90년대 이후부터 아쉽게 조선일보로 바꾸었는데, 단순히 너무 잦은 배달 사고 때문이었다. 소위 진보적인 아니 좌경(左傾)적인 김대중 정권 특히 노무현 정권 이후 노골적인 조선일보 탄압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이 신문이 더 좋아졌다. 일찍이 신문을 좋아해서 한자를 많이 익히게 되고, 게다가 일기광(日記狂)이 되어서 옥편(玉篇)을 곁에 둔 채 한자(漢字)로 일기를 쓰다보니까 웬만한 한자는 다 알게 되고, 웬만한 책은 다 읽게 되었다. 이것이 일생동안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