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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友情)의 농도(濃度)

학창시절

by 최연수

부모 팔아 친구 산다는 말이 있다.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 사이의 사귐을 *관포지교(管鮑之交)라 하고,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정은 *다윗과 요나단을 손꼽는데, 이렇게 희노애락(喜怒哀樂)을 같이 하는 친구, 생사를 같이 하는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

원수도 없지만 나에게는 그런 친구가 없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몸도 약한데다가 성격도 여려서 등치 큰 아이들과 힘센 아이들에게 맞거나 따돌림 받은데다가, 중학 시절부터 타향에서 살았으니 죽마고우(竹馬故友)와의 관계도 단절(斷絶)되었다. 그나마 중학 시절에도 6.25를 겪으면서 부역(附逆)했던 집 아이들하고는 아예 상대하기도 싫어서 친구가 없다. 곧 고등학교로 분리 헤어지면서 조금 사귀었던 친구들과도 소원(疎遠)해졌다. 고등학교 때는 본교 병중(倂中) 출신과 타교(他校) 출신들의 갈등(葛藤)과 대립이, 학교 주도권(主導權)을 쟁탈(爭奪)하기 위한 암투(暗鬪)로 발전하더니, 이 곳 저 곳에서 난투극(亂鬪劇)까지 벌어지곤 했는데, 나는 원래 이런 싸움판이 싫어 그런 패거리에 끼이지도 않았다.

어깨를 치켜 올리고 주먹을 불끈 쥔 채 몰려다니는 패거리를 ‘어깨’ 또는 ‘까다=かた’라고 했는데, 완력(腕力)으로 남을 제압(制壓)하거나 다른 패를 굴복(屈服)시켜 자기 세력을 확장(擴張)하여, 학도호국단의 연대, 대대, 중대 등 간부(幹部)를 독점하려는 그들을 가장 혐오(嫌惡)했다. 훈련(訓練)이라는 명목, 기율(紀律)이라는 명분으로 하급생들에게 체벌(體罰)로 기합 주며, 심지어는 동급생(同級生)들에게까지 빵 값을 뜯어낸다거나 술을 사내라 하는 무례(無禮)한 행동을 해 몹시 싫어했다. 내가 그들 패거리에 맞거나 빼앗기거나 한 일은 없었으나, 시험 때면 커닝페이퍼(cunning paper)를 만들어 달라거나 해답을 가르쳐달라고 으름장을 놓는 일은 가끔 있었다. 약삭빠른 학우들은 이들에게 타협하고 알랑거렸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과 상종(相從)할만한 천성(天性)을 타고 나지 않았다.

싱겁게 남을 건드려 약올리고 집적거리며 귀찮게 치근덕거리는 ‘건달’ 또한 몹시 싫어했다. 공부는 않고 놀러 다니기 좋아하며, 술, 담배, 놀음을 즐기고 계집애들 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니는 껄렁패들을 또한 몹시 싫어했다. 그런가 하면 두뇌가 좋아 공부도 잘 하며 똑똑하기는 하나 지나치게 ~척 거만하게 남을 깔보는 사람, 넉넉하여 돈을 잘 쓰면서 가난한 사람을 얕보는 사람, 거짓말 잘 하고 허풍 잘 떠는 사람 싫어했다.

헛간과 같은 오막살이 행랑방에서, 굶다시피 자취하는 초라한 나의 모습을 드러내놓고 싶지 않은 자존심(自尊心) 때문에 아무도 찾아오는 걸 싫어했으며, 누구와 깊게 사귀어 서로 오가는 일이 달갑지 않았다. 자, 그러니 누구를 친구로 삼는다는 말인가? 절해고도(絶海孤島)에서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처럼 혼자 살거나,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홀로 수양하는 수도승(修道僧)처럼 살아야 마땅한 사람이지.

2학년 때 K라는 학우와 함께 10개월 정도 자취를 한 적이 있다. 그가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해서 승락을 했다. 그는 성격도 온화하고 성실했으며 생활수준도 비슷해서 좋았다. 코피를 자주 흘렸는데, 모기가 물면 피 한 방울이 얼마나 귀한 줄 아느냐며 몹시 못마땅해 할 정도로 깔끔하고 자상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목욕탕에 가고 없었는데, 괴나리 보따리를 등에 진 웬 할아버지 한 분이 찾아왔다. 자기 사위가 어디 갔느냐는 것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잘 못 찾아왔노라고 했으나 틀림이 없었다. 그 분은 건어물(乾魚物)이랑 젓갈이랑 식량을 가져왔다. 이렇게 장인 사위가 참 어색하게 만난 후 곧 헤어졌다.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나 같으면 사실 이야기를 할 법한데....내가 무시당한 듯해서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한 방에서 한 솥 밥을 먹고 있는 친구라면, 지난 방학 때 결혼을 했노라고 고백하고, 나에게 알려주지 못 해서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는 했어야 하는데 그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그럴만한 사연(事緣)이야 있었겠지만 배신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친구라면 그럴 수 있을까? 그 후 나는 그와의 사이에 보이지 않은 벽(壁)을 느끼면서 멀리 했다. 그리고 헤어졌다.

J. 이미 고인(故人)이 된 그의 이야기를 쓰려니까 마음 내키지 않는다. 내가 가장 가깝게 사귀었던 친구이다. 해남(海南)이 고향이면서 목포중(木浦中) 출신인데도 얼른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성격도 생각도 뜻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뇌가 명석(明晳)하고 언변(言辯)도 좋으며 열심히 공부하는 학구파(學究派)였다. 다만 그는 사범대학에 진학하겠다며 영어 공부를 많이 했으며, 나는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독학으로 입지(立志)를 하겠다는 차이는 있었다. 그는 몸에 털이 많은데다가 살이 물러, 나는 그가 두부에 털이 났다고 ‘두부털’이라 별명을 붙여주었고, 그는 내가 여자 같다 해서 ‘miss최’라고 불렀다. 고둥고시를 응시하자고 묵계(黙契)를 하던 터이다. 졸업을 하고, 그는 서울대 사범대학에 진학했으며, 나는 직장에 나와서 독학을 했다. 디딘 발걸음은 달랐으나 고등고시라는 목표는 똑같아서 졸업 후에도 자주 만났으며, 시험 때는 우리 집에서 묵으면서 함께 시험을 보기도 했다. 그는 행정과에 합격하자마자 총경(總警)이 된 행운아(幸運兒)였는데, 나는 노상 낙방을 거듭한 불운아(不運兒)였다.

그런데 합격한 후 그는 열차(列車) 안에서 만난 홍성국민학교 양호(養護)교사 H와 열애(熱愛)를 하였다. 연애야 자유지만 문제가 생겼다. 알고 보니까 그는 이미 처가 있는 기혼자(旣婚者)가 아닌가? 고2 때 결혼을 했는데 지금까지 숨겨 왔노라 하면서 양해를 구했다. 가정 사정에 의해서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시골 여자와 결혼식은 했으나, 정이 없어 지금까지 독신(獨身)처럼 살아왔는데, 총경이 되었으니 그 촌뜨기 여자와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좋겠느냐 하면서 의견을 물었다. 나는 당황(唐慌)했다. 이 무렵 내가 사직(辭職)을 하고 굶으면서 공부하던 때이라 사치(奢侈)스러운 고민(苦悶)이라고 일축(一蹴)했으나, 그는 일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라면서,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너기 위해서 줄달음치고 있었다. 그가 입대한 후 우리 집을 오작교(烏鵲橋) 삼아 두 사람은 자주 만나고, 만날수록 사랑은 뜨거워져서 마침내 본처와는 합의(合意) 이혼(離婚)을 한 후 곧 재혼하였다. 그는 우리 동기 동창 가운데 가장 성공한 경찰계(警察界)의 엘리트(elite)로 출세가도(出世街道)를 질주(疾走)했는데, 아깝게도 50고개를 넘다가 그만 타계(他界)했다. 아무리 절친(切親)한 친구라도 말 못할 비밀(秘密)은 있으며, 그 일을 계기로 소외감(疎外感)을 느낀 나는 옛날의 순수(純粹)했던 우정(友情)이 되살아나지 않았다.

S. 이 친구도 60고개를 쳐다보면서 아깝게 타계(他界)했다. 그는 함평(咸平)이 고향인 타교 출신으로 고1 때 만났는데, 모든 면에서 나와 유사(類似)한 점이 많고 참으로 믿을만한 친구였다. 문학을 좋아해서 서로 가까웠으며, 학교 신문 ‘횃불’을 발간하면서 함께 일하였다. 그는 특히 서예(書藝)를 좋아해서 날마다 그의 손에서 붓이 떠나지 않았으며, 묵향(墨香)이 몸에 배어있었다. 누추(陋醜)한 나의 자취방에도 자주 찾아왔는데, 가장 멋있는 응접실(應接室)로 모시겠다며 뒷동산 언덕으로 데리고 나가 문학이며, 철학이며, 예술이며....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그 당시 서예전(書藝展)을 계기로 입상했던 연상(年上)의 오혜령(吳惠玲=극작가)을 사랑하며 고민을 했다. 내가 보기에는 짝사랑 같았는데 졸업 후 어떻게 발전했는지.

그는 국전(國展)에서 독특한 한글 서체(書體)로 최초의 서예 부문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후 首都女師大(현 世宗大)로 갔는데 유명 인사가 되고 보니까 자연적으로 만나기가 힘들고, 따라서 자연적으로 단교(斷交)가 되어버렸다.

김기선(金沂琁). 그는 강진(康津) 출신으로 나와 동향(同鄕)이다. 그리고 같은 光州師範倂設中 출신이라 6년간의 지우(知友)다. 키가 작고 통통해서 갑순은 그를 ‘땅개’라 불렀고, 나는 점잖게 ‘지구(地狗)’라 불렀다. 그는 호인(好人)으로 화를 내거나 신경질 내거나 하는 일이 없으며, 불평 불만한 일이 없이 부잣집 귀공자(貴公子) 같이 너그럽고 유연(柔軟)했다. 그는 성균관(成均館)대학에 진학하였으며, 군에 입대하여 자주 왕래가 있었다. 법학을 전공, 고등고시의

동지가 되어 흩어져 공부하다가, 시험 때가 되면 갑순과 함께 만나 셋이서 잘 어울렸다.

내가 사직(辭職)을 하고 굶으면서 외롭게 공부할 때 나를 늘 격려해주었고, 공부하다 권태(倦怠)가 엄습(掩襲)하면 벽을 헐고 알몸을 내놓는 정도의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스트레스를 풀곤 하였다.

1962년 4월 21일, 아버지의 소상(小喪) 때는 과일이라도 사서 제사상에 올리라고 1,000환을 보내주기도 했으며, 어느 해는 수험료(受驗料)를 내지 못할 정도로 돈이 없어서 그에게 편지를 부치려는데 우표 값도 없었다. 그래서 이미 소인(消印)이 찍힌 크낙새 우표를 지우개로 잘 지워서 우송했는데, 그가 수험료(受驗料)를 내주어서 응시원서(應試願書)를 제출했다. 이 처절(悽絶)했던 이야기를 그가 알 리가 없다. 그리고 시험장에서 졸도(卒倒)하여 실패했을 때, 그와 갑순이가 나를 부축하여 집으로 데려와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 해 여름 외가로 내려가 행정과를 준비하고 있을 때인 1962년 8월 23일, 70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먼 벽촌(僻村)까지 찾아와 나를 격려해 주었다.

그는 그 후 방향을 선회(旋回)하여 상공부 4급채용시험에에도 합격했으나, 한전(韓電) 시험에 합격하여 취직하였다. 나는 만성 고시(枯屍=高試)병에 걸려서 헤어나지를 못할 때였다. 그는 이따금 자기가 결혼하면 멋진 축사(祝辭)를 써서 읽어달라고 부탁하곤 했는데, 막상 64년 1월 18일 군산(群山)에서 최수경(崔秀景)이라는 처녀와 결혼한다는 청첩(請牒)이 왔으나 축사는커녕 참석조차 못하고 말았다. 밥을 굶고 있는 판에 교통비인들 있었겠는가? 나는 그 날 흐느끼면서 ‘다들 가면’이라는 축시(祝詩)로 일기를 썼다. 축시라 하기보다는 내 신세타령이다.

다들 가면

맑게 빛나던 눈알.

힘차게 활개치던

새들.

내 벗들.


간다지 어디론지.

짝지어 날아간다지.

원앙새 되어.

원앙새 되어.

가거라 다들.

다들 가거라 그들 보금자리로.

다들 가면 나는 나는

한 마리 학이 되어,


긴 목을 치키고 서있으리.

조각달 쳐다보며.

외다리로 서있으리.

이렇게 서있으리.

이런 기막힌 사실을 그가 알 리가 없어 늘 섭섭했으리라. 친구라는 내가 이와 같이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거늘, 어찌 다른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깊게 알지도 못하면서, 우정의 농

도를 왈가왈부(曰可曰否)할 수 있으랴. 지금 그는 정년 퇴임(退任)을 하고 익산(益山))에서 사는데, 이따금 전화(063-854-2546)로 통화는 하지만 잘 만나지지를 않는다. 그 사랑의 빚을 반드시 갚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를 않는다. 내가 무심하지.

K. 그는 나보다 2세 연상이며, 전남 나주(羅州) 출신이다. 사범학교 때 만난 친구인데, 그는 나처럼 내성적(內省的)인데다 어른스러웠으며, 공부하느라고 다른 친구와의 교제는 물론, 나와의 교제도 전혀 없었다. 그 역시 고등고시 행정과를 응시하였다는 것은 후에 알았으며, 졸업 후 만나게 된 것은 70년대 말이었는데, 그는 부부가 서울로 전근(轉勤)하여 대방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부인도 동기동창이라 아는 사이었다. 그런데 그와 가까워진 것은 신앙 때문이었다. 세상 친구들 멀리 하고 오직 믿는 사람들하고만 교제하려던 나에게, 믿는 동창을 만났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웠다. 그들은 어느 장로교회를 다녔는데 별로 확신이 없었던 차에, 김기동목사를 알게 되고 지병(持病)을 치료받아 성락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있었다. 당시 성락교회는 축사(逐邪) 문제로 인한 이단(異端)으로 백안시(白眼視)되고 있었는데, 그는 내가 반포로 이사하여 새 교회를 찾고 있을 때 성락교회에 오기를 바랬다.

그러나 우리는 민감(敏感)한 교회 문제와 깊은 교리(敎理) 문제는 서로 피해가면서, 서로의 순수한 신앙을 위해 기도하며 함께 성경 공부도 하고 자주 왕래를 하였다. 내가 장로 장립을 할 때 와서 축하해 주었고, 그가 집사 안수 받을 때 가서 축하해 주었다. 그런데 2000년 7월에 접어들면서 뜻밖에 위암(胃癌)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수술을 사양하고 기도로써 낫겠다고 하였다. 그의 대단한 믿음을 놀랍게 여긴 나는, 기도의 동지가 되어주기로 마음먹고 참으로 열심히 중보적 기도를 하며, 일주 일회 정도 광명시 철산동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부부와의 금슬(琴瑟)이 좋지 않았으며, 뜻밖에 교회와의 문제도 심각해서 스트레스가 누적(累積)되어 있었다. 기도로써 암을 치료하겠다는 그에게는 그야말로 악재(惡材)였다. 이 두 가지 근본 문제의 해결 없이 치료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우회적(迂廻的)으로 회개를 촉구했으나, 큰 변화가 보이지 않아 안타까웠다. 결국 그는 교회를 옮기고, 기도원을 전전하였다. 그런대로 2년간은 버티었으나, 3년째 접어들면서 병색(病色)이 짙어가더니 칠순(七旬)이 된 2002년 11월 9일 하늘나라로 훌쩍 가버리고 말았다. 기도가 헛된 것 같아 너무나 허탈했다.

여자 친구는 아예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남녀공학(男女共學)이 되어 다른 학우들은 심심찮게 여자 친구와 교제를 한다, 연애를 한다고 소문들이 무성했으나, 한 사람의 여자 친구도 사귀어본 일도 없을 뿐더러,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단테(Dante)와 베아뜨리체(Beatrice), 서화담(徐花譚)과 황진이(黃眞伊)의 프라토닉(Platonic)한 사랑이 어떻고, 로미오((Romeo))와 쥴리엣(Juliet)의 죽음을 초월한 순수한 사랑이 어떻고, 에로스(Eros)와 아가페(Agape) 사랑이 어떻다는 이야기를 잘 해서 연애학(戀愛學) 박사라는 칭호를 주는 학우가 있는가 하면, 연애학 강좌를 해달라는 학우들도 있었지만, 모두가 관념적이고, 추상적일 뿐 어느 여자에게 시선을 주어본 적도 없었으며, 어느 여학생이 나에게 미소를 주어본 적도 없었다. 교내 작품 전시회에 출품된 내 일기장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발견해보려고, 돋보기를 대어보아도 무미(無味) 건조(乾燥)한 이야기만 있을 뿐, 달콤한 사랑 이야기는 단 한 줄도 없어 실망 했노라고들 했다. 어떤 학우들은 오죽하면 나더러 고자(鼓子)가 아니냐고 하였으랴.

자, 이렇게 쓰고 보니까 고등학교 시절에 사귀었던 마음에 남아있는 친구는 더 이상 없다. 그러니까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구나. 그만큼 내가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친구 사귀기를 싫어했던 성격이었으며, 내 환경(環境)과 형편(形便)이 또 용납하지 않았다. 취직한 후 중학교 사범학교 동창회도 초창기에는 나가봤으나, 내 돈 빌려가 떼어먹은 녀석들, 허풍 떨고 술에 취해 곤드레만드레한 모습들이 싫어, 신앙생활을 위해서 발길을 뚝 끊어버렸다.

취직하고 서울에 와서도 직장 동료(同僚)들이 많았지만, 전근하면 이별하고 전근한 후에도 모임들을 갖지만 유야무야(有耶無耶)되기 일쑤여서 역시 발을 끊었다. 다 걸러지고 초임지(初任地)에서 만난 종휘(鐘徽)와 연규(鍊圭)만 지금까지 남았다. 종휘는 순천(順天) 출신으로 나와 동갑이며 처음 서울에 와서 하숙과 자취를 함께한 친구이다. 원만한 성품이라 교우관계가 넓었으며 따르는 여자도 많은 편이었다. 술 담배도 좋아한 소탈(疏脫)한 호인이었는데, 같은 교사와 결혼하여 좋은 가정을 이루었다. 연규 역시 구례(九禮) 출신으로 나보다는 연상이다. 철도고를 나와 철도청에 근무하다가, 사범학교 연수과를 나와 함께 초임 발령을 받았다. 역시 원만한 호인이며 소탈해서 교우관계가 넓었다. 비교적 일찍 결혼하여 좋은 가정을 이루었는데, 용산에 살고 있을 때 문안에 오다가다 자주 들렀으며, 특히 내가 사직하고 고시 시험을 볼 때 신세도 졌다. 나의 결혼 때 우인(友人)대표로 이 두 친구들에게만 청첩하였으며, 그 후 아이들 결혼 때도 이들만 청첩했다. 꾸준히 기도는 하고 있지만 아직 불신자가 되어 아쉽다. 그러나 그들의 정직(正直)과 의리(義理) 때문에 믿는 친구들 보다 우의(友誼)를 다지면서 함께 산행(山行)을 하고 있다.

교회에서 새롭게 사귄 친구들은 신앙이라는 공동 목표와 교회 직분 때문에 빈번(頻煩)하고 친밀하게 교제하며 서로 기도해주고는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처럼 과연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 할만한 친구들인가는 내 자신이 그렇지 못한 게 솔직한 고백이다.

* 관포지교(管鮑之交)...춘추시대 제(齊)나라 재사(才士)였던 포숙(鮑叔)과 그의 친구 관중(管仲) 은 각각 셋째 왕자 소백(小白)과 둘째 왕자 규(糾)의 스승임. 두 친구는 자신의 주군을 왕으로 삼으려는 경쟁을 하였는데, 관중이 소백을 암살 하려다 미수에 그친 것을 아는 소백이 관중을 처벌하려 했으나, 포숙의 간언으로 사면하여 관중이 명재상(名宰相)이 되고 , 소백은 패자(覇者)가 됨.

* 다윗과 요나단...사울왕이 사위인 다윗을 죽이려 할 때, 왕자인 요나단이 친구 다윗을 구해 왕위를 계승시키며 자기는 전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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