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사범학교에 진급하면서부터 가정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 아버지는 친구 분의 후의(厚意)로 소주(燒酒)대리점을 한 것이다. 안양면(安良面) 김영기(金榮璣)씨가 양조장(釀造場)을 경영하였는데, 그 분은 지방의 유지(有志)였으며 정치하는 동지였다. 식생활이 해결되었다는 것만으로 다행이었으며, 나에게도 최저생활을 할 정도의 식량과 반찬이 보급(補給)되었고, 학교 납부금도 체납(滯納)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빈곤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빠짐없이 가계부(家計簿)를 썼고, 월말에는 갖가지 통계를 내어보곤 했는데, *엥겔계수(Engel係數)가 98이라면 알아 볼만하다. 주말(週末)이면 다른 학우들은 고향에 다녀오는데, 나는 여름.겨울 방학 외에는 고향에 가본 일이 없었다. 교통비(交通費)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량 찬거리 등은 버스 편으로 부쳐주었는데, 4km 남짓 되는 숙소(宿所)까지 어깨에 메거나 등에 져서 운반했다.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전봇대마다 쉬곤 했는데, 전봇대 하나하나를 지나는 것이, 마치 군인들이 진지(陣地) 하나하나를 정복하는 것과 같은 고통과 함께 쾌감(快感)이 있었다. 어느 날은 아직 국민학생인 아우 상수(祥洙)편에 보내왔는데, 연락이 잘 되지 않아서, 그가 짐은 버스 정류소(停留所)에 맡기고 울먹거리며 학교로 찾아온 일도 있었다.
석유(石油)가 나무보다 싸서 석유곤로로 밥을 지어먹으니 편리하긴 했으나, 불기가 없는 냉방(冷房)이 얼마나 추운지 씻어놓은 쌀이 겨울에는 항상 살얼음이 얼었다. 이불을 개지 못한 채 이불과 요를 함께 묶어 침낭(寢囊)처럼 깔아놓고 몸뚱이만 드나들었다. 고치 속의 번데기같이 늘 누워서 얼굴만 내놓고 공부를 하다보니까 팔과 허리에 힘이 주어져 뻐근하고 아팠다. 목욕탕에 가지를 못 하니까 대야로 오리처럼 뒷물 목욕을 했는데, 겨울에도 냉수마찰을 했으니 대단한 일이었다. 하기야 광주의 겨울 기온은 서울보다 높아서 영하 5도면 큰 추위라고 했으니까.
채소를 사다가 김치도 담아 먹고, 일요일이면 빨래를 했는데, 때로는 이불 빨래도 했다. 다리미질을 못하니까 잘 펴서 말리기만 했으며, 단벌 바지는 항상 요 밑에다 깔고 책을 얹어서 그 위에 누워서 잤다. 냉기(冷氣)도 덜 하고, 다리미질을 한 것 같았다. 그래서 *おりめ(오리메=折り目)가 칼날 같아 남의 속을 알 리 없는 학우들은 늘 단정(端正)하다고 했지.
2학년 때 작은아버지(鍾實)께서 이웃집으로 이사 오셔서 도청(道廳)에 다니셨다. 함께 식사를 하고 잠만 내 숙소(宿所)에 가서 자라고 했지만, 신세지는 것 같아서 사양했다. 작은아버지는 상처(喪妻)를 하고 후처(後妻)와 함께 큰딸만을 데리고 와서 생활했는데, 넉넉하지를 못했다. 아들 낳기를 소원했는데, 몇 번 유산(流産)하고 이번에는 아들을 사산(死産)했다. 내가 죽은 아기를 비닐보자기에 싸서 안고, 작은아버지는 삽을 들고 뒷산 공동묘지(共同墓地)로 가서 묻었다.
“잘 썩어부러라!”
퉁명스럽게 내뱉은 작은아버지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만 3년을 끌던 전쟁이 끝나고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휴전(休戰)을 했다. 이 때 한국은 휴전협정 조인(調印)을 거부했기 때문에, 전쟁의 당사자(當事者)가 되지 못하고 공산측(共産側)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였다. 그러나 휴전을 하고 나니까 비로소 사회가 안정을 찾았다. 전반적으로 경제 사정도 나아진 것 같았으며, 신체검사를 마치고 징집(徵集) 문제로 들떠있던 학우들도 안정을 되찾았다.
* *
2학년에 진급하면서 club활동이 활성화되었는데, 나는 생소(生疎)한 ‘賣店클럽’에 속하게 되었다. 여러 선생님들의 추천으로 김세인(金世仁), 정형채(丁炯彩), 서병렬(徐炳烈)과 함께 학용품 중심의 학교 매점을 경영하는 것이다. 휴식 시간에만 나와서 팔다가 방과 후에는 문을 닫고, 토요일에는 충장로(忠壯路) 도매상으로 가서 주문을 하는 것이다. 물건을 팔 때마다 ‘正’자를 써가며 현금과 재고품(在庫品)과 맞추어보는 것이 문을 닫는 이후의 일이었는데, 매일 약간씩 착오가 있었다. 장난끼 있는 학우들의 장난도 있었고, 작은 물건은 훔쳐간 일도 있었다. 외상으로 사간 학우들은 우리가 꾸어줄 수는 있었으나, 그것도 차일피일(此日彼日) 질질 끌다가 나중에 오리 발 내미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참으로 난처해서 허공만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지도 교사인 송규만(宋圭萬)선생은 위로해주며 결손처분(缺損處分)을 하라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우리를 전폭적(全幅的)으로 믿어주는 것이 참으로 감사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월말이 되면 학비에 보태라고 보수를 주셨다. 황송했으나 감사하게 받았다. 나에게는 큰 수입이었으며 학업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돈으로 바지도 한 벌 사 입고, 사보고 싶은 책도 샀다. 고학(苦學)도 하는데 선생님들의 신임(信任) 아래 떳떳하게 클럽활동의 일환(一環)으로 아르바이트(arbeit)를 한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장학금을 주기 위한 학교 측의 배려(配慮)였다. 이와 같은 신임을 받고 보니 공부를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이랄 것은 없으나, 아무튼 피로를 무릅쓰고 깊은 밤까지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이, 은사에 대한 보답이었다.
사범학교는 초등교사를 양성(養成)하는 학교이므로 모든 교육과정(敎育課程)이 그렇게 짜여 있다. 이것이 못 마땅하여 불만인 학우들이 많았는데, 처음부터 각오하고 입학했으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체념(諦念)할 것은 빨리 체념해야지.
화가, 문학가, 신문 기자, 저술가, 법관... 꿈들은 화려하였으나, 그러나 당장은 교사가 되어야 한다. 직업전선(職業戰線)에 나가서 가정 경제를 일으켜야 한다. 누님의 결혼 문제, 동생의 학비 문제, 그리고 나의 진로 등 큰 일이 첩첩(疊疊) 산인데 굳은 결심이 없으면 안 된다.
*엥겔계수(Engel係數)...독일 통계학자 Engel이 가계 지출 중에서 음식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클수록 가난하다는 법칙에서 나옴.
*おりめ(오리메=折り目)...접은 금이나 자리의 일어인데, 절도 있고 예의 바르다는 뜻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