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국민학교 시절 특별활동 작문부에서 ‘가로수’라는 동시를 지어 칭찬을 받았던 것이, 내가 문예(文藝)에 관심을 갖게 된 첫 사건일 것이다. 가로수(街路樹)들이 두 줄로 서서 원족(遠足=소풍)을 가는데, 차를 피해 길 양쪽으로 비켜서서 산으로 올라간다는 내용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교지(校誌) ‘호국(護國)’에 ‘문학의 품에서’라는 시가 실리면서 문예부에 들어갔다. 문학도(文學徒) 병란과 친교를 나누면서 문학을 아주 좋아했다. 이광수(李光洙)의 ‘흙’이나 심훈(沈薰)의 ‘상록수’ 박계주(朴啓周)의 ‘순애보’ 같은 계열의 소설이 좋았는데, 월북자가의 금서(禁書) 조치 이전에는 그의 영향으로 이기영(李箕永), 이태준(李泰俊) 등 카프(KAPF) 작품에도 접근했다. 물론 습작(習作)도 많이 한 편이었다.
그러나 사범학교로 진급하면서부터는, 문학가(文學家)의 꿈길에서 선회(旋回)하여 법조계(法曹界)의 길로 들어섰다. 따라서 법률 책 위주의 독서를 하다보니까 문학 서적도 멀어지고 습작도 뜸해졌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늘 문학이 고향(故鄕)처럼 느껴졌고, 때로는 회향병(懷鄕病)에도 걸렸다. 본격적인 고시 공부를 하면서부터는 틈틈이 장편보다는 단편소설(短篇小說)을 읽었고, 소설보다는 백철(白鐵), 조연현(趙演鉉), 최재서(崔載瑞) 등의 평론(評論)을 많이 읽었다. 읽지 못한 명작(名作)들의 해설(解說)과 작품평(作品評)을 통해서, 읽은 척 하기가 좋았을 뿐더러, 원래 논리적이고 비판적인 내 성격 탓이기도 했다.
문학 작품은 쓰지 않더라도 일기(日記)만은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국민학교 때는 가끔씩 썼지만,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일기는 내 생활의 일부였다. 많은 친구를 사귀지 안 해서 늘 혼자 외롭게 있게 된 데다가, 할 일도 없어서 공부 아니면 독서인데, 이 때 일기야말로 나의 유일(唯一)한 친구로서 대화(對話)의 상대(相對)였다. 이렇게 써진 일기장은 한 권 두 권 탑(塔)처럼 쌓이고, 마침내는 나의 분신(分身)처럼 사랑스러워졌다.
서점(書店)에서 사온 일기장이 아니고, 백로지를 사다가 16절지로 잘라서 꿰매었는데,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좋았다. 한 쪽을 쓰는 것이 아니라, 몇 쪽이건 펜 가는대로 마음껏 썼기 때문에 어느 날은 5,6쪽도 썼다. 그리고 생활 일기만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쓰고 보니까, 문학 작품도 있고 논설(論說)도 있으며, 심지어는 그림과 만화(漫畵)까지도 있었다. 비빔밥이요 잡탕이다.
3cm 두께의 일기장이 한 해 두 권까지도 썼으니 내가 생각해도 대단했다. 그래서 한 층 찬 층 탑처럼 쌓여가는 일기장에 ‘상아탑(象牙塔) 일기장’ ‘청운탑(靑雲塔) ’ ‘금자탑(金子塔)’ ‘계명탑(鷄鳴塔)’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기를 쓰면 자기의 하루 생활을 반성해본다는 뜻도 있지만,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의 감정(感情)을 순화(醇化) 정리(整理)하고, 자기의 사상(思想)이나 인생관(人生觀)을 정립(定立) 체계화(體系化)하는데 참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한자를 쓰며, 그러기 위해서 사전(辭典) 옥편(玉篇)을 항상 곁에 두고 있으니까 한자 실력이 엄청나게 늘었다.
일단 문학은 포기(抛棄)했지만, 일기를 통한 문장 연습은 매일 했던 셈이다. 다만 문체(文體)가 수필(隨筆)이나 논설문 형식의 글을 많이 쓰다보니까, 섬세(纖細)하고 부드러운 글보다는 굵고 딱딱한 글로 굳어져갔다. 이것은 일찍부터 신문을 탐독(耽讀)했던 영향도 있고, 법률 서적 같은 학술(學術) 서적을 많이 읽게 된데도 그 원인이 있다. 아무튼 감상적(感想的)인 시(詩)보다는 이지적(理智的)인 평론이나 논설이 나에게 적성(適性)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J란 학우가 있었다. 그도 타교 출신인데 문학을 좋아해서 얼른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는 재학 시절, 지방 신문이 공모(公募)한 학생 수필(隨筆)에 입상을 하여 대단한 주목을 받고 있었으며, 아닌게아니라 감상적(感傷的)인 글을 잘 썼다. 그래서 만나면 문학 이야기를 가끔 나누었는데, 나와는 전혀 견해(見解)가 달랐다. 그는 문학가가 되려면 경험(經驗)이 가장 소중하므로, 인생으로서의 모든 체험(體驗)은 다 해보아야 한다. 따라서 자기는 술 담배 도 하며, 심지어 성(性) 경험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실감(實感)있고 감동적(感動的)인 명작(名作)을 낳는다고 했다. 아닌게아니라 그의 하숙방(下宿房)에 가보았는데 책상 위에는 원고지(原稿紙)만 어지럽게 듬뿍 쌓인 채 교과서도 꽂혀있지 않았다. 역겨운 담배 냄새가 속을 메스껍게 하였으며, 서랍에는 담배꽁초가 가득 차있었다. 그리고 시험 때는 백지(白紙)를 내놓고 자랑스럽게 나가곤 했는데, 문학만을 전념(專念)하겠다는 과시(誇示)였겠지만, 문학의 기초인 국어 시험조차도 그런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달랐다. 예술가(藝術家) 이전에 인간(人間)이 되어야 하며, 그런 가운데 정금(正金) 같은 글이 나올 수 있고, 구체적(具體的)인 경험을 하지 않더라도 영감(靈感)과 상상력(想像力)으로 글을 쓸 수가 있다. 그리고 작품 주제(主題) 속에 인생관 세계관이 담겨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신변잡기(身邊雜記)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건 그렇고, 사범 2학년 때에는 정덕채(鄭德彩) 선생님의 추천(推薦)으로 학교 신문 ‘횃불’ 주필(主筆)을 맡게 되었는데, 주로 내가 사설(社說)과 고십(gossip)란을 담당하고 희환(喜煥)과 후배들이 기사를 쓰며, 원지(原紙)를 써서 등사(謄寫)를 했다. 그리고 3학년에 올라가서는 사장(社長)을 맡고, 사설(社說)만을 담당했다. 벌써 정선생님은 나의 논리적(論理的)인 글의 적성을 알아서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쓴 셈이다.
2학년 여름방학을 마치고 ‘일인일기(一人一技) 작품전시회’가 강당에서 열렸다. 전교생이 관람(觀覽)을 하는데 갖가지 특색 있는 작품이 다 나왔다.
“연수 네가 특상이다!”
담임선생님의 말이 믿어지지 않아서 곧 강당(講堂)으로 갔다. 많은 학생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갔더니, 정말로 내 작품 위에 특상(特賞)의 딱지가 붙어 있지 않는가? 그리고 선후배 학생들은 혀를 내두르며 대단하다고 소곤거렸다. 작품은 ‘상아탑 일기장’이었다. 특히 방학중의 일기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이었다. 내용보다는 그 꾸준한 노고(勞苦)가 가상(嘉祥)했는지 모를 일이다. ‘횃불’을 통해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지만, 이 일로 인해서 더욱 유명(有名)해졌다.
3학년에 진급하면서 학생회 조직을 하는데, 학예부장(學藝部長)에 입후보(立候補)하라고 몇몇 학우들이 추천장(推薦狀)을 받으러 다녔다. 그런데 J측 운동원들이 다니면서 나를 모함(謀陷)하기도 하고, 반 협박도 했다. 참으로 가소(可笑)로운 일이다. 사회의 탁류(濁流)가 학원까지 스며들어 오염(汚染)된 데 대해서 구토(嘔吐)가 났다. 나는 나를 미는 학우들에게 양해(諒解)를 구해서 입후보를 하지 않기로 했다. 오기(傲氣)로는 대결(對決)해서 압도적(壓倒的)인 당선(當選)으로 그의 기(氣)를 꺾고도 싶었으나, 난 학생회 간부(幹部) 자체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데다가, 앞으로 고등고시에 전념(專念)하기 위해서는 그런데 신경(神經) 쓸 여유가 없었다.
결국 그는 방송국장 K와 경선(競選)해서 당선되었다. 그 우쭐대는 꼴이 너무 유치(幼稚)해서 그와 교제(交際)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횃불 사장직만 가지고 일을 했다. 그는 졸업 기념으로 교지 ‘잔디’를 창간했다. 그의 청탁(請託)에 의해서 논설문 ‘民主主義와 民主政治’를 써냈다. 그런데 문단(文段)들이 뒤바뀐 채 교정(校訂)도 보지 않고 그대로 나와, 도무지 문맥(文脈)과 논지(論旨)가 맞지 않아 엉터리 글이 되고 말았다. 알면서도 일부러 그대로 둔 것인지, 내용을 알지 못하니까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 알아보지도 않았지만, 참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기형아(畸形兒)를 출산한 산모(産母)의 마음이 그럴까?
일기는 계속 썼다. ‘아미엘의 일기’를 남긴 19세기 철학자 아미엘은 ‘일기는 인간의 위안이자 치유, 영원과 내면의 대화, 펜을 든 명상’이라 했듯이, 하루만 쓰지 않아도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일기광(日記狂)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6년 동안 쓴 일기가 제법 큰 짐이 되었다. 졸업을 하고 고향집으로 옮겨갔다. 졸업과 동시에 서울로 왔기 때문에 내가 관리하지는 못하고, 방학이 되어 하향(下鄕)하면 점검(點檢)하곤 하였다.
“만일 우리 집에 불이 나면 난 맨 먼저 내 일기장을 구할 것이다.”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곧잘 했는데, 말이 씨가 되고 말았다. 졸업한지 3년 만에 세탁(洗濯)소를 하던 집에서 화재가 나 모든 것이 소실(燒失)되었다. 이 화재 현장에서 어머니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내 일기장이었다. 그토록 애지중지(愛之重之)하던 아들의 일기장이나 건지자는 어머니는 불 속에 뛰어 들어가 일기장 상자를 꺼내어 개천 물에 던졌다. 참으로 한 편의 드라마(drama)였다. 이렇게 구해진 일기장은 서울로 올라와 주인 품으로 돌아왔다. 내 눈에서 이슬이 맺혔다. 일기장은 타들어가다가 꺼졌기 때문에 반달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탄 자국들은 손만 대도 부슬부슬 떨어졌다. 더욱 소중해진 일기장은 졸업 후 서울에 와서 쓴 일기장과 함께 가보(家寶)처럼 고이 간직되어, 이사할 때마다 이삿짐 제1호로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반포 아파아트(apartment)로 온 마지막 이사 때, 많은 살림을 정리하면서 낡은 책들도 거의 버리기로 했다. 중요한 책을 넣은 마대(麻袋)와, 버려야 할 마대가 어머니의 실수로 뒤바뀌어, 내 일기장은 어느 고물상(古物商)에게 실려 가버렸고, 쓸데없는 책들만 실려 왔다. 어머니는 몹시 당황하였으나 이미 엎질러진 우유. 그러나 나는 어머니를 위로했다. 어머니가 불 속에서 건져낸 것을 어머니가 실수로 버렸으니 더 할 말이 없었다. 참으로 기구(崎嶇)한 운명의 일기장들이다.
이 불 속에서 건져낸 일기장을 읽어본 사람이 있었다. 막내아우의 친구요 제자인 순병(淳炳)이다. 우리 집에 들락거리면서 이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곤 했는데, 그 일기장 내용과 내력을 알고 감명(感銘)을 받은 그는, 늘 마음속으로 나를 존경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게 되어 주례(主禮)를 부탁하러 왔다. 사양(辭讓)했으나 그의 진심을 알고 주례를 섰던 게 나의 첫 주례였다. 이 일이 인연이 되어 그 형님 재병(宰炳)의 결혼 주례도 또한 서게 되었다.
* *
졸업반 때는 부속국민학교에서 교생(敎生) 실습을 했다. 실습을 마칠 때에는 교편물(敎鞭物) 한 점을 남기기로 되어있는데, 나는 실습(實習) 기간 동안 써두었던 40편의 동요 동시(童謠 童詩)를 모아 모조지 전지(全紙)에 써서 괘도(掛圖)를 만들어 제출하였다. 10대(代)의 마지막 작품이었는데 이것도 많은 찬사(讚辭)를 받았다.
구슬 달린 거미줄
이슬비 간지럽게 뿌린 날 아침.
거미줄에 맑은 구슬 달렸습니다.
오늘따라 거미님은 어디를 가고,
구슬만 올망졸망 달렸을까요.
구슬 달린 거미줄이 탐스러워,
전깃줄에 모여 앉은 참새들이
몰래몰래 훔치려고 달려들면
오소소 물방울로 떨어집니다.
이슬비 오손도손 내리는 아침.
송알송알 거미줄에 꿰어진 구슬.
구름에서 밝은 해가 얼굴 내밀면
별처럼 반짝반짝 오죽 예쁠까?
사회에 나와서는 오로지 고등고시 준비에 몰두(沒頭)했으나 문학에 대한 향수(鄕愁)는 어쩔 수 없어, 이따금 작품을 썼다. 특히 국민학교에 재직(在職)하다보니까 어린이들을 위한 글을 주로 썼는데, 1960년 1월 4일. 한국일보 신춘문예(新春文藝)에서 내 동시 ‘집보는 날’이 당선되었다는 신문 보도를 보았다. 953편 응모(應募)에 예선(豫選) 통과 28편 가운데서 내 것이 당선된 것이다. 2월 9일 한국일보사에 갔다. 심사위원들을 비롯해서 입대한 박상철(시 당선)씨를 제외한 박상배(시 가작), 김태희(시조 당선), 최숙경(동화 당선)씨와 함께 시상식(施賞式)에 참석했다. 장기영(張基永) 사장으로부터 상장과 상금을 받고 다과회 때 기념 촬영이 있었다. 나는 심사위원인 아동문학가 강소천(姜小泉). 이원수(李元壽) 선생의 격려(激勵)를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 보는 날
가만히
방문이 열립니다.
“누구세요?”
그러나 바람만
말 없이 지나갑니다.
“땡그랑”
대문이 소리칩니다.
“엄마지요?”
그러나 바둑이가
꼬리치며 들어옵니다.
“...숙아”
목소리가 들립니다.
“예-”
그러나 옆 집에서
새어나온 소립니다.
“많이 기다렸지?”
내가 내게 묻습니다.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내가 내게 대답합니다.
이후 ‘어린이’ 지(誌)에 동시 ‘물오른 나무’ 소년한국일보에 ‘꽁지 빠진 십자매(61.3.19)’‘점치는 새(61.10.3)’ ‘풋감(62.3.29)’, ‘어린이 자유’ 지에 ‘비둘기의 죽음(67.2)’ ‘꿈이 자라는 칠판’ 에 ‘종이새가 깐 알’ 등 틈틈이 동화(童話)를 발표했다. 당시 소년한국일보의 주간(主幹)이었던 김요섭(金堯燮=아동문학가)선생은 그 후 출판사 ‘보진제(寶晉齊)’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세계소년소녀학급문고’ 발행을 위해 함께 일하자는 제의(提議)를 해왔다. 학교에 있으므로 미담가화(美談佳話)를 취재(取材)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등고시에 전념(專念)하기 위해서 사양, 작품 쓰는 일은 절필(絶筆)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동안 써 모은 풍자시평(諷刺時評) ‘꿀돼지의 일기’, 교육 수필집(隨筆集) ‘교단’을 비롯해서, 동화집 ‘쇠똥구리’, 동극집 ‘즐거운 산속’, 동시집 ‘집보는 날’을 30세 안에 펴내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원고뭉치는 간데온데없이 또 사라지고 말았다.
R교수는 ‘법학과 문학’에서, ‘사랑의 원심력(遠心力)은 평화(平和)에 미치게 하고, 평화의 구심력(求心力)은 사랑을 구현한다면서 문학에서 다루는 사랑과 법학에서 다루는 평화는 서로 뗄 수 없는 밀접(密接)한 관계’라고 하였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나는 법관이 되더라도 문학하는 법관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지금은 중1 때의 시 ‘나는 문학의 품에서’ 멀리 떠나있지만, 문학은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한 마음의 고향으로만 남게 되었다.
<시조>
까 치
전봇대 꼭대기에
철사로 둥지칠까?
노랗게 물들이고
꾀꼬리 노래할까?
아서라 시끄런 세상
누구인들 귀담으랴.
홍시 감 주렁주렁
산골로 되돌아가
잔 가지 얼기설기
포곤한 둥지틀어
털털한 내 목소리로
기쁜 소식 전해주리
(1996.12.20 성북초등시조교육연구회 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