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현재는 광주광역시이지만 당시에는 광산군(光山郡) 서방면(瑞坊面) 풍향리(豊鄕里)였다. 광주사범학교(光州師範學校=현 광주교육대학교)는 이 외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
1951년 중2 때부터 1955년 졸업 때까지 자취(自炊)를 하였으니 만 4년을 산 셈이다. 이 거처를 ‘풍향초가’라고 이름 지었다. 주인 최ㅇㅇ씨에게 염치고 뭐고 애걸복걸(哀乞伏乞) 하다시피 해서 들어간 것이다. 물론 세(貰)를 낸 것이 아니다. 옛적 머슴이 기거하던 행랑(行廊)채인데, 대문(大門)을 가운데 두고, 한쪽은 측간(뒷간)이고, 한쪽은 행랑방과 헛간이다. 기둥들이 약간 기울어져 있어서, 대오리 창살의 방문이 평행사변형 모양으로 곧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마당 한 구석 우물이 동네 공동 우물이 되어 낮엔 늘 대문이 열려있고, 아낙네들이 번질나게 드나들었다. 부엌이라야 가리게 하나 없는 한데라 부지깽이까지 다 드러나 보였는데, 부뚜막에 덜렁 얹혀 있는 솥 뚜껑이 유난히 반짝반짝 윤이 났다. 구질구질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부지런히 기름 걸레로 닦아놓았기 때문이다.
‘머슴아 새끼가 가시내 같이..... ’
힐끔거리며 지나가는 아낙네들이 혀를 끌끌 차지나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나의 어려운 사정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을 터이지만, 누구 하나 김치 한 접시 갖다 주는 사람 없었다. 별 볼 일 없이 보이는 학생에게 값싼 동정을 할 리가 없을뿐더러, 가난한 동네가 되어 그들도 남에게 눈을 돌릴만한 여유가 없었으리라.
여름엔 주인 아주머니는 가끔 닭을 잡아달고 했다. 약을 하기 위해서 기르던 닭인데, 참새 한 마리도 죽여 본 일이 없는 내가 닭을 잡아야 한다니....더구나 낫을 갖고 와서 목을 치라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닭살이 돋았다. 그러나 남자로서의 체면을 구길 수 없어, 예전에 보았던 대로 눈을 딱 감고 목을 비틀었다. 털을 뽑는데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리는 모습이 꿈에도 보였다. 여러 마리 잡아 드렸는데도 다리 하나 먹어보란 말이 없었다. 그만큼 주인집도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아는 것이 많은 주인 아저씨는 평소에는 말수가 적고 점잖은 신사였다. 그러나 과음(過飮)만 하면 아무 데나 토(吐)하고 방뇨(放尿)하는 주사파(酒邪派)였다. 숙취(宿醉)한 채 그 먼 거리를 어떻게 자전거로 퇴근을 하는지 수수께끼였다. 대문까지 와서는 의례 고꾸라지는 것이다. 곁부축하여 모시는 일은 내 몫이었는데 왜 그리도 무거운지.... 이런 주벽(酒癖) 때문에 부부 싸움이 잦았고, 이 싸움을 말리는 것 또한 내 몫이었다. 하루는 부엌에서 싸우다가 아주머니가 밀치는 바람에 뚜껑을 열어놓은 밥솥에 주저앉기도 했다. 끝내 술이 사람을 마신다더니....
이 풍향초가 주위는 논밭이 즐비한 들이었고, 손에 닿을 듯 공동묘지가 가까웠다. 여름에는 논에서 개구리들의 합창, 봄에는 종달새의 독창...청빈(淸貧)했던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은 가회동 우거(寓居)를 방문한 일본 정객 おざき(오사키=尾崎行雄)를 응접실로 안내한다며 돗자리 하나 들고 소나무 숲으로 갔다는 일화(逸話)가 있다는데, 나도 어쩌다가 친구가 찾아오면 ‘자연의 응접실’이라고 밭두렁이나 무덤가로 데리고 나가서 외로움을 풀고 함께 미래를 꿈꾸기도 했다. 그런데 밤이 되어 어디선지 부엉이 우는 소리가 향수(鄕愁)를 자극하면, 고독(孤獨)이 고독(苦毒)이 되어 눈물짓곤 했던 초가.
홀부엉이
깊은 밤 어두움이
빗방울처럼
뚝뚝 떨어지는데,
침묵으로 병든 고목에
돌부처 같이 앉아있는
홀부엉이.
지지리도 어리석게
부엉이 셈을 하다말고,
하품만 허공에 내뿜으며
무엇을 찾기에
눈동자는
저다지도 큰 것일까?
목이 쉬도록 부르던
그 노래는
여운도 없이 사라졌는데,
또 이 밤이 가고
대낮이 되면
무슨 꿈을 꿀 것인가?
(1952.)
그런데 휴전이 되기까지 가장 불안했던 것은 공비(共匪)들의 출몰(出沒)이었다. 풍향초가는 무등산(無等山) 끝자락이 되어, 이곳을 본거지(本據地)로 준동(蠢動)하는 공비들의 이동 통로(通路)였다. 때문에 야간(夜間)에는 군.경들의 잠복(潛伏) 근무가 잦았다. 우리도 학교를 경비 한답시고 목총을 들고 밤에는 조(組)를 짜서 뒷산을 지키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두려움을 덜기 위해 달빛 아래서 한 옥타부(octave) 낮은 목소리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손 들어! 총 놓고 일어나!”
“꼼짝 말고 앞으로 가!”
등 뒤에서 총부리를 겨눈 두 그림자에 우리는 기절할 뻔했다. 온 몸에서 힘이 쭉 바진 채 바들바들 떨면서 천근 만근되는 발을 떼었다.
“예끼 놈들아, 그래갖고 학교를 지켜!”
배를 움켜쥐며 박장대소(拍掌大笑)하는 그림자는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 선배들이었다. 경비 상황을 점검하려고 순시(巡視)하는 중인데, 지금 생각하면 중2 짜리들이 목총(木銃)으로 어떻게 경비를 하겠는가?
어느 날이었다. 밤 늦도록 책을 읽고 있었다. 빨간 표지에 보리 이삭이 그려져 있는 ‘노농(勞農)사전’이었다. 지질(紙質)도 나쁘고 인쇄도 조잡(粗雜)했다. 그러니까 인공 시절에 나돌았던 불온서적(不穩書籍)이다. 우연히 손에 들어와 호기심으로 읽어 보았다. 아닌게아니라 노동자 농민 등 무산근로대중(無産勤勞大衆)들의 복음서였다. 빨간 색깔만 봐도 소름끼치는 나였지만, 내용은 그럴듯한 말들로 메워져 있었다.
“쾅쾅쾅!”
그런데 아닌 밤중에 거칠게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이불 속에 이 책을 감추었다. 봉창(封窓) 창구멍을 통해서 누군가 엿보고 있지 않았나 하는 불길한 예감(豫感)이 들었다. 대문을 여닫는 것은 내 몫이었기 때문에 망설이고 있으려니까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대문을 열어달라는 것이다. 아닌 밤중에 웬 사람들일까? 무등산에서 내려온 공비 아니면, 잠복근무하는 군.경일 텐데... 군.경이라면 이 붉은 책을 읽고 있는 나를 체포(逮捕)할 것이고, 공비라면 나를 납치(拉致)할 것이고....가슴이 방망이질 했다.
하는 수 없이 대문을 열어 주었다. 총검(銃劍)을 한 경찰이었다. 불안했다. 그러나 그들은 주
인 아주머니를 불러 배가 고프니까 밥 좀 달라는 것이었다. 주인집도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밥을 지어 주었다. 그들은 곧 떠났고, 나는 읽다 둔 책을 꺼내어 아궁이 속에 쑤셔 넣었다. 차마 자랑할 만한 것은 못 되지만, 그래도 내 학창생활의 애환(哀歡)이 담긴 정든 집이었다.
* *
1952년 중학 3학년으로 진급했다. 5월 말이 되면서 소위 부산 정치파동(政治波動)이 있었다. 6.25 전쟁으로 당시 부산이 임시 수도(首都)였고, 대통령은 국회의 간선제(間選制)였다. 1950년 5.30 총선(總選)에서 야당인 무소속이 다수 당선되므로, 이승만 대통령은 연임(連任)이 불가능해지자, 국민직선제 개헌안을 제출(提出)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부결한 국회는 해산하라며 백골단(白骨團), 땃벌대 등 관제민의(官製民意)가 동원되고, 50여 명의 야당 의원들을 헌병대로 연행하였다. 정국이 혼란해지자 정부는 경남,전북,전남 일원에 계엄령(戒嚴令)을 선포하였다. 결국 직선제의 정부안과 내각제의 야당안을 발췌(拔萃) 혼합(混合)한 소위 발췌개헌안이 통과됨으로서, 의회민주주의(議會民主主義)에 대한 도전의 대못은 빼었으나,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큰 상처를 남겼다. 이후 신익희(申翼熙) 국회의장을 지도자로 하는 민주국민당은 야당의 깃발을 선명(鮮明)하게 흔들며, 사사건건 정부와 충돌했다. 정국은 아주 어수선했다. 그 무렵 여름방학이 되어 집에 내려갔더니, 아버지께서는 경찰서에 불려갔다가 나왔노라고 했다. 야당 탄압이 이렇게 악랄(惡辣)했다.
방학을 마치고 개학이 되어 풍향초가에 돌아오면, 방안 냉기(冷氣)와 곰팡이 냄새에 정나미가 떨어질 지경이었다. 엄동설한(嚴冬雪寒) 겨울에는 방문을 열면 코를 베어갈 것 같았다. 시베리아의 툰드라(tundra 러) 같지는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