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1950년 6월 25일. 그 날은 일요일이었다. 갑자기 울어대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새벽 단잠을 깨었다. 그 동안 병중에 있던 주인 아주머니가 마침내 숨을 거둔 것이다. 벽 하나 사이를 두고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있는 것은 처음이다. 누나와 나는 용수철 퉁기듯 뛰쳐나와 이웃집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의 친지(親知)였다. 장례(葬禮)를 마칠 때까지 신세지기로 사정했다.
골목에서 삼삼오오(三三五五)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초상 집 이야기려니 했으나, 심각한 표정으로 보아 심상(尋常)치 않았다. 알고 보니 북한 공산군이 남침(南侵)했다는 것이었다. 이튿날 학교에 갔는데 온통 다 전쟁 이야기였다. 이전에도 38선을 경계로 작고 큰 충돌(衝突)이 잦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었는데, 우리 국군이 반격(反擊)했다는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후퇴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서울이 6월 28일에 함락(陷落)되었다니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우리 학생들은 무기(武器)를 달라며 시위를 했다. 그리고 혈서(血書)를 쓰면서 학도병(學徒兵)으로 나가는 선배들을 환송하기도 하고, 전사해서 후송(後送)되어온 유골(遺骨)들을 절에다 봉안(奉安)하는 행사가 이어졌다. 일장기가 태극기로 바뀌었을 뿐 머리띠는 제2차세계대전 말기(末期)의 모습 그대로였다.
라디오나 신문은 반격(反擊)을 하고 있으니 국민은 안심하고 동요(動搖)하지 말라고 했으나, 급변(急變)하는 정세는 그게 아닌 것 같았다. 20여일 동안 별별 유언비어(流言蜚語)가 난무(亂舞)했는데, 7월 중순부터 피난민들이 광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7월 20일 쯤 대전도 함락(陷落)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국군은 막강(莫强)한 괴뢰군(傀儡軍)의 화력(火力) 앞에 무력하다는 것이다. 모든 정황(情況)으로 보아 분명했다. 광주도 위협받고 있었다. 학교들은 모두 조기(早期) 방학으로 들어갔다. 우리 학교는 7월 20일 쯤 늦은 편이었는데, 나는 누님과 함께 방학을 한 즉시 식량과 책가방을 챙겨서 광주(光州)역으로 나갔다. 역전 광장은 피난민(避難民)들로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되돌아갔다가 이튿날 새벽에 다시 나갔다. 마찬가지였다. 기차가 곧 끊어진다는 말에 군중(群衆)들은 필사적으로 기차에 매달렸다. 기차 지붕까지 사람들이 기어올라서 출발을 못했다. 이 열차가 간다, 저 열차가 간다는 말에 손님들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아수라장(阿修羅場)이 빚어진 끝에, 다행히 우리가 탄 열차가 기적(汽笛)을 울렸다. 밖에서는 타지 못한 사람들의 돌팔매질로, 안에서는 콩나물 시루 같은 만원으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기차는 고개를 넘고 몇 개의 터널(tunnel)을 지나가는 사이, 괴뢰군의 공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몹시 헐떡거렸다. 사람들은 비지땀과 기차 연기로 흑인이 되었다. 안심(安心)하는 얼굴 빛과 수심(愁心)에 찬 눈동자가 교차(交叉)하였다. 그래도 보성(寶城)까지 실어다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보성에 내렸으나 차편이 없어서 제암산(蹄岩山807m) 재를 넘기로 했다. 몇 사람의 일행이 밤길을 걷는데 여간 힘들지 않았다. 장흥군 장동(長東)면에 이르렀을 때 밤이 깊어 가까운 마을로 들어가 하룻밤을 새우기로 했다. 그런데 지서에 연행(連行)되어 조사를 받았다. 수상한 사람들이란 것이다. 마침 아버지를 아는 순경이 있어서 풀려나긴 했으나, 이유도 없이 모욕(侮辱)을 당했다.
다음날 동이 트자마자 쌀을 씹으면서 요기를 하고 또 걸었다. 짐은 무겁고 다리는 아팠다. 마침 트럭 한 대가 지나가 다짜고짜 가로막고 태워달라고 애원(哀願)했다. 트럭(truck)은 벌써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 참 위험했으나 결사적으로 비집고 탔다. 커어브(curve)를 돌 때마다 한쪽으로 휩쓸려 떨어질 것 같았다.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점심때쯤 고향에 도착했다. 부모님의 초조(焦燥)한 얼굴이 무리들 사이로 보였다. 우리를 보더니 안도(安堵)의 한숨을 쉬면서 기뻐했다. 그러나 긴장의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었다. 라디오에 귀를 대고 있는 사람들은 피난 보따리를 싸기 시작했다.
7월 23일.
“급보를 알려드립니다. 청년들은 작전에 협력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일반 시민들은 잠시 동안 산으로 피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는 보도(報道)를 마지막으로 광주방송 전파는 끊어졌다. 드디어 광주도 괴뢰군 손아귀에 들어간 듯했다. 우리는 서둘러 미숫가루를 만들어 싸고 가족회의를 열었다. 누나와 동생은 병영면(兵營面) 할아버지 댁, 어머니는 칠량면(七良面) 외가, 아버지와 나는 부산(釜山)으로 갈라져 피난하기로 결정했다.
“오래 가야 일주일이다. 국련군(UN)이 온다니께 곧 반격이 시작될 거다. 그 동안만 잘 숨어 있거라.”
곧 세 갈래 길로 헤어졌다. 우리는 안양면(安良面) 쪽으로 향했다. 미숫가루 자루를 매단 긴 장대를 어깨에 메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경찰이 배들을 징발(徵發)해서 그들 가족만 태우고 벌써 부산으로 도망가고, 수문포(水門浦)에는 한 척의 배도 없다고 했다. 앞서 갔던 사람들이 되돌아오면서 욕을 퍼부었다. 야속했다. 우리도 외가로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이 따라나섰다. 2대 국회의원 고영완(高永完)씨의 노모(老母) 였다. 서울 가족들의 소식은 끊어지고 오갈 데 없어, 죽거나 살거나 행동을 함께 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의리상 할 수 없었다.
세 사람은 밤길을 걸었다. 그날따라 별들이 총총했다. 그리고 유달리 유성이 많이 떨어졌다. 기다란 포물선(抛物線)을 그리며 사라져 가는 유성(流星)을 쳐다보며 갖가지 상념(想念)에 사로잡혔다.
‘저 별은 왜 떨어질까? 왜 사라져버릴까? ’
‘별똥별이 사라지기 전에 자기 소원을 세 번만 외치면 이루어진 댔지...’
“빨갱이들 전멸해라! 빨갱이들 전멸해라! 빨갱...”
그러나 별똥별은 이내 사라졌다. 말이 너무 길다. 짧은 말은 없을까? 옳지.
“빨갱이 망해라! 빨갱이 망...”
역시 별똥은 사라졌다. 잘 따라오지 못한 노인은 하늘을 향해서 합장(合掌) 기도를 하였다. 천지신명(天地神明)께 기도했으리라. 그러나 유성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다만 빛을 잃었을 뿐 어디론가 하염없이 흐를 것이다.
밤이 깊어서 길가 어느 주막(酒幕)집에서 쉬는데, 멀리서 불빛 행렬(行列)이 우리 쪽으로 오고 있는 게 아닌가? 괴뢰군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재빨리 밭으로 뛰어들어 몸을 숨겼다. 큰 수수와 옥수수가 키를 재며 가려주었다. 그런데 그 집주인이 소까지 끌고 들어와 안타까웠다. 자세히 살펴보니까 경찰들이었다. 후퇴를 하느라고 우왕좌왕(右往左往)하는 모습이었다.
40 여리 산길을 걸어서 새벽녘에 칠량면(七良面) 송촌(松村) 외가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친정에, 아버지는 처가에, 나는 외가에 온 것인데 결국 한 집으로 모인 것이다. 물론 노인도 함께.
“요즘 시상이 으츠구 돌아간다요? 원 갑갑해서...”
라디오도 신문도 없는 이 벽지(僻地)에서, 읍에서 온 아버지는 좋은 소식통(消息通)이었다. 마을 정자에 모인 사람들은 아버지에게로 모여들어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는
“매칠 새에 국련군(유엔군)이 국군과 합동으로 반격전(反擊戰)을 펴서 전세(戰勢)가 역전(逆轉)될 것이요. 아마도 광주가 최후의 방어선(防禦線)이 될 것이니께, 여러분은 날뛰지 말고 농사만 짓고 있어야 할 것이요.”
이런 요지(要旨)의 발언을 하였다. 진정으로 그들을 위한 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예측은 빗나갔다. 괴뢰군이 강진읍(康津邑)에 입성했다는 미확인(未確認) 정보가 들어왔다. 급박(急迫)해진 우리는 송촌에 은신해 있을 수 없었다. 아니 은신이 아니라 오히려 공개 노출(露出)되어 있었다. 그 날 밤 야음(夜陰)을 타서 송촌을 탈출(脫出)하기로 했다. 개들이 컹컹 짖어댔다. 건너편에 보이는 마을은 우리 최씨들 문중(門中)이 모여 사는 단월리(丹月里) 목암(牧岩) 마을이다. 명월강 개천물이 졸졸 흐르는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선두(先頭)에 선 아버지가 갑자기 주저앉아 엎드린 바람에 우리도 덩달아 엎드렸다. 간이 콩알만 해졌다.
“개똥벌러지다! ”
한숨을 몰아쉰 아버지를 따라서 우리도 일어섰다. 논길로 걸으면서 반딧불이임을 확인했다. 아버지는 사람들의 동태(動態)를 감시하는 어떤 오열(五列)의 담뱃불인 줄 착각했던 것이다. 가까운 친척인 용수(鎔洙) 아저씨 댁으로 몰래 숨어들어갔다. 그리고 뒤안 모퉁이 언덕에다 굴을 파도록 하고 정세를 관망(觀望)했다. 동이 트자 굴을 살펴보았더니 삼척동자(三尺童子)도 금방 발견할 수 있는 허술한 굴이었다. 파서 대나무 밭에 쌓아놓은 황토(黃土) 흙이 유난히 붉었으며, 입구를 가려놓은 나뭇가지 잎사귀들이 벌써 말라서 한 눈에도 은신처(隱身處) 같았다. 이용 가치가 없었다.
건너편에 보이는 송촌의 움직임이 수상했다. 동네 사람들이 정자(亭子)에 모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괴뢰군(傀儡軍)이 들어왔으리라고 짐작한 아버지는 나만 데리고 뒷산으로 도망갔다. 큰 나무는 없어 풀이 무성(茂盛)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 숨을 죽였다. 7월말의 뙤약볕이 화살처럼 머리에 박히고, 개미떼들이 수 없이 몰려들어, 개미굴로 물고 갈 채비를 한 것 같았다. 이따금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풀잎만 바스락거릴 뿐 정적(靜寂)은 참으로 불안했다.
“탕! 탕탕! ”
갑자기 총 소리가 정적을 깼다. 모골(毛骨)이 송연(竦然)했다. 삼흥리(三興里)쪽에서 들려왔는데 우리 부자(父子)를 수색(搜索)하는 괴뢰군들의 소행(所行)이 아닐까? 그러나 또 긴 정적(靜寂)이 흐르고 긴긴 여름의 한낮 햇볕도 수그러들면서 어둠이 짙게 깔렸다.
“삼흥리엔 우리 선산(先山)이 있다. 니 친함마니 산소(山所)가 있다....”
아버지는 이따금 선산 이야기를 꺼내면서, 당신께서 관리하지 못한 불효(不孝)를 후회하곤 했다. 그러나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마당에 난 관심이 없었다. 허기진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산을 내려왔다. 별들은 여전히 총총 빛나고 별똥별은 꼬리를 끌며 사라져갔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우릴...”
안타깝게도 유성들은 곧바로 사라져갔다. 앞서가던 아버지가 또 갑자기 주저앉았다. 나도 반사적(反射的)으로 따라 앉았다. 아! 웬 사람이 서있는 게 아닌가? 이젠 꼼짝없이 잡히나 보다고 식은땀이 흐르며 가슴이 방망이질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서서히 드러난 그 사람은 산소에 세워둔 석상(石像)이었다. 두 번째의 착각이었다. 몇 년은 감수(減壽)했으리라.
이튿날, 아침을 먹은 우리는 바깥 정세에 촉각(觸覺)을 곤두세웠으나 겉으로는 아무런 징조도 나타나지 않았다. 점심 때였다. 자전거를 타고 밀짚모자를 눌러쓴 누군가가 이 동네로 들어왔다. 뜻밖에도 삼촌(鍾根)이었다. 우체국에 다닌 삼촌인데 조부(祖父)님의 심부름이었다. 그곳 병영면(兵營面)에는 인민군이 입성(入城)했는데, 아무 일 없이 직장 일에 충실히 하라 한다며, 자수(自首)하면 용서를 한다니 아버지더러 자수하라는 조부님의 전갈(傳喝)이었다. 아버지는 한 마디로 거절했다. 사술(詐術)이라면서, 며칠 동안 산 속에 피신해 있을 테니 나만 데리고 가라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산 속으로 피신했으며, 나는 삼촌의 자전거를 타고 병영면 조부님 댁으로 갔다. 가는 길에 군동면(郡東面) 분주소(지서) 앞에서 검문검색(檢問檢索)을 받았다. 무명 바지 저고리를 아무렇게나 입은 사람인데, 얼핏 보기엔 남의 집 머슴살이한 사람 같았다. 삼촌의 신분증(身分證)을 이리저리 돌려 보는 게 일자(一字)무식(無識) 같았다. 우리는 속으로 깔깔대며 떠나왔다. 하늘 높이 힘차게 나부끼는 소련(蘇聯)의 붉은기와 낯선 인공기가 나의 뒤통수를 방망이로 후려친 것 같았다. 논에서 유유히 거니는 두루미가 어찌나 부러운지....개울물로 미숫가루를 타서 먹으면서 병영면으로 왔다. 다시 누나와 동생과 만났으나,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와는 헤어진 것이다.
며칠 후 뜻밖에 아버지가 나타났다. 밀짚모자를 푹 눌러 쓴 채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반가웠다. 그러나 조부님과의 대화(對話)가 심각했다. 외가 식구들을 고문(拷問)하는 통에 자수(自首)를 했는데 죽도록 맞았다는 것이다. 대쪽 같았던 아버지도 살기 위해서 도마뱀처럼 꼬리를 잘라야 하는 자절(自切)을 했다는 게 아닌가? 몇 백 리 멀리 떠나간다는 조건부(條件附)로 친척된 분이 여행증명서 하나를 떼어주어 그걸 가지고 광주로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는 길에 지리산(智異山)에서 하산하는 듯한 장흥(長興) 사람을 만났다는 게 아닌가? 이제 가면 추격(追擊)해올 테니 당장 잡히게 된다면서, 왔던 길로 되돌아가 아무도 몰래 은신(隱身)하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그 길로 되돌아갔다. 이렇게 만남은 잠깐이었다. 다리를 끌다시피 걸어가는 뒷모습이 너무 처량(凄凉)했다.
* 오열(五列)=첩자, 스페인 내란 때 프랑코군의 에밀리오몰라 장군이 자기가 통솔하는 4개 부 대 외에 제5부대가 있다는 데에서 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