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시절
1956년. 내 나이 만 20세가 되었다. 어엿한 성년(成年)이다. 지난 1년 동안의 허송(虛送) 세월이 후회스러웠다. 본 궤도(軌道)로 복귀(復歸)해야 한다. 망각(忘却)했던 높은 희망봉(希望峰)이 운무(雲霧) 위로 다시금 얼굴을 내밀고 손짓을 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 마냥 먼지가 뽀얗게 앉은 책들을 꺼내어 다시 펼쳤다. 결심(決心)이 약해질 때면 하던 버릇대로 또
수험기와 합격기를 읽었다. 링거(Ringer) 주사를 맞은 듯이 새로운 원기가 솟았다.
예비고시를 준비하자!
이 무렵 동료들 가운데는 야간대학(夜間大學)에 진학하는 붐이 일었다.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대학이 설립되고, 동네 개들도 사각모(四角帽)를 쓸 수 있었다. 등록금(登錄金)만 우송(郵送)하면, 교문(校門) 안에 한 발자국 들여놓지 않더라도 학사자격증(學士資格證)이 또한 우송되어 왔다. 나더러 함께 진학하자는 동료들의 권유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부패(腐敗)한 교육계에 대한 반발심(反撥心)만 생기고, 나는 독학해서 그들을 능가(凌駕)한 실력을 기르자는 오기(傲氣)만 생겼다. 더구나 동생의 진학 문제 등을 앞두고 많은 돈이 필요한데, 내 앞길만 챙긴다는 것은 불효(不孝) 같았다.
4월 16일부터 본격적인 고시 준비에 들어갔다. 먼저 공법(公法)관계를 공부하되 韓泰淵저 ‘헌법학(憲法學)’을 공부하였다. 서브노트 정리를 하면서 정독(精讀)하는데 꼭 한 달이 걸렸다. 좀 어려운 느낌은 들었으나 흥미가 있어, 학문에 대해서 새로운 눈을 열어주었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라는 확성기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했다. 한강 백사장에서 백만명 인파(人波)를 동원하여 사자후(獅子吼)하던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선생! 막강(莫强)한 자유당 정권, 3선(三選) 대통령을 꿈꾸는 이승만 대통령의 적수(敵手)가 된 그는, 가위(可謂) 대다수 국민의 영웅(英雄)일 정도의 인기였다. 정권의 교체(交替)는 기정사실(旣定事實)로 굳혀졌다. 그러나 비극(悲劇)으로 막을 내렸다. 유세(遊說)하러 내려가는 호남선 열차 안에서 5월 5일 급서(急逝)한 것이다. 독살(毒殺), 심장마비, 뇌일혈....추측과 소문만 무성할 뿐, 대통령 선거는 싱겁게 끝나버렸다. 나도 허탈(虛脫)했는데 7,8년간 우상(偶像)으로 떠받들었던 아버지의 심적 상처는 어떠했을까?
애써 정치에 초연하여 공부에 전념하자고 책을 단단히 쥐었다. 6월부터는 康明玉저 ‘行政法總論’ ‘행정법各論’을 차례로 공부하고 나니까 여름이 지나갔다. 이어서 金龍式저 ‘新刑法解義’를 공부하였는데, 형법(刑法)은 다른 공법과 달리 어려운 이론과 대립된 학설들이 많았다. 물론 서브노트를 했는데, 힘은 무척 들었으나 참 흥미 있는 학문이었다.
그러니까 1년 동안 헌법,행정법,형법총론 밖에 공부하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이 해에는 일반 독서를 많이 한 셈이다. 학창 시절, 전공과목을 공부하드라도 어느 기본적인 수준의 교양(敎養)은 있어야 한다는 지론(持論)을 이미 가졌던 것이고, 법학을 공부하다보니까 다른 학문과도 밀접(密接)하게 관련되었음을 발견하였으며,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대신 대학 1년의 교육과정에 있는 교양과목(敎養科目)은 모조리 공부하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朴鐘鴻 저 ‘철학개론’, 金斗憲 저 ‘윤리학(倫理學)’, 邊時敏 저 ‘사회학(社會學)’, G.겟텔 저 ‘정치학강요(政治學綱要), 崔虎鎭 저 ‘경제학원론(經濟學原論)’ 그밖에도 학창시절에 배웠던 논리학과 심리학 등 그야말로 인문과학 계통의 기본 서적은 닥치는 대로 읽었다.
시간에 쫓기어 비록 속독(速讀)이요 난독(亂讀)이긴 했으나, 이 1년 동안의 광범위(廣範圍)한 독서는 내 인생의 귀중한 경험이었다. 그 학문의 내용과 체계(體系)를 알게 되었고, 사물(事物)을 보는 시야(視野)를 넓혀주었으며, 대학에 재학 중인 사람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교양을 쌓았다. 어떤 모임에서 어느 사람과 무슨 대화(對話), 토론(討論)을 한다거나, 어느 누구의 어떤 강의를 듣는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自信感)을 심어주었다.
1957년. 이제 만 20세. 20고개를 넘고 보니까 약간 초조해졌다. 정유년(丁酉年) 설계도에
‘ ⑴豫試의 응시를 ⑵ 50권의 책을 ‘성실한 독서를’ 이라고 계획을 세웠다. 1,2월에는 徐一敎
저 ‘신형사소송법(新刑事訴訟法)’을 공부하였다. 절차법(節次法)이므로 별로 흥미 있는 학문은 아니었으며 노트 정리를 하다가 중단(中斷)해버렸다. 祥洙동생의 성남고교(城南高校) 입학 문제로 들떠 있다가, 3월 17일 ‘法政’지를 통해서 제9회 고시 실시의 공고(公告)를 보았다. 5월로 예측(豫測)했던 예시(豫試)가 4월에 있다고 해서 좀 다급해졌다.
‘간추린 國史’를 한 번 소독(素讀)한 후 계속해서 朴奉石저 ‘국사정해(國史精解)’를 정독하며, 여러 신문 잡지를 잡히는 대로 읽었다. 4월 22일 경복(景福)고등학교로 갔다. 오전의 ‘논문’은 ‘경제 안정과 우리 국민의 정신생활’이었다. 의외(意外)였다. 경제학 지식이 없으면 손도 댈 수 없는 문제였는데, 다행히 경제학 책을 읽었던 덕택으로 생산 증강책(增强策), 재정안정책, 금융(金融)합리화책, 소비생활의 합리화(合理化)로 나누어 160분에 썼다. 오후의 ‘국사’는 ‘1.진흥왕대(眞興王代)의 업적을 기술(記述)하라. 2. 실학(實學) 흥기(興起)의 원인과 대표적 인물 5명을 열거(列擧)하고 각각 그 업적을 쓰라' 였다. 몇 군데 틀린 곳과 불충분한 곳이 있었다. 한 달 후 5월 23일 국무원사무국(國務院事務局)에서 합격통지서가 왔다.
“한 층의 탑을 쌓고,
이 뼈만 남은 가냘픈 손에 놓여진 종이!
이것이 무엇이기에 받아 쥐고서 부르르 떨었던가? 흥분을 참느라고 유리창 너머 먼 하늘을 바라볼 때, 하늘이 자꾸만 높아진 것만 같았고, 거기에 우뚝 탑이 쌓아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후략)
그 날의 일기장 첫머리에 그렇게 썼다. 동생과 함께 기뻐하면서, 아버지께 편지를 올리던 기쁨!
그리고 그 날의 일기장은 계속해서 첫째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비분(悲憤)을 씻었고, 둘째 나의 진로에 때한 명확한 방향(方向)을 세웠으며, 셋째 나의 가능성을 파악(把握)했노라고 기록하였다. 물론 그 해의 본고시(本考試)는 응시하지 못하였다. 수험 과목을 1회도 통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해 합격자는 사법과 3,000여명 가운데 겨우 4명, 행정과 2,000여명 가운데 7명이었다. 참으로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시험이라 아니할 수 없다. 3년 째 되는 그 해에는 희망도 하지 않았는데 6학년 담임을 하였다. 6학년만 전담하는 폐단(弊端)을 없애기 위해 상급 관청에서 단속(團束)을 하였기 때문이다. 입시(入試) 경쟁이 치열(熾烈)하던 때라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 반까지 수업이었으며, 밤에도 집에서 과외지도를 했다. 구내(區內) 또는 시내(市內) 학력검사가 수시(隨時)로 있어서 그야말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경제적으로는 약간의 도움이 되었으나, 시간을 얻을 수가 없고 건강상의 무리도 있어, 공부하는데 지장이 많고 모든 계획이 다 어긋나버렸다.
양문사(陽文社)에서 나온 법학, 정치학, 경제학 전집류(全集類)를 사보았다. 페이지가 적어 부담이 없었기 때문이다. 민법(民法) 공부를 했는데, 민법은 인간 생활에 가장 관계가 깊으면서도, 육법(六法) 중 가장 난해(難解)한 법이요, 그 체계로 보아서도 방대(尨大)하여 다른 법률의 3,4배의 노력이 필요했다. 이렇게 원시림(原始林) 무성(茂盛)한 처녀지(處女地)에 개척(開拓)의 괭이를 들었다. 아닌게아니라 현기증(眩氣症)이 났다. 陳承錄 저 ‘물권법(物權法)’과 ‘담보물권법(擔保物權法)’을 7월까지 노트하고 8월부터는 ‘채권법(債權法)총론’으로 들어갔다. ‘채권법각론’과 張庚鶴 저 ‘민법총칙’까지 대강 보고 나니까 10월이 되었다. 서부로 서부로 벋어 나가는 미국인들의 개척정신(開拓精神)으로.
학문에는 왕도(王道)가 없다고 했듯이, 사실 학문은 태산준령(泰山峻嶺)이다. 특히 법률 서적 백만 권을 읽어도 사랑애(愛) 자 하나 없다고 했지 않은가? 법학이 차고 딱딱한 학문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법관이 되면 얼음장처럼 차갑고 바위 같이 단단한 인간형(人間型)이 될 수 있겠다는 인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