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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병아리 선생(先生)

청년시절

by 최연수

1955년. 수복(收復) 직후인지라 아이들의 나이가 고르지 않았다. 학령(學齡)을 초과한 아이들도 꽤 많아서 만 19세로 교단에 선 내가 그들 눈에도 오빠처럼 어리게 보였을 것이다. 첫 해 4학년 여자 반을 맡고, 이듬해도 그 반을 그대로 데리고 5학년에 올라갔다. 그러니까 나와는 많아야 9살 차이고, 예닐곱 살 차이의 아이들도 있었다. 게다가 전라도(全羅道) 사투리 말투를 아직 벗어나지 못 했으니 여러모로 선생님으로서의 권위(權威)를 나타내 보이기는 어려웠다. 아무리 표준말(標準語)을 쓴다고 노력해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사투리 억양(抑揚)에 아이들은 킬킬대고 웃었다.


눈보라는 보따리를 쓸어 가는데

허물어진 처마 밑에 밤을 새우고...


아이들은 이런 단조(短調)의 구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6.25의 전화(戰禍) 속에서 업히고 걸리며 피난길을 갔을 아이들.

총알이 날아오는 싸움터에서

피 흘리는 아저씨들 간호해주는

흰 모자에 적십자 간호 언니는

천사와 같이도 거룩하지요.

그 무서운 폭격(爆擊)과 포격(砲擊)을 피해 다니며, 혹은 공산당의 학살(虐殺)을 피해 다니며 공포(恐怖)에 떨었을 아이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늘이 없었다. 궁핍(窮乏)하여 가끔 도난(盜難) 사고는 있었지만 아이들은 순진(純眞)했다. 90여명이나 되는 재적수여서 개인 지도는 시도(試圖)할 수조차 없었으며, 기초 학력이 없는 학습 부진아(不進兒)가 여간 많지 않았다. 받침을 제대로 쓰지 못해서 흰자질(단백질)을 ‘흰자지’라고 써서 웃기기도 하고, ‘읍사무소’를 끝끝내 ‘씁사무소’라고 읽은 아이가 있어서 안타까웠다. ‘하였읍니다’ 의 ‘읍’이 ‘씁’으로 발음되기 때문이다.(현재는 하였습니다로 표기) 구구단을 외우지 못한 아이들도 수두룩했다. 산수(算數)를 가르치기가 너무 힘들었다.

사범학교 시절 책에서 배운 대로, 교생(敎生) 때 실습(實習)했던 대로, 그저 열심히 가르쳐야겠다는 생각만 가득 찼다. 특히 정서(情緖)가 메말라 있는 그들에게, 음악, 미술 시간을 빼먹지 않고 심지어는 무용(체육)까지 가르쳤다. 한가하면 그저 오르간을 치면서 노래를 불러대고, 곱슬머리 장발(長髮)을 올백(all back)해서 아이들은 ‘베토벤’이란 별명(別名)을 붙여주며 무척 좋아했다. 특히 우리 반은 후진(後進)반이 되어서, 주지(主知) 교과보다는 그런 예.체능(藝.體能) 교과를 좋아했다. 그리고 동생들처럼 귀여워 해주는 나를 퍽 따랐다.

그러나, 한 달에 한 번은 생리하는 여자들처럼 늘 우울(憂鬱)했다. 소위 일제고사(一齊考査)에서 항상 꼴찌를 했기 때문이다. 운동장 조회 때 교장은 각반 성적과 등위(等位)를 발표하였는데, 경쟁(競爭)이 붙은 반끼리는 웃고 울고 야단인데, 우리 반은 물끄러미 이런 광경을 구경만 할 따름이었다. 동료 교사들은 나를 민망(憫惘)하게 바라보고, 학부모들은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물론 상사(上司)에게는 무능 교사로 찍혔을 것이고...

출제(出題)는 다른 학년에서 하고, 시험 감독과 채점(採點)은 동학년에서 반을 바꿔가면서 했는데, 이것이 각가지 부작용(副作用)을 낳았다. 문제가 누설(漏泄)되기도 하고, 채점이 잘못되어 아이들 앞에서 동료들끼리 삿대질을 해가며 싸우기도 하며, 심지어 고학년 학부모들은 담임 배척(排斥) 운동도 하였다. 6학년 담임 운동을 하기 위해서 교장에게 상납(上納)하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고, 배후(背後)에서 학부모를 조종(操縱)하여 담임 운동을 하는 부류(部類)도 있었다. 6학년을 담임하면 학부모들의 관심이 높아져서 봉투 수입이 컸고, 시험지 대금이니 부독본(副讀本) 알선(斡旋) 사례니 하는 잡부금(雜附金) 수입에다가, 무엇보다도 과외(課外) 지도를 통한 수입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민학교 6학년 담임을 몇 년만 하면 집을 장만할 수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으며, 국민학교 교사 집에 중고등학교 교사가 전세(傳貰)들어 살고, 중고등학교 교사 전셋집에 대학교 교수가 월세(月貰) 산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과장(誇張)된 소문이긴 했으나, 박치기를 해서라도 남을 짓밟고 6학년을 담임하려했던 것은 사실이고, 나 같은 무능 교사는 평생 저학년이나 담임하면서 학교의 잡무(雜務)는 도맡아해야 했다. 고향에서나 동창들은 서울에 올라간 우리들이 벼락부자가 되었으리라는 소문도 파다하다고 했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다. 이러니 학교 분위기는 살벌(殺伐)하고 인간관계는 삐꺽거렸다.

이러한 환경에 재빨리 적응한 동료들도 있었으며, 한술 더 떠서 선배들 뺨 칠정도로 지모(智謀)를 발휘하여 실속을 챙긴 동료들도 있었다. 고지식하고 어수룩한 나는 비분강개(悲憤慷慨)만 하였을 뿐, 점점 사회의 외톨이로 밀려났다. 획일식(劃一式) 수업에 의한 평균씨(平均氏) 의 양산(量産)이 교육일진데, 이런 교육계에 대한 환멸(幻滅)과 교직에 대한 염증(厭症)이 조수(潮水)처럼 밀려올 때는 당장 사직(辭職)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어서 교육계로부터 탈출하여 법조계(法曹界)로 진입해야겠다는 초조함이 가슴을 죄었다. 그러나 있는 동안이나마 어린이들을 열(熱)과 성(誠)으로 가르치고, 맡겨진 업무에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먹었다.

* *

3년째 되던 1957에는 뜻밖에 6학년을 담임하게 되었다. 최병철(崔秉哲)교장이 부임하고, 담임 순환제(循環制)의 강력한 상부의 지시가 내려, 지금까지의 6학년 아성(牙城)이 무너지고, 나에게도 6학년 담임의 기회가 왔다. 그리고 7개 반을 9개 반으로 증설(增設) 편성해서 재적수도 줄고, 아이들도 뒤섞였다. 4학년 때부터 연 3년째 가르치게 된 아이들도 있었으며, 새로 맡게 된 아이들도 있었다. 6학년 8반 여자반이다. 새로 맡게 된 아이들 가운데는 머리가 명석(明晳)하여 공부를 잘 한 아이들도 많았으며, 가정 형편도 비교적 나아서 뒷바라지를 잘 해준 아이들도 있었다. 이제 나도 만 21세가 되어 햇병아리 신세는 면했는데, 그만큼 아이들도 처녀같이 컸다.

사람은 바뀌었지만 제도(制度)가 바뀌었으랴. 입시(入試) 제도가 그대로인데, 경쟁이 사라질 리가 없지. 새로 6학년을 담임한 아홉 분의 얼굴은 모두 새로운 각오에 차있었다. 상사와 학부모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혼신(渾身)의 노력을 다 기울였다.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꽉 짜여진 수업에, 날마다 한두 번 시험을 실시했다. 출제하랴, 원지(原紙) 긁어 등사하랴, 채점하고 통계 처리하랴 잠시도 쉴 새가 없었다. 퇴근하면 집에는 또 과외 지도를 받는 아이들이 와있다. 저녁 숟가락을 놓기가 바쁘게 밤 10,11시까지 가르쳐야 한다.

이 무렵 나는 자취(自炊)를 하고 있어서 더욱 바빴는데, 아이들이 숙성(熟成)해서 나를 도와주었다. 반장인 L이 어른스러워서 학교에서는 반 아이들을 잘 통솔(統率)하고, 그가 아이들을 잘 시키어 퇴근 전에 내 방 청소는 물론 김치를 담아놓기도 하고 동태찌개를 끓여놓기도 했다. 너무 고마워 힘껏 그들을 가르쳤다. 그 가르침이 과열(過熱)되다보니 폭언(暴言)도 나가고 체벌(體罰)도 가해졌다. 심지어는 자기 시험지를 입에 물리거나 등에 메달아 다른 반을 돌아오게 하는 모욕적(侮辱的)인 벌도 있었다. 교육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이런 비교육적 행동이 공공연하게 횡행(橫行)하였다. 그러한 교육 풍조(風潮)에 비분강개하였던 나였지만, 어느새 나도 모르게 오염(汚染)된 채, 오로지 입시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양쪽 여자반인 7반은 H.D., 9반은 H.B 선생인데 두 사람 다 노총각이었다. 당시에는 30세도 안 되었는데 노총각(老總角)이라고 했다. 그들은 우리 교실에 들어오면 잘 길러서 장가가라는 말을 가끔 했다. ㅇㅇ이가 부잣집 맏며느리 감이라면서 ‘사모님’이란 별명도 붙였다. 그는 지금도 멘스를 할 텐데 한 달에 한 번은 잘 살펴보라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이 농담(弄談)인 줄 알았다. 눈치 빠른 그가 이것을 모를 리 없다. 두 H선생만 들어오면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자리를 떠나곤 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가끔 찾아오곤 했는데, 다른 동창들보다 결혼이 늦었다. 그 후 소식이 끊겼다가, 내가 서른이 넘어 몇 군데 선을 보고 있을 무렵, 외사촌 동생을 통해 중매(仲媒)가 들어왔다. 자세히 알고 보니까 바로 그 L가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 제자(弟子)라고 했더니 제자이면 더욱 좋지 않느냐고 했다. 나는 나이 차가 너무 많다는 핑계로 사양했다. 그 후 소식이 또 끊어졌다가 졸업한지 23,4년이 흐른 후 80년대 반포교회에서 같은 신자(信者)가 되어 만나게 되었다. 이름은 ‘××’으로 개명(改名)하였다. 이미 장년이 되어 함께 교회학교와 성가대에서 봉사하고, 그 남편 되는 K집사는 내가 가장 어렵고 무섭다고 농담을 했다. 후에 목사가 되어 인도네시아 바탐에서 한인교회를 목회하고 있다.

“선생님, 우리 반에서 누가 제일 먼저 시집갈 건지 아세요?”

‘스칼레트’라는 별명을 가진 김태숙(金泰淑)이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글쎄, 스칼레트겠지.”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 당시 큰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켰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영화 주인공 ‘스칼레트 오하라’와 성격이 비슷해서 내가 지어준 별명이다. 그는

“아니예요. 조국자(趙菊子)예요.”

아이들은 또 까르르 웃었다. 또래보다는 나이가 많았는데 아닌게아니라 졸업한지 몇 년 되지 않아서 강원도에 있는 군인과 결혼하게 되었노라고 인사를 하러 왔다. 내가 만 34세에 결혼했으니까 그 때의 제자들이 모두 나보다 앞서 결혼한 셈이다.

숙성(熟成)한 아이들이라 오빠 또래인 나를 잘 골렸다. 어느 날 화가 잔뜩 나서 종아리를 때리려고 하였더니 부반장 J가

“선생님, 오늘은 때리지 마시고요, 내일 때려주세요.”

하고 정색(正色)을 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왜?”

“내일 소풍가잖아요. 짧은 치마를 입고 가야하는데, 종아리가 꽃뱀같이 얼룩얼룩하면 어떻게 해요.”

“..........”

숨을 죽이며 긴장(緊張)해있던 교실 안에 폭소(爆笑)가 터졌다. 나도 껄껄 웃고 말았다. 화가 났을 때에는 이런 아이들의 멍청한 듯한 행동이 윤활유(潤滑油)가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당번을 남겨두고 교무실에 갔다 왔더니 책상 위에 놓고 간 성적일람표를 펴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당시는 무시험 전형제(銓衡制)가 처음 실시되고 상대평가(相對評價)

를 할 때인지라 성적은 공개(公開)할 수 없는 인비(人秘) 사항인데 몰래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그들은 교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도 기분이 안 좋고 참 난처(難處)했다. 조금 있으려니까 문이 열리더니 태숙이와 경희(京熙)가 고개를 숙이며 들어왔다.

“선생님, 잘 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너희들이 봤나. 성적일람표가 보여줬지.”

“뽕! ”

“뭐, 뽕?”

선생님의 뜻밖의 부드러움에 긴장이 풀린 그는 자기도 모르게 방귀를 뀐 것이다.

뒤따라온 경희가 고함(高喊)을 치며 도망가고, 태숙이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이튿날 출석을 부르면서, 태숙 대신 “김 뽕!” 했더니,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은 어리둥절했지만, 태숙이는 그만 고개를 파묻고 들지를 못 했다. 그 후 그의 별명은 ‘뭐,뽕’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그래도 그는 싫어하지 않고 명랑하기만 하였다.

일선 국군 아저씨께 위문편지(慰問便紙)를 쓰도록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군인 한 사람이 학교를 찾아온 것이다. ‘한수자’를 찾는 것이다. 편지를 받고 너무 고맙고 반가워서 휴가를 나왔는데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아, 그래요? 그런데 저희 반에는 한수자가 아니고 두수자인데요?”

“네? 한수자가 없다고요?”

“아니, 한수자가 둘이라 누굴 찾는데요?”

“그렇습니까? 얼굴은 모르겠는데요.”

“편지 내용이 어떠했는데요?”

그는 몹시 쑥스러워 하면서, 내용 일부를 얘기했다. 아이답지 않는 어른스러운 내용이었다. 나는 교실로 들어가서 두 수자를 불러놓고 확인했더니 작은 수자(穗子)였다. 그는 예쁘장하게 생긴데다가 노상 인형(人形)에 옷을 지어 입히는 놀이를 잘 했다. 그러나 수자는 무섭다고 안 만나겠다고 한사코 궁둥이를 빼었다. 간신히 달래어 만나도록 해주었는데 짜장면 점심도 얻어먹고 대접을 잘 받고 왔다. 한동안 참새족들의 화제(話題)가 되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전화가 걸려왔다. 제자 한수자라는 것이다.

“한수자가 둘이었잖아? 큰 수자야 작은 수자야? ”

수화기에서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럿이서 있는 모양이었다.

“작은 수자예요.”

“아, 군인 아저씨 짜장면 얻어먹은 수자이구먼.”

“어머, 선생님 그 때 그 일을 지금까지 기억하세요?”

“그럼, 생생하지. 노상 인형 만들어 옷 갈아입히기 했잖아?”

또 폭소(爆笑)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어디서 뭘 하는데?”

“여기 명동인데요, 의상실(衣裳室)이예요. ‘이딸리아나’라고.”

“응, 결국 그 길로 들어섰구먼.”

“그렇잖아도, 지금 그 때 얘길 하면서, 선생님께 전화를 하는 거예요.”

그 후 동창회 모임에 갔더니 그는 일류 의상(衣裳) 디자이너(designer)가 되어있었다.

1958년 3월 4일 제 40회 졸업식이 있었다. 그 전 2월 25일 최초의 무시험 전형자의 합격자가 발표되었는데, 명문인 경기(京畿)에 K, 이화(梨花)에 U, 수도(首都)에 L, 상명(祥明)에 H를 비롯하여 여자 반 최고의 합격률을 기록하였다. 필기시험 전형에도 좋은 성적을 내어 일약(一躍) 유명해졌다. 교직에 들어선지 첫 졸업생이요, 첫 중학교 진학이었다. 참 기쁘고도 한편 서운했다.

그리고 나니까 경제학 책만 만지작거리다가 한 해가 지나갔다. 이제는 2학년을 희망해서 담임하였는데, 공부가 되지 않았다. 날짜도 촉박(促迫)했을 뿐만 아니라, 고향집에서 화재가 나고, 온 식구들이 알거지가 된 채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어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8월 18일부터 시행된 제10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첫 응시했으나 고배(苦杯)를 마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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