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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없는 유배(流配)

청년시절

by 최연수 Jan 15. 2025

 1959년 3월 23일. 조간(朝刊) 신문에 시내 국민학교 교사 800명의 이동 발령이 났다. 나는 그 틈에 낀 내 이름에 경악(驚愕)했다. 희망도 하지 않았고 내신(內申)도 안했는데 이럴 수가....우신(又新)의 15명 가운데 나는 문창(文昌)학교로 전근(轉勤)이 된 것이다. 내신했던 사람도 유임(留任)인데 내신하지 않은 내가 더구나 서울에서 가장 변두리인 곳으로.....서울에서  순환근무제(循環勤務制)가 실시되면서 첫 케이스(case)로 내가 걸린 셈이다. 근무 성적이 좋아서 발탁(拔擢)되었으니 2년만 고생하면 좋은 학교로 나오게 된다는 교장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25일 수원(水原)행 시외버스를 타고 대림(大林)동에서 내려,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학교를 찾아갔다. 고개를 넘어서니, 펄럭이는 태극기가 아니었다면 어떤 창고로 보았을 것이다. 땅이 꺼져라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성실죄(誠實罪)를 짓고 유배(流配)온 다섯 사람들의 얼굴마다 허탈이 짙었다. 조훈(趙勳)교장은 눈물로 왔다가 눈물로 가는 학교라며 위로를 했다.  그 당시 구로.문창(九老.文昌)이라면 서울 초등교육계의 유배지라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었다. 서울의 최남단(最南端)에 위치하여, 운동장을 끼고 흐르는 마장천(馬場川) 건너편은 경기도 시흥(始興)의 신림리(新林里)였다. 그래도 서울 학교를 다니겠다고 학구(學區)를 위반하면서 개울을 건너온 신림, 낙골(蘭谷), 당골(堂谷) 어린이들이 상당수였다. 천연두(天然痘)를 앓아 곰보가 된 아이, 머리에 기계충이라는 백선(白癬)이 있는 아이, 심지어는 맨발로 통학한 아이.....정.부통령 선거 홍보, 신입생 취학통지서 배부, 교육공채(公債)의 판촉(販促)을 위해 자주 가정 방문을 갔는데, 모자원(母子院) 쪽에는 판잣집을 짓고 모여 사는 철거민(撤去民)들이 굉장히 많았다. 문명의 혜택이라고는 조금도 받지 못한 채, 학교에서 배급해준 분유(粉乳)나 강냉이 빵에 침을 삼키며 바라보는 아이가 있었으니, 그야말로 빈민굴(貧民窟) 그대로였다. 서울에도 이런 곳이 있으랴. 낡은 목조 건물에 7개 교실, 전교생은 700명에 11개 반인데 나는 3의1 남자반을 맡았다. 그러나 여자반 담임이 결원(缺員)이 되어 당분간 108명을 합반(合班)하여 가르쳤다.

 4월 중순부터서는 걸어서 통근(通勤)하기로 했다. 대방동(大方洞)을 지나서 공군사관학교(空軍士官學校)를 끼고 야산(野山)을 넘으면 30여분 만에 학교에 도착한다. 아지랑이가 가물거리는 언덕을 오를 때면 종달새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며 나를 위로해주었다. 유배되어 온 불만을 휘파람으로 달래며,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로 삼자고 여러 모로 생각해 봤다. 가난하여 찌들어지게 사는 불쌍한 아이들의 메마른 정서(情緖)를 순화(醇化)시키기 위해 예체능 교육을 중점적으로 하며, 그들 나름대로의 꿈을 키워 주기 위하여 특히 ‘글짓기’ 지도를 하되, 매주 학급 문집 ‘병아리’를 내기로 했다. 어린이들의 글을 다듬어주고 내 글도 쓰며, 이를 원지에 긁어 등사(謄寫)하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금씩 나아지는 어린이들의 글 솜씨에 보람을 느끼면서 두 번에 걸쳐 ‘글잔치’를 하였고, 종합장학 때는 ‘글짓기 (동요 동시) 지도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발표하여 칭찬도 받았다. 출퇴근 길은 동시, 동화, 동극을 구상(構想)하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귀양을 갔던 선비들이 불후(不朽)의 명작(名作)을 남겼 듯이, 나도 글을 쓰지 않으면 나의 허전함을 무엇으로 매울 수가 없었다. 마침내  1960년 1월 4일. 한국일보 신춘문예(新春文藝)에서 내 동시 ‘집보는 날’이 당선되었다. 참으로 기뻤다. 지난 1년 동안, 귀양살이의 설움을 달래고 문창 어린이들의 가난한 마음을 채워주기 위해서 뿌리며 가꾸어온 글이 드디어 열매를 맺은 것이다. 신춘문예의 당선은 문단(文壇)에 등단(登壇)하는 관문(關門)이기에 모두들 ‘아동문학가’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

 “잘 했다. 그러나 글 쓰면 배고프다. 문학가는 되지 마라.”

 병석(病席)에 누운 아버지 말씀이었다.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법관이 되겠다는 초지(初志)를 굽히지 말라는 암시(暗示)였다. 상금(賞金)으로는 일제(日製) 라디오(radio) マッタ를 샀다. 아버지의 보약(補藥)을 사드릴까 했으나 침울(沈鬱)한 집안 분위기를 바꿔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불안과 초조는 늘 나의 가슴을 죄어 왔다. 식료품 가게를 치우고 흑석동(黑石洞)에다 건축업(建築業)을 하겠다는 아버지는, 대지(垈地)를 마련하고 재목(材木)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은 뜻대로 진척되지 않고 빚만 늘면서, 아버지의 얼굴에 병색(病色)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종 사촌 동생들까지 우리 집에 거처하면서 할저기(割箸機)를 사들여 소독저(消毒箸=나무젓가락)를 만들고 있었는데, 힘도 들었지만 판로(販路)를 뚫지 못해서 적자(赤字)가 누적(累積)되어 갔다. 어머니는 찹쌀떡을 만들고 사촌동생들은 밤거리에서 이를 팔아 생계를 이어나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11회 사법.행정 고시를 보았다. 여름 방학 동안 공부하노라고 했으나 비좁은 셋방에서 폭염(暴炎)과 싸우면서 공부하는 일은 고역(苦役)이었다. 물론 떨어졌다. 공부다운 공부를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병세(病勢)는 더 짙어갔다. 기침과 비명(悲鳴)과 신음(呻吟)이 온 가족들의 신경을 날카롭게 하여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미제(美製) 진해환(鎭咳丸)이나, 아버지가 원하는 백사주(白蛇酒)까지 사드렸으나 약효(藥效)도 별로 없고, 아버지는 극약(劇藥)이라 몸에 충격(衝擊)을 주었다며 복용하지 않았다. 한편 대학에도 진학하지 못하고 정처(定處)도 없이 낙향(落鄕)해버린 상수 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노라니 가슴의 상처는 더욱 쓰라렸다. 그리고 박봉(薄俸)으로 늘어만 가는 부채(負債)와, 나의 병역 문제 또한 무거운 납덩어리가 되어 나의 가슴을 압박(壓迫)해, 심장은 금방 터질 것만 같았다. 고등고시 응시원서를 제출해놓고도 도무지 책을 펼만한 마음의 안정이 되지 않았다.

 ‘청무주(靑無柱) 향무점(香無点)’. 청(靑)자에서 기둥이 없으면 ‘三月’, 향(香)자에서 점이 없으면 ‘十八日’. 세상이 뒤숭숭하면 유언비어(流言蜚語)가 난무(亂舞)하기 마련인데, 일찍이 이런 말이 떠돌더니 아니나 다를까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규탄(糾彈)하는 궐기대회(蹶起大會)가  마산에서 발화(發火)하여 서울로 인화(引火)되었다. 3,4월 내내 대학생들의 데모는 교수단의 데모로, 심지어 국민학생까지 번져 온 나라가 데모의 불바다가 되었다. 계엄령(戒嚴令)이 포고(布告)되었으나 데모대가 경무대(景武臺→청와대)를 향하자, 경찰의 발포(發砲)로 사상자(死傷者)가 속출했다. 마침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하야(下野)한 후 하와이로 망명(亡命)하고, 부통령 당선자인 이기붕(李起鵬) 일가가 자살을 하며, 여당 신문인 서울신문 사옥(社屋)이 불탔다. 마침내 4.19 학생혁명(革命)으로, 허정(許政) 과도정부(過渡政府)가 들어서면서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 개헌안(改憲案)이 통과되었다. 이에 야당이었던 민주당(民主黨) 정부가 들어섰다. 야당 생활만 해왔던 아버지는 원기(元氣)를 회복한 듯, 도의원(道議員)이나 출마(出馬)하겠다고 고향에 내려가 민주당 신파(新派) 김형배(金亨培)씨의 민의원(民議院) 선거 운동을 했었다. 그러나 김씨는 낙선(落選)하고 건강을 잃은 아버지는 패잔병(敗殘兵)이 되어 상경하였다. 정치 이야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 아버지였지만, 신.구파(新.舊派)로 갈린 민주당의 내분(內紛)과, 정권 교체(交替) 후의 사회적 혼란(混亂)에 대한 환멸(幻滅)의 수렁에 깊이 빠져들었다. 게다가 팔리지 않은 채 동네 놀이터가 되어버린 가옥(家屋)과, 짙어 가는 병세(病勢) 때문에 더 이상의 삶에 대한 희망조차 잃어버린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기왕 지어놓은 집이니, 팔릴 때까지 집이나 지키자며 1960년 5월 9일 신길동(新吉洞)에서 흑석동(黑石洞)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제 노량진까지 걸어가 수원행 버스를 타고 대림동(大林洞)에서 내려, 또 산을 타고 학교까지 갔다. 큰 고개 세 번을 넘는데 1시간, 버스 타는데 20분. 그러니까 매일 통근 시간이 1시간 20분이다. 시간도, 버스비도 아깝고 무엇보다도 피곤해서 하는 수 없이 학교 숙직을 전담(專擔)하기로 하고, 영숙(英淑)이네 집에서 월 10,000환 짜리 매식(買食)을 하기로 했다. 고등고시가 10월로 연기(延期)되었기 때문에 약간의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여유가 생기고 보니 뒷산 뻐꾸기의 독창과, 개울물의 반주(伴奏)에 맞추어 부르는 앞 논 개구리들의 합창이 참 아름답게 들려왔다.

 “누구야! ”

 “으악! ”

 잠결에 쇠 긁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쥐려니 생각했으나 유리를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또 들렸다. 예민(銳敏)해진 신경으로 불길(不吉)한 예감(豫感)이 들어 옆에 누워있는 청부(廳夫) H씨를 흔들어 깨웠다. H씨는 갑자기 벼락같은 고함(高喊)을 지르며 복도 쪽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나도 덩달아 뛰어나갔다. 도둑도 얼떨결에 소리를 지르며 복도 창문을 뛰어넘어 도망갔다. 직원실 자물쇠를 끊고 창살을 뜯은 채 들어오려는 찰나(刹那)에 발견 된 것인데, 숙직실(宿直室) 문 앞에 커다란 참나무 몽둥이를 세워 놓았었다. 여의치 않으면 휘두를 계획이었으리라. 아찔했다. 도둑은 내쫓아야지 잡으려 들면 해친다고들 하지 않는가? 운동회 때 쓰는 신호탄(信號彈)을 쏘면 어떻겠느냐는 방안도 나왔으나, 숙직을 강화(强化)한다는 말 외에 다른 묘안(妙案)이 나오지 않았다.

 쉬운 말로 강화(强化)지 숙직을 전담하는 나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공교롭게도 취직(就職)한 초창기부터 도둑과 관련이 깊었다. 어렸을 적에도 절도범(竊盜犯)을 잡았던 일이 있었지 않은가? 50, 60년대는 경제가 어려워 도둑이 들끓었다. 학교 근처에 공군사관학교(空軍士官學校)가 있었고 증축(增築) 공사가 한창인데, 밤이면 자재(資材)를 빼돌리는 지게부대가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운반했다. 신고(申告)를 했겠지만 경찰은 손을 쓰지 못했으리라. 마장천 위에 마장교(馬場橋)가 있었는데 시흥에서 올라오는 트럭(truck)들이, 급 커어브(curve)길인 이 다리 앞에서는 천천히 지나갔다. 그런데 이 다리 밑에는 절도범 패거리가 상주(常駐)하여 있었고, 이들은 잽싸게 트럭 위에 올라가서 짐을 내리 던지거나, 가로수에 지렛대를 설치하여 갈고리를 걸어 들어 올려 물자를 빼돌렸다. 이 다리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경찰지서가 있었으나 절도업(竊盜業)은 끄떡없이 성업(盛業)이었다. 

 물론 학교에서도 그 동안 도난 사고가 심심하지 않게 있었다. 사전(辭典)류, 괘종시계, 오르간(organ) 건반, 종, 커어튼(curtain). 결식아 배급용 분유(粉乳)와 강냉이 가루까지 빼돌렸다. 심지어 전선(電線)까지 끊어가서 가끔 촛불 신세를 져야만 했으며, 철봉을 빼가려다 발각되어 싸움판까지 벌어졌으나 그야말로 적반하장(賊反荷杖)으로 협박까지 받았다. 교무실 한 쪽에 임시 숙직실을 마련해 놓았으나 어느 새 어떻게 빼돌리는지 당해낼 수가 없어, 내부에서 일어난 소행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해봤지만, 단서(端緖)도 없고 증거(證據)도 확실한 것이 아니었다. 지서에 신고해 봐도 조사만 할 뿐 아무런 조치(措置)가 없었다. 달이 없는 날, 바람 부는 날이나 쥐들이 설치는 날이면 신경이 곤두서서 깊은 잠을 자지 못하였다.

 학교 운동장 옆에는 커다란 오물 저장 함정(陷穽)이 있었다. 운동할 때마다 공이 빠져 J선생이 반 아이들과 함께 흙으로 메워버렸다. 이에 화가 난 주인은 삽을 치켜들고 J선생을 죽여 버리겠다고 달려들었다. 

 “니 놈들은 똥 안 먹고 사냐? 너 죽고 나 죽자!"

 ‘학교 환경 정화법’을 들이대면서 학교 주변에 이런 시설물(施設物)을 할 수 없다고 했으나, 그의 살기(殺氣) 등등한 행동을 말릴 재간이 없어서 선생들이 모두들 피해 다녔다. 그 아들이 이 학교 출신이란 걸 알아 가지고, 그 아들을 통해서 원상(原狀) 회복할 것을 약속하고 간신히 해결을 하였는데, 교육계가 이렇게도 허약(虛弱)하며, 교권(敎權)이 삽날 앞에서 이렇게도 무너져야 하는지 비애(悲哀)가 앞섰다. 하기야 우리들도 학교 교재원에 채소를 심고 분뇨(糞尿)로 거름을 주고 있는 터여서 할 말이 없었지.

 비가 오면 마장천은 삽시간에 범람(氾濫)했다. 관악산(冠岳山)에 나무가 없는 탓이요 상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물이 불어 물살이 세어지면 남자선생들은 팬티 바람으로 냇물로 들어가 인간 띠를 만들어 아이들의 등교(登校)를 도왔다. 그나마 급류(急流)가 되면 그 일조차 포기하고, 건너편 냇둑까지만 나오면 출석(出席)으로 잡아주는 것이 관례(慣例)였다. 겨울에 징검다리를 건너오다 물에 빠진 아이들의 양말을 난로에 말려서 신기는 일은 보통이었다. 이렇게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해도 썩 머리 좋은 아이가 없었고, 따라서 공부 잘 한 아이가 드물었다. 기초 실력이 너무 없어서 가르치기가 참 힘들었다. 재적수도 적었지만 남자는 용산(龍山)중학교, 여자는 숙명여(淑明女)중에 합격하면 최고였다. 가정 형편으로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이 태반이었으며, 학령을 넘어 문창학교에 부설(附設)된 고등공민학교(高等公民學校)에 다니다가 어느 정도의 학력(學力)이 되면 국민학교로 편입학(編入學)한 아이들도 상당수였다. 그래도 할 일은 다 했다. 오히려 측은(惻隱)한 마음에 더 열심히 가르쳤다. 아마도 교직 생활 중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보람 있게 가르쳤을 것이다. 더구나 인력(人力)은 모자란데 나는 서무계(庶務係)를 맡아 잡무(雜務)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가르치는 일이 교사인데, 공문 기안(起案)하고 보고하고 조사하고 서류 정리하고......번문욕례(繁文縟禮)가 나라를 망치는 것 같았다.    

 여름 방학이 되었으나 집에 가지 않고 학교를 지키며 공부를 했다. 더위와 모기와의 전쟁을 선포했으나 당해낼 수가 없었다. 역시 공부다운 공부를 못해본 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고등고시 시험에 응시했다. 6000여명이나 되는 응시자들이 저마다 청운(靑雲)의 꿈을 안고 모여들었으나 합격의 문은 그야말로 바늘구멍. 28일에 있었던 사법과 발표에 내 이름은 물론 없었다. 처음부터 합격에 대한 자신은 없었다. 제대로 공부다운 공부를 해보았으면 하는 것만이 간절한 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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