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시절
1959년. 불과 2년만 기다리면 소위 특(特)A 학교로의 전출이 보장된 곳이었지만, 모든 면에서 문창학교에서의 생활은 모두들 고달파 했다. 동료들은 실력과 열성(熱誠)을 다 갖추었는데도 이유 없이 유배되어온 듯한 불만 때문에, 허탈감을 달랠 길이 없어 퇴근길에 술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나는 학교에서 숙직(宿直)을 전담하면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술을 들지 않았기 때문에 합석(合席)을 못하였지만, 그들은 숙직을 대직(代直)해준 나를 고마워하고 늘 위로해 주겠다고 별렀다.
“ 오늘은 최선생 총각 딱지를 떼어주자.”
어느 날 의기투합(意氣投合)한 동료들은 이 백면서생(白面書生)에게 재미있는 세상 구경을 시켜주겠노라고 나를 유인(誘引)했다. 그 당시 호탕(浩蕩)했던 젊은 L교감은 부인과 별거(別居) 상태에서, 문화인의 필수품(必需品)이요 상비품(常備品)이라고 저고리 안주머니에서 콘돔(condom)을 꺼내 보이며, 이 거사(擧事)에 적극 호응(呼應)했다. N선생도 임신 중인 부인이 성병(性病)에만 걸리지 말라면서 챙겨주는 콘돔을 스스럼없이 보여 주었다. 말로만 듣던 콘돔을 보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후의(厚意)를 무시한 채 고고(孤高)한 척 하는 것도 모양새가 안 좋고, 중학 시절부터 나의 좌우명이었던 삼금주의(三禁主義)도 시험해볼 겸, 못이긴 척 하면서 따라나섰다. 5년 전 영등포역전 휘파람 골목 입구에서 도망친 사건 이후 처음인 셈이다. 용산역전 술집에서 간단하게 한 잔 들고 뒷골목에 들어서니, 기다란 나무 의자에 여자들이 마치 제비들처럼 걸터앉아서 저마다 얼굴들을 내밀고 있었다. 싸구려 분을 얼마나 찍어 발랐는지 밀랍(蜜蠟)처럼 허연 얼굴들이 금방 거푸집에서 나온 것처럼 똑같은데다가, 희미한 불빛에 바랜 듯 꾀죄죄한 옷차림들이, 끌어 당기는커녕 오히려 자석(磁石)의 같은 극(極)처럼 내 맘을 떼밀어냈다. 허름한 미닫이문을 열고 보니, 닭장 같은 집에 커튼 하나로 칸막이 된 비좁은 방에서는 뒤엉켜진 남녀가 커튼 사이로 슬쩍슬쩍 눈에 들어왔다. 거의 수직(垂直)으로 걸쳐있는 층계 위는 2층 방인데, 삐거덕거리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물고기 낚아채 듯 한 여자씩 데리고 들어가 이렇게 뒹구는 것이다. 훔쳐보는 나는 성욕(性慾)이 일기는커녕 오히려 사그라질 판인데, 당사자들의
쾌감(快感)은 오히려 상승작용(相乘作用)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봐선 안 될 것 본 것 같은 혐오감(嫌惡感)이 갑자기 가슴속을 메스껍게 하였다.
‘세상에 이런 곳이 환락가(歡樂街)라고 드나들다니....’
‘날 이런 곳을 구경시켜 준다고....’
당장 뒤돌아서고 싶어 주춤거리고 있으려니까, 이곳은 휴가병이나 날품팔이들이 드나들면서 숏타임(short time) 하는 곳이지, 좋은 곳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야말로 사창가(私娼街) 매음굴(賣淫窟)이다.
다시 발걸음을 옮긴 곳은 일반 주택이었다. 현관 쪽 방 안에 들어서자 콘돔을 나누어주었다. 이윽고 여자들이 하나씩 들어오는데, 나더러 우선권(優先權)을 줄 테니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잡으라는 것이다. 나는 맨 나중에 고르겠다고 하니까, 한 사람씩 짝을 지어 나갔다. 마지막 남은 여자가 안내를 하는데, 좁은 방 안에는 개켜진 이부자리만 덩그렇게 놓여 있고, 30W 짜리 희미한 전등 하나가 양쪽 방 공용(共用)으로 메달아 있었다. 나더러 어서 옷을 벗으라고 하였다. 입을 다문 채 벽에 기대어 앉았으려니까 왜 기분이 안 좋게 보인다는 것이다. 난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순간 여자의 손이 내 허리춤을 잽싸게 파고들었다. 나는 손을 붙잡아 빼내었다.
“알았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는 사과를 깎아가지고 들어오더니 먹으면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훌쩍 나가버렸다. 과일에 손이 갈 리가 없었다. 옆방에서는 키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앉았으려니까 웃음도 나왔고, 내가 왜 따라왔을까 은근히 후회도 되었다. 얼마 만이었을까
“최선생, 그만 하고 나와, 너무 오래 하지 마!”
이윽고 밖에서 동료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부리나케 뛰어나왔다.
“최선생이 제일 좋아하는구만.”
“오늘 총각 딱지 떼었군.”
화대(花代)까지 대납(代納)하면서 뭐가 그리도 유쾌(愉快)한지, 그들은 손뼉을 치면서 골목이 떠들썩하게 너털웃음을 웃었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요지경(瑤池鏡)을 구경했는데, 이후 그들은 그들의 적선(積善)으로 그야말로 내가 총각 딱지를 뗀 줄 알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우리 패들은 술자리를 찾는다고 종로를 기웃거리며 걷고 있었다. 어느덧 뒷골목에 접어들었는데 곧 유명하다는 종삼(鍾三)인 것이다. 이제는 나도 풋내기는 아니어서 호기심을 가지고 제법 의젓하게 뒤 따랐다. 그런데 용산역전과는 전혀 다른 이방(異邦)이었다. 줄지어 선 한옥 대문에는 빨간 전등이 켜져 있었다. 그야말로 홍등가(紅燈街)인 셈이다. ‘솔개’라고 부르는 잠바(jumper) 차림의 어깨들이 여기저기 눈에 띌 뿐, 골목에 여자라고는 그림자도 없었다. 이곳은 정기적으로 위생검사(衛生檢査)를 철저히 하는 공창(公娼)이라고 했다. 대문 안에 들어서니 포주(抱主)가 반가이 맞이하며 방안으로 안내했다. 곧 술상이 들어왔는데, 생굴 등 이른바 정력(精力) 음식이라고 했다. 술자리가 끝나고 각각 방으로 안내되었는데, 깨끗한 침대도 놓여있고, 레이스(lace)가 달린 커튼이나 전등이 제법 호화롭게 장식되어있었다. 그리고 여자도 선정적(煽情的)인 차림으로 교태(嬌態)를 부렸다.
“전 오늘 건강이 안 좋아 먼저 갈 테니 그렇게 아세요.”
하였더니, 그는 얼른 나가서 구두를 챙겨 왔다. 구두는 이미 댓돌 위에 있지 않고 어디엔가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고마워요.”
그는 솔개를 불러 나를 안내하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솔개를 따라 큰길로 나와 곧바로 집
으로 줄행랑을 쳤다. 두 번째 요지경 구경이었다. 물론 적지 않은 화대(花代)를 누군가 선금(先金)으로 계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튿날 그들은 내가 어떻게 된 셈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이미 숫총각이 아니라고 별로 무관심한 듯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최고급이어서 화대가 엄청난 곳이라고 했다. 박봉(薄俸)인데도 그토록 많은 돈을 써가면서 까지 왜 나를 생각하는 것일까? 진심으로 공부에 지친 나의 피로와 고독을 풀어주고, 넘쳐나는 젊은 정욕(情慾)을 분출(噴出)시켜주고자 하는 호의(好意)요 선심(善心)일까? 그리고 처자식이 있는 기혼자와 결혼을 앞두고 열애(熱愛)중인 미혼자가 왜 홍등가를 출입하는 것일까? 그게 소위 남성들의 수렵(狩獵) 본능이라는 것일까? 참 궁금했다. 아무튼 충동(衝動)과 본능(本能)으로부터 해방된 의지(意志)의 자유를 만끽(滿喫)했다고나 할까. 다만 숫총각은 없겠다는 씁쓰레한 느낌만이 내 가슴에 자리 잡았다.
그로부터 1년. 사직한 채 최후의 혈전(血戰)을 앞두고 고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공부하다 말고 깜빡 잠이 든 깊은 밤인데, 들창 쪽에서 웬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신경이 예민해진 나는 도둑이라고 직감(直感)했다. 그 곳은 우리 집과 이웃집의 처마가 맞닿은 공간이요, 그 집에서 헛간으로 쓰는 곳이다. 우리 방에 들어오기 위해서 망을 보며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방망이를 찾아 들었다. 그리고 창문을 열기만 하면 내리칠 태세를 갖추고 그들의 소곤거림에 귀를 기울였다. 교직 생활할 때 흔히 겪었던 도둑이요, 도난 당할만한 귀중품이 있는 건 아니기에,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는 마음의 여유로 긴장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호기심(好奇心)도 생겼다. 창호지(窓戶紙)에 바싹 귀를 대고 보니 남녀 두 사람의 목소리였다. 이윽고 두 사람의 흥분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아, 붙었구나!’
드디어 나의 가슴이 뛰기 시작하고 나의 아랫도리도 달아올랐다. 그 집에는 과년(過年)한 딸이 있었고 중대생(中大生)을 하숙(下宿)치고 있었는데, 서로 눈이 맞아 그렇게 성애(性愛)를 즐기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처녀 총각 행세를 하겠지’ 라는 생각에 입안이 씁쓰레 하고, 그들을 보는 나의 시선이 삐딱해졌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뒷산에 올라가 공부를 하던 중이었다. 인적(人跡)이 드문 넓은 바위에서 웃통까지 벗고 앉아서 책을 보고 있으려니까, 뒤에서 남녀의 소곤거림이 들려 왔다. 오리나무를 비롯해서 관목(灌木)이 빽빽이 들이차 있는 곳이다. 살며시 뒤돌아보니 남녀 한 쌍이 포옹(抱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살그머니 자리를 비켜줘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몸이 무거웠다.
‘ 내게 들켰단 걸 알면 가만있을까? 불쾌한 나머지 큰 돌이라도 들고 와서 내 뒤통수를 내리치지 않을까?’
이런 불안감이 엄습(掩襲)하면서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모른 척 하는 것이 상수(上數)라고 판단해서, 그야말로 내가 동상(銅像)이 되어 미동(微動)도 못하였다. 활자(活字)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뒤엉켜 있는 그들의 영상(映像)만이 내 책에 가득 채워졌다.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그들의 시시덕거리는 소리가 음향효과(音響效果)까지 내어, 한편의 에로(erotic)영화를 보는 듯 내 몸도 후끈 달아올랐다. 갑자기 정적(靜寂)이 찾아왔다. 그들이 다가온 것 같이 공연(空然)히 두려워졌다. 한참만에야 죄인처럼 흘깃 뒤돌아봤다. 이미 새들은 날아가고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처럼 둥지만 휘휘하게 남았다. 비로소 기지개를 켜고 일어선 나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들은 저만치 능선(稜線)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차림으로 봐서 역시 중대생들 같았다.
나는 공부도 되지 않고 호기심이 생겨서, 책을 들고 둥지 쪽으로 발을 옮겼다. 애꿎게 잡초
들은 문드러지고, 드문드문 젖은 흙들이 방울방울 빚어졌는데, 횡재(橫財)한 개미떼들이 영차영차 그 화물(貨物)을 운반하고 있었다. 그 후 난 그 곳을 *'차타레부인의 숲'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 숲을 지나고 그 바위에 앉기만 하면 어김없이 그 영화가 상연(上演)되었다.
‘그러니 숫처녀가 어디 있담. 그런 여자와 결혼해야 된다는 말인가?’
그 사건 며칠 후 곧 고시를 보게 되었고, 졸도하여 낙방했다. 당시 고시 시험중 졸도할 때 듣지도 못했던 유정(遺精)을 했기에, 일종의 병(病)이 아닌지 은근히 걱정되기도 했는데, 그 사건과 인과관계(因果關係)가 아니었을까.....
사법 시험을 포기하고, 다시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어느 날이었다. 화장사가 내려다보이는 국립묘지 쪽 숲속 바위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문득 멀리 여인이 눈에 띄었다. 당시에는 상도동으로 가로지르는 산길이 나 있었는데, 이 길을 따라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발아래 굽어보이는 곳까지 가까이 다가오고 있을 때, 순간 성적 욕망이 꿈틀거렸다. 남성의 성욕(性慾)은 시각적(視覺的)이라는데 곧 이런 것일까? 이래서 아무도 없는 이런 곳에서 맞닥뜨리면 강간(强姦)을 하는 것일까? 사랑하기는커녕 알지도 못한 사람과도 과연 성애(性愛)가 원만히 이루어지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그 여인은 내 시야(視野)에서 멀리 비켜났다. 내리질러 가도 한참 가야할 거리요, 얼굴 윤곽(輪廓)도 희미한데, 성욕 하나 때문에 저돌적(猪突的)으로 덤벼들 내가 아니지만, 아무튼 용암(熔岩)을 분출하는 분화구(噴火口) 같은 생리(生理)를 참는 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나를 받쳐주고 있는 의지(意志)의 허상(虛像)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인간의 아폴로(Apollo)적인 면 후면(後面)에는 이와 같은 디오니소스 (Dionysos)적인 면이 또한 강하게 버티고 있다는 걸 실감(實感)할 수 있었다.
간디(Gandhy)는 31세에 부부관계까지 끊어버렸고, 37세에 영원한 순결을 서약해 일생의 성적 절제(節制)를 확인했다. 그런 그도 성 충동(衝動)과 욕구(慾求)는 완전히 이겨내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네 차례나 매음굴(賣淫窟)로 나서려던 그를 하느님이 구해줬다고 자서전에 썼다. 톨스토이(Tolstoy)도 ‘성욕과의 싸움이 가장 어려운 투쟁이다. 이 욕망은 만족하는 법이 없다’고 하였다. 송(宋)나라 시인 황정견(黃庭堅)이 생구탈통(生龜脫筒)이라 했다. 산 거북이가 통 빠져 나오듯이, 정욕(情慾)이 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정욕을 누르지 못함을 말과 원숭이에 비유하여 의마심원(意馬心猿)이라는 말도 있다. 의지와 본능의 권투(拳鬪) 시합에서 챔피언(champion)은 응당 의지라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나도, 본능적인 충동이 언제든지 챔피언 벨트(belt)를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다만 이들 싸움의 링(ring)을 어디에 어떻게 마련하며, 관중(觀衆)이 누구냐가 함수(函數)일 것이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났다. 우리는 전세로 바깥채에 살고 있었고, 안채는 집 주인이 몇몇 중대생들을 하숙치고 있었다. 과부(寡婦)인 주인은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며칠 만에 한 번씩 들렀고, 처녀 식모(食母)가 과부의 외아들(중학생)을 데리고 학교에 보내며 살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외상이면 당나귀도 잡아먹는다고 이 식모가 가게마다 외상을 깔아놓고 어느 날 어디론지 삼십육계(三十六計)를 하고 말았다. 빚쟁이들이 몰려오고, 영문을 모르는 주인은 어이없어 애꿎은 아들만 족쳤다.
“이 등신아, 누나가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냐?”
“......................”
“그래, 누나가 학생들하고 자는 걸 못 봤냐?”
“누나 위로 학생들이 올라타고 잤어요.”
“누구하고?”
“○○형, ××형....”
주인 아주머니는 학생들을 나무라고, 학생들은 오리발을 내밀었다. 식모는 외상 걷어다가 학생들에게 최선의 서어비스(service)를 하여 왔고, 학생들은 일처다부(一妻多夫)의 기둥서방을 해 온 것이 드러난 셈이다. 그 후 이 안채는 다른 사람에게 전세로 내주고, 아들은 데리고 갔다. 아들은 중학생이었지만 정신연령(精神年令)이 낮아 좀 모자랐고 말도 어눌했다. 이 무렵 또 하나의 요지경을 구경했다. 이 집 뜰 안에 들어서려면 안쪽으로 층계가 있는데, 바삐 한길을 지나치다 보면 눈에 얼른 띄지 않아서 으슥한 편이다. 그날따라 인적(人跡)이 끊기고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데, 층계 한쪽 구석에서 어둠을 이불 삼아 둘러쓴 채 남녀가 앉은 채로 뒤엉켜 있었다. 난 대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난처(難處)할 수가 없었다. 그 집 하숙생이었는데 어느 여자인지 데리고 와서 데이트를 한다는 게 그만 선을 넘은 것 같았다. 하숙집 처녀와도 계속 관계를 해온 터인데도 말이다.
“죄송합니다”
“....................”
이제는 요지경(瑤池鏡)을 통해서 이런 인생의 이면(裏面)에 많이 익숙해졌고, 이해의 폭(幅)도 꽤 넓어졌으나, 내가 미혼이기 때문인지 뒷맛이 썩 개운치 않음은 사실이었다. 대관절(大關節) 이 세상에 숫총각 숫처녀가 있다는 말인가? 공교롭게 미혼인 나만 이런 장면을 목격(目擊)하게 된다는 말인가? 결혼 때까지는 내가 동정(童貞)을 지킴은, 물론 상대방도 마땅히 정조(貞操)를 지켜야 한다는 내 ‘혼전(婚前) 순결(純潔)’ 계명판(誡命板)을 박물관(博物館)에 보내야만 하는가? 모세(Moses)처럼 내던져야만 하는가?
*'차타레부인의 숲'...영국 D.H.로렌스의 대표작 ‘챠타레 부인의 사랑’에 나오는 숲. 무분별 한 성행위를 파격적으로 묘사함으로서, 성표현의 자유의 논란을 일으켰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