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시절
의식주(衣食住)라고 했는데 ‘우리 집’ 이란 말을 모르고 성장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사범학교 시절에 처음으로 빚을 안고 조그만 집을 한 채 장만했는데, 내가 취직(就職)을 한지 3년 만에 세탁업(洗濯業)을 하다가 화재가 나서 집을 잃고, 1958년 8월 9일 온 가족이 서울 우리 자취방(自炊房)으로 와버렸다.
그 해 10월 24일 아버지께서는 노량진 본동(本洞)시장 안에다가 조그만 식료품(食料品) 가게를 차렸다. 자본(資本)도 없고 경기(景氣)를 타지 않으므로 안정된 업종(業種)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세(零細) 자본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주위의 기존(旣存) 가게들과 경쟁이 되지 못하였다. 하는 수 없이 분루(憤淚)를 삼키며 이듬해 1959년 1월 3일 신길동(新吉洞)으로 가게를 옮겼다. 거처(居處)가 가까워졌고, 재고품(在庫品)은 우리가 먹을 수 있었으나, 신경을 많이 써서 피곤(疲困)한데다가, 외상 때문에 도저히 지탱(支撑)하기가 힘들었다. 마침내 8월 3일 9개월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100,000圜 정도의 결손(缺損)이 났다. 아버지께서는 벌써부터 가게를 포기(抛棄)하고 그 동안 건축(建築)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 몇 채만 지으면 우리 집 한 채는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흑석동 뒷산 중턱에 대지(垈地)를 외상으로 사놓고, 건축 허가(許可)를 얻기 위해서 동분서주(東奔西走)하였다. 자본이 없기 때문에 장흥 용산(蓉山)면의 이모부와 합자(合資)하기로 한 것이다. 이모부는 농사를 지었으나 식솔(食率)은 늘고 농업으로는 생계가 어려웠기 때문에 돌파구(突破口)를 찾던 중, 동서(同壻)끼리 서로 뜻이 맞은 것이다. 모든 재산을 다 팔아 280,000圜을 보내왔다. 희망에 부푼 아버지는 집터를 닦아놓고 목재(木材)도 사들였다. 그러나 선결(先決) 문제인 풍치지구(風致地區)가 쉬 해제(解除)되지 않았다. 관계 행정관서(行政官署)는 큰 뇌물(賂物)에만 생각이 있었다. 쌓아놓은 자재(資材)는 비를 맞고 도난(盜難)당하는가 하면, 일부 자재는 큰 하자(瑕疵)가 있었다. 도난(盜難)을 막기 위해 허허 벌판에서 잠을 자야 하고, 비를 맞히지 않기 위해 밤을 새워야 했다. 초조해진 아버지는 무허가(無許可)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경찰들이 와서 벽을 헐고 아버지는 경찰서에 불려 다니고....관할 구청, 경찰서, 파출소, 소방서 등 관계 기관의 방해(妨害)로 일이 진척(進陟)될 리가 없었다. 이런 와중(渦中)에서 총책(總責)인 홍(洪) 목수는 자재(資材)를 빼돌리고 바꿔치기를 한 후 종적(蹤迹)을 감추었다. 아버지는 사기꾼 홍씨를 상대로 손해배상(損害賠償) 소송(訴訟)을 하기 위해, 내용증명(內容證明) 우편(郵便)을 띄웠으나 행방불명(行方不明)으로 송달(送達)되지 못하였다. 지주(地主).목수(木手).토수(土手).잡역부(雜役夫)..... 모두 빚 독촉(督促)인데, 아버지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기침과 헛소리, 어지럼 증세는 계속되는 것이다.
건축 허가 신청을 한지 두 달 만인 9월 28일 가까스로 두 채 분의 상량(上樑)이 있었다. 그러나 자금(資金)은 계속 들어가야 하는데 나올 곳이 없어 기진맥진(氣盡脈盡)한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이모부는 10월 20일 하향(下鄕)해버리고, 한 채는 11월 10일 팔아버렸다. 급기야(及其也) 아버지는 불면증(不眠症)과 신경과민(神經過敏)과 과로(過勞)가 겹쳐, 흑석동(黑石洞) 고갯길을 오르내리면서 몇 번이나 뇌빈혈(腦貧血)로 졸도(卒倒)를 하더니 병색(病色)이 짙어갔다. 나는 학교에 출근하랴, 제11회 고등고시 시험 보랴, 지원(志願) 입대하랴 건축 일을 돕지 못했으나, 아버지의 얼굴에서 일기 시작한 먹구름이 온 집안에 밀려들고 있었다.
한편 11월 13일 이사(移徙)를 하였다. 자취 생활 3년 3개월 만에 신길동 조씨(용주네) 집을 떠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진주로 이사 가게 된 김씨(군헌이네) 집으로 15만환을 차입(借入)해서 세를 들었다. 단칸방이었으나 넓고 깨끗하고 밝아서 좋았다. 이 때부터 부채(負債)는 늘어갔다.
해가 바뀌어 1960년이 되었다. 집 모양은 갖추었으나 꾸미지를 못해서 엉성했다. 부동산 경기가 침체(沈滯)되어 사겠다는 사람 한 사람 없고, 게다가 나의 입대 문제, 상수 동생의 진로(進路) 문제, 건수 동생의 잔병 치리들이 엎친데 덮쳐, 우리 집안은 입원실(入院室)이나 감옥(監獄)같이 웃음을 잃은지 이미 오래였다. 한편 3.15 부정선거(不正選擧)를 규탄(糾彈)하는 데모로 세상이 극도(極度)로 혼란에 빠지고, 급기야(及其也) 4.19 학생혁명(學生革命)이 일어났다.
뜻밖에 5월 7일 집 주인 김(金)씨가 이사를 왔다. 20일 전쯤 방을 비우라는 통고(通告)를 받았으나 예고(豫告)도 없이 너무 무례(無禮)했다. 전세금 15만환을 보내달라는 두 번의 편지를 받지 못했노라면서. 집 없는 설움을 또다시 톡톡히 보면서 셋방을 얻으러 다녔다. 그러나 돈은 적고 방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기왕 지어놓은 집이니, 팔릴 때까지 집이나 지키자며 소꿉놀이 같은 이삿짐을 꾸려서, 5월 9일 신길동(新吉洞)에서 흑석동(黑石洞) 집으로 이사를 했다. 뼈대만 앙상한 집에 도배만 하고 들어왔는데도 내 집이니까 참으로 좋았다. 시외버스를 타고 20분, 도보(徒步)로 1시간 걸려 통근하게 되어 참으로 피곤했다. 그러나 내 집이라는 생각에 일단 마음의 안정은 되었다.
그 동안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렸고, 심지어는 용변(用便)도 해서 새 집이 아니라 헌 집 그대로였다. 또한 우리 마당을 넓히기 위해서 공용로(共用路)를 침범한다고 동네 사람들이 대들었다. 물론 빚 독촉도 여전했다. 출퇴근이 너무 힘들고 교통비도 만만치 않으며 공부도 할 겸 학교 숙직을 전담(專擔)하기로 하고, 학교 근처에서 매식(買食)하기로 했다.
한 해가 또 바뀌어 1961년이 되었다. 부동산 경기는 여전히 침체(沈滯)되어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은 그림자도 없었으나, 빚은 눈 덩어리처럼 커지고 빚쟁이들만 뻔질나게 출입했다. 하는 수 없이 건넌방은 채권자(債權者)인 서씨(徐氏=해창이네)에게 내주었다. 투자(投資)를 해놓고 낙향(落鄕)한 이모부께서 1960년 12월 말엽 갑자기 작고(作故)하는 바람에 큰 충격에 휩싸였는데, 아버지의 병세(病勢)마저 회복(回復)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채 점점 악화되어 갔다. 게다가 나는 5년 11개월 만인 2월 말에 사직(辭職)을 하고 말았다. 병역(兵役) 문제가 직접적인 이유였지만, 공부에 전념하자는 계획이 컸었다. 당장 굶어야 했기 때문에 S씨(재헌이네)댁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그런데 1961년 5월 5일 마침내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장례(葬禮)를 치르고 나니 빚더미는 더욱 커졌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S씨네 사업에도 큰 타격(打擊)을 입혀, 기대했던 최저생활비(最低生活費)는커녕 내 밥 얻어먹기도 힘들었다. 상수 동생의 학비(學費)를 대주지 못했던 것은 물론, 가족들을 부양(扶養)하지 못한 죄책감(罪責感) 때문에 고민(苦悶)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962년, 고등고시 합격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唯一)한 열쇠였는데, 나의 건강이나 가정 형편이나 주위 환경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
도였다. 연초(年初) 군대에 지원했다가 되돌아오고, 상수 동생도 지원 입대를 해버렸다. 어머니께서는 천주교(天主敎)구제협회에서 구호(救護) 식량(食糧)을 타오기도 하고, 취로(就勞) 사업장에서 동사무소로부터 배급 밀가루도 가져왔으나 입에 풀칠 정도였다.
손을 대지 못한 집은 나날이 허물어져 갔다. 안방에 아무리 불을 지펴도 얼음장인 이유를 알았다. 노임(勞賃)을 제 때에 주지 않았다는 앙갚음으로, 구들장 불길을 흙으로 막아버렸던 게 아닌가? 기가 막혔다. 흙벽이 더덕더덕 떨어져나가고 기둥이 기울어지기 시작했으며, 우물 바닥은 쩍쩍 갈라졌다. 집은 손보기 마련인데, 이러다가는 호미로 막을 것 가래로도 못 막을 것 같았다. 빚을 더 지더라도 수리(修理)해야만 하였다. 장마철이 되기 전 5월 12일부터 일을 시작했는데 헌 집 고치기라는 말이 있듯이, 자꾸 손보다 보니까 예산이 초과(超過)되었다. 집 살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제비 부부만 셋방 들자고 번질나게 처마 밑을 드나들었다.
가을이 되면서 셋방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집을 지은 이후 처음 보는 호황(好況)이라 어머니도 배짱이 늘었다. 어머니께서는 9월 10일 방 세 칸을 36,000원에 전세 놓자고 하였다. 23,000원 전세금을 반환하고 나면 10,000원이 남는데, 이걸로 이자(利子) 놀이를 하거나 봇짐장사를 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반대했다. 9월 17일 코브라(cobra 라) 부인에게 아랫방 두 칸을 16,000원에 전세를 놓고 12,000원을 먼저 받아, 천우네 전세금으로 내주었다. 천우네는 3년 만에 이사를 나가는데 그 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온갖 행패(行悖)를 부렸다. 자기네들이 부설(附設)했던 것을 모조리 뜯어갔다. 다 썩어빠진 판자 나부랭이를 어디다가 쓰려는지, 나일론 (nylon)빨랫줄, 심지어 두레박 끈까지 잘라가고, 미신(迷信)으로 방문 창호지(窓戶紙)까지 모조리 찢어 갈겨 어머니와 싸움을 했다. 참으로 한심(寒心)스런 광경이었다.
차양(遮陽) 공사를 시작했고, 해창이네 전세금을 반환해야 하는데 아랫방에서는 잔금(殘金)을 내지 않고 차일피일(此日彼日) 미루었다. 또 말다툼이 시작되었다. 해창이네는 기다리다 못해 10월 9일 2년 만에 흑석1동으로 새 집을 사서 이사를 갔다. 참으로 미안했으나 돈이 없었다. 10월 15일은 해창이네 살던 건넌방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이사 오겠다고 언약했던 ‘가’조의 학생들이 돈 때문에 2,3일 후에나 들어오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점심 때 ‘나’조의 학생들이 현금을 가지고 와서 계약(契約)하자고 했다. ‘가’조와의 언약 때문에 입장이 난처했으나, 복덕방 할아버지는 ‘가’조의 말을 믿을 수 없으니, 현금(現金)을 내놓는 사람이 우선이라며 즉시 계약하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해창이네 전세금 때문에 ‘나’조와 계약을 하고 우선 계약금 10,000원을 받았다.
그런데 저녁 때, 2,3일 걸릴 것이라던 ‘가’조의 학생들이 이삿짐을 가지고 들어온 게 아닌가? ‘나’조 학생들과 해약(解約)하기 위해서 어머니는 급히 상도동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나’조 학생들의 이삿짐도 겹쳐 들이닥쳤다. 참으로 난처(難處)했다. 누구의 잘 잘못을 가릴 수는 없고, 다른 방을 얻을 때까지 ‘나’조가 우리 집에서 함께 묵기로 했다. 전세금을 내주기 위해 흑석동 해창이네에 다녀온 어머니는 또 싸움을 한 모양이었다. 이자(利子)도 주지 못했으면서 복덕방(福德房)비와 전기료(電氣料)를 계산하자는 어머니가 야속했을 것이다. ‘나’조 학생들은 사흘만에 나갔지만, 내 집 내 방 가지고도 이렇게도 속이 썩었다.
두 달이 되었는데도 아랫방 부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잔금 1,000원은 내도 좋고 안 내도 좋은 서어비스(service) 돈이라는 둥 별별 말을 다 했다. 그리고 방 한 칸은 자기가 세놓겠다는 말도 했다. 일마다 트집을 잡고 어머니를 괴롭히며 대들어서 한 울타리 안에서 도저히 같이 살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복덕방에 내놓기로 했다. 전주에서 온 S씨(태숙이네)가 11월 25일 이사를 들어왔다. 이사하기로 한 코브라 부인은 아침부터 종적(蹤迹)을 감추고 나타나지 않아, 이삿짐을 풀지 못하고 이곳저곳에 쌓아두었다. 저녁때야 슬슬 기어 들어온 코브라와 한 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내가 오죽하면 코브라(cobra 라) 독사(毒蛇)라고 폭언(暴言)을 했으랴? 11월 30일은 잊을 수 없는 악몽(惡夢)의 날이다. 끝까지 똬리를 튼 채고 버티고 있는 코브라 방 창문과 방문을 전부 철거(撤去)시켜 버렸다. 독이 오른 코브라도 우리 방문을 부수겠다고 덤벼들어 어머니와 주먹 싸움으로 번졌다. S씨가 달래고 달래서 이사 비용 100원을 내주고 간신히 쫓아내었다. 그는 어느 세무공무원의 내연(內緣)의 처로 딸 하나를 두며 살고 있는데, 결국 보이콧(boycott) 당하고 생과부(寡婦)로 살고 있는 불쌍한 여인이었다. 그래서인지 여간 독한 여자가 아니었다. 우리가 여유만 있으면 도와주어도 좋을 사람인데, 우리의 처지가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튼 11월과 함께 코브라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이윽고 1962년도 저물었다.
1963년. 해동(解凍)이 되면서 복덕방 할아버지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우리 집을 팔 생각이 없느냐고 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 하더니 듣는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랫방에 전세든 S씨네와의 관계가 점점 소원(疏遠)해진 것이다. 경찰계에 있다가 퇴직(退職)했다는데, 첩(妾)과 함께 상경(上京)하여 리어카아(rear-car)를 끌면서 물장사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한데, 본처(本妻)와의 혼인(婚姻)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상태로, 아이들 셋을 낳아 도피(逃避)하다시피 상경한 것이다. 그리하여 조속히 법적조치(法的措置)를 취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떼어놓고 나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이따금 부부 싸움을 했다. 두 부부가 교대(交代)로 가출(家出)하거나 자취를 감출 때마다 우리가 당혹스럽고 난처했다. 게다가 좀 모자란 아이 하나를 보수(報酬)도 주지 않은 채, 식모(食母)로 부려먹으면서 자꾸 때리고 쫓아내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기료, 분뇨(糞尿)처리비 등 문제로 어머니와 늘 옥신각신했다. 한 지붕 밑에서 살다가 보니 가슴이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축대(築臺) 쪽 변소의 개축(改築) 등 집 수리비(41원)가 계속 들어가야 했다. 안정된 분위기에서 공부를 하는 문제는 털끝만큼도 바랄 수 없는 처지였다. 달팽이 같은 집이라도 내 집이 있으면 한이 없겠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남의 집 셋방이라도 조용히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건넌방에서 자취해오던 학생들도 6개월만인 5월 22일 자취를 그만 두고 매식(買食)으로 돌아섰다가, 다시 6월 29일에는 아주 나갔다. 그 대신 다른 학생이 들어왔다. 장마철인지라 습기가 차서 아궁이에서 물이 나고, 방바닥과 벽들이 축축해서 곰팡이 냄새에 노린재도 기어 다녔다. 도배를 해달라고 하였는데, 돈도 한 푼 없을뿐더러 도배해도 종이가 붙을 것 같지가 않았다. 어려움을 이야기했더니 사흘 만에 다시 이사를 나갔다. 그 대신 7월 9일 그 형님이 방학 동안만 있겠다며 들어와서 또 10월 7일에 나갔다. 내 집 가지고도 이제 전세를 들고 나가고 하는 문제에 노이로제(Neurose 도)가 될 지경이었다. 앞으로 내 집이 또 마련된다면 절대로 세는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 무렵 누님이 임신중독(姙娠中毒)으로 입원하여 제왕수술(帝王手術)을 하고 쌍둥이를 낳았으나, 그만 운명(殞命)한 것이다.(6월 27일) 어머니는 딸을 손수 묻고 쌍둥이를 기르기 위해서 시골에서 올라오지 못하였다. 나는 자취(自炊) 신세가 되어 막내 동생 학교 뒷바라지 하랴 고등고시 시험 보랴, 끼니를 굶으면서 가슴이 터져 거의 미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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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4일. 복덕방에서 170,000원에 집을 팔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 때 마침 상수 동생도 제대를 하여 집에 와있고, 나는 또 10월 28일 입대를 해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집에 대한 미련(未練)을 가질 수가 없어서, 상수와 협의한 후 175,000원에 팔기로 25일 계약을 해버렸다. 지난 봄보다 25,000원 더 올려 받은 셈이다. 계약금 15,000원을 받고 복덕방비 2,000원을 냈다. 11월 14일 잔금(殘金)을 치르기로 했다. 곧 어머니와 이종제(姨從弟) 윤오에게 사실을 통보했다. 4,5년을 끌어오던 문제가 일시에 풀려 앓은 이를 뺀 듯 시원했다.
입대했으나 또 불합격 판정으로 귀향하여 본격적으로 셋방을 얻으러 다녔다. 11월 2일 尹씨네 2칸 짜리 방을 60,000원(후에 50,000원)에 계약을 했다. 그러나 또 문제가 터졌다. 계약서(契約書)에 우리 집 대지(垈地)를 42평이라고 적었는데, 등기소(登記所)와 구청에 다녀온 상수 동생이 34평이라고 했다. 매수인(買受人) 崔씨는 사기(詐欺)를 당했다고 노발대발하면서 대금을 깎자고 했다. 잠간의 착각으로 오기(誤記)했노라고 했으나, 좋은 기회로 여기는 그는 막무가내(莫無可奈)였다. 내 불찰(不察)을 인정하고 169,000원으로 감액(減額)하기로 하였다. 11월 12일 잔금 154,000원을 받았다. 아랫방 S씨네 15,000원과, 건넌방 R씨에게 전세금 8,500원을 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11월 14일 R씨네, 11월 15일 우리와 S씨네 이삿짐이 다 나가고 참으로 피를 말리던 집 문제가 마무리 지어졌다. 꿈을 부풀리던 아버지 세대(世代)들은 비운(悲運)으로 가신 후, 2세들인 우리가 드디어 매듭을 지은 것이다.
11월 13일 이종제 윤오가 집 문제 처리를 협의하기 위해 보름동안의 휴가를 얻어 나왔다.
대지.가옥 매매대금 169,000원에서 복덕방비 2,000원을 공제하니까 167,000원.
윤오 측 투자액50,000원과 우리 측 투자액 70,000원을 공제하면 순이익 47,000원.
순이익을 양쪽으로 2등분하면 23,500원 그래서 윤오는 735,000원, 나는 935,000원이 각각 배당되었다.
우리는 S씨 전세금 20,000원. R씨 전세금 12,000원. 신길동 할머니 차용금 5,000원
합계 37,000원을 공제하니까 56,500원이 남았는데, 그 중 우리가 새로 전세든 전세금 50,000원과 복덕방비 500원을 지출하고 6,000원을 남겼다.
그 중 상수와 건수의 의복을 사주고 나니까 마지막 남은 것은 겨우 4,000원이었다.
이 때부터 다시 남의 집 전세를 전전(轉轉)하게 되었다. 복직(復職)을 하여 수입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씩 늘리고 키우며 이사를 했는데, 1973년 내 집을 처음 마련하기까지 흑석동 안에서만 무려 여섯 집을 이사(移徙) 다녔다.
1963년 11월에 이사한 첫 집은 윤씨댁. 집 주인이 선량(善良)하고 거처도 깨끗해서 좋았다. 그러나 1년 6개월만인 1965년 4월 그 집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몇 집을 다녔으나 집다운 집도 아닌데 콧대만 높아 고달팠다. 간다고 간 게 전도관(傳道館) 앞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나도 예수 믿고 교회에 나가지만 예배(禮拜)가 아니라 이건 거의 발광(發狂)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박수치며 고래고래 찬송하며 호곡(號哭)을 하는 바람에 시끄러워 도저히 견딜 수 없는데다가, 또 집이 팔려(330,000원) 6개월만인 10월 1일 흑석1동으로 이사했다. 또 전세금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어머니는 말다툼을 하였다.
새 집은 안채와 바깥채가 떨어져 있었는데 우리는 바깥채에서 살았다. 집주인은 과부(寡婦)인데, 중학생 외아들을 미혼 식모(食母)에게 맡겨 놓은 채 따로 장사하고 있었다. 양모(養母) 겸 주부(主婦)가 된 이 식모가 중앙대학생들을 하숙치고 있었는데, 학생들과 바람을 피워 사방에 외상만 깔아놓고 도망 가버렸다. 안채 전세입자가 세 번이나 바뀌었는데 모두가 갖가지 문제들이 있었다. 집이 동향(東向)이 되어 여름엔 덥고 겨울에는 몹시 추웠다. 결혼 문제도 등장하여 새로 이사해야만 할 처지가 되었다.
1965년 8월. 어머님은 흑석2동 집이 700,000원이면 살 것 같은데 200,000원만 빚을 내면 좋겠다고 하였다. 연말까지 빚 청산을 하려던 계획이었는데, 또 빚을 져야 하고 대지가 남의 땅이라고 해서 반대했다. 한 달 동안 돌아보다가 은로학교 후문 쪽 한옥을 350,000원에 전세 계약을 해버렸다. 9월 28일 이사를 했는데, 전(前) 집에서는 우리 이삿짐이 나가지도 않은데 이삿짐을 밀고 들어와서 말다툼을 하고, 새 집에서는 이삿짐이 나가지도 않았는데 우리 이삿짐이 밀고 들어오는 법이 있느냐고 해서 또 말다툼. 이래저래 이사(移徙)할 때마다 홍역(紅疫)을 치르게 된다. 전셋집이지만 잘 지어진 집이고 깨끗해서 내 집처럼 참 마음에 들었다.
1967년. 흑석3동 소위 공군주택(空軍住宅)으로 이사를 했다. 공군 장교용으로 지은 집인데 약간 높은 지대였으나 100평의 대지에 25평의 건물이라 마음에 들었다. 같은 흑석동교회 교인이었는데 갑자기 이사를 하게 되어 언제까지라도 내 집처럼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닌가? 600,000원의 전세금을 내고 계약도 없이 들어가 살았다. 터가 넓어 마음대로 채소도 심고 화초도 가꿀 수 있었으며, 학교 아이들이 놀러 와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다. 이 집에서 결혼도 하고, 두 아들을 낳았으니 참 정들었던 집이었다.
그러나 1972년 집을 비어달라고 해서 다시 흑석3동 동사무소 근처로 이사를 하였다. 1,000,000원짜리 전셋집인데, 전 집보다는 못했으나 평지(平地)였고 집도 깨끗해서 좋았다. 그리고 언제까지라도 내 집으로 알고 살아도 된다는 조건(條件)이 좋았다. 그러나 이 집도 갑자기 비워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집 주인이 다시 들어와야 할 형편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혹스러웠다. 추운 겨울인데, 갓난애(대진)를 안고 또 어디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말인가? 지난 한 해 동안 새벽 기도회에 나가서 내 집을 달라고 기도해 왔는데, 이 셋집도 비워줘야 한다니 하나님 참 무심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여우도 글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하셨는데, 달팽이 집이라도 내 집이 있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