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시절
1.무너진 바벨탑
1962년 11월 12일 오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책을 팔에 끼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가을바람이 제법 스산했다. 단풍잎은 빨갛게 물들여 있었고, 오리나무 가랑잎은 땅 위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바위로 발을 옮겼다. 여름내 책도 읽고 체조도 하면서 정들었던 바위다.
낙엽을 긁는 갈퀴 소리만 들릴 뿐 사방이 조용한데,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고등고시의 계속된 낙방(落榜)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바로 건너편 바위 옆에서 하얗게 센머리가 석양빛에 반짝이며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때마침 산허리에서 출렁거리는 하얀 억새와 어울려 퍽 인상적(印象的)이었다.
‘무슨 슬픈 일이 있기에 이 산에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하고 콧날이 시큰거렸다.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남을 볼 때, 까닭도 모르고 함께 눈물짓는 이 버릇이 언제부터 비롯된 것인지... 호기심(好奇心)이 생겼다. 자리를 옮겨서 그의 동정(動靜)을 살폈다. 환갑(還甲)은 훨씬 지났을 노인이었다. 국방색 재건복(再建服)을 입고 있었다. 합장(合掌)하고 기도하다가 찬송을 부르다가......그 목소리가 젊은이 못지않게 크고 힘 있었다.
‘광신자(狂信者)다!’
의문이 싱겁게 풀렸다. 그러나 이 산에까지 와서 혼자 저래야만 할까?
‘혹시 정신이상자(精神異常者)인지도 모르지.’
나는 시선을 돌려 애써 책을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기도와 찬송이 반복되었고, 그 차림새로 보아서 이상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문득 그저께 밤의 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
나는 어느 깊은 산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곰과 양들이 함께 놀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옆에는 큰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도 역시 많은 산짐승들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들 틈에 끼어들었다.
‘내가 길을 잘못 들었구나!’
이렇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모든 짐승들이 나를 에워쌌다. 달아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잡히면 죽을 게 분명(分明)했다. 한참 망설이던 나는
‘그럼 이 짐승들과 함께 살아버리면?’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네 인생길 반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나는 어두운 숲속에 있었다......”
로 시작되는 단테(Dante)의 서사시 ‘신곡(神曲)’ 첫 장면을 연상(聯想)케 하였다. 이 때였다. 하체(下體)만 나뭇잎으로 가린 흑인(黑人) 둘이 나타나더니
“네가 여기서 살고 싶으면 네 허리가 콩나물 같이 되어야 한다.”
고 하였다. 나는 체념(諦念)한 채로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따라 오라 하면서 앞장서 걸었다. 어느 허름한 창고로 데리고 들어갔다. 창고는 바위 위에 세워져 있고, 천장은 물론 지붕도 없었다. 높은 하늘에서 두 가닥의 새끼줄이 그네처럼 늘어뜨려져 있었다. 그걸 붙잡고 석달 동안만 있으면 허리가 콩나물 같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말없이 새끼줄을 붙잡았다. 새끼줄이 둥 떠오르더니 허공(虛空)에 메달아 놓은 게 아닌가? 순간 팔이 빳빳해지고 허리가 개미허리처럼 잘록해지면서 뚝 끊어질 것 같이 뻐근해졌다.
‘정말 이렇게 되면 허리가 콩나물처럼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바야흐로 허리가 고무줄처럼 늘어지는 것만 같았다. 견딜 수가 없었다. 석달은커녕 세 시간도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들고 괴로웠다. 이 때 또 한 흑인이 물뿌리개를 들고 나타났다. 마치 꽃밭에 물을 주듯이 내 머리 위에 물을 뿌렸다. 새끼줄이 아래로 늘어지면서 몸은 바위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난 새끼줄을 놓고 흑인(黑人)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물은 머리에서 어깨로 등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온 정성을 다 해 기도를 하였다. 내 정성을 보고 용서해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얼마 동안 기도를 했는지 옷은 땀과 눈물과 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흑인도 아무 말이 없어 나를 용서해 주는 것 같았다. 마음이 놓였다.
* *
눈을 뜨니까 꿈이었다. 나는 원래 꿈이 많았다. 밤이건 낮이건 잠만 들면 꿈을 꾸었다. 그만큼 깊은 잠을 못 잔 탓이겠는데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프로이트(Freud Sigmund)의 정신분석학적(精神分析學的)으로 분석하면 어떤 해석이 나올지 모르지만, 개꿈이다고 지나쳐버리기 일쑤였는데, 삶이 하도 고달프니까 꿈에다 어떤 의미(意味)를 붙여보는 버릇도 생겼다. 바로 이 꿈이 그랬다. 그 꿈을 다시 더듬어 보면서 산을 내려 왔다. 숲길, 바위 모두 똑같은데 다만 백발(白髮) 노인과 흑인(黑人)은 매우 대조적(對照的)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할아버지 이야기와 꿈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그라믄 그 분을 좀 만나보지 그랬냐? 혹시 하느님께서 현몽(現夢)을 하셨는지 모른디....”
하면서 내일이라도 할아버지를 만나 이야기라도 해보라고 하였다.
이튿날도 산을 올랐는데, 할아버지의 정체(正體)를 알아보기로 했다. 바위에 앉아 목을 길게 빼들고 두리번거렸다. 예상한 대로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돋보기안경을 끼고 성경에서 무엇인지 열심히 필기(筆記)하고 계셨다. 나는 주위를 빙빙 맴돌다가 할아버지 앞으로 가만히 다가갔다.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세운 채 바바리코우트(coat)를 벗어 차양(遮陽)처럼 걸어놓았다. 그리스의 통(桶) 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를 방불(彷佛)케 하였다.
“할아버지, 무얼 그렇게 열심히 연구하고 계셔요? ”
이렇게 말을 건 나에게 할아버지는 안경을 벗으면서 웃음을 띄었다. 그러나 경계(警戒)하는 표정이 역력(歷歷)했다. 첫 인상(印象)이 날카로웠지만 인자(仁慈)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어제도 제가 여기 왔지만, 웬 일인지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왔습니다. 혹시 방해가 안 되실지......”
할아버지는 연해 싱글거리며 자리를 권하고 인사를 나누자고 했다. 할아버지는 상도동(上道洞) 성결교회 이원근(李元根)장로였다. 평양이 고향인데(원적은 황해도 장연(長淵)-한국 최초의 소래(松川)교회 연고지)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월남(越南)했으며 올해 일흔 세 살이라고 하였다. 열 살 때부터 교회를 다녔으니까 63년 간 신앙생활을 해왔다는 것이다. 장로님은 나 같은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스스로 찾아주어 고맙다면서, 이 산을 오르내리는 젊은이와 어린이들이 기인(奇人) 취급하며 돌멩이를 던지는 바람에, 이렇게 바리케이드(barricade)를 쌓았노라고 돌담과 코우트(coat) 차양(遮陽)을 가리켰다. 나도 그런 사람이 아닌가 걱정했으나 안심하고 이야기하겠다며 싱긋 웃었다. 연세에 비해 하얀 이가 퍽 인상적이었다. 틀니 같았다.
“나는 최선생과 같은 젊은이들에게 교훈(敎訓) 줄 사람은 못 되고, 나 자신 아직 부족한 사람이라 지난 70여 년의 과거를 후회(後悔)하면서, 마지막 하나님의 은혜(恩惠)나 받아볼까 하고 이렇게 산에 올라왔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장로님은 다시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무궁무진(無窮無盡)한지라, 이 곳 이 시간으로는 불가능(不可能)한 일이요”
하면서 안경을 끼며 성경(聖經)을 폈다. 요한복음 14장 6,7절을 읽어보라고 하였다.(집 주소 흑석동 67번지, 1976년 6월 22일 가설된 최초의 전화 번호 67-1454와 연관 있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지금 많은 사람들이 갈 길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은, 어떤 뚜렷한 목표(目標)와 좋은 지도자(指導者)가 없기 때문이 아니냐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거린 장로님은 우리의 눈이 멀어서 그렇지, 길은 곧 성경이요 지도자(指導者)는 곧 예수라고 단언하였다. 교리(敎理)와 교파(敎派)에 관한 몇 가지 문답을 했는데 아무튼 교회(敎會)에 나와 보라고 권유(勸誘)하였다.
“글쎄요, 신앙을 가져보려고 하였지만 얼른 그렇게 되지 않는 건 왜일까요?”
“기회라는 게 있습니다. 기회(機會)를 붙잡아야 합니다. 내가 산에 온 것이나 최선생이 날 찾아온 것이 다 하나님의 인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는 우연(偶然)이라고 돌리기에는 너무 기이(奇異)한 인연(因緣)이라 꿈 이야기를 하겠노라며 꿈 이야기를 하였다. 싱글벙글 웃으며 귀를 기울이던 장로님은
“난 해몽가(解夢家)가 아니므로 꿈 풀이하려는 게 아니고, 꿈 풀이가 맞는다는 법도 없지만, 꿈 내용이 보통은 아님에, 내 생각으로는 그 새끼줄이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구원(救援)의 줄이요, 뿌려준 그 물은 성령(聖靈)이 아닌가 합니다. 신앙을 갖도록 하는 하나님의 계시(啓示)라고 봅니다.”
이렇게 말씀하면서 성경에는 꿈으로 인해서 계시를 받고 구원받은 사람이 많다고 하였다. 장로님은 나의 가정환경과 성장 과정을 묻고 가족 사항을 적었다. 기도해 주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앞으로 가정 방문(訪問)을 하려고 하지만, 먼저 오는 주일 10시 반 어머님을 모시고 교회에 나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하나님 아버지, 이 최선생과 같은 젊은이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끌어 주옵소서. 최선생과 어머님, 동생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 특히 최선생에게는 좋은 배필이 나와서 신앙으로써 결합된 새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나도 고개를 숙이고 기도에 귀를 기울이었다. 아무튼 기도가 고마워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자초지종(自初至終) 이야기를 하였다. 모든 것이 꿈같기도 하고 어린애 장난 같기도 하였다. 정말 멀었던 내 눈이 떠져서 참된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인지, 길을 잘 못 들어 오히려 어떤 함정(陷穽)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며칠 동안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로도 며칠 간 산을 오르내렸으나 장로님은 보이지 않았다. 섭섭했다.
‘왜 내가 섭섭할까? 왜 그 분을 찾는 것일까?’
내가 너무 감상적(感傷的)이라는 자책(自責)도 해보고, 위선자(僞善者)가 아니냐는 자문(自問)도 하여 보았다.
1962.11.18(일) 맑음
몸을 단정히 하고 성결교회로 찾아갔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현관에서 나를 기다리는 분이 있었다.
“최선생이시죠? 잘 오셨습니다.”
“.......................”
“자, 들어가십시다.”
나는 그 분의 안내로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아 조용했다. 강대상 쪽 벽에 걸린 십자가만이 내 앞으로 다가오는 듯 했다. 한 마디 기도도 할 줄 모르는 나인지라 고개만 숙이고 눈을 감았다.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내가 여태까지 헤매며 찾던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요, 내가 의지하고 싶은 분이 바로 하나님이었던가?
이윽고 예배가 시작되었다. 현관 앞에서 기다리던 분의 사회로 예배가 진행되었는데, 그 분이 곧 임사순(任士淳) 담임 목사님이었다. 군목(軍牧) 허경삼(許京三)목사의 설교는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라’ 였다. 말씀은 귓가에서만 맴돌 뿐 귓속 깊이 들어오지 않고, 성가대의 성가와 찬양만이 가슴 속에 잔잔하게 고였다. 예배 순서를 모르는 나는 참 어색했다. 700여 명을 헤아리는 신도(信徒)들에게 나를 새 신자로 소개하고 환영의 박수를 해줄 때는 더욱 서먹서먹했다. 얼떨결에 이렇게 신자가 되어버렸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李장로님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몸이 아파 못 왔다는 것이다. 임목사님이 그려주신 약도로 이장로님 댁에 문병(問病)을 갔다. 누워계셨던 이장로님은 벌떡 일어나 반가이 맞이하였다. 나를 위해 꼭 참례(參禮)하려고 했으나 여의(如意)치 않아 목사님께 서신(書信)만 띄었노라고.
쪄온 고구마를 먹으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장로님이 주신 ‘생사의 두 길’과 상수 동생의 대학 교재 ‘종교와 기독교’를 읽었다. 생각할수록 우습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하고 한편 불안하기도 했다. 서른 해가 다 되도록 몸부림치며 찾던 길이 이 길이었던가?
* *
해방의 종소리와 함께 내가 사는 고을에도 예배당(禮拜堂)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도 다른 아이들과 함께 예배당을 기웃거려 보았다. 크리스머스(Christmas)가 되어 주일학교(主日學校)에 들어가 선생님의 눈치를 살피며 아이들 사이에 끼기도 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친구의 전도(傳道)를 받았으나 신앙에는 무관심이었다. 더구나 아버지는 일제시대 보천교(普天敎)에 관여(關與)했다가 절연(絶緣)한 이후로는 모든 종교를 일종의 미신(迷信)으로 여기었다. 가끔 불교(佛敎)에 관해서는 이해가 되지만 야소교(耶蘇敎=예수교)에 관해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하셨다. 누나와 내가 교회에 나가는 것을 만류(挽留)하지는 않았지만 권장도 않았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성장한 나도 역시 종교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박태선(朴泰善)장로 문제 등으로 교파가 난립(亂立)되고 교회 분규(紛糾)가 사회의 지탄(指彈)을 받으면서, 내 마음 속에도 불신(不信)과 의혹(疑惑)이 싹트기 시작되었다. 크리스머스의 그 아름답던 새벽송 소리만 가슴에 여운처럼 남아있을 뿐, 복음의 씨앗은 이렇게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쪼아 먹어버렸다.
나의 10대는 한 말로 표현해서 의지(意志)가 수정(水晶)처럼 결정(結晶)되던 시기였다. 가정을 돌보지 않고 정치운동에 뛰어든 아버지로 인해서 고난의 여정(旅程)이 시작되었다. 해방 후의 좌우익(左右翼) 싸움을 시작으로, 여수.순천 반란 사건이라는 지진(地震)이 일어났고, 그 여진(餘震)으로 인해서 집이 전소(全燒)되었다. 이어서 6.25동란(動亂)이 일어나 생명만을 부지(扶持)한 채 힘겨운 시련(試鍊)을 계속 겪게 되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자취(自炊)와 고학(苦學)의 학창 시절을 보내었다. 이러한 역경(逆境)과의 투쟁에서 굳어진 것은 오로지 의지였다. 내 환경과 여건(與件)을 원망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에만 전념(專念)하였다. 이 길만이 내가 생존(生存)할 수 있는 길이요, 역경을 넘을 수 있는 돌파구(突破口)였다. 경제적으로 남에게 뒤질 뿐 모든 일이 내 의지(意志)와 노력(努力)대로 되어 나갔다.
이것은 나에게 인간중심주의(人間中心主義) 사상과 독립자존(獨立自存)의 정신을 배태(胚胎)하였다. 더구나 학교 교육이 과학 위주(爲主)였기 때문에, 모든 사물(事物)을 과학이라는 척도(尺度)에 의해서만 사고(思考)하는 습성(習性)을 익혔다. 이런 나에게 종교는 무관심이 아니라 오히려 경멸(輕蔑)의 대상이었다. 전도자들에 대한 무신론(無神論)적이고 반기독교적(反基督敎的)인 나의 비판(批判)은 수위(水位)를 높여나갔다. 나의 결단(決斷)과 책임(責任)에 의해서만 내 운명은 결정된다는 편견(偏見)과 독단(獨斷)은 자만심(自慢心)과 교만(驕慢)을 낳았다. 나는 ‘知’를 사랑하는 Philosophia가 되어 애송이 철학자가 되었다. 철학, 심리학, 윤리학 등에 흥미와 관심을 가졌으며, 종교보다는 휴멘이즘(humanism)이나 실용주의(pragmatism) 같은 철학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프랑스의 노벨문학상 작가 아나톨 프랑스의 말대로 사람과의 접촉에서가 아니라 책과 접촉한 결과로 인생을 조금씩이나마 알게 되었다. 철학의 끝이 종교의 문턱이라는 것을 깨닫고, 때마침 천주교에 귀의(歸依)한 숙부의 영향으로 윤형중(尹亨重)신부 저 ‘종교의 근본문제’와 장면(張勉) 저 ‘교부(敎父)들의 신앙’을 손에 들게 되었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던 시절이고, 기독교 비판을 위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그런데 읽어나갈수록 나는 그 어떤 힘에 의해 끌려가고 있음을 느끼었다. 미로(迷路)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는 책을 덮어버렸지만 어느 틈엔지 또 책을 펴들곤 했다. ‘미이라(mirra 포) 잡으러 갔다가 미이라 된다’는 말을 되새기며 벌떡 일어나 아예 불을 꺼버리기 일쑤였다.
불신 가문(家門)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도 신앙을 가질 수 없고, 내 의지를 꺾지 않기 위해서도 교회에 갈 수는 없다. 이렇게 대원군의 척화비(斥和碑)같은 척교비(斥敎碑)를 튼튼히 세웠다. 교육계에 나오면서도 법관이 되겠다는 입지(立志)를 가지고 고등고시 정복(征服)을 계획했다. 그러나 응시와 낙방의 악순환(惡循環)을 반복하였다. 환경과 조건이 공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내 의지와 노력 하나만을 믿고 무모(無謀)하고 무리(無理)한 일을 계속했다. 운석(隕石)처럼 계속 날아드는 문제들을 응시(凝視)하면서, 법률 책만 붙들고 있을 수 없었다. 분명히 외도(外道)인 줄 알면서도 정신은 집시(gypsy)가 되어 유랑(流浪)하며, 법관 이전에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명분(名分)을 세워 놓고, 오로지 철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었다.
‘실존주의(實存主義)는 Humanism이다’는 싸르트르(Sartre), ‘신(神)은 죽었다’는 니체(Nietzches) 등 무신론적인 실존주의에 매력(魅力)을 느끼며, 내 의지의 재건(再建) 작업에 열중했는데 이것은 물론 법관이라는 금자탑(金子塔) 쌓기였다.
그러나 *미네르바(Minerva)의 여신(女神)은 나에게 선전포고를 하며 포위망(包圍網)을 좁혀왔다. 전우(戰友)도 없이 고군분투(孤軍奮鬪)했던 전사(戰士)는 사기(士氣)가 떨어진 채 전열(戰列)을 가다듬을 수조차 없었다. 몽롱(朦朧)한 의식 속에서 신기루(蜃氣樓)처럼 떠오르는 개선문(凱旋門)을 바라보는 패잔병(敗殘兵)은 허무(虛無)를 피부로 느꼈다. 허무에의 심연(深淵)을 응시하면서 현기증(眩氣症)을 느끼고, 앞을 가로막은 절벽 앞에서 전율(戰慄)을 느꼈다. 키엘케골(Kierkegaard), 마르셀(Marcel), 야스퍼스(Jaspers) 등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에게 한 발자국씩 접근(接近)해 갔다. 고사장에서 졸도한 이후 사느냐 죽느냐는 기로(岐路)에서 나는 차가운 빙벽(氷壁) 앞에 섰다. 아! 왜소(矮小)하기 짝이 없는 추악(醜惡)한 모습, 무능(無能)하기 짝이 없는 위선자, 몽매(蒙昧)하기 짝이 없는 교만자! 나는 난파(難破)한 의지의 잔해(殘骸)를 바라보며 살아야 할 이유도 가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와 동생들의 창백(蒼白)한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죽는 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 연약한 내 의지를 얼마나 원망하고 저주(咀呪)했던가?
자아(自我)의 부정. 인간의 부정(否定). 나는 어렴풋이 신(神)을 의식하게 되면서 유신론적(有
神論的) 실존주의에 아주 밀착(密着)되어 갔다.
‘신(神)은 존재(存在)한다. 그리고 인간의 의지는 신의 섭리(攝理)를 거역(拒逆)할 수 없다. 신에게 귀의(歸依)하는 길이 인간이 구원되는 길이다.’ 이런 생각을 하였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격으로, *나르시시즘(narcissim 프) 숲 속의 샘에서 가까스로 헤엄쳐 나온 나-나르시소스(Narcissus)는 수선화(水仙花)로 피어난 것이 아니라, 신을 찾고 있었다. 복수와 응보(應報)와 징계(懲戒)의 *네메시스(Nemesis)여신이 아닌, 용서(容恕)와 자비(慈悲)의 구세주(救世主)를. 가을! 열매와 낙엽의 계절. 그러나 열매도 없고 겨울눈도 없이 조락(凋落)하는 계절. 이 때 나는 장로님을 만났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요14:6)를 만난 것이다. 오랜 방황(彷徨) 끝에 찾은 길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길을 헤매어본 사람이라야 길을 안다.
하늘 아버지
제가 먼저 찾아가
뵈어야만 하지요.
그런데 몸소 찾아 오셨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리도 먼 길이라는데
이렇게 쉬이 오셨는지요.
의붓자식 마냥 겉돌던 일이
여간 부끄럽지 않습니다.
빗장을 열 때만 해도
설마 당신일까 하던 마음.
품속에 안기고 보니
이다지도 포근한 것을
아버지,
전 양아들이 아니지요.
아버지,
더구나 고아가 아니지요.
(1963)
*미네르바(Minerva)...로마신화에 나오는 지혜,전쟁,학예의 여신(女神), 그리스 신화의 아테네 에 해당
*나르시시즘(narcissim 프)...그리스 신화 나르키소스라는 인물에서 유래한 것으로, 자기를 사 랑의 대상으로 삼는 자기애, 자아도취
* 너메시스(Nemesis)...밤의 신 닉스의 딸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복수와 징계의 여신.
2.꺾꽂이된 포도나무
그러나 교회에만 나갈 뿐 신앙이 있을 리 없었다. 설교 시간에는 곧잘 졸았으며, 제대로 성경을 읽어보지 못하였다. 다만 성가대의 찬양(讚揚)만은 귀를 번쩍 뜨게 하였으며, 악보(樂譜)를 볼 수 있어 찬송가는 곧잘 익혔다. ‘내 주를 가까이’‘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가 특히 좋아 가슴이 답답할 때면 곧잘 불렀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對話)요 반드시 응답(應答)이 있다고 했으니 확신(確信)은 없으나 계속했다. 사도신경(使徒信經)과 주기도문(主祈禱文) 하나 외우지 못하면서도 기도는 했다. 그러나 유치했다. 통성기도를 할 때는 옆 사람의 기도에만 귀를 기울였는데, 그야말로 청산유수(靑山流水)요 천사와 같았다. 그런데 내 기도는 이기적(利己的)이요 기복(祈福)적인 것이다. 일기장에는 그럴 듯한 기도문이 있지만 말로 하려고 하면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설혹 무의미한 일일지라도반복(反復)하면 의미가 붙을 것이고, 권태(倦怠)롭지만 계속하면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막연(漠然)한 생각을 하면서... 그럴수록 졸렬(拙劣)하고 비루(鄙陋)한 생각이 들어, 확신이 없고 환멸(幻滅)을 느끼기 시작했다.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고 하였는데 만약 내 기도를 그대로 다 들어주신다면 과연 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반대로 세상만사가 다 하나님의 뜻대로만 되어질 것이라면 모든 기도는 헛된 도로(徒勞)가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이 머리에 찰 때면 스스로 모았던 손을 풀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눈에 뜨일라치면 숙였던 고개도 들어버렸다.
그런데 기도의 응답(應答)이 왔다. 교회에 나가게 된지 40일 만이다. 시골 누님으로부터 임신(姙娠)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기도에 대한 회의(懷疑)를 가지면서도 고시(考試)의 합격과 누님의 임신(姙娠)을 위해 기도했던 것은 사실이다. 누님은 결혼한지 7년 동안 불임(不姙)으로 고민이 많았고 소박(疎薄) 등 가정에서 문제가 심각했다. 그런데 임신 소식이 전해왔으니 그 기쁨은 표현할 수가 없었다. 빠른 기도의 응답에 놀라면서 기도에 대한 확신과 새로운 희망을 안고 새해를 맞이하였다.
사실 동화(童話)와 같은 극히 우연(偶然)한 계기로 교회에 나갔으니 신앙이 얼마나 자랐을 것인가? 이왕 신앙을 가졌으니 아버지가 안 계신 우리 가정의 정신적 지주(支柱)로서, 자칫하면 동서남북(東西南北)으로 이산(離散)될 우리 위성(衛星) 가족들의 惑星(혹성)으로서, 신을 모셔야만 한다는 생각에 퍽 다행스럽게 여기고는 있었다.
* *
그런데 신은 반드시 기독교의 하나님이어야만 하느냐? 카토릭(Catholic)에서는 천주교만이 정통(正統)이라고 하지 않느냐? 이와 같은 의문부(疑問符) 속에서 처음 불붙었던 신앙열이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이 무렵 교회에 구호물자(救護物資)가 나와서 극빈(極貧)자에게 배급(配給)을 해주고 있었다. 李장로님은 배급표를 주겠다고 했으나 사양(辭讓)했다.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남에게 손을 내밀지 않겠다는 나의 자존심이 상처(傷處)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장로님은 몇 차례 강냉이 가루와 땅콩기름을 보내왔다. 목구멍 풀칠도 어렵던 때라 유익한 식량(食糧)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보릿고개 마루턱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가슴츠레 실눈으로 백일몽(白日夢)을 꾸고 있는 청년은, 허공(虛空)에 물그림자처럼 아련히 흔들리는 야누스를 보았다. 그 *야누스(Janus)가 나의 초상화(肖像畵)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언제인가 내 앞길을 가로막던 그 빙벽(氷壁)에 비추이던 그 비극적(悲劇的)인 모습과 함께, 이제는 희극적(喜劇的)인 모습! 단절(斷絶)시킨 과거에 미래가 용접(鎔接)되지 않을 때의 나를 얽어맨 초조(焦燥)와 불안! 교회에 처음 나갔을 때의 동화 같은 이야기나 그 후 열성(熱誠)으로 보아서는, 그 어떤 극적(劇的)인 사건이 있거나 새 역사의 주인공(主人公)으로 변화되었을 법 한데, 개미 채 바퀴 돈 듯한 내 생활을 생각
하면 삶에 대한 나른한 피로와 권태(倦怠)가 나를 엄습(掩襲)해 왔다. 발목 교인인 나는 창일(漲溢)한 은혜의 강에 빠진 게 아니라(겔47:3-5), 신앙의 슬럼프(slump)에 빠졌다.
헌금 시간만 되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정도로 민망(憫惘)했다. 700여명을 헤아리는 신도(信徒)들 중 친절하게 인사라도 해주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 속에 들었다. 교인들로부터의 소외감(疎外感) 때문에도 교회에 대한 거리감(距離感)이 생겼다. 내가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은 그 어떤 불순(不純)한 동기가 있었는가? 교회라는 새로운 사회를 발판으로 도움닫기를 해서 내 이기적인 욕망을 향해 높이뛰기라도 해보려 했던 것은 아닌가?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은폐(隱蔽)하기 위해서 신(神)이라는 관념(觀念)을 임시(臨時)로 도입(導入)해온 것이 아닌가? 칸트(Kant)의 말대로 참 선(善)을 실현하기 위해서 인간이 주관적으로 요청(要請)한 또는 차용(借用)한 신인가? 이러한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히면 도장(塗裝)된 자아를 적나나(赤裸裸)하게 벗겨버리고 싶은 충동이 나를 괴롭혔다. 종교적인 원죄(原罪) 의식을 깊이 느껴보았다거나, 위법적(違法的)인 행동과 뚜렷하게 반도덕적(反道德的) 반사회적(反社會的)인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내가, 가슴을 치며 참회(懺悔)할 일도 없을 뿐 아니라,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신앙이 급성장(急成長)할 리도 없는 것이다. 패륜아(悖倫兒) 범법자(犯法者)가 아니기에 독실(篤實)한 크리스천이 될 수 없다는 역설(逆說)을 뇌까리면서, 현대판(現代版) *소피스트(sophist)가 된 채로 ‘난 죄가 없다’는 가장 큰 죄를 자꾸만 짓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6개월 만에 학습을 받았다면 아이로닉(ironical)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날 공교롭게 술을 마셨다. 건넌방 학생들의 권유로 한 모금 마신 것이다. 원래 술을 못한 집안이었고, 삼금주의(三禁主義)의 좌우명을 생활화하고 있는 나에게는 하나의 파계(破戒)였다. 신(神)으로 승격(昇格)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동물로 격하(格下)되어버렸으면 하는 심정(心情).
*디오니소스(Dionysos)신은 되지 못한 채, 금단(禁斷)의 열매를 따 먹은 이브(Eve)처럼, 금단의 액체(液體)를 마심으로서 제2의 이브(Eve)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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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부 쿠데타, 경제 위기, 고시의 계속된 낙방, 가족들의 영양실조(營養失調)....붕괴(崩壞) 직전의 저수지(貯水池) 같은 상황 속에서 전보(電報)가 떨어졌다. 누님이 위독(危篤)하다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와 함께 전라선 열차에 탔다. 이튿날 태풍(颱風)과 폭우(暴雨)로 폐허(廢墟) 같은 고흥(高興)반도 고흥면에 도착했다. 불길(不吉)한 예감을 떨치지 못한 채 제일병원으로 갔다. 그러나 누님은 생존(生存)해 있었고 아들 쌍둥이를 출산(出産)했다. 제왕수술(帝王手術)을 했는데 기적적(奇蹟的)으로 성공했다는 것이다. 정말 꿈만 같았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면서 흐느꼈다. 고시시험을 앞두고 나는 곧 상경하였다. 그런데 1주일 후에 편지가 왔다. 누님은 하늘나라로 갔다는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소식이었다. 순간 나는 심장의 고동(鼓動)이 멎는 듯했다. 몽유병자(夢遊病者)와 같은 나날을 보내었다. 명복(冥福)을 빌면서 나의 액운(厄運)과 박복(薄福)을 탄식했다.
시험일이 박두(迫頭)한 탓도 있지만, 나는 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 이장로님과 임목사님이 심방(尋訪) 오셔서 구약(舊約)의 욥기를 이야기하고,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인데 예수님께서 마련해놓은 처소(處所)로 갔으니, 슬퍼하지 말라고 나를 위로하며 격려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회의(懷疑)가 싹트기 시작했다. 나의 소박(素朴)하고 절실(切實)한 기도에 대한 응답이 고작 저승으로 데려 갔다고 생각하니, 신앙과 교회에 나가는 것 자체가 무의미(無意味)해졌다. 하나님도 다른 잡신(雜神)들과 함께 사망해서 북망산(北邙山) 기슭에서 영원히 잠들었거나, 노쇠(老衰)하여 양로원(養老院)에 들어가 인간의 구호(救護)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냐? 설혹 하나님이 존재한다 해도 그 관할권(管轄權)은 이승에 미치지 못하거나, 그 전권(全權)을 이승 사람들에게 백지위임(白紙委任)을 해버린 것이 아니냐? 이와 같은 의혹(疑惑)은 증오(憎惡)를 낳고, 증오는 저주(咀呪)를 낳아 만약 하나님이 눈앞에 서있다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던 로마 병정처럼, 주먹질은 못 하드라도 침을 뱉었을지도 모른다. 신앙생활 8개월 만에 주어진 가장 큰 시련(試鍊)이요, 신앙생활의 첫 위기(危機)였다.
이 무렵 어머니의 편지는 나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비록 대필(代筆)해서 쓴 것이지만 시들어가는 나의 영혼(靈魂)에 단비였다. 외동딸을 손수 가슴과 땅에 묻고, 비록 엄마를 죽이고 태어난다는 살모사(殺母蛇)같은 아이들이지만,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원망이 아니라 감사하면서 외손자를 양육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낙심(落心)하여 신앙의 싹이 꺾일까봐 걱정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나보다 배운 것이 없는 촌로(村老), 나로부터 전도 받은 어머니인데, 그 비통(悲痛)한 한계상황(限界狀況) 속에서 어떻게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는 것인지 그저 놀랍고 감사해서, 나도 다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1년이 되었다 세례(洗禮)를 받으라는 것이다. 문답을 하는데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남자이고 지식층(知識層) 청년이니까 더 어렵고 많은 것을 물으리라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미리 나누어준 문답지(問答紙)와 관계없는 몇 가지만을 물었는데 제대로 대답을 못했다. 불합격이 분명했다. 성경 한 번 통독(通讀)한 일도 없고, 성경 한 구절 외운 일이 없는 나인데 그래도 합격한 것이 아닌가? 세례식(洗禮式)에 이어서 성찬식(聖餐式)까지 있었다. 어머니가 동참(同參)하지 못한 것이 퍽 아쉬웠으나 이장로님께서 대단히 기뻐하셨다. 1963년 11월 24일이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모두 예수님께 맡겨버린 날이다. (11월 24일은 마11:28의 성구와 연관이 있음) 어찌 되었건 이제 정말 신자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1년 동안의 환란(患亂)과 시련(試鍊)을 극복하고 세례까지 받았다는 사실이 천만다행(千萬多幸)이었고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었다.
*소피스트(sophist)...고대 그리스의 궤변(詭辯) 학파(본래는 지혜 있는 사람의 뜻)
*디오니소스(Dionysos)신....그리이스 신화의 생성신(生成神).포도의 신, 주신(酒神) 로마신화의 박카스(Bacchus), 예술에 있어서는 현실적,음악적,동적,정의적 풍을 주로 함.
3.소금 기둥
씨를 뿌려서 싹이 튼 신앙이 아니고 꺾꽂이된 신앙이다. 성도들은 예수님께 접붙이 된 몸이라고 하는데, 나는 가시덤불 속에 가식(假植)된 신앙이다. 그러므로 땅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바람이 불면 언제 뽑힐지 모르는 신앙, 뙤약볕이 내리쬐면 언제 시들지 모르는 신앙이기에, 맹목적(盲目的)인 신자가 되지 않기 위해 좀더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콩나물시루와 같은 의문부(疑問符) 속에다 스스로 나를 던져 넣었다.
신은 자연(自然)일까? 일체(一切) 만물이 그대로 신일까? 우주(宇宙)는 신의 표현일까? 신이란 인간을 신격화(神格化)한 것일까? 인간은 신의 초상(肖像)으로서 자기 속에 내포(內包)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창조(創造)의 원리인 이성(理性)이 곧 신일까? 선(善)의 실현을 위해 인간이 주관적으로 요청(要請)한 것이 신일까? 아니 유울론자(唯物論者)들의 말처럼 피압박(被壓迫) 계급의 소원을 대상화(對象化)한 것이 신일까? 만물을 창조하고 운동(運動)의 원리만 주는데 그친 존재일까? 혹은 신은 자율적(自律的) 존재요 절대적 타자(他者)인가?
법률 공부를 오랫동안 하다보니까 이론적으로 따지는 버릇이 생겼다. 아주 단순(單純)한 사
물인데도 복잡(複雜)한 사변(思辨)의 거미줄을 친 채, 스스로 걸려들어 혼미(昏迷)해지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니까 푸른 풀밭에서 마른 풀을 먹고 있는 망아지인 셈이다. 아무리 책장을 넘기며 활자와 씨름해도 하나님의 형상(形像)은 떠오르지 않는다. 특히 삼위일체(三位一體)론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이론이었다. 신자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신학자(神學者)나 성직자(聖職者)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는 셈이다. 책 속에서 신을 찾을 수 없으니까 망원경(望遠鏡)이나 현미경(顯微鏡)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한 일이다. 파스칼(Pascal)은 신을 모르는 것은 어리석고 신을 믿는 것은 행복한데, 신을 이론적으로 캐묻는 자는 불행한 자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나도 가장 불행한 사람 중 하나가 아닌가? 내 딴으로는 가장 독실(篤實)한 신자가 되기 위함인데.......
아무튼 그럴수록 하나님은 더 높은 구만리 장천(長天) 하늘 보좌(寶座)로 올라갔다. 나의 기도와 찬송을 들을 수 있는 거리(距離)는 아니다.
이 무렵 우연히 김형석(金亨錫)교수 저 ‘진리란 무엇인가?’ 라는 작은 책자를 읽게 되었다. 우리가 고아(孤兒)가 아닌 바에야 아버지란 무엇이며 어머니란 어떤 분인가 의심(疑心)하고 연구(硏究)할 필요가 없다. 그를 학문의 대상으로 탐구(探究)할 이유와 가치가 없다. 다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 사랑스런 품안에 안기면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면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 낳아 주신 어머니도 의붓어머니가 아닌가 의문을 가지며 괴로워했던 철부지 시절이 있었지 않은가? 양부모(養父母)라도 믿고 그 사랑의 품 안에서 살면 행복한 삶이 아니겠는가? 나는 무릎을 탁 쳤다. 하나님의 음성(音聲)이 들리는 듯 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나에게 던지시도록 내가 나의 양심(良心)을 들어 무릎을 꿇었느냐고 할 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신다는 생각이 나의 두 눈을 빛나게 한 것이다.
우리들은 체험(體驗)이 이론(理論)보다 앞서야 할 때가 있고, 생(生)이 학문(學問)보다 귀함을 알고 있다. 신앙은 하나의 모험적(冒險的)인 결단(決斷)이라고 파스칼(Pascal)이 말하였다지만, 신앙은 이론(理論)에 선행(先行)하는 행동이요 실천이요 체험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신의 계시(啓示)에 사로잡혀 그 위력(威力)에 순종(順從)함으로서 신을 능히 인식할 수 있다는 키엘케골(Kierkegard)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란 성경 구절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 금은(金銀)을 녹이거나 나무를 깎고 돌을 다듬어서 우상(偶像)을 만들 필요가 없다. 말끔하게 단장(丹粧)한 신사(紳士)나 흰 수염 사이로 인자한 미소(微笑) 띈 할아버지의 초상화(肖像畵)를 그릴 필요가 없다.’
나는 지금까지 바벨탑과 같은 사상(思想)의 사탑(斜塔)을 바라보면서 먼 훗날 관광(觀光)거리로서의 가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오랜 표류(漂流) 끝에 내 사상의 편주(片舟)가 마침내 어느 육지에 닿은 것이다. ‘모든 이론은 회색(灰色)이나 생명의 나무는 푸르다’는 괴테(GӦethe)의 말을 되새기면서, 책을 던져버리고 찬송을 불렀다. 기도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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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6월 1일, 3년 3개월 만에 복직(復職)을 하였다. 고시 낙방에 대한 좌절감(挫折感)과 열등감(劣等感)에 부끄러웠으나, 우선 가족들의 기아(饑餓)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는 안도감(安堵感)으로 기뻤다. 빈곤(貧困)의 고통을 뼈저리게 체험했던 나는 절약과 저축이 당면 목표였다. 과외(課外) 지도로 생긴 부수입(副收入)이 직장의 본봉(本俸)보다 나았다. 허약 할대로 허약해진 몸이었으나 학교에서 가정에서 수면(睡眠) 시간 외에는 중학교 입시생들을 지도했다. 외손자들을 양육해온 어머니는 1년6개월 만에 서울로 돌아와 살림을 해주셨으므로, 나는 돈 버는 일에 전력(全力) 투구(投球)를 하였다.
어머니는 그 동안 신앙이 급성장하여 성경 지식도 많았고, 은혜를 사모하면서 성령(聖靈)을 받기 위해서는 용문산(龍門山)에 가야한다고 하였다. 너무 신비주의적(神秘主義的)인 것에 치중(置重)하는 신앙은 경계(警戒)하라는 이장로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나는 우리가 건강하고 큰 사고나 재난 없이 생활하고 있는 것이 은혜며, 용문산에 가야만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종교적 편견(偏見)이라고 했다. 잘못하면 신앙적인 갈등(葛藤)으로 가정 문제가 생길 요소가 있어 무척 신경을 썼다.
그런데 이 무렵 그 문제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첫째는 주일 성수(聖守) 문제이다. 과외 지도의 경쟁이 치열(熾烈)해져서 매일 자정(子正)까지 가르쳐야 하고, 심지어 주일까지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아이들이 떨어져 나갔다. 하는 수 없이 교회 예배에 가지 못하거나 가까운 교회에 가서 도둑 예배를 드려야만 했다. 둘째는 헌금 문제다. 돈은 벌었으나 감사 헌금은커녕 주일 연보(捐補)도 크게 하지 않았다. 십일조는커녕 월정헌금으로 의무를 다 한 것처럼 생각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 헌금으로 인한 소외감(疎外感)을 가지면서, 앞으로 돈을 벌면 십일조가 아니라 십이조도 낼 수 있다고 장담했던 내가 아닌가? 그런데 돈이 늘어나니까 개구리 올챙이 시절 다 잊어버리고 돈에 대한 욕심이 더 생겼다. 참 간사(奸邪)한 동물이다. 나는 모든 살림을 어머니께 맡겨버렸기 때문에, 어머니는 이자(利子) 놀이와 계(契)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나는 나대로 합리적인 변명(辨明)을 만들어 냈다. 지금은 가정경제의 복구(復舊)에 총력을 기울일 단계이므로,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오르면 그 때는 마음껏 헌금을 하겠다는 것이다. 십일조만큼 저금을 해서 어느 정도의 기금(基金)을 확보하면 그 이자(利子)로 십일조를 내고, 기타 하나님 뜻에 맞는 사업(事業)을 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달란트 비유를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하여 인색(吝嗇)하기 짝이 없었다.
이장로님은 냉천동(冷泉洞)으로 이사하면서 교회도 서대문 순복음교회로 옮겼다. 고아처럼 홀로 남게 된 나는 허전했다. 이장로님은 상도동(上道洞)은 산을 넘어 다녀야 하는 불편이 있으므로, 가까운 흑석동(黑石洞)교회로 이적(移籍)해도 괜찮다고 하였다. 나 또한 가까운 교회를 다니면 과외 지도하는데 유리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집과 학교의 중간에 위치한 흑석동감리교회(監理敎會)로 옮겼다. 당시 새로 성전(聖殿)을 건축하는 중이어서 정식으로 전적(轉籍) 입교(入敎)한 것이 아니라, 우물쭈물 다니다가 어느 새 감리교인(監理敎人)이 되어버렸다. 1968년 중학 입시가 무시험(無試驗) 제도로 바뀌었다. 따라서 과외 지도도 없어지고 부수입이 없어졌다. 10개년 계획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육신은 홀가분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초조해졌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한가(閑暇)해진 게 오히려 허탈(虛脫)했다. 다시 고시를 시작할까 서가(書架)를 쳐다보았다. 주인 잃은 책들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기름땀이 벤 노트의 글자 하나하나를 보니까 지나간 옛 일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어른거리며 전율(戰慄) 같은 것을 느꼈다. 시험 삼아 책을 읽어보았더니 1시간 이상 계속하면, 골치가 아프고 소화(消化)가 안 되며 심한 피로를 느꼈다. 고시는 완전히 단념(斷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현직(現職)에서 승진(昇進)해보겠다는 생각은 추호(秋毫)도 없고, 전직(轉職)을 하거나 다른 돈벌이는 없을까 하는 생각만 머리를 어지럽혔다.
4.다메섹 언덕
내 나이 이미 30대의 중반에 이르고 있었다. 노총각(老總角)이라는 딱지가 붙고, 결혼해야 된다는 주위 사람들의 권고(勸告)가 귀를 따갑게 하였다. 1970년 4월 2일 드디어 결혼을 하였다.
그런데 결혼하자마자 잠재(潛在)되어 있었던 문제가 표면화(表面化) 되었다. 금전 문제였다. 어머니께서 이자(利子) 놀이한 돈이 들어오지 않고 계(契)는 다 깨졌다. 당사자들은 같은 교회 교인들이었다. 그나마 모두 속장, 권사, 전도사 등 직분을 맡은 자들이다. 새 교회에 와서 막 정을 붙이려 하는데 문제가 발생하니까, 교인에 대한 불신(不信)과 교회에 대한 회의와, 기독교 자체에 대한 재평가(再評價)를 하게 되었다. 위선자(僞善者)들의 사기(詐欺) 집단이 교회요, 가룟 유다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예수의 이름을 팔아 남을 속이고 등쳐먹는 족속(族屬)들이 가룟 유다라고 폭언(暴言)을 했다. 그들의 유창(流暢)한 기도를 들을 때는 침을 뱉고 싶었으며, 찬송을 할 때는 코웃음을 웃었다. 그 익숙한 사술(邪術)과 그 능숙(能熟)한 변명...흥분한 나는 예배 때 오물(汚物) 세례를 주겠노라고 까지 모욕(侮辱)적인 언사(言辭)를 퍼부었다. 이 교회 저 교회 유랑(流浪) 예배를 드리며 사기한(詐欺漢)들을 저주하였다.
갓 시집 온 새댁에게 안 되었다. 더구나 임신까지 해서 절대 안정이 필요한데, 그는 싸움의 와중(渦中)에서 나를 원망하고 힐난(詰難)을 했다. 독실(篤實)한 신자인 줄 알았는데, 십일조도 내지 않고 봉사하며 충성하기는커녕 비난(非難)만 일삼는데 환멸(幻滅)을 느낀 것 같았다. 아내는 결혼 80일 만에 친정(親庭)으로 갔다. 나는 그가 없는 동안 해결을 짓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했다. 건수 동생은 그들 자녀 패거리들에게 폭행(暴行)까지 당했다. 상수 동생은 교회에 다니지 말라고 충고를 하였다. 하나님 바라보고 교회 가는 것이지 사람 바라보고 교회 가는 것은 아니라고 나 스스로를 달랬으나, 그들만 보면 용서(容恕)는커녕 피가 역류(逆流)함을 느꼈다. 시간이 가고 대질(對質)을 하면서 다행히 한 사람 한 사람의 혐의(嫌疑)가 풀리고 책임의 한계(限界)가 명확해져서 오해(誤解)도 풀었다. 그 동안 기도와 찬송은 끊어지고, 신자로서의 큰 죄를 짓고 있었다. 믿은 이후 두 번째의 위기(危機)였다.
* *
때때로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적인 생각과 무신론적(無神論的)인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흥분(興奮)도 가라앉고 아내의 충고도 있어서 다시 본교회에 나갔다. 인간적으로 이장로님을 배신할 수 없고, 신앙적으로 예수의 몸된 교회를 모독(冒瀆)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중단되었던 기도를 다시 시작했다. 물론 아론과 같이 황금(黃金) 송아지를 우상(偶像)으로 섬겼던 일과, 로마 병정처럼 주의 옆구리를 찔렀던 일을 회개(悔改)하며. 그리고 아내의 순산(順産)을 위해.
1971년 2월 14일. 첫 아들을 낳았다. 경사(慶事) 중의 경사였다. 그러나 난산(難産) 중의 난산이었다. 수술할 때 너무 출혈(出血)을 많이 해서 장기간의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학년 말 휴가를 맞아 해산(解産) 2주간 만에 처가에 내려갔다. 산모는 메리놀병원에서 퇴원하였으나 아직 창백한 얼굴로 신음(呻吟)하고 있었다. 자성병원(慈聖病院)에 가서 세 번째 수술을 하고 입원했다. 그 동안 음식을 취하지 못한 채 주사로 연명(延命)하고 있었으며, 대소변을 받아낼 정도로 극도로 허약(虛弱)해졌다.
직장(職場) 때문에 평균 2주일 만에 처가에 내려갔는데, 시일이 지날수록 건강이 악화되었다. 심장의 고동(鼓動)이 불규칙하고, 황달(黃疸)이 급성간장염(急性肝臟炎)으로 진전(進展)되며, 위장도 심하게 상해서 병원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기도와는 반비례로 차도(差度)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올 날이 왔다. 병원 약방 모두 손을 떼었다. 최선을 다 했다고만 할 뿐 치료를 사절(謝絶)했다. 사형선고(死刑宣告)나 다름없었다. 장인 장모님은 물론 온 가족이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눈물의 기도를 했다. 나도 물론 눈물로 기도하긴 처음이었다. 생명만 살려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서원(誓願) 기도를 하였다. 아직 도사리고 있는 나의 교만(驕慢), 하나님께 대한 불충성(不忠誠), 사람들에 대한 불신(不信)과 증오(憎惡), 교회에 대한 모욕(侮辱), 황금에 대한 우상 숭배....매거(枚擧)할 수 없는 죄들을 회개하며 용서를 빌었다.
어느 새벽 기도회에서 장모님은 이 딱한 사정을 고(高)권사께 호소했더니 그 분은 안수(按手) 기도를 했다. 산모의 믿음이 부족하다며 믿고 일어나서 음식을 취하라고 했다. 산모는 순종했다. 할렐루야!
산모는 비로소 음식을 먹고 소화를 시켰다. 계속 안수 기도를 받으면서 음식을 취함으로서 차도(差度)가 생겼다. 너무도 놀라운 기적(奇蹟)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감사했다. 장로(長老)인 장인어른도 안수 기도에 관해서 평소 회의적이었는데, 이런 체험을 통해서 확신이 생기고 나일론 신자였던 나도 또한 그러했다.
백일 가까워서야 산모와 아기는 서울로 올라왔다. 산모를 곁부축하고 아기는 외할머니가 업고. 회복되었다고 하지만 아직 병색(病色)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숙부를 통해서 산후(産後) 조리를 위한 한약(漢藥)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한사코 안 먹겠다는 것이다. 기도로 낫겠다고 고집했다. 한약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약을 쓰면서 기도하라 했지만 듣지 않고, 대신 기도원(祈禱院)에 가겠다고 했다. 과거 같으면 반신반의(半信半疑)했겠으나 기도원에 가는 건 찬성이었다. 당시 퇴계로 대한극장 맞은편에 변(卞)계단 권사 기도원이 있었다. 나는 학교로 출근하고 아내는 기도원으로 출근(?) 하다시피 했다.
1972년 새 해가 되니까 안심할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서원 기도 했던 대로 하기로 했다. 주일 성수, 십일조 생활, 그리고 교회학교 봉사....사실 교회학교 봉사를 부탁 받을 때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시달린 것도 지겨운데 휴일까지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느냐고 사양했다. 청장년(靑壯年)회에 가입하라는 권유를 받을 때에도, 사람과의 교제를 싫어하는 내 성격과 교인들부터의 배신(背信)을 받고 보니, 인간 기피증(忌避症)이 생겨서 내 개인 신앙만 지키려 했다. 그러나 변하여 새 사람 되어 새 출발하기로 작정했다. 정식으로 청장년회(靑壯年會)에 가입하였으며, 금요일 속회(屬會)에도 참석하며 물론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였다.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는 습관도 생기고, 교우들도 사귀며 교회 생활에 적응해 갔다. 어머니와 아내는 물론 좋아하였다.
1973년. 이렇게 1년이 지나니까 속장(屬長)으로 임명했다. 청장년회에서는 문화연구부장, 교회학교에서는 초등부 교사. 힘이 들었으나 순종하는 마음으로 묵묵(黙黙)히 일했다. 때마침 명수대(明水臺)에서 뜻밖에 은로(恩露)로 다시 전근되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교회학교 성장에 목표를 두고 전략(戰略)을 세웠다. 교회가 학구(學區)내에 있으므로 아동들에게 전도하기로 한 것이다. 빌리 그레함(Billy Graham) 전도대회와 6월부터 시작된 새벽 기도회는 나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었다. 결근(缺勤)한 반(班) 보결(補缺)을 자원해서 들어가 전도하고, 휴식시간을 이용해서 전도하는 데 예상외에 좋은 반응을 얻어 많은 어린이들이 교회로 왔다. 100명 내외의 초등부가 200명에 육박(肉薄)해서 교사 부족 사태가 생겼다. 동료 교사들에게도 기회 있는대로 전도하니까 ‘빌리 그레함’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여름성경학교 부장 책임이 주어져 헌신적인 열성과 새로운 아이디어(idea)로 전시회, 발표회, 교사위로회를 마쳐, 칭찬이 대단했다. 청장년회에서도 교양강좌를 자청하고, 회지(會誌) 발간, 영화 상영 등 책임을 완수하며 다른 부서 일도 힘껏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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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은 세례 받은지 10년이 된 해요 가장 은혜로웠던 해이다. 1월 24일에 둘째 아들을 주셨고, 가장 기쁘고 열심히 교회 봉사를 하였던 해이다. 이 해 10월 2일부터 가을대부흥회(大復興會)를 하였다. 지금까지 나는 부흥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선입감(先入感)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후 부흥회를 계기로 교회가 분열되었고, 소위 은혜 받았다는 사람들의 신비주의적인 자세가 눈에 거슬렸다. 뿐만 아니라 광적(狂的)인 분위기가 나의 생리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사람 되어 새 출발을 하게 된 바에야 나도 은혜를 받아볼까 한 것이다. 먼저 성가대에 입대하라는 권유를 받아들이고, 준비 기도회부터 참석했다. 강사는 금호(金湖)제일교회 장(張)광영 목사님이었다. 둘째 날 새벽 기도회 때는 미리 감사 헌금을 내었으며, 마침 개천절 공휴일이라 낮 집회에도 참석하였다. ‘성령의 역사’라는 주제로 4시간 동안의 설교가 진행되고 있었다. 좀 지루한 느낌이 들고 집안도 궁금해서 잠깐 집에 들렀다.
그런데 문들이 활짝 열려있고 집안 분위기(雰圍氣)가 썰렁했다. 세 살짜리 大石이가 엄마는 동생 大珍을 데리고 병원에 뛰어 갔다는 것이다. 보행기(步行器)를 타다가 1m 남짓 되는 부엌 마루에서 콘크리트(concrete) 밑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이 아닌가? 불길(不吉)한 예감이 들어 나도 뛰어나갔는데, 아내는 사색(死色)이 된 채로 아기를 안고 되돌아 온 것이다. 병원에서는 괜찮을 거라면서 손을 쓰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마가 깨지고 왼쪽 눈언저리가 시퍼렇게 부어서 눈을 뜨지 못하며, 눈 아래는 보행기 손잡이 철사에 다친 듯 멍들어 있는 채 울지도 못했다. 하다못해 머큐로크롬(mercurochrome)이나 안티프라(ANTIPHLAMINE)이라도 발라줘야지 그대로 보내는 법이 어디 있을까? 만일 뇌(腦)를 다쳤다거나 눈을 다쳤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불안한 생각이 온 몸을 휘감았다.
아내는 부들부들 떨면서 부흥 목사님의 안수(按手) 기도 받기를 원했다. 병원에서 손을 쓰지 않으니까 그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설교 중이니 그럴 수도 없어서 신음하는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우는 아기를 안고 기도와 찬송을 되풀이했다. 눈물과 진땀으로 옷이 젖었다. 아기는 이내 잠이 들었으나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 날 밤 집회, 이튿날 새벽 기도회, 밤 집회...남보다 더 힘차게 손뼉을 치며 목이 쉬도록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을 더 채찍질한다고 하셨으니,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피할 수 있는 길을 주시리라 믿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부터 열이 오르더니 사흘째 날에는 고열(高熱)이 나는 게 아닌가? 뇌가 받은 충격(衝擊) 때문인지, 타박상(打撲傷)에서 오는 화농(化膿)인지, 안수 기도를 받더라도 원인은 알아야 했다. 다시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더니 목감기 때문이라는 진단(診斷)이 나왔다. 얼마나 감사한지.
아직도 회개하지 못한 나의 죄과(罪過)를 울면서 고백하고, 정말 새 사람으로 중생(重生)할 것을 서약했다. 아기에게는 안 되었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좋은 계기가 되었다. 몸이 뜨거워지는 성령 체험을 했다거나, 방언(方言) 혹은 신유(神癒) 등 남들이 원하는 은사(恩賜)는 받지 않았으나, 땀으로 목욕하면서 회개 기도하고 목이 쉬도록 찬송했던 일이 나에게 언제 있었던가? 남은 생애는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생활하면서, 복음 사업에 적극 헌신(獻身)하고 교회 일에 봉사하기로 마음먹었다. 부흥회가 끝난 후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성령(聖靈)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겸손(謙遜)이 아니라 그렇게 쉽게 은혜를 받고 성령을 받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인생 지각(遲刻)생이다. 출세도, 재리(財利)도 결혼과 신앙도.....내 나이 만 서른여덟으로 반생(半生)이 지났는데, 앞으로 대단한 일을 할 것 같지도 않다. 인생은 느끼는 사람에게는 비극(悲劇)이요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희극(喜劇)이라 하였거니와, 더 깊이 생각해보면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나의 숙명을 원망하면서 취생몽사(醉生夢死)할 필요 없이, 하나님 앞에 경건(敬虔)하며 주님을 푯대로 삼아 헌신(獻身)하며, 이웃들과 친근하고 성실하게 교제하며 살 수밖에 없다.
* 야누스(Janus)...로마 신화에서 문지기의 신으로서, 문의 앞 뒤를 보는 2개의 얼굴을 가짐.
* 위 글은 1973년 11월 29일 쓴 ‘신앙수기’에서 발췌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