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시절
국민학교 시절에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으나, 중학교에 진학하고는 신문 기자나 저술가(著述家)가 되고 싶었다. 아버지께서 신문사 지국(支局)을 한 영향(影響)일 것이다. 병행(竝行)해서 문학가가 되고 싶었다. 글 쓰는 것 읽는 것 모두가 좋았다. 그러나 사범학교에 재학중이니 국민학교 선생은 하나의 숙명(宿命)이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일찍 취직(就職)할 수 있는 유일(唯一)한 길은 사범학교였는데, 아버지께서는 처음 몇 년간은 교직에 있다가 언제인가는 법조계(法曹界)로 진로(進路)를 바꾸기를 소원하였다. 아버지께서 법조계에 뜻이 있었으나 좌절(挫折)했던 것을 아들을 통해서 보상(報償)받고 싶었던 것이다. 고향에는 광주지방법원 장흥(長興)지원과 지방검찰청 지청이 있었으며, 판.검사.변호사는 가장 존경받는 신분(身分)이었다. 그리고 소년의 생각으로도 법조계는 권력(權力)과 명예(名譽)와 재물(財物)과 인기(人氣) 등 모든 꿈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되었으며, 때마침 아버지 친지(親知)의 아드님이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지방의 축제(祝祭) 분위기였다.
감수성(感受性)이 예민(銳敏)했던 나도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개인적으로는 영예(榮譽)를 누리고 부모에게는 효도(孝道)를 하며 국가적으로는 충성(忠誠)하자는 생각을 굳혔다. 학교 매점에서 주는 보수로 학비(學費)에 보태고 남은 것은 책을 사기로 했다. 그 당시 ‘고시계(考試界)’라는 월간지(月刊誌)는 나의 둘도 없는 벗이었다. 여기에 실린 수험기(受驗記)와 합격기는 큰 자극제(刺戟劑)요 활력소(活力素)였으며, 각종 고시 안내는 좋은 정보를 제공했고, 명사(名士)들의 강의는 유유(幽幽)한 학문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성창환 저 ‘경제원론’과 장승두. 장경근 공저 ‘법제대의’ 헌책과, 이창수 저 ‘대한민국헌법대의’와 강명옥 저 ‘행정법총론’을 새로 사서 읽었다. 첫인상이 법학(法學)은 재미있으나 범위가 넓고, 경제학(經濟學)은 깊고 어렵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시간 나는 대로 읽었다. 수업 중에 몰래 읽다가 선생님의 꾸중도 들었으며, 공부하는 척 한다고 친구들의 비웃음도 받았다.
먼저 사범학교 재학 중 빡빡 머리로 제7회 보통고시(당시 4급, 군수나 경감 경찰서장)에 응시했다. 그러나 낙방(落榜)했다. 경험을 얻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상처(傷處)는 없었다. 다시 황산덕 저 ‘법학입문’을 사서 읽었는데 ‘법제대의’ 와 김증한 저 ‘법학통론’과 아주 달랐다. 법철학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어서 나의 입맛에 맞았다. 최호진 저 ‘경제대의’도 ‘경제원론’보다 쉽고 재미있는 것 같았다. 이러는 사이에 법관(法官)에 대한 희망은 더욱 굳어갔으며, 부모님과 친척들의 격려(激勵)도 있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955년 4월 1일자로 서울우신(又新)국민학교로 교사 발령을 받았다. 수복(收復) 직후인지라 교육계가 안정되지 않았으며, 만 19세 짜리 시골 촌놈의 서울 사회생활에의 적응(適應)도 참으로 힘들었다. 당시 동료들 사이에는 대학 진학 바람이 불었다. 대학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세워지고, 등록금만 내면 교문 안에 발을 딛지 않아도 학사(學士) 학위증(學位證)이 우송(郵送)되어 왔다. 이와 같은 교육계의 부패(腐敗)에 대한 반발심(反撥心)으로 인해서, 나는 독학(獨學)으로 실력을 대결해보자는 오기(傲氣)가 생겼다. 얼싸덜싸 1년을 허송세월(虛送歲月)하고, 1956년부터 본격적인 고시 준비에 들어갔다. 한태연 저 ‘헌법학’을 서브 노트 해가면서 정독(精讀)했는데 꼭 한 달이 걸렸다. 이어서 강명옥 저 ‘행정법총론’과 ‘행정법각론’을 읽고 나니까 여름이 지나갔다. 다음에는 김용식 저 ‘신형법해의’를 읽었다. 어려운 이론과 대립된 학설들이 많았다. 어렵기는 했으나 그런대로 흥미 있는 학문이었다.
1년 동안 법학뿐만 아니라 대학 1학년 인문계통 교양과목(敎養科目)은 모조리 공부를 했다. 입문(入門), 개론(槪論), 통론(通論) 자만 있으면 어떤 책이든 덤벼들었다. 이 때의 다방면(多方面)에 걸친 폭넓은 공부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아주 귀중한 체험이었으며, 나의 정체성(正體性)을 확립하는데 튼튼한 지반(地盤)이 된 셈이었다.
1957년 만 21세가 되자 초조(焦燥)해졌다. 서일교 저 ‘신형사소송법’을 공부하던 중 3월 17일, 제9회 고등고시 실시 공고에 접했다. 당시 고등고시는 사법과(司法科), 행정과(行政科), 기술과(技術科)로 나뉘어져 있었고, 대학 1년 이상을 수료(修了)해야 응시 자격이 주어지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예비고사에 합격해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예비고사에 응시하였고, 5월 23일 국무원사무국(國務院事務局)에서 합격통지서가 왔다. ‘한 층의 탑을 쌓고’라는 일기를 쓸 때의 감격을 글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나의 진로에 대한 명확(明確)한 방향이 설정(設定)된 셈이고, 가능성(可能性)을 확인한 셈이었다.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본고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이 때 사법과는 3,000여명 중 단 4명, 행정과는 2,000여 명 중 7명만 합격하였다. 참으로 어려운 시험이었다. 뜻하지 않게 입시(入試)학년인 6학년을 담임하게 되어 공부 시간에 쫓기고 건강에도 무리가 따랐다. 그러나 젊음과 희망 하나로 버티면서 민법을 공부했다. 장경학 저 ‘민법총칙’, 진승록 저 ‘물권법’‘담보물권법’‘채권법총론’‘채권법각론’을 차례로 공부했다. 정말 방대(尨大)하고 난해(難解)해서, 마치 원시림(原始林) 무성한 처녀지(處女地)를 괭이 하나로 개척(開拓)해 가는 것 같았다.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과 ‘법률서적 백만 권을 읽어도 사랑 애(愛) 자 하나도 없다’는 말을 실감(實感)하였다. 20여권의 책을 읽는 동안 법관이 되면 정말 얼음 같이 차갑고 바위 같이 단단한 인간형(人間型)이 되겠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법 이론을 하나하나 정복(征服)해 가는 만족감과, 난해(難解)한 문제와 씨름하다가 섬광(閃光)처럼 해득(解得)될 때의 희열감(喜悅感)이란, 섹스피어의 희곡(戱曲)을 읽을 때의 맛과 어찌 비교할 수 있으랴. 소년 시절이야 권력과 명예와 지위가 부러워 법관이 되고 싶었으나, 청년이 되고 공부를 깊이 하는 동안에 ‘정의감(正義感)’이 싹트기 시작했다. 부친은 자유당 천하(天下)에서 야당(野黨)생활로 일관(一貫)했기 때문에 정상배(政商輩)들과 모리배(謀利輩)들의 간교(奸巧)에 구토(嘔吐)를 느끼고 있을 때여서, 내가 법관이 된다면 소금 한 그릇 법정(法廷)에 놓고, 디케(Dike) 여신(女神)처럼 정의(正義)의 사자(使者), 인권(人權)의 수호신(守護神)이 되어 가장 공평(公平)하고 정의(正義)로운 재판을 하겠다는 의지를 굳혔다.
1958년 3월 10일. 7,8월에 제10회 고등고시를 시행한다는 공고를 접하였다. 그런데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소식이 왔다. 아버지께서 세탁업을 시작한지 3개월만인 6월 23일, 화재(火災)가 나서 생명만 건졌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생애 중 처음으로 안정된 가정 경제를 이룩한 것이요, 이제 나도 가족 부양(扶養)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을 때였는데........ 시험 한 달을 앞두고 하향(下鄕)할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難堪)했다.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김순재. 강수희. 황윤석 제씨(諸氏)들의 합격기를 눈물로 읽으면서 용기를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쳤으나 심신(心身)이 함께 지쳤다. 8월7일 온 가족이 빈 손 들고 내 자취방으로 상경(上京)해버렸다. 실의(失意)에 빠진 부모님을 위로하고 지쳐버린 심신(心身)을 회복시켜 드리는 일이 급선무(急先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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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8월 18일 혼(魂)이 다 나간 상태에서 제10회 고등고시에 첫 응시를 하였다. 아버지께서 동행하여 원남동(苑南洞) 서울법대로 갔다. 희열(喜悅)과 수심(愁心)과 당황(唐慌)의 교차! 오전 첫 시간은 헌법이었다. ‘1. 대통령의 명령 제정권을 논함 2.인격평등주의를 논함’이었다. 너무 평범해서 소홀히 했던 것이 아쉬웠다. 오후 둘째 시간은 형법. ‘1.피해자의 승낙을 논함 2. 증거인멸죄를 설명함.’ 2문에서 범인은닉죄의 객체로 착각했다. 그러나 60점은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집에 돌아왔다.
이튿날은 염려했던 과목이라 가슴이 방망이질했다.
첫째 시간 민법 ‘1.법인의 본질을 논함 2.대물변제를 설명함’이었다. 1문에서 부인설(否認說)을 빼먹고, 2문은 성질(性質)에서 틀리고 효과(效果)에서 불필요한 것을 썼다. 그래도 60점은 될 것 같았다.
둘째 시간은 국사. ‘ 1.근세조선 법제사 사상사(思想史)上 정도전을 논함 2. 삼일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쓰라’였다. 1문에서 실패. 어느 책에 정도전(鄭道傳)에 관해서 그토록 상세하게 기술한 책이 있단 말인가? 이태조 정책 중심으로 썼지만 꺼림칙했다.
머리가 벌어질 것 같아 밤잠을 설치고 사흘째 날을 맞았다.
첫째 시간 행정법. ‘1.국가에 대한 공무원의 손해배상 제도를 논함 2.공법상의 계약을 논함’이었다. 1문에서 출납공무원의 배상책임을 누락(漏落)하고, 2문에서 불평등계약의 특징을 망각(妄覺)하였다. 머리는 열 갈래로 쪼개어진 듯 했다.
둘째 시간 형사소송법. ‘1.자유심증주의를 논함 2. 수사상에 있어서 대인적 강제처분을 설명함’이었다. 비교적 잘 썼다.
사흘째 날은 문제가 생겼다. 일찍 가겠다고 7시 20분에 집을 나섰는데, 알고 보니 8시 20분이 아닌가? 을지로4가에서 전차(電車)를 탔는데 오늘따라 정전(停電)이 되어 가다가 서다가....
떨어지려니까 별일이 다 있구나 하고 시험장에 뛰어갔더니, 자리에 앉자마자 숨 돌릴 새도 없이 시작되었다.
경제학. ‘1.구매력 변동에 있어서 Fisher의 방정식과 Keynes의 방정식을 비교 설명하고 비판하라 2. 투자재의 수요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였다. 그럭저럭 쓰고 보니까 50점은 된 것 같았다.
나흘 동안의 시험을 마치고 7과목 평균을 내보니까 꼭 60점. 물론 내가 예상한 나의 주관 점수이다. 발표까지 4개월을 기다리는 일은 시험 보는 것 보다 더 초조하고 지루했다. 솔직히 첫 고시에 합격한다면 그건 기적이다. 정규(正規) 법대 교육을 마친 수재(秀才)들도 떨어지는 시험인데, 직장(職場), 자취(自炊), 독학(獨學), 허약(虛弱), 화재(火災)......이런 여건(與件)과 환경(環境)에서 합격한다면 기적(奇蹟)이 아니겠는가?
11월 22일에 발표한 행정과 30명 합격자 중 친구 갑순(甲淳)이 낙방했다. 나보다 훨씬 좋은 여건에서 공부한 그가 떨어져서 일찍이 포기(抛棄)했는데, 12월 15일에 발표된 51명의 사법과 합격자 중 내 이름은 없었다. 상수 동생이 국무원사무국에서 확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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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아버지는 그 동안 식료품상을 개업했다가 실패하고, 화재 사건으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피고(被告)로 불려 다녔다. 나는 뜻밖에 당시 가장 변두리 서울문창(文昌)국민학교에 전근(轉勤)이 되었다. 교통도 여간 불편하지 않아 출퇴근 때문에 피로했고, 박봉(薄俸)에 그나마 수입도 줄었으며, 학교 규모(規模)가 작아서 잡무(雜務)만 많아 도저히 공부할 수 없었다. 생각한 끝에 학교 숙직을 전담하면서 매식(買食)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흑석동(黑石洞)에다 건축업을 시작했다. 자본은 없고 건강은 안 좋은 데다가 행정관서(行政官署)의 부조리(不條理)와 협력자들의 사기(詐欺)로, 사업이 진척(進陟)되지 않고 건강만 악화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지난해의 고배(苦杯)를 만회(挽回)하기 위해 사법, 행정 양과를 지원하기로 화려한 계획을 하였다. 먼저 1959년 8월 18일부터 제11회 고등고시가 시작되었다.
첫째 날 국사 1. 고려 쇠망의 원인을 설명하라 2. 항일 민족운동의 과정을 쓰라
헌법 1. 언론출판의 자유와 한계를 논하라 2. 법원의 법령심사권을 논하라
잘 본 것 같았다. 다만 기운이 없고 구역질이 나왔다. 차멀미 같았다.
둘째 날 형법 1. 범의와 위법성의 인식과의 관계를 논함 2. 명예에 대한 죄를 설명함
민법 1. 근저당을 논함 2. 변제의 제공을 설명함
이런 날벼락이 또 있을까? 민법 초안을 다 써놓고 우연히 답안지 표지(表紙)를 보니까 잉크(ink)가 흠뻑 젖어있었다. 번호와 성명을 기재하는 중요한 난(欄)인데, 큰 원(圓) 하나가 선명하게 도장 찍힌 것이 아닌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잉크병 뚜껑을 열어 엎어놓았던 자리 위에, 답안지(答案紙)를 펼쳐 놓고 글씨를 썼으니, 그대로 등사(謄寫)될 수밖에....규칙상(規則上) 답안지 어느 곳이건 어떤 표시(表示)를 하면 무효(無效) 처리하게 되어 있고, 답안지를 쓰기 시작한 후로는 답안지의 교환(交換)이 안 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답안지 교환 문제를 놓고 감독자(監督者)와 말씨름이 벌어졌으며 다른 수험생들의 항의(抗議)를 받았다. 결국 바꿔주었으나 불쾌감(不快感)과 불안감(不安感)으로 답안을 쓰는데 도무지 막히고 불만스러웠다. 처리 문제는 요행(僥倖)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날 행정법 1. 행정행위의 취소를 논하라 2. 공기업의 이용관계를 논하라
형사소송법 1. 당사자주의를 논하라 2. 공판 심리의 범위를 논하라
넷째 날 경제학 1. 생산비 법칙을 설명하고 생산비와 생산 규모와의 관계를 논함
2. 수요의 탄력성을 설명하고 그 산출하는 법칙을 설명하라
경제학은 선택과목인데 3,420명 지원자 중 100여명만 선택한 것이다. 행정과의 필수과목(必須科目)이었으므로 양과(兩科) 응시를 위해 선택한 것인데, 역시 깊이 있게 공부하지 못해서 자신이 없었다.
8월 26일부터는 행정과가 시작되었다.
첫째 날 헌법 1. 우리 헌법상 입헌주의적인 규정을 논하라 2. 기본권의 제한과 한계를 논함
국사 1. 세조조의 문화정책(특히 제도 정비와의 관계. 문화정책의 이념)을 논함
2. 근세 말기 새로운 학풍의 대두를 설명함
둘째 날 행정법 1.아국 공무원 제도의 특색을 설명하라
2. 재정상 강제와 그 처벌의 특징을 논함
경제학 1. 투자승수를 논함
2. 재할인율 대출이자율 예금이자율의 상호 관계를 설명하라
역시 경제학에 손을 들었다. 과목낙제(科目落第)나 면했으면 하는 절망감(絶望感)에 빠졌다. 이날 일기장에는 이렇게 씌어있었다. ‘새삼스럽게 짜증이 났다. 일곱 식구가 드나드는 손바닥만한 방, 그나마 울음소리, 앓는 소리, 한숨 소리, 푸념.....’
셋째 날 민법 1. 표견대리를 논함 2. 아국 현행 이자단속법 체계와 금융 실정과의 모순을 지적하고 그에 위반한 이자의 효력을 설명함
넷째 날 형법 1. 과실범을 논함 2. 사기죄를 논하고 과대광고에 언급하라
마지막 날 정치학 1. 정치권력의 본질을 논함 2. 민주주의적 행정의 기본 원칙을 논함
이렇게 해서 투기(投機)요 모험(冒險)이었던 첫번 행정과 시험이 끝났다.
11월 21일 발표를 보니까 3,420명 중 22명만 합격했는데, 또 그 중 13명이 서울법대 출신이었다. 사법과 만은 미련과 기대가 컸는데 또 고배(苦杯)를 마신 것이다. 결론이야 실력 부족 때문이었겠지만 고시병(枯屍病) 환자요 고시의 노예(奴隸)로서, 다시 혈투(血鬪)를 강요당하는 느낌이 들어 눈앞이 컴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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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서광(瑞光)으로부터 시작된 희망의 새해였다. 그러나 자유당의 부정선거 규탄(糾彈) 데모(demonstration)가 마침내 4.19 학생혁명으로 폭발(爆發)했으며, 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交替)가 이루어지는 정치적 격동기(激動期)였다. 가정적으로는 아버지의 병세만 점점 악화되고, 상수 동생의 진로 문제가 불투명(不透明)했으며, 직장에서는 병역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제12회 고등고시가 정치적 상황 때문에 연기(延期)되었으나 역시 공부다운 공부를 하지 못했다. 9월이 되자 문홍주 저 ‘신한국헌법’ 한태연 저 ‘행정법’ 윤세창 저 ‘행정법 각론’ 이건호 저 ‘형법총론’ 서일교 저 ‘형법각론’ 등을 새로 사서 공부했는데, 배를 바꿔 탄 셈이다.
이번에는 6,000여명의 응시자 때문에 서울법대, 서울문리대, 성균관대로 나뉘어 보았다. 10월 2일부터 하루 세 과목을 치르었다.
첫째 날 국사 1.진흥왕의 업적을 설명하라 2. 이조 당쟁의 원인, 파벌, 영향을 논하라
헌법 1.집회 결사의 자유를 논함 2. 국무원의 헌법상 지위를 논함
민법 1. 간접점유 2. 무권리자로부터 권리를 양수한 자를 보호하는 경우를 열거하라
국사와 민법에서 만족한 답안을 쓰지 못했다.
둘째 날 형법 1. 실행의 착수를 논함 2. 공무집행방해죄
행정법 1. 자유재량행위를 설명하고 행정소송과의 관계 2.공물의 법률적 특색을 논함
형사소송법 1. 자백과 보강증거 2. 변호인 제도의 의의를 설명하고 현행 변호인 제도 를 비판하라
셋째 날 경제학 1. 유효수요 원리를 설명하고 고용량을 증가시키는 논리를 밝히라
2. 조세와 국채가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라
제10,11회보다 더 자신이 없었다. 예상(豫想) 점수를 점쳐보는 일도 그만 두고 흥미도 없었다. 12월 28일 사법과 발표에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이 날은 병역법 위반(違反) 사실이 통보되고 해임(解任) 신청을 하라는 전언통신이 왔다. 본의 아닌 기피자(忌避者)가 되어 11월 지원 입대했으나 병적지(兵籍地)가 달라 수리(受理)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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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고등고시에 전념(專念)하기 위해 사임(辭任)하고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별세(別世)하고 가족들은 굶게 되었다. 그리고 5.16 군부쿠데타가 일어나 정치 경제 등 나라 안이 극도로 혼란했다. 비장(悲壯)한 각오로 사직했는데 도저히 공부가 되지 않았다. 이 무렵 사법시행령이 개정되어, 본고시가 1,2차로 나뉘어 지고, 1차 합격자에 한해서 2차 고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1차 고사는 헌법,민법,형법 3과목이었으며 객관식(客觀式)이었다. 새로운 제도(制度)에 적응(適應)하는 일이 어려웠으나 1차 고사에는 무난(無難)히 합격하였다. 1차 고사 합격자는 다음 회에 한해서 면제(免除)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민사소송법이 필수과목(必須科目)으로 추가되어, 이영섭 저 ‘신민사소송법’ 총론.각론을 구독(購讀)하는데 퍽 힘이 들었다. 시일이 없어 몇 문제만 뽑아 투기식(投機式)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병역 관계로 1962년 2월의 제14회 사법과는 응시하지 못했다. 이 때 친구 甲淳은 제13회 행정과에 합격하였다. 이제 고등고시는 내 인생 전부였고 운명 그것이었다. ‘하여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표어(標語)를 걸고 그야말로 분골쇄신(粉骨碎身)하였다. 배가 고파 검정 활자(活字)가 흰 쌀로 보이는 역경(逆境) 속에서 온 몸과 맘을 불태웠다. 자신이 생겼다. 1차 고사에는 수석(首席) 합격을 하고 말겠다는 결사적(決死的)인 각오를 하였다.
드디어 결전(決戰)의 날 제15회 사법과 1차 고사. 1962년 7월 1일 서울법대. 나는 시험장에서 졸도(卒倒)하고 말았다. 빌려 갖고 간 이웃집 아주머니의 손목시계가 정지(停止)되어 있는 것을 몰랐다. 거의 완벽(完璧)하게 헌법을 마치고, 민법까지 자신 있게 마쳤는데 “남은 시간 15분!” 하는 감독자의 소리가 정적(靜寂)을 깨뜨렸다. 그의 시계가 틀렸겠지 했는데 오히려 내 시계가 11시 그대로가 아닌가? 순간 피가 역류(逆流)한 것 같았다. 태엽(胎葉)을 감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형법 한 과목을 손도 대지 않았는데 10여분 동안 다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손이 떨리고 온 몸에서 진땀이 나며 눈앞이 컴컴해졌다. 경련(痙攣)이 일더니 소변(小便)이 마려웠다. 시험장에서 졸도했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었으나, 그럴수록 메스껍고 현기증(眩氣症)이 나면서, 소변을 싼 채 그대로 쓰러졌다. 친구들이 빙과점(氷菓店)으로 데리고 가 냉수를 끼얹고 하여,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소변을 쌌다는 생각이 나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바지가랑이가 젖었으려니 생각하고 이리저리 살펴보니까, 팬티에 정액(精液)만 묻어 있는 게 아닌가?
‘이런 낭패(狼狽)가 있나? 무슨 몹쓸 병에나 걸리지나 않았나?’
의문과 불안을 친구들에게 말도 못한 채, 강제 납치(拉致)라도 된 듯 택시에 태워져 집으로 돌아왔다. 죽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이 그렇게 처량(凄凉)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 낙방하면 투신(投身)해버리겠다던 각오는 어디로 갔는지. 사형을 구형(求刑)했는데 무기징역으로 선고(宣告)했다면 동정(同情)인가 자선(慈善)인가? 7월 11일 발표를 보니까 여자 2명을 포함해서 468
명이 합격했으며, 친구 기선(沂琁)은 합격했으나 갑순(甲淳)은 낙방했다. 87.5가 최고 득점(得點)이었으며 컷트라인(cut line)은 60점이라고 했다. 그런데 불안했던 정액은 한참 후에 유정(遺精)이라는 걸 알았다. 몽정(夢精)이 아닌 유정이란 걸 처음 안 것이다.
어머니는 단호(斷乎)하게 고시의 포기를 종용(慫慂)하고, 나도 또한 고시를 단념(斷念)하라는 신(神)의 계시(啓示)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간신히 마음이 안정되자 호남선 열차에 몸을 싣고 송촌 외가로 갔다. 행정과에 도전(挑戰)하기 위해서였다. 농촌이므로 일은 많았으나 밥은 얻어먹을 수 있었다. 라스키 저 ‘정치학강요’와 겟텔 저 ‘정치학대요’ 그리고 경제학과 행정법을 공부했다. 한 달 만에 서울로 돌아와 9월 2일 초라한 모습으로 시험장으로 갔다. 헌법(30문),행정법(35문),경제학(35문). 9월 12일 내각(內閣)사무처(事務處)에서 448명 중 나도 합격했음을 확인하고, 2차 고사를 위해 박문옥 저 ‘행정학’과 이상조 저 ‘행정학’을 공부했다.
9월 22일부터 중앙대학 도서관에서 2차 시험이 있었다.
첫째 날 헌법 1. 헌법 제정 권력의 행사 방법 2. 우리나라의 경제 질서
민법 1. 물권적 청구권을 설명하고 다른 청구권과의 관계 2. 사단법인과 조합을 비 교하여 그 이동을 밝혀라
둘째 날 행정학 1. 현대 행정의 특징을 논함 2. 직무분류제(직계제)의 의의와 이점을 논함
경제학 1. 국내 물가와 환율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자국화폐 가치의 저락이 국내 물 가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라 2. ㄱ. 교도자본주의 ㄴ. 통화량과 통화유통량은 어떻게 다른가?
셋째 날 정치학 1. 의회주의의 본질과 논리적 구조를 설명하고 그 위기를 언급하라.
2. 선거 제도와 정당 제도의 관계를 논함
넷째 날 형법 1. 공범과 간접정범과의 이동을 논하라 2. 절취를 논하라
이렇게 해서 올해의 고시의 막이 내렸는데,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시원했다. 한 달 만인 10월 27일 38명의 합격자 명단에는 역시 내 이름은 없었다. 어느 정도의 자신이 있었는데 낙심(落心)이었다. 행정과야 덤으로 본 것이지만 상처(傷處)는 역시 컸다. 이것으로 모든 것을 청산(淸算)해야만 하였다. 이 무렵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모든 시름을 잊으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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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高試는 아편(阿片)이다. 1월 6일 성균관대학에서 제16회 사법과 1차고사를 보았다. 또 출제(出題) 경향이 달라졌다. 택일식 60문(240점), 진위식 25문(50점), 연결식21문(210점)이었다. 1월 18일 3200명 중 707명이 합격하였고 나도 내각사무처로부터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첫째 날 헌법과 민법, 둘째 날 형법과 형사소송법 셋째 날 행정법과 민사소송법 넷째 날 경제원론. 새로 공부하게 된 민사소송법의 과락(科落) 여부가 열쇠를 쥐고 있었다. 2월 26일 발표된 합격자 명단에는 또 내 이름은 없었다. 최고 득점이 64.14요 합격률이 1%이니 어려운 시험임에는 틀림없지만, 이제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어버렸다. 엥겔(Engel)계수(係數) 99의 생계(生計)를 유지하면서 공부하여 출세하겠다는 것은 위선자(僞善者)가 아닐 수 없고, 이제 건강에도 빨간 불이 켜지게 되었다. 정수리를 송곳으로 찍는 듯한 통증(痛症)이 오면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목구멍과 가슴이 갑자기 헐떡거리다가 퉁 하고 멈추면 심장이 멎는 듯 했다.
소변을 보면 따끔거리며 분필 가루 같은 것이 섞여 나왔다. 지병(持病)인 치질은 이따금 노예(奴隸) 만적(萬積)의 난(亂)을 일으켰다.
서양 속담에 ‘Every man's destiny in his hand.’라고 하였는데, 내 손에 있는 것은 무능,무력,무지,무식.....온통 없을무(無)만이 있는 게 아닌가? 껍질만의 의지(意志), 식어버린 정열(情熱), 꺾어진 패기(覇氣)! 이 서글픈 자화상(自畵像) 앞에서 나는 허공(虛空)을 치면서 마음속으로 오열(嗚咽)하고 있었다. 고시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상실(喪失)한 채 현실과 투쟁하고 있던 5월 7일 새 사법시행령이 공포되었다. 벌써 세 번째의 개혁이다. 이럴 때마다 가장 손해를 보는 사람은 독학(獨學)하는 사람이다. 이런 극한(極限) 상황(狀況)인데도 또 고시로 끌려가는 것은 고시가 곧 마약(痲藥)이요 신기루(蜃氣樓)이기 때문이다.
6월부터 시작된 장마가 태풍과 폭우로 그리고 흉작(凶作)과 수재(水災)로 이어지면서 식량 배급제(配給制)가 실시되는 경제 위기(危機)를 맞이하였다. 게다가 임신중독으로 뜻밖에 누님이 별세하고, 어머니는 쌍둥이 외손자를 양육하기 위해서 시골에 머물렀다. 나를 둘러싼 환경과 여건은 나를 질식(窒息)할 정도로 압박(壓迫)하고 있었다. 이런 빈사(瀕死) 상태에서 제1회 사법시험을 보게 되었다. 8월 5일부터 성균관대학에서 시험이 실시되었다. 첫째 날 헌법과 민법 둘째 날 형법과 형사소송법 셋째 날 행정법과 민사소송법 넷째 날 경제원론. 출제 방식이 사례(事例) 중심으로 되어 생소(生疎)했다. 9월 7일 발표에 또 낙방했다. 고시에 대한 공포(恐怖)와 열등의식(劣等意識)이 나를 엄습(掩襲)해왔다. 이 무렵 또 징집(徵集)이 되어 입대했다가 체중 미달로 불합격 귀가 조치되었다. 45Kg의 체중도 못 되었으니 해골이요 허수아비 그대로였다.
이런 상황에서 12월 27일 제2회 사법시험 제1차 고사 응시. 이듬해 1월 10일 합격. 1964년 제2차 시험 응시, 3월 14일 낙방...이렇게 희랍신화 *시지프스(Sisyphus)의 신화(神話)를 엮으면서 응시 낙방을 반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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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2월 6일(木) 눈
강의 급류(急流)를 따라 그저 흘러가는 표류(漂流)가 아니다. 산 같은 거센 파도(波濤)에 이리 밀리고 저리 떠밀릴 뿐이다. SOS를 타전(打電)할만한 시설(施設)이 있을 리 없다. ‘사람 살려!’하고 고함(高喊)친들 헛수고이다. 출항(出航)할 때의 희망이나 파선(破船)할 때의 (恐怖)조차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육지! 육지!”
“섬! 섬!”
이대로 상어 떼의 밥이 되어버릴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어느 섬이나 육지에 닿을 것이지...
이런 위기(危機)에서도 신의 가호(加護)를 확신하면서 할렐루야를 높이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러한 위난(危難)에서도 표착(漂着)될 어느 절해고도(絶海孤島)를 상상하면서, 낭만(浪漫)을 꿈꾸는 삶이 또한 있다면 또한 오죽 행복할까?
춥다! 배고프다! 힘이 없다!
머리가 몽롱(朦朧)해진다. 어느 맹수(猛獸)들의 밥이 되고, 어느 식인종(食人種)의 제물(祭物)이 되더라도 땅에서 죽고 싶다. 흙속에 묻히고 싶다.
“육지! 육지!”
“섬! 섬!”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기아(饑餓)와 병약(病弱)과 허탈(虛脫) 밖에 없었다. 고대 그리스 신탁(神託)의 성지(聖地)인 델포이(Delphi) 신전(神殿)에 갔다면, 백전전패(百戰全敗)의 점괘(占卦)가 나왔을 것이다. 1964년 3월 28일 복직(復職) 시험을 치르고 6월 1일, 3년 3개월 만에 서울은로(恩露)국민학교로 부임하였다. 송충(松蟲)이는 솔잎을 먹으며 살랬다고 자조(自嘲)하면서.
어찌 되었건 굶지 않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이제 고시는 망각(忘却) 지대(地帶)에 미련 없이 매장(埋葬)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호흡이 남아 있는 한 고시병도 함께 음성(陰性)으로 남아있으니 어찌하랴. 위령제(慰靈祭) 지내주듯이 제3회 사법시험에 원서를 내었다. 병가원(病暇願)을 내고 7월 13일부터 16일까지 시험을 보았다. 물론 아무런 부담 없이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결과는 물론 낙방. 사법시험에 영어(英語) 과목이 새로 추가되어 더 이상 응시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 고등고시라는 화려한 꿈의 날개를 접고 말았다.
그러니까 입지(立志)해서부터 10년, 예비고사부터 시험 본 기간은 8년, 응시 횟수는 예비고사, 1,2차 시험까지 합해서 16회를 헤아린다. 지금 생각하면 이렇게 무모(無謀)한 일을 왜 반복했는지 하나의 신화(神話)이다. 그러나 고시는 분명히 무지개와 같은 화려한 꿈이요, 한번 중독(中毒)되면 끊을 수 없는 몰핀(mor-phine)이다. 결론은 실력 없으니까 낙방한 것이요 도저히 공부할 수 없는 처지(處地)를 무릅쓰고 무리한 짓을 강행(强行)했을 뿐 다른 변명(辨明)은 필요 없다. 다만 아쉬운 것은 몰락(沒落)해 가는 가운(家運) 속에서, 낮은 사회적 지위를 탈피(脫皮)하여 수직상승(垂直上昇)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뚫리지 못한 채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끝난 것이다. ‘놓친 고기가 더 크게 보인다’는데....이 무렵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迎接)하지 않았다면, 내가 잠복기(潛伏期)에 들어간 고시병의 보균자(保菌者)가 되어, 어느 뒷골목에서 어떤 모습으로 폐인(廢人)생활을 했을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 이 기록은 일기장을 토대로 1976년 9월, 20년 후에 ‘落榜記’라는 이름으로 정리한 것 을 다시 발췌(拔萃)하여 여기에 적어놓은 것이다. 이것은 2008년 5월 다시 단행본으로 만들 었다.
* 디케(Dike) 여신(女神) ...그리스 신화의 정의의 여신. 한쪽 손엔 칼, 한 쪽 손엔 저울을 가 지고 눈을 감고 있음.
* 시지프스(Sisyphus)의 신화(神話)...희랍신화의 시지프스는 산꼭대기까지 무거운 바위를 들 어 올리다가 글러 떨어지면 다시 들어 올리는 일을 반복함.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는 숙명적인 업보를 짊어지고 고지를 향해 올라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