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시절
1960년이 저물어 가는 12월 28일, 징병연령 해임(解任) 내신서(內申書)를 제출하라는 공문이 내려오고, 전남 병무청에서는 1958년 6월 25일 병역을 기피(忌避)했다는 통보(通報)가 왔다. 올 때까지 오고 만 셈이다. 그 동안 병역 기피자 단속이 있을 때마다 가슴 조렸던 문제이다. 1934년생까지의 교육공무원은 병역(兵役)이 보류(保留)되었으나, 1935년생은 만 20세가 되는 1955년부터는 징집(徵集)이 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학교에는 병역 미필자(未畢者)가 많았다. 뇌물 상납(上納)을 하면서 연기(延期)들을 하고 있었으나 늘 불안해하고 있었다.
1958년 6월 25일이라면, 고향집 세탁소의 화재로 인해서, 온 가족이 정처(定處) 없던 때이고, 아버님은 폭행당한 채 음독(飮毒) 했다가 간신히 구명(救命)된 데다가, 손해배상 청구 소송으로 피소(被訴)되었을 때였다. 주소조차 불명(不明)한데 징집영장(令狀)이 나왔다니, 어떻게 누구에게 송달(送達)되었는지 알 수 없는 상황(狀況)이었다. 때문에 나도 모르게 병역 기피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병역 기피자 단속이 강화되고, 교사들에게는 복무(服務) 기간을 1년으로 단축(短縮)해준다는 혜택이 주어졌으므로 지원(志願) 입대한 사람들이 많아졌다. 물론 나도 지원서를 내놓고 1959년 11월 9일 집결지(集結地)인 용산 육군야구장으로 갔다. 그러나 지원서가 접수되지 않았다. 담당자의 말에 의하면 병적지(兵籍地)인 전남에 가서 지원하라는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4.19혁명으로 민주당 정부가 세워지면서, 개혁(改革) 차원에서 병역 기피자에 대한 단속(團束)이 더욱 강화되어, 기피자들은 교직에서 해임(解任)시킨다는 말이 떠돌았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의 고민에 빠졌다.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와 버렸는데 병적지(兵籍地) 때문에 전남까지 내려가서 지원한다는 것이 매우 번거롭고, 병석에서 신음하시는 아버지와 굶는 가족들을 남겨 두고 떠날 수가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고등고시의 중단은 곧 포기와 다름 없었다. 가족들과 상의(相議)한들 묘책(妙策)이 있을 리 없었다. 겨울 방학 동안 고민 하다가 사직(辭職)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직을 하건 입대를 하건 가족들 부양(扶養)은 어차피 못할 형편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병세가 날로 악화되어서, 만일의 경우 이 엄청난 일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 막연(漠然)했다. 입대했다 셈치고 열심히 공부해서 합격하여 군법무관(軍法務官)으로 복무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학년도말 한 달을 앞둔 1961년 2월말 마침내 사직을 하고 교문을 떠났다. 교단에 선지 만 5년 11개월 만이었다. ‘다시는 분필을 잡지 않겠다’ 는 비장(悲壯)한 각오를 하고 나왔으나 당장 갈 곳이 없었다. 그 동안 가정교사를 해달라고 졸라온 대림동 S씨네 집으로 가기로 했다. J는 1학년을 유급(留級)한 지진아(遲進兒)였다. 위로는 여중생 누나, 6학년 형이 있고, 아래로는 두 동생이 있었다. 아버지는 건축업을 하고 있었으며 식모까지 두고 있었으니, 열악(劣惡)한 환경의 대림동에서는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부모의 교육열도 높은 편이었다.
나의 식생활(食生活)은 물론 해결된 셈이고, 가족들의 최저(最低) 생활비 정도는 주리라는 기대를 안고 가정교사 생활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학습 자료를 만들고 갖가지 방법과 묘안(妙案)을 동원하여 열심히 가르쳤다. 물론 조금씩 나아졌으나 욕심대로 되지 않았다. 첫째 집중력(集中力)과 인내력(忍耐力)이 전혀 없는데다가, 공부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없었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도 기대(期待)했던 대로 보수(報酬)를 주지 않았다. 계약(契約)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해 5월 5일이었다. 나의 사직을 충격적(衝擊的)으로 지켜본 아버지는 그 때부터 병세가 급격하게 악화(惡化)되었으리라. 잇달아 5.16 군사 쿠데타(coup d'Etat 프)가 일어났다. 군인들의 총부리 앞에서 산천초목(山川草木)이 떨고, 혼란했던 정국(政局)이 조용해졌다. 기피자들에 대한 단속이 더욱 심해졌다. 혁명 정부는 자진 신고(申告)기간을 설정하여, 나도 아버지의 친구인 김승기(金勝基)씨를 소집 통보인(通報人)으로 신고하여, 언제라도 영장(令狀)이 나오면 입대할 각오가 되었다.
어느 날 소집 통보인으로부터 장흥(長興)경찰서로 출두(出頭)하라는 전달이 왔다. 그런데, 출두하자마자 불쾌(不快)했던 것은, 또 한 명을 구속(拘束)했으니 한 건을 올렸다고 희희낙락(喜喜樂樂)한 것이 아닌가? 수사실(搜査室) 한 쪽 구석에는 역시 잡혀온 기피자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이리 채이고 저리 짓밟히고 있었다. 한결같이 덥수룩한 머리에 핫바지 저고리를 입은 시골 청년들이었다. 한 순경이 나를 앞에 앉히더니 조서(調書)를 꾸미겠다고 하였다. 나는 서울에서부터 내 스스로 출두했으니 체포(逮捕)했다는 말을 쓰지 말라고 했다. 건방지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본 순경은 기피자가 무슨 말이 많으냐고 고함을 쳤다. 나는 징집영장을 받은 바 없기 때문에 기피자가 아니라고 항변(抗辯)하자, 그는 영장을 받았으나 군대에 가기 싫어 기피했다고 조서를 꾸몄다. 조서는 멋대로 쓰되 그 내용에 승복(承服)할 수 없으므로 지장(指章)을 찍을 수 없다고 버티었더니, 갖은 욕설을 하면서 협박(脅迫)과 회유(懷柔)를 반복했다.
벽에는 ‘인권옹호주간’ 이라는 현수막(懸垂幕)이 걸려 있었다. 끌려온 기피자들에게 폭언(暴言)과 폭행(暴行) 등 인격적인 모욕(侮辱)을 서슴지 않고 했다. 나는 현수막을 일부로 쳐다보면서 몇 번이고 입을 악물었다. 어서 법관이 되거나 총경이 되어 저런 사람을 일벌백계(一罰百戒)를 하고 싶었다. 명찰(名札)과 책상 위의 명패(名牌)를 보고 수첩을 꺼내어 그들 경찰관들의 이름을 적었다. 승기씨로부터 어떤 전화가 왔는지 갑자기 경찰관들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그 분은 경찰을 지원하는 지방 유지(有志)였는데, 우리 아버지는 지난 날 건국(建國), 반공(反共), 반탁(反託)의 투사였다는 경력을 이야기했으리라. 그리고 나도 사법과 1차고시까지 합격한 유망(有望)한 청년이니까 잘 봐달라는 부탁도 했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조서 내용을 인정하고 지장만 찍으면 선처(善處)하겠다고 회유(懷柔)했다.
“승복할 수 없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24시간 후면 더 이상 구금(拘禁)할 수 없을 테니까 알아서 하십시오. ”
“그런 법이 어딨어?”
“그 법전(法典) 이리 주세요. 형사소송법(刑事訴訟法)에서 찾아 드릴 테니..... 만약 석방(釋放)하지 않으면 지금 이 인권(人權) 침해(侵害) 사례(事例)를 언론(言論)에 보도(報道)해 버릴 것이요.”
사법과 1차고사까지 합격했으므로 법 이론과 법조문까지 인용(引用)하면서 팽팽히 맞섰다. 그들은 낯빛이 변하면서 저녁 식사를 시켜 왔다. 나는 안 먹겠다고 뿌리치며, 하룻밤 지샐 각오를 했다. 유치장(留置場)에 있는 피의자(被疑者)들에게 개.돼지 취급을 하는 모습을 밤 새 보고 있노라니 피가 역류(逆流)한 것 같았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풀려 나오기는 했으나 입맛이 썼다. 곧바로 읍사무소 병사계에 들러 지원(志願) 입대(入隊) 수속을 밟았다.
* *
1962년 1월 26일, 만 26세의 노병(老兵)으로 장흥 군청으로 집합했다. 눈이 어마어마하게 쌓였다. 용당리(龍塘里) 가는 길이 참으로 미끄러웠다. 목포(木浦)행 기선(汽船)을 탔을 때가 어둔 밤. 비포여관(飛浦旅館)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유달(儒達)국민학교에 집합했다. 오후 3시 예비 신체검사를 마치고 5시에 열차에 탔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 열차 대전발 0시 50분....”
떠드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침묵에 잠긴 사람..... 차창 밖으로 철로 연변(沿邊)에 전송(餞送) 나온 사람들을 바라보니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11시에 논산(論山)에 도착하고 8중대 막사(幕舍)로 배치 받았다. 옷을 많이 껴입었으나 밤새도록 떨었다. 9소대로 가서 밥을 먹었는데 모래알을 씹는 듯해서 먹는 둥 마는 둥. 같은 막사(幕舍)의 서울 출신들은 그래도 교양이 있어 보였으나, 지방 출신 장정들은 저속(低俗)한 욕설(辱說)과 완력(腕力)으로 주도권(主導權)을 잡으려 했다.
하루를 쉬고 월요일. 신체검사를 받는데 순번이고 줄이고 무법천지(無法天地)였다. 유행가에 식상(食傷)한 검사관이 명곡(名曲) 부를 사람 없느냐고 해서 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오 나의 태양’과 ‘로렐라이’를 불렀더니, 잘 했다면서 순번을 앞당겨 주었다. 이틀 동안 혈액 검사와 X-ray 촬영, 정신신경과, 이비인후과, 안과, 내과, 외과 순으로 검사를 받는데 외과에서 ‘치핵외고도’ 로 걸렸다.
“사내 짜식도 월경을 하나?”
아닌게아니라 팬티가 온통 피로 얼룩져 있는 것을 미쳐 몰랐다. 이튿날 신체검사 판정실(判定室)로 들어가 2시간 기다린 끝에 결국 불합격 귀향의 최종판정을 받았다. 사실 항문(肛門)이 다 빠져 나올 것 같은 통증(痛症)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러나 기왕 지원 입대했으니 합격할 것을 바랐는데 뜻밖이었고, 함께 온 상수의 친구들은 “형님 잘 됐습니다”고 축하를 해주었다. 축하할 일인지 위로할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어, 연탄 운반과 침구(寢具) 꿰매기로 공허(空虛)함을 달래며 봉사(奉仕)를 했다. 그러나 그 넓은 연병장(練兵場)을 도는 기합을 받을 때는 거의 기진맥진(氣盡脈盡)했다. 휘청거리는 두 발이 땅에 디뎌지지 않은 것 같았으며,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점심을 먹고는 8중대 10소대로 모였는데 모두 78명이었다. 방첩(防諜) 교육을 받은 뒤, 귀향증과 여비를 받았다. 논산(論山)역에서 서울행 기차를 탔는데 5일간의 수용연대 생활이 필름(film)처럼 지나갔다. 뜻밖에 귀향(歸鄕)한 아들을 다시 보게 된 어머니는 물론이고, 동생들도 잔치 기분이었다. ‘공부 계속 하라’는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입을 악물고 공부하리라 결심했다. 제 14회 사법과 1차고사 합격자 300여명의 발표가 있은 후였다.
뜻밖에 서울지방검찰청으로부터 출두(出頭) 명령서가 왔다. 3월 2일 서울지검 17호 검사실에 출두했으나 무려 8시간 만에야 담당 K검사를 만났다. 병역법 위반으로 장흥(長興)지청에서 사건이 이송(移送)되어 온 것이다. 장흥지청에 발도 디뎌본 일이 없는데,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었기에 이런 낮도깨비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물론 수사 결과 무혐의(無嫌疑) 처리되어 귀가(歸家)했다.
이 날 상수(祥洙) 동생으로부터는 소포와 편지가 왔다. 그는 1962년 2월 16일에 지원 입대하였는데, 학보병(學保兵) 혜택을 받지 못하여 2년 6개월을 복무하게 되었으며, QT 점수 140점을 받았으나 포병(砲兵)으로 가게 되어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체념(諦念)하겠다고 했다. 참으로 불쾌했던 날이다. 그는 대학 1학년을 겨우 마치고, 도저히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휴학(休學)하고 연령 미달(未達)인데도 지원 입대한 것이다. 입대한지 꼭 한 달이 되던 날 이런 첫 소식이 왔다.
“유령처럼 희끄무레 웃는 막사들의 불빛. 싸늘히 흔들리는 새벽 별빛이 어둠 속을 마구 쏟아져 내려오는 새벽에 상수는 밥통을 안고 꿈을 꾼답니다. 먼 훗날의 서글프도록 아름다운 꿈을... 그리고 M1 소총이 겨웁고 차거운 새벽이 볼에 싸늘히 흩어질 땐, 어느 때 보다도 강렬한 존재의식을 느끼며, 삶에 대한 강렬한 의욕이 가슴속에 승화한답니다. (중략)
어쩌면 이루어질지도 모를 삼각형의 탑에서, 형이 닦아놓은 견고한 밑바닥 위에 서있을 중간 부분이 되어, 健洙라는 하나의 조그만 별처럼 아름다운 꼭지점을 이룩할 수가 있을까? 난 이렇게 오늘도 검은 흑점을 조준하면서 어쩌면 나의 인생을 관음자로 조준한다고, 총구에 쏟아져 흩어지는 봄빛 속에서 전쟁터의 이방인 ‘무르죠’가 되어봅니다. 그러노라면 조그만 조준구 사이에서 전개되는 넓은 하늘! 형님, 그래도 하늘은 푸르군요? 푸른 이념을 향한 푸른 노스탈쟈처럼....”(후략)
그리고 다시 20일 만에 편지를 보내왔다. 하루 이틀 사이에 이동될 것 같아 쓰지 않으려 했는데 평소에 꿈이 없는 그가 너무나도 강렬(强烈)하고 인상적(印象的)인 꿈을 꾸고 나서 썼다는 것이다. ‘봄은 오려나?’라는 원고 뭉치를 흩어 놓은 채, 코피를 쏟으면서 쓰러져 나무처럼 딱딱해진 나를 붙들고 한없이 울었다는 것.
“과거와 미래의 완충지대에 서서 숨 가쁘게 다가오는 운명의 올가미 속에서 난 찬란한 미래를 기대하기보다는 옛날에 돌아가고픈 회고의 정이 더 강렬하답니다. 눈물겹게 슬프고 뼈저리도록 불행했다고 생각했던 옛날이 어쩌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느냐고, 평범 속에서 행복했던 추억들을 더듬으면서, 다시 그런 시절만 있으면 난 또 무엇을 원할 수 있느냐고 스스로 물었다.
형, 이러한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창조하기 위해 젊음을 상실한, 짧아서 귀하다는 청춘을 피와 땀으로 묻어버린 형의 무덤, 시체 없는 무덤, 젊음이 승화된 무덤을 난 어찌 눈물 없이 바라볼 수 있으며, 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난 어떻게 보답해야 합니까?” (후략)
그 후 4월 24일 아버지의 1주기(週忌)를 맞이하여 훈병(訓兵)인데도 특별 외출을 나왔다. 시험에 패스(pass)해서 후반기 교육도 받지 않고 오산(烏山) 고사포(高射砲) 기지(基地)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가 처음 나온 외출은 5월 25일부터 2박 3일이었다. 건강이 좋아 보여 잘 먹은 것이 아니냐 했더니, 규칙적(規則的)인 생활에 잡념(雜念)이 없고 노동(勞動)을 많이 하기 때문이라 했다. 졸병(卒兵)으로 기합도 많이 받고 궂은일은 도맡아 했으리라. 사흘 동안 꽁보리밥에 김치 밖에 대접한 것 없었다. 그러나 빚을 얻어서 떡과 포도주와 담배를 귀대(歸隊) 선물로 들려 보냈다. 그 후 6월 18일 첫 휴가를 나왔다. 육본(陸本) 검열 때 수상(受賞)한 보로(報勞) 휴가라고 했다. 1주일 동안 아프기는 했지만 비교적 건강했다. 생일인 24일 1주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는데, 내일이면 굳게 쥘 펜(pen)을 잡기 위해 지금 총대를 굳게 메고 있는 그가 참으로 대견하고 고마웠다. 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7월 1일에 있을 고시를 잘 보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며 그를 배웅했다.
그러나 7월 1일은 내 인생의 가장 쓰라린 패배의 날이었다. 어머니 뵐 낯이 없고, 사랑하는 내 동생들에게 할 말이 없었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 위에서 가장 심각하게 갈등해봤던 날. 제15회 사법과 시험장에서 졸도를 했으니까 말이다. 고시를 포기하라는 것이 어머니의 단호(斷乎)한 권유였으나 역시 고시는 마약(痲藥)인 것이다. 간신히 마음을 안정시키고 가을에 있을 행정과 응시를 위해서 7월 17일 호남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19일 장흥(長興)국민학교로 가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400여명의 장정(壯丁)들이 집합했는데 과령(過令) 장정들은 오후 늦게야 마치었다. ‘제2을종 합격’이었다. 결국은 또 다시 입영(入營)해야 되는 것이다. 일주일 후에 외가로 와서 행정과 준비를 했다. 외사촌 동생 남용(南容), 남채(南彩) 모두가 과령(過令)으로 입대하고 없었다. 한 달 보름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 날 상수 동생이 뜻밖에 왔다. 원주(原州)로 부대 이동을 하는 중 잠깐 들렀다고 했는데, 이튿날 치를 1차고시가 궁금했을 것이었다. 물론 합격했으며 9월 22일부터 제2차 고사가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애타게 기다렸던 2차 고사에서의 합격은 끝끝내 나를 등졌다. 신문에서 발표를 보던 날 남용(南容) 동생은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는 길에 우리 집에 들렀을 때였다. 부끄러웠다.
상수(祥洙) 동생이 100일 만에 휴가를 나왔다. 학교에 들렀더니 학보(學保) 혜택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 12월 27일 학교에 가서 ‘재영기간단축원’을 해 가지고 왔다. 그러나 이튿날 영등포구청에 갔는데 병적(兵籍) 등록(登錄)이 안 되었더라는 것이다. 등록증까지 있고, 지원 입대해서 복무하고 있는데 허깨비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다. 당황해서 2,3일 안에 선처(善處)하겠다는 언약을 받고 왔지만, 행정의 난맥상(亂脈相)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1963년은 무엇인가 모르게 내 생애에 있어서의 전환점(轉換點)이 되리라는 소망과 기대를 안고 새 해를 맞이하였다. 새 해 벽두 제16회 고등고시 사법과 1차 고사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월 26일 있었던 2차 고사 최종(最終) 시험에는 또 낙방했다. 참으로 회의(懷疑)가 앞섰다. 그리고 6월 27일 누님의 사별(死別)이라는 견딜 수 없는 또 하나의 고통을 겪으면서, 7월 7일에 첫 시행된 사법시험 1차 고사를 보았고, 이어서 8월 5일부터 2차 고사에 들어갔는데 이제는 희망도 기대도 없이, 아니 고시에 대한 공포(恐怖)와 열등감(劣等感)에 심신(心身)이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역시 9월 8일 있었던 41명의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그 동안 교회에 나가게 되면서 인생을 달리 생각해 보았으니까 망정이지, 살만한 가치도 살아야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았다.
8월 18일 상수 동생은 1년 6개월 만에 제대복(除隊服)을 입고 1주간의 교육을 받기 위해 광주(光州)예비사단으로 갔고, 이 날 남용(南容)동생은 25일 간의 휴가를 마치고 보리쌀을 짊어지고 귀대하면서 들렀으며, 그들이 떠난 후에는 친구 갑순(甲淳)이 귀대하는 길에 들렀다. 다음 다음 날은 또 이종사촌 윤오(潤五)동생이 귀대 길에 들렀으니, 최근 2,3년간 우리 집은 군대(軍隊) 막사(幕舍) 같았다. 그리고 상수 동생이 제대하고 집에 오는 날, 나는 또 현역병(現役兵) 증서를 받았다. 10월 27일 장흥(長興)읍에 집합하였다가 다음 날 목포(木浦)로 집결한다는 것이다. 제2을종은 보충역(補充役)에 편입(編入)된다고 했는데 참으로 뜻밖이었다.
10월 27일 밤 9시 20분 발 호남선에 몸을 실었다. 착잡(錯雜)했으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다. 이튿날 목포(木浦)에 도착하여 9시 30분에 중앙(中央)국민학교로 갔다. 상수 동생의 국민학교 동창들이 알아보아서 참 창피했다. 예비 신체검사도 생략한 채 오후 5시 30분에 8개군 720명이 광주(光州)행 열차를 탔다. 모두들 술을 마신 채 떠들썩했으나 나는 내 앞에 펼쳐진 운명의 그림자를 응시하면서 침묵에 잠겼다. 31사단 도착이 밤 10시. 5소대 막사로 들어가서 인사기록카드를 받았다. 논산(論山)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로 질서가 정연하여 안도했다. 오전에는 혈액형, X-ray, 고시를 끝냈다. 점심을 먹고는 측정과 신검. 체중 45Kg가 문제되고, 외과에서 또 치핵(痔核) 때문에 문제되어 병종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1962년도의 상황이 똑같이 재현되었는데, 이 때는 정말 주님께 감사하면서 기뻐했다. 이튿날 귀향증과 귀향 여비를 받아 가지고 31예비사단을 나왔다. 마치 꿈 같았다. 합승을 타고 광주역으로 와서 7시 20분발 서울행 열차를 탔다. 차창 밖에는 달빛이 유난히 밝아 세레나데(serenade)를 콧노래를 불렀다.
“상수야, 상수야!”
는개에 촉촉이 젖은 옷을 걸치고 대문을 흔들었다. 모든 것을 체념(諦念)한 채 맥이 다 빠져있던 두 동생들이 뛰어 나와 그저 좋아했다.
1964년 1월 10일 제2회 사법시험 제1차 고사에 합격하고, 29일부터 제2차 시험을 치르었으나 또 낙방했다. 고시가 힘든 방랑(放浪)이요, 법조계(法曹界)가 낯선 이방(異邦)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제는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을 때, 라디오(radio)를 통해서 서울시 국민학교 교사 전형(銓衡)시험이 있다는 보도를 보고 곧 응시해서 합격했다. 그리하여 6월 1일 서울은로(恩露)국민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바로 그 이튿날 또다시 호남선 열차를 타고 강진(康津) 숙부댁을 거쳐 3일 장흥(長興)으로 갔다. 6월 5일 장흥교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또 제3을종 판정을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인가? 그러니까 세 번째 입대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시도했던 제3회 사법시험 제2차 고사를 끝으로 고시와는 영원히 결별(訣別)하였다.
1965년. 6월 1일 세 번째의 입영 통지서를 받았다. 입에서 쓸개물이 날 정도로 지긋지긋했다. 45Kg의 체중에 치핵(痔核)이 또 돌출(突出)하고 출혈(出血)이 있어서 참 고통스러웠다. 이래가지고 어떻게 완전 군장을 하고 훈련을 한단 말인가? 6일 저녁 8시에 철마를 탔다. 차창에 기대어 앉아 있으려니까 착잡(錯雜)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찬송가를 맘속으로 불러봤으나 깜박거리는 전등 불빛이 나그네의 설움을 불러일으켰다. 희미한 전등 밑에서 합장하고 있을 어머니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고, ‘주간한국’을 읽으면서 잊으려 해도 미로(迷路)를 헤매는 것 같았다. 시시각각(時時刻刻) 다가오는 운명의 그림자를 응시하고 있으려니까 현기증(眩氣症)이 나고, 가슴이 메슥거리는 게 토할 것만 같았다. 공복감(空腹感)이 이따금 온 몸을 스쳐 가면 가벼운 경련(痙攣)이 일고, 옆 사람의 시계 소리가 귀에 몹시 거슬렸다. 영산포(榮山浦)에서 내려 장흥(長興)행 버스를 갈아탔는데 만원. 욕설 투성이인 촌부(村婦)들에게도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나 현지(現地) 입영한다는 바람에 강진(康津) 작은댁을 경유(經由)해서 이튿날 광주(光州)에 도착했다. 삼각리행 합승을 타야 했는데 입영 장정(壯丁)들로 북새통을 이루어 약골(弱骨)인 나는 맨 뒤로 밀려 30분 늦게 31사단에 도착했다. 4개군 420명의 징집자와 50명의 지원자들이 몰려 수용연대로 인계(引繼)되었다.
군번(軍番)을 빨리 타기 위한 장정들의 잔꾀와 속임수, 욕지거리와 주먹다짐의 무법천지.....이 정글(jungle)의 법칙에서 나는 도저히 살아날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찼다. 5소대로 배치되었는데 33세 짜리 장정 때문에 최고 고문은 면했으나 역시 고문관이었다. 체중은 44.7Kg. 저녁 식사를 하기까지 돌 운반하는 사역(使役)에 동원되었는데 거의 빈사(瀕死) 상태였다. 치핵(痔核)의 고통으로 잠도 못 자고 식사도 못하며 밤을 새웠다. 이튿날 또 외과에서 치질(痔疾)이 문제되었다. 담당 I대위는 51년도 전주(全州)사범출신으로 교직에 있었다면서 고령인 나에게 동정적이었으며, 개인 면담(面談)을 담당한 군목 ×대위와 판정관도 모두 동정적이었다.
“군대 생활하면 오히려 건강해져서 체중도 금방 늘고, 치질도 1주일 후면 치료될 수 있습니다. 꼭 입대할 생각입니까?”
나는 고령(高齡)인 데다가 심히 허약(虛弱)하고, 부양(扶養) 가족이 여럿이며 고등고시도 지원했노라면서, 애원(哀願)하다시피 선처(善處)를 바란다고 했더니 즉각 ‘병종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주님의 은총과 어머니의 기도에 감사했다. 치핵과 함께 탈항(脫肛)까지 되어 너무 고통스러웠으나 훌훌 날 것 같았다.
아무 이해관계도 없이, 인생 패잔병(敗殘兵)들이니 병신(病身) 불구(不具)니 하는 욕설을 퍼붓는 장정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 10일 영문(營門)을 나왔다. 인솔한 정(鄭)일병은 중대(中大) 2년 법과 재학중에 입영했다고 해서, 마치 상수(祥洙) 동생처럼 느껴졌다. 영문(營門)을 나오면서 100원을 주었다. 우선 치질 약 ‘G-one'을 바르고, 구두약을 칠하며, 남방셔츠와 손수건을 사고 이발도 했다. 그러나 거울에 비추인 내 모습이 마치 산송장 그대로였다. 건강 회복을 위해 한약 10첩을 사들고 서울행 열차를 탔다. 카스테라(castella 포) 하나와 사과 둘로 저녁 식사를 하고 구룬산 디럭스 2병을 사먹었는데, 약간의 취기(醉氣)가 돌면서 피로(疲勞)가 풀린 것 같았다. 24일 ‘제1국민병신고필증’을 받았다.
이제 3회 이상 병종 불합격으로 귀향(歸鄕)했으니, 재검(再檢) 하지 않고 면제(免除)하는 줄 알고 마음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967년에 들어와 이 문제가 다시 대두되어 국방부에 알아보았는데 다시 재검(再檢)을 받아야 한다는 게 아닌가? 학부모 되는 병학(炳學)이 아버지의 소개로 국방부 조사과의 J씨를 만나 이를 확인(確認)하였다. 그는 그 동안의 내 이야기를 듣고는 마땅히 면제받아야 한다면서, 군의관(軍醫官)에게 선처(善處)를 부탁할 테니 4월 18일 보성(寶城)으로 가서 신체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마침내 ‘병역면제’ 판정을 받은 것이다. 60년부터 67년까지 무려 8년을 끌어온 병역 문제가 마침내 종결(終結)되었으니 군번(軍番) 없이 제대한 셈이다. 전쟁터에서 전사(戰死)했거나, 고통스런 훈련 과정에서 부상(負傷)당하여 의병(依病) 제대한 상이군인(傷痍軍人)들과 비교할 수는 없으나, 차라리
2년 반 복무하고 나온 게 낫지, 8년 동안 겪어온 정신적 육체적 고통(苦痛)을 반복하는 일은 차마 할 일이 못 된다. 오죽하면 지금도 군대 간 악몽(惡夢)을 꾸다가 진땀을 흘리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