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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두 번의 죽음

청년시절

by 최연수

1961년 5월 5일.

침통(沈痛)한 표정으로 상수 동생이 왔다. 아버지가 위독(危篤)하다는 것이다. 문창학교를 끝으로 사직(辭職)을 한 후, 대림동 선(宣)씨네 집에서 가정교사를 한지 두 달 남짓 되었을 때였다. 눈앞이 캄캄하였다. 주인집에서 응급(應急) 가료(加療)를 하라고 준 10,000환을 가지고 합승(合乘)을 탔다. 차창이 자꾸 흐렸다. 무거운 침묵(沈黙)이 차 안에 가득 했다. 노량진에서 흑석동까지 어떻게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동생은 이미 체념(諦念)한 듯, 나를 오히려 위안해 주었다. 언제 와도 올 일인데 너무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그러나 그의 말이 제대로 들릴 까닭이 없었다.

‘설마 돌아가시랴....응급 가료하면 될테지.....’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언덕길을 헐레벌떡 올라갔다. 동네 사람들의 표정으로부터 벌써 희망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문 안에 발을 디디는 순간, 공기가 싸늘함을 감촉(感觸)할 수 있었다. 이미 운명(殞命)을 한 뒤였다. 아버지께서는 일한합병(日韓合倂)으로 주권을 잃었던 1910년(庚戌) 음력 9월 25일(양력10월 27일), 2대 독자(獨子)인 부(父) 최동렬(崔東烈)과 모(母) 김후덕(金厚德)사이에서 5남2녀(1남1여는 일찍 사거) 중 맏아들로 태어나셨는데, 만 50년 6개월의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생을 마치고 이렇게 영면(永眠)한 것이다. 어머니는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수의(壽衣)를 깁고 있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버진 잘 돌아가셨어요. 어머니, 그 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나는 우선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안심시켰다. 그러나 어머니는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셨다. 이성(理性)을 잃지 않은 채 태연(泰然)해 보려고 애를 섰으나, 전신(全身)이 오들오들 떨림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동생은 외부 연락을 맡기 위해서 밖으로 내보내고, 어머니와 함께 손발이 굽지 않도록 묶고, 합판 위에 아버지를 모신 후 홑이불로 덮었다. 아직은 손에 온기(溫氣)가 있었다. 의식만 잃었을 뿐 아직 심장은 아직 뛰고 있지 않나 생각했다. 의식(意識)을 되찾아 기적적(奇蹟的)으로 소생(蘇生)할지 모른다는 기대도 해보았고, 절대로 운명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다짐도 해보았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冷酷)했다. 체온이 식고 몸은 점점 굳어져 갔다. 이제 비로소 돌아가셨나 보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막연(漠然)해서 그저 방안을 정리하면서 우왕좌왕(右往左往)할 뿐이었다.

내 나이 스물여섯. 집안에서 상사(喪事)를 당해보기는 처음이요, 상가(喪家)에 가서 조문(弔問)은 몇 번 해봤지만, 시신(屍身)을 직접 목격(目擊)하는 일도 별로 없었다. 장례(葬禮)는 어떻게 지내는 것이며, 상주(喪主)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 리가 없었다. 더구나 장례비는 어디서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아무런 계획도 복안(腹案)도 없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몇몇 친지(親知)들이 왔다. 다행히 장례의 절차(節次)를 아는 사람도 있고, 상사(喪事)에 경험(經驗)이 많은 사람도 있어서, 모든 것을 그들에게 의뢰(依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상 큰 문제는 역시 비용이었다. 조문객이 모여들었으나 격식(格式)과 절차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뜬 눈으로 하룻밤을 새웠다. 아버지를 여읜 슬픔보다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느라고 잠을 자지 않았다. 고향 친척들에게 부고(訃告)를 낸다 해도 협조(協助)해줄 사람 하나 없는 것 같았고, 협조를 한들 시일이 너무 촉박(促迫)한 것 같았다. 이튿날 오후가 되어서야 친구들과 친지들의 문상(問喪)이 시작되었다. 조상(弔喪)할 때마다 호곡(號哭)하라는 말이 괴로웠다. 이 넓은 세상에 나만이 고아(孤兒)라고 생각되었으나 뜻밖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비로소 내가 아버지를 여의었다는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 그들의 조문과 협조가 너무 고마워서 흐느꼈다. 그 가운데는 김현중이라는 분도 섞이어 있었다. 홑이불을 들추고, 미처 감지 못한 눈을 감겨드리기 위하여 손으로 쓸었다.

“차마 눈을 감지 못했구료!”

그는 호곡(號哭)을 했다. 그는 3년 전 드라이크리닝 세탁소를 경영하던 때, 만취(滿醉)한 채 휘발성(揮發性) 물질을 잘못 다루다가 실화(失火)를 한 바로 그 종업원(從業員)이었다. 그 비극의 원인 제공자(提供者)로서 그 동안 원망도 많이 했던 사람이었으나, 진심이건 아니건 조문하러 온 것이 고마웠다. 이렇게 상사에 조문하고 협조하는 일보다 더 아름답고 값있는 일이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전도서7:2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고 하였을 것이다.

모든 일은 친구들과 전 직장 동료들이 추진하였다. 접수(接受), 회계(會計), 부고(訃告), 장의사(葬儀社)와의 교섭등...... 친척이라고는 누님만 왔다. 친척보다는 친구들이 더 좋았고, 친지들보다는 모든 일을 해주는 장의사(葬儀社) 영감이 더 좋았다. ‘이웃 사촌’이라는 말이 그런 뜻일 것이다. 장례비는 빚을 지지 않도록 부의금(賻儀金) 범위 내에서 사용하기로 하였다. 가장 고민거리인 장례식은 이렇게 해서 친구들의 협조로 진행되었다.

아무 것도 할 것 없는 나는 새삼스럽게 슬픔에 젖었다. 염습(殮襲)할 때의 미이라(mirra 포) 같은 시신(屍身)을 바라보면서 자제(自制)를 못하고 오열(嗚咽)했다. 살아 계실 때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다. 입관(入棺) 할 때, 차라리 함께 관(棺)에 들어가 버리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었다. 임종(臨終)을 못해드린 애석(哀惜)함, 효도를 못해 드린 후회(後悔).....아버지께서는 병색(病色)이 짙어가자 가끔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눈물짓곤 하셨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올 때 위패(位牌)를 불사른 죄로 고생하고 단명(短命)한 것 같다고 후회(後悔)도 하시고, 죽어도 관(棺)하나 살 돈도 없다고 걱정하며 한숨을 쉬셨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장례비를 걱정하면서 눈을 차마 감지 못했을 아버지를 생각할 때 마다 거의 미칠 것만 같았다. 아버지께서 꼭 한 번만 의식을 회복하여, 걱정했던 장례는 이렇게 친구들의 협조로 순조롭다는 것을 보았으면.....영혼(靈魂)이 살아 있다면 이 모습을 보았으면.....

아버지는 신림동 시립공동묘지에 안장(安葬)하였다. 이종사촌 동생 윤오와 윤영 형제가 직접 땅을 팠다. 촘촘히 들어선 무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섰다. 윤오 동생이 쓴 두어 뼘 되는 나무 팻말 하나 세워 놓고, 인생의 무상(無常)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돌아왔다. 아버지께서 누워계시던 자리가 왜 그다지도 휘휘하게 넓어 보였는지, 집안이 온통 텅 비어있는 것 같이 그야말로 공허(空虛) 그대로였다. 친구 동료 친지들은 썰물처럼 다 떠나고 공간을 가득 채운 정적(靜寂)은, 눈물의 샘이 되었다. 정말 꿈같은 날이 지나갔다. 아직도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 그대로, 대림동 처소로 돌아갔다. 불현듯 떠오르는 어머니와 동생들의 얼굴과 바라다 보이는 장지(葬地)가 마음의 상처(傷處)를 아물게 하지 않았다. 하루 밤에도 두서너 번 꿈에 보였다. 기왕 돌아가셨으면 꿈에라도 아예 나타나지 않았으면.....남의 집에서 더부살이 하는 처지인데, 산란(散亂)해진 마음과 쇠약(衰弱)해진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열흘 후에는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내각제(內閣制) 헌법에 의해서 민주당이 집권(執權) 했으나, 자유당 독재에 의해서 짓눌렸던 인권(人權), 목말랐던 자유(自由)가 온갖 기대(期待)와 욕구(慾求)로 분출(噴出)하면서 사회는 대 혼란(混亂)에 빠졌다. 군.경(軍.警)이 데모를 하는가 하면, 용공(容共)세력까지도 기지개를 켰다. 이에 박정희(朴正熙)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 쿠데타(coup d'Etat 프)가 일어났다. 1961년 5월 16일이었다. 하룻밤 새에 총부리 앞에서 질서가 회복되고 사회는 안정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의 통치에 의해서,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은 금지되었다. 민주주의의 싹이 군화(軍靴)에 짓밟힌 아쉬움은 있었으나, 반공(反共)을 국시(國是)로 한다는 선언에 일단 안도(安堵)를 했고, 혼란에 종지부(終止符)를 찍었다는 데 공감(共感)했다. 그러나 건축업을 하는 주인 선(宣)씨네가 직접 타격(打擊)을 받아, 나에게 보수(報酬)는커녕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세(家勢)가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1962년. 아버지 가신지 1주기(週忌)가 되었다. 아버지께서 가장 존경하였던 신익희(申翼熙)선생의 기일(忌日)이 5월 5일인데, 기쁘고 즐거운 ‘어린이날’과 겹치는 일이 마음에 꺼려, 음력 3월 21일(4월 24일)로 지키기로 하였다. 이 날 제사(祭祀)를 드리면서 새삼스럽게 울었다. 출가한 누님은 물론, 뜻밖에 입대한 상수 동생까지 참례하기 위해서 왔으며, 이종 사촌 동생인 윤영과 윤심이도 왔다. 이튿날부터 비가 쏟아져 성묘를 못 가고, 28일에야 누님과 함께 성묘를 갔다. 아버지의 함자(銜字)는 쇠북종(鍾).민첩할민(敏)이다. 정치 문제에 민감(敏感)했고, 정치운동에 민첩(敏捷)했으며, 평생 야당(野黨)생활하면서 경종(警鐘)만을 울리다가 깨져 금이 간 채 영영 잠들었다. 이 날 이렇게 추도시(追悼詩)를 써서 읽었다.

쇠북소리

파아란 하늘 향해 외치던 소리.

산으로 메아리치다 되돌아온 소리.

몸부림치며 외치다 깨져버린 쇠북.

쇠북 여기 잠들었네.

산도 고요하고 물도 고요하고

구름만 말없이 흘러가고.

귀에 쟁쟁한 그 소리 여운이 되어

솔밭에서나 넘실거리는가.

대밭에서나 출렁거리는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은은한 소리.

우리들 가슴 속에 잔잔히

고여 있는 소리.

그 소리.

그 소리.

쇠북 소리.

(1962.5)

* *

그로부터 9년. 추석을 이틀 앞둔 1970년 9월 13일. 임신한 아내는 부산 친정에 가 있어서, 나 혼자 성묘(省墓)하기 위해서 신림동으로 갔다.

아! 이럴수가......

몸이 석고상(石膏像)처럼 되었다. 그 넓은 공동묘지가 전부 파헤쳐진 게 아닌가? 두 달 동안 ‘서울신문’과 라디오를 통해서 이장(移葬) 공고(公告)를 낸 후, 지난 달부터 서울시에서 처리했다는 것이다. 그 동안 공고를 보고 이장(移葬) 또는 화장(火葬)한 것도 다수였지만, 대부분은 무연고자(無緣故者)로 취급, 시에서 처리하여 그 날 종료(終了)했다고 했다. 서울신문 구독자(購讀者)도 아니고, 라디오를 자주 듣지 않는 탓이겠지만, 이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었다. 항의(抗議)하거나 호소(呼訴)할 상대자도 없이, 불도우저(bulldozer)로 밀어버린 허허 벌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근 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돌이켰다. 5.16 쿠데타로 집권(執權)한 군부 정권은 근대화(近代化), 개발(開發)이라는 명목(名目)으로, 모든 정책을 이렇게 불도우저 식으로 밀어붙였다.

아버지 가신지 9년 4개월 만인데, 이제 무덤조차 없어졌으니.....공교롭게도 기독교상조회라는 기관에서 도급(都給)을 맡았다니, 기독교인이 된 내가 어떻게 해석(解釋)해야 하는가? 그 많은 유골(遺骨)들을 쓰레기 모으듯 긁어 모아서 어떻게 처리했다는 말인가? 아무리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는 무의미한 존재라고는 하지만, 너무도 충격적인 사건이요, 허무하고 애석(哀惜)했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실 무렵, 죽으면 화장(火葬)해서 재를 한강에 뿌려버렸으면 좋겠다고는 했지만, 자식 된 도리로 그럴 수 없어 매장(埋葬)을 했고, 이후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 고향 선산(先山)에 이장(移葬)하려고 했는데, 이제 가보자니 가 볼 곳도 없고, 어머니를 비롯해서 누가 물으면 뭐라고 답변한다는 말인가? 천하에 불효악덕(不孝惡德)한 자식이란 자책감에 한동안 우울했다.

그 당시 9월 17일자 동아일보에는 ‘萬여遺骸함부로暗葬 서울시분묘移葬’이라는 기사와 함께,‘六개公設墓地의 異變’이라는 사설(社說)과, ‘횡설수설’란에도, 이 문제의 심각성(深刻性)을 신랄(辛辣)하게 다루었다. 74,000여 분묘(墳墓) 중 98%를 무연고로 처리했으며, 16일 서울 시청에 몰려간 유족들은 양택식(梁澤植)시장에게 없어진 유골을 돌려달라고 소동(騷動)을 벌였다

고 보도했다. 특히 일을 쉽게 해 수입을 올리려고 산소를 1/3이나 1/2 정도로 깎아내고는, 유골을 그냥 끌어당기거나 새끼줄로 끌어내 제대로 유골이 갖춰지지 않는 폐단을 가져온 데다, 인부 삯을 더 받으려고 유해의 두해골(頭骸骨)을 둘로 빠개기도 하고, 멀쩡한 머리만을 잘라내기도 하며, 심지어 일부 인부들은 금이빨 은이빨을 뽑아서 금은상에 파는 행패까지 부렸다고 보도했다.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일어난 이런 해괴(駭怪)한 사건을 증거(證據)하고, 가족 친지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나는 신문을 스크랩(scrap)해서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하도 오래 전 일이라 신문지가 누렇게 바랬지만, 지금 읽어봐도 분통(憤痛)이 터진다. 흔히 기독교는, 신자는 두 번 낳아 한 번 죽지만, 불신자는 한 번 낳아 두 번 죽는다는 말을 한다. 부연(敷衍)하면 믿지 않으면 육적(肉的)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靈的)으로 또 죽어 천국에 못 간다고 한다. 이 사실도 못내 아쉬운데, 이렇게 육적으로도 두 번의 죽음을 당한 것 같아 몹시 측은(惻隱)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 날의 일기장에 끝에는 ‘하나님이나 잘 믿을 수밖에 없다’고 썼다. 초상 때 조문 왔던 김용길선생은 너무 애통(哀痛)해 하는 나더러 ‘예수를 믿으라’고 권면했고, 지금 와서 생각하니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은 나더러 ‘잘 믿으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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