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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나무에 단물이

장년시절

by 최연수

1.겨울눈(冬芽)

1957년 늦가을. 고향 아버지로부터 편지가 왔다. 결혼하라는 내용이었다. 누나의 친구인 ㅇㅇ가 며느리 감으로 좋다는 것이다. 나는 뜻밖의 편지에 몹시 당황했다. 만 22살의 나이는 어릴 뿐만 아니라 지금은 공부하고 있을 때이고, 아무런 준비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 뜻이 없다는 답서(答書)를 즉시 띄웠다. 그러나 다시 간곡(懇曲)한 편지가 왔다. 아버지의 건강으로 보아서 일찍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고, 나의 공부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 결혼하라는 것이다. 물론 사양(辭讓)하는 답서를 또 보냈다.

나는 평소에 만 28,9살쯤, 그리고 고시에 합격한 후에 결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더 깊이 생각해볼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쪽의 적극적인 청혼(請婚)이 있어 혼담(婚談)이 무르익어 가는 사이에, 이성(異性)에 관한 자각(自覺)이 싹트고 남성으로서의 정체성(正體性)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결혼 문제를 놓고 그 장단점(長短點)을 저울질 해보고, 중학교 진학 후에는 만나본 일이 없는 ㅇㅇ라는 아가씨를 이리 저리 뜯어보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기도 했다. 생각을 깨끗이 지우려 해도 금방 다시 고개를 쳐드는 것을 어찌 하랴.

아무튼 고향에 내려가서 직접 담판(談判)할 수밖에 없어 겨울 방학을 기다렸다. 1958년 새해 첫날이 되자마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 해 1월 5일 (음력 11월 16)은 음력으로 내 나이 만 22세가 되던 때이다. 때마침 처녀도 같은 날 생일을 맞이했다고 했다. 사주(四柱)에서 시(時) 하나만 내가 약간 빠를 뿐 공교롭게도 연.월.일(年月日) 고두 삼주육자(三柱六字)는 같다고 하였다. 부모님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결혼의 최적기(最適期)이므로, 방학 때 예식(禮式)을 올리라고 간곡(懇曲)하게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여러 친척들과 아버지의 친구들도 입을 모아 적극 권고하였다. 동갑네기가 다 잘 살며, 삼주가 같아 궁합(宮合)이 아주 좋으며, 고시 합격 때까지 내 뒷바라지를 잘 해줄 것이라는 것이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간 나무가 없다 했던가? 아버지께서는 시기를 놓치면 안 되며, 좋은 색시감을 놓칠 가능성이 있다고 몸이 달았으나, 나는 약혼(約婚)만 해두었다가 고시가 끝나고 가을쯤 성혼(成婚)하면 어떻겠느냐는 타협안(妥協案)을 내놓았다.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상대방의 의향(意向)을 알아보기 위해서 누나가 특사(特使)로 파견(派遣)되었다. 표면적으로는 그 어머니가 노령(老齡)인데다가 처녀가 과년(過年)하면 안 되므로, 이번 겨울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고 꼭 결혼시키겠다면서 난색(難色)을 보이더라고 했다. 하지만 내면적(內面的)으로는 고시에 합격하면 남자가 변심(變心)할 수 있다는 불안(不安)도 겹쳤으리라고 추측(推測)했다.

열흘 동안의 단막극(單幕劇)이 끝나고, 나는 서울로 올라와 버렸다. 모든 과거를 없었던 일로 잊고 공부에 매진(邁進)하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불현듯 그의 모습이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버리면 서운할 것이라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혹시 뜻하지 않게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연애강좌’라는 책도 읽고 연애시(戀愛詩)도 쓰며 작곡(作曲)도 했다. 새삼스럽게 내가 성숙(成熟)한 남성으로서 혼기(婚期)를 맞이한 청년이라고 스스로 확인하게 되었다. 2월 5일 그는 드디어 정혼(定婚)했다는 소식을 듣고 차라리 홀가분해졌지만, 한편으로는 뭔지 모르는 섭섭함이 여운(餘韻)처럼 오래 남아있었다.

바위의 역사

솟아나 산이 된 2월이던가

꺼져서 바다 된 3월이던가

땅이 주름 잡히던 그 무렵에

짓눌려 단단히 굳었습니다.

방산충 첫 울음 울고

해면이 태어나던 8월 어느 날

조그만 숨구멍 한 개가

뚫렸습니다.

한창 흙비 내리고

바위옷 뒤덮더니

얼부풀어 금 간 곳에

뿌리털이 돋아났습니다.

섣달 그믐날 10시 반

사랑 사랑이 영글 적에는

앉은 자리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묵은 해 자락을 걷고

새 해가 동트는 새벽에

조상도 없는 꽃 한 송이가

간드러지게 피었습니다.

햇귀에 시름시름

시들더니만

달빛에 바라지며

이내 졌습니다.

46억년 긴 세월

주름잡아 1 년으로 살아오면서

그리움 없이 살자던 것이

아쉬움 없이 살자던 것이.

(1958. 3)

이따금 학부모들을 통해 청혼(請婚)이 들어오고, 심심찮게 직장 동료들도 결혼하지 않겠느냐고 의향(意向)을 떠봤지만 일체 무관심(無關心)하였다.

화재로 인해서 서울로 온 아버지는 건강이 악화되자 실기(失機)한 나의 결혼을 퍽 아쉽게 여기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목석(木石) 같은 나의 이성애(異性愛)나 성(性)에 관한 둔감(鈍感)을 염려(念慮)해서인지, 남성 호르몬(hormon)제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을 사주며 주사(注射)를 맞으라고 하였다. 직장을 사임하고 고시 공부에 전념하는 동안에는 결혼 문제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가, 고시를 포기하고 복직(復職)하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결혼 문제가 대두(擡頭)되었다. 생전의 아버지의 예언대로 나이가 이미 30 고개를 넘고 있었다. 직장에서는 노총각(老總角)이라는 딱지와 총각당 당수(黨首) 직함(職銜)까지 맡게 되었다. 심지어는 스펀지(sponge) 권총(拳銃)을 차고 다닌 게 아니냐는 선배들의 농담(弄談)까지 듣게 되었다.

2. 멧새는 버들가지에

첫 혼담이 있은지 꼭 10년이 되던 1967년 12월 17일. Y선생의 데이트(date) 신청을 받았다. 떡국으로 저녁을 먹고 아카데미극장에서 신성일.남정임 주연(主演)의 영화 ‘초연(初戀)’을 관람하였다. 두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고민을 그린 내용인데, 소재(素材)는 흔하지만 영상(映像)이 은근하고 멋있었다. 다방에서 영화에 대한 단평(短評)을 화두로 해서, 종교 문제까지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의 호의(好意)에 대한 답례(答禮)를 찾고 있었으나 연말연시(年末年始)가 되어 피차 바빴다. “초연(初宴) 베풀어 준 것 감사하며 여기에 꿈이 익어가기를” 이라고 써서 ‘추억일기’ 한 권을 선사한 것으로 일차적인 사의(謝意)는 표했다. 그러나 그의 진심은 과연 무엇일까?

한달 후인 1968년 1월 16일. 국제극장에서 둘이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내가 데이트(date)를 신청한 것이다. 신성일.고은아.윤정희 주연의 영화 ‘청춘극장’을 관람했는데 멜로드라마(melodrama)였다. 영화를 보고 나와 다방에서 이 얘기 저 얘기 나누었다. 헤어질 때 그는

“올핸 꼭 결혼하세요. 저도 결혼해야만 될 것 같아요.”

이런 말을 불쑥 꺼내었다. 나는 4,5년 후에나 할 것이라고 의미 없는 말로 싱겁게 대답했다. 내 일생 처음으로 데이트를 한 후로, 나는 나의 정체에 대해서 혼란해졌다. 나이도 들만큼 들었고, 직장 생활도 오래 했으며 공부도 꽤 했는데, 이성(異性) 교제(交際)만은 경험도 상식(常識)도 없었으며, 더구나 연애(戀愛)는 자신이 없었다. 뜻밖의 데이트를 하고 나서 그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며, 내가 어떻게 대처(對處)해야 할 것인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만 그가 날 사랑한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응수(應酬)해야 하며,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하면 그가 어떻게 대응(對應)해올까 해법(解法)을 찾기 위해 고심(苦心)했지만 궁금증만 더해갔다.

상대방이 꼬리를 치는 것으로 알고, 마음에 있으면 적극적인 공세(攻勢)를 취하라는 친구들의 권유가 있었다. 그러나 친구요 애인이라면 몰라도, 이제 결혼해야 할 처지라면 조건(條件)은 맞아야 했다. 나는 당장 결혼할 수 있는 준비도 되지 않은데다가, 그는 명문(名門) 이화여대(梨花女大) 출신으로서 YWCA 등 사회 활동을 많이 한 여성 엘리트(elite)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어떤 면에서 나보다 우월(優越)했다. 섣불리 결혼을 전제로 한 교제를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미련 없이 일찍 돌아서야 하거늘, 그렇지 못한 것이 이성 문제가 아닌가 싶었다. 사랑에 관한 추상적(抽象的)인 관념(觀念)의 탑만 높이 쌓으면서, 사춘기의 소년처럼 들떠있는 나의 우유부단(優柔不斷)함 만을 자책(自責)할 뿐이었다.

2월 19일, 예고 없이 창현(昌峴)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그는 성가대석에 앉아 있었다. 예배를 마치고 데이트를 할 생각이었으나 그는 회의가 있다고 했다. 오는 길에 혜화동 그의 집 앞을 기웃거렸다. 조그만 2층 집인데 오빠인 듯한 문패가 붙어있었다. 퍽 조용했으나 좀 쓸쓸해 보였다. 혼자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 자신을 알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10년 전 첫 혼담이 있을 때와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의 연약(軟弱)함을 모두 드러내 보이며, 그를 멀리서 훑어보고만 있는 것이다.

고양이와 여자는 사랑해주어야 따른다고 일찍이 상수 동생이 말하지 않았는가? 천리만리 떨어진 곳에서 정신적으로만 사랑한다는 프라토닉(Platonic)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일까? 이런 의문부 속에서 시나 편지나 일기나 쓰면서 사랑을 노래하는 일이 사랑일까?

한 철이 바뀌어 3월 22일. 나는 또다시 데이트를 신청했다. 명동 국립극장에서 연극을 보자고 했다. 그런데 약속 시간이 30분이나 지나서야 내가 ‘청자’ 다방에 도착했다. 물론 그는 없었다. 기다렸는지 아예 오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입장권에는 ‘사랑과 위트와 페이소스. 향기롭고 달콤한 남불(南佛)의 서정시! 마르셀 빠뇰 원작 <화니>’라고 적혀 있었는데, 나는 ‘미움과 우둔과 싱거움. 구리고 쓰디쓴 명동의 서사시! 마르셀 빠뇰 원작 멧새 버들 주연 <화났니?>라고 고쳐 쓰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날마다 직장에서 만났지만 특별한 대화나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 동안 써온 문집 ‘멧새는 버들가지에’를 전달했으나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 모습이 또렷할수록 오히려 지우려고 노력했다. 이미 물 건너간 그의 그림자를 붙잡으려는 나를 아프게 꾸짖었다. 높은 가지에 열려서 따먹지 못한 포도를 시기 때문에 안 따먹는다고 핑계한 이솝(Aesop)우화(寓話)의 여우처럼, 나는 그가 너무 연약하고, 자주 볼수록 다리가 짧아 보인다고 그를 평가절하(平價切下)하며 거리를 넓혀나갔다. 그리하여 가족들의 동조(同調)를 구했다.

이렇게 해서 막이 오르지도 못한 채, 또 하나의 연극 무대(舞臺)에서 조명(照明)은 꺼져버렸다. 봄이 가기 전에 드디어 그는 결혼을 했고, 나는 진심으로 그를 축하(祝賀)해주었다. 서운했던 감정이야 첫 혼담 때와 똑같았다. 모든 것이 끝난 다음에야 그것이 연정(戀情)이요, 첫사랑이 아니었던가 생각해 보았다.

* 이 글은 1969년 4월에 쓴‘멧새는 버들가지에’에서 발췌한 것임


3.풋내

1968년과 69년은 본격적인 혼담이 오고 간 해였다. 나를 전도했던 이원근(李元根) 장로의 중매로 대방동 교회의 성가대 처녀를 선보았으며, 직장 동료 P선생의 중매로 몇 사람의 맞선도 보았으나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교 동창 S의 중매로 여의도 순복음교회 처녀를 맞선보았는데, 본인은 마음에 들었으나 홀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을 돌보아야 하는 환경이 싫어서 사양했다. 옛날 한 집에서 세를 살았던 S씨네가 중매한 왕십리 처녀와 두 번이나 맞선을 보았다. 이 처녀는 우리 집에까지 찾아와 설거지를 해놓고 갈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적극적인 것이 몹시 부담스러워 어렵게 끊었다. 외사촌 동생을 통해 중매가 들어왔는데, 알고 보니까 우신(又新)학교 시절의 제자 B이었다. 물론 사양했다.

연애가 아닌 중매(仲媒) 결혼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혀 알지 못한 처녀를 한 두 번 봐가지고 어떻게 판단한다는 말인가? 중매인(仲媒人)을 전폭적(全幅的)으로 믿고 눈 딱

감은 채 하기 전에는 성혼(成婚)되기 힘들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자신은 생각하지 않은 채 눈만 높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혼담(婚談)이 뚝 끊어졌다. 내 눈이 높은 것은 아닌데 조건은 꽤 까다로웠던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 집 가정 사정(事情)이나 환경(環境)을 생각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건 나이 서른 서너 살이 되었으니 세월이 흐를수록 노총각의 주가(株價)는 떨어지기 마련 아닌가? 1970년이 되면서 어머니의 성화에 초조감이 증폭(增幅)해졌다. 이제는 치마만 둘렀으면 결혼해야 한다는 말까지 있었으니...

1970년.

1월2일 흑석동교회 정병기(鄭炳基)목사님의 중매로 문래동교회의 S라는 처녀와 맞선을 보았다. 26세라면 10년 연하인 데다가 AB 혈액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쪽에서도 미온적(微溫的)인 태도 같아서 첫선으로 끝났다. 1월 29일 李元根 장로님으로부터 중매가 들어왔다. 자기네 상점 사무원인데 장로의 딸로서 믿음이 좋다는 것이다. 24,5세라면 지나치게 연하(年下)라 곤란하다 했더니, 자기는 열두 살 연하(年下)라도 좋기만 하더라고 했다. 역시 나이 때문에 맞선을 보지 않기로 했다. 2월 22일 직장 동료(同僚) P로부터 중매가 들어왔다. 포항에 사는 32세의 노처녀인데 모 사단장(師團長)의 처제(妻弟)라는 것. 마침내 30세라는 상한선(上限線)을 깨고 28일 맞선을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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