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년시절
2월 28일. 오후 3시에 있을 맞선을 준비하느라고 머리를 감고 기름도 약간 발랐다. 그런데 점심을 먹고 있으려니까 전화가 왔다. 이장로님이었다.
“다른 데 알아봤나?”
“오늘 한 군데 보러 갈 거예요.”
“어떤 사람인데?”
나는 대강 설명했더니
“응 그래? 거기 있어. 좀 기다려.”
하면서 한참 침묵(沈黙)이 흘렀다. 보나마나 상점(商店) 처녀이려니 생각했다. 이윽고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산에 있는 내 손녀가 올해 서른둘인데, 언니가 최선생을 한 번 봤으면 하는데 그럴 생각 없나?”
“보지요.”
나는 대뜸 대답했다. 엉석으로 하던 버릇으로 껄껄 웃으며.
“그럼 말이지, 바빠서 당장 보고 싶다니까 나오라.”
“그러죠.”
“여보세요. 저 처녀 언닌디요, 자가용 타고 흑석동으로 가겄이요. 어디메서 만날까요?”
낯선 평안도 사투리였다. 명수대(明水臺) 교문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쳇, 복도 많다. 하루에 두 처녀를 맞선봐? 오늘 아침에 30대도 괜찮다고 했더니 둘 다 30대 네...’
나는 큰 기대를 걸지 않고 학교 앞으로 갔다. 검정 양복에 빨강.초록 무늬가 있는 고운 넥타이를 매고 두툼한 털 오우버코우트(over coat)를 입었다.
“이장로님댁에서 오셨지요?”
“네, 최선생님이세요?”
악센트(accent)가 세고 쾌활(快活)한 40대 외사촌 언니와, 온순(溫順)한 30대 친언니 두 분이었다. 곧 다방 ‘혜성’으로 안내했다. 말은 외사촌 언니가 도맡아서 했다.
“선생님 인상이 참 좋습네다요?”
“사람이야 좋죠. 결혼 조건이 나빠서 그렇지...”
언니들은 큰 소리로 웃었다. 조금 있으니까 청년 학생이 들어왔는데 사촌 언니의 아들(길청)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1:3의 맞선인 셈이다.
“지들은 피양 사람인디요, 이남 사람은 싫다는 걸 요새 세상에 그런 생각이 어데 있는가고 했수다.”
“..........”
한참 지방 이야기를 하다가
“장사꾼도 좋습네까?”
하면서 상업(商業)하는 가문(家門)인데 교육 공무원과 안 맞을 게 아니냐는 것이다. 나는 본인만 좋으면 그런 건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침묵이 흐른 동안 나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면서 열대어(熱帶魚)를 보고 있었다. 두 언니는 귓속말로 속삭이더니
“오늘 선볼 데가 있다디요?”
“예, 3시예요.”
“사실은 치녀가 여기 와 있어요. 보고 싶으면 볼까요?”
“그러죠 뭐”
다방이 아니라 승용차 안에 있다고 했다. 교만해서가 아니고 수줍어서 그런데 가서 보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아무리 수줍기로서니 그럼 맞선도 안 보고 시집가려나? 요즘 그런 여자가 어디 있담. 나이 서른둘이면 벌써 몇 번 봤을 법한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보나마나 못 생겼거나 잘난 척 하는 사람일거라고 짐작을 했다. 그만 둘까 했으나 보기나 하자면서 내가 앞장서서 승용차로 갔다.
“이쁘딘 않아요. 거저 마음씨 곱고, 신앙 좋고, 살림꾼일 뿐이디...”
언니는 기사에게 나가있으라고 했다. 언니는 뒷자리에서 처녀와 함께 앉고, 나는 앞자리로 앉으면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니 무슨 총각이 수줍어할까?”
“아니, 그렇게 수줍어서야 어떻게 시집을 갑니까?”
공격(攻擊)과 역습(逆襲)이 있고 나서 나는
“혈액형이 A지요?”
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힐끔힐끔 쳐다보니까 키는 무척 컸으나, 머풀러(muffler)를 두르고 있어서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살결이 곱고 예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눈과 눈썹이 짙고 광대뼈가 좀 나오며 입이 내미는 편이었다.
“요즘 감기를 앓아 화장을 안해서...”
언니는 변명을 했다.
“지금 몇 학년 맡고 계셔요?”
그의 첫 말이었다. 이가 크고 희었지만 앞쪽 윗니 두 개 사이에 녹두 알만한 은이 박혀 있는 걸로 미루어 이가 안 좋은 듯했다. 그는 연두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첫 인상이 선(線)이 굵고 쾌활하나 남성적(男性的)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참 우습고 싱거운 첫선을 보고 다시 다방 ‘충무’로 갔다. 출가외인(出嫁外人)이므로 종교는 남편 따라 갈 거라고 했지만, 독실한 불교(佛敎) 신자라는 것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이튿날은 3.1절 공휴일이라 인사차 어머니와 함께 냉천동(冷泉洞) 李장로님댁을 방문했다. 어머니는 대단한 멀미를 하였다. 그런데 부산에 내려갔으리라 했던 처녀가 아직 가지 않아서 다시 맞선을 보게 되었다. 전날 승용차 안에서 봤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보라색 원피스(one-piece dress)를 입었고, 화장도 한 것 같았다. 예쁘지는 않아도 얼굴에 흠이 없고 건강하며 활발하고 생활력이 강할 것 같았다. 이장로님은 손녀 자랑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 하고, 어머니는 귓속말로 마음에 든다고 하였다.
순복음교회 4부 예배를 드렸다. ‘3.1절과 아가페 사랑’이란 제목으로 조용기 목사의 설교가 있었는데, 나의 결혼에 관한 어떤 계시(啓示) 같기도 했다. 어머니는 더 따질 필요 없이 결정 지으라 했지만, 나는 양쪽을 저울질하면서 밤을 새웠다. 2일 아침 또 이장로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때? 어머니 마음에 들다 하던?”
“글쎄요, 어머닌 좋다나 봐요.”
“그럼 최선생은?”
“글쎄요....”
“망설이지 말고 결정지어라. 내 손녀가 어디가 나빠? 마음에 어느 정도 있으면 부산으로 연락할 테니 다음에 둘이 또 만나라.”
“..........”
전화를 끊고 나니 머리가 아팠다.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現在)’와 ‘사람’을 중시하느냐, ‘장래(將來)’와 ‘하나님’을 중시하느냐는 선택의 기로(岐路)에서, 응당 4:5 비율로 후자 쪽이었다. 반 강제(强制)인지, 하나님의 섭리인지. 아무튼 인생의 분수령(分水嶺)에서 방황(彷徨)할 때는 이장로님이 나타난 게 아닌가? 이장로님을 구세주(救世主)처럼 여겨온 우리들은 내 연약한 믿음을 단단히 붙들어 매놓기 위해서, 잘 믿는 가정으로 이끌고 가는 것 같았다. 대사(大事)는 하나님의 섭리대로 되어간다는 것을 믿게 된 바에야 마땅히 0순위(順位)는 영순(永順)이가 아닐까? 포항 처녀 측에서 몸이 달 것 같았으나 미련을 끊기로 하고, 4:6 비율로 부산 처녀 측으로 방향을 잡았다. 100% 만족할 수는 없어도 그러나 막상 방향(方向)을 잡으려고 하니 뭘 잃은 듯 허전하고 아쉬웠다.
맞선 본지 일주일. 우리는 다방에서 세 번째로 만났다. 가까이 앉아 여러 가지 말을 주고받았다. 그는 할아버지의 체면(體面)과 어머니의 권고(勸告)에 의해서 데이트를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을 힘주어 물었다. 물론 그런 면도 없지 않았으나, 그러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따르겠다고 말했다. 99%의 합의(合意)를 보고 거리로 나왔다. 네온사인(neon-sign)이 화려하게 수놓는 밤거리를 둘이서 걸으면서, 나는 은근히 키를 맞대어 보았다. 내가 약간 큰 편이었다. 이튿날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파도치던 내 마음이 오히려 잔잔해졌다. 이렇게 싱겁게 이루어질 일이었다면 왜 그렇게 헤매었는지.
3월 8일. 이장로님과 순복음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휘경동(徽慶洞) 귀녀(貴女)언니의 승용차로 북악 스카이웨이(sky-way) 드라이브(drive)를 한 후 언니댁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형부와 언니는 솔직(率直)하고 결단성(決斷性) 있는 게 참 좋아 보였다. 약혼식은 생략(省略)하고 한 달 후쯤 서울에서 결혼식을 하자고 잠정적(暫定的)인 합의를 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사연이 많았다.
< 할아버지 이원근 장로님은 4,5년 전부터 부산 아드님에게 몇 차례나 나를 소개했다. 그러나 전라도(全羅道) 출신이요 공무원(公務員)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런데 손녀가 이도원씨의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어 서울에 올라왔다. 마침 어떤 사람과 맞선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만나고 싶지가 않아서 인사차 할아버지 댁에만 잠깐 들렀다. 아산 현충사 가는 길인데, 전혀 뜻하지 않게 나와 맞선을 보게 되었다. 서울에 올려 보낸 부모님은 이번 맞선이 꼭 성사(成事)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간절히 하였는데, 엉뚱한 사람과 맞선을 보게 되고 마침내 성사되었다.>
이런 줄거리였다. 실질적으로 약혼을 한 셈이었다. 다음 날 아가씨는 부산에 내려갔으며, 구체적인 것은 서신으로 연락하기로 했다. 나는 첫 편지를 띄워 보냈다.
<제1신>
順아가씨에게.
차창에 몸을 기대어,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지난날을 돌이켜 보며, 뭔지 모르는 아쉬움에 코끝이 시릴 順을 생각하며 펜을 쥐었소.
길고도 먼 여로. 어차피 궤도를 따라 달릴 숙명이었으면서도, 우리들은 너무 종착역에 대한 기대와 불안을 함께 지닌 채, 몽롱한 의식 속에서 철마의 향방을 스스로 통제해 보려 했던 거요. 무리였고 말고.
順.
지난 1주간의 숙제는, 힘에 겨우리만큼 너무 벅찬 것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소? 아직도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안고, 가까워지는 종착역을 기적(汽笛)을 통해 의식하게 될 때, 현기증 같은 것을 느끼지는 않소?
그러나 順!
인생을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지 맙시다. 어렵고 괴로운 벽에 부딪칠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다는 게 얼마나 행복하며, 만권의 책들이 해결 짓지 못한 많고 많은 문제들을, 멍청스런 듯한 웃음 하나로 해결 지을 수 있는 눈과 입술을 가졌다는 게 얼마나 행복하오?
하나님의 뜻은 넓고 깊어 헤아릴 수 없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따르려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복 주실 것이요.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고 말하지 않소?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인간에게 무엇을 기대하겠소? 인간이 자기의 부족을 보완하자는 의지가 결혼일진데, 허물은 사랑으로 덮고, 사랑을 배워 나갑시다.
順
나의 미숙을 용서하시오. 만년 풋 복숭아인 나를 이해하여 주시오. 이성 교제가 세련되지 못해 당황하도록 하는 일이 지난 일주일 동안 많았으리라 짐작하오. 그러나 그것이 나답고 또 나의 자랑이라고 생각해 주면 고맙겠소. 너무 갑작스레 당하는 일이고, 너무 뜻밖의 일이 겹치고 겹쳐서, 가슴 답답하고 머리가 뒤숭숭하리라 믿으오. 그러나 주님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겠나이다. 아버지의 뜻이라 믿고 둘이서 손을 잡았으니, 항상 저희들과 함께 계셔서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시고, 順 아가씨 고이 지켜주시며, 새 가정을 차릴 그 날까지 아름답고 깨끗하며 사랑스런 사이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옵시기를 주님 이름 받들어 비옵나이다. 아멘
자!
마음의 짐을 챙기십시오. 그리하여 내일 준비를 하여야 하겠소. 하나님 품으로 돌아갈 그 날까지 늘 옆에 있어줄 한 이름 없는 사나이가 함께 南行열차를 타고 있다는 것을 믿어도 좋소.
오는 토요일 오후에 있을 예정인 육성회 조직 문제를 생각해가면서, 부산행 여부를 결정짓겠으니 그리 알고, 당분간 서신으로 모든 연락을 하겠수다. 회답 바라지 않으니 부담으로 생각하지 말기를. 그럼 내일까지 안녕!
’70. 3. 9 밤
믿어도 좋을 連洙로부터
* 이것은 ‘밤마다 놓는 무지개다리’에서 전재(轉載)한 것임.
오는 토요일 부산에 내려가기 위해 기차표까지 사놓았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처녀의 양친(兩親)이 상경(上京)하였으니 오라는 것이다. 나는 조퇴(早退)를 하고 곧 냉천동으로 갔다. 아버지는 작은 키에 하얀 머리와 날카로운 눈이 퍽 인상적이었으며, 어머니는 온후(溫厚)하면서 인자하게 보였다. 아버지는 부산 영락(永樂)교회 장로로서 근엄(謹嚴)하면서도 인자하였고, 어머니는 집사였다. 첫 인상이 참 좋았다. 점심을 함께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곧 29살 된 동생이 있는데, 3월 중에 결혼하려다가 누나의 혼사(婚事) 문제가 불거져 4월로 연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구 처녀와 연애 끝에 누나의 결혼을 기다릴 수 없어 부득이 먼저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누나가 먼저 하는 것이 순리(順理)가 아니냐고 하다가, 나는 4월중에 합동(合同) 결혼식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提案)을 했다. 이왕 처가(妻家)가 될 바에야 그쪽 입장을 배려(配慮)하고 싶었다. 그 일이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당돌(唐突)한 제의(提議)에 처음에는 난색(難色)을 보였으나, 처녀와 대구 사돈댁의 양해(諒解)만 있다면 고려(考慮)해 보겠노라고 원칙적인 합의(合議)를 보았다. 그렇다면 부활주일이 지나고 아버님 기일(음3월31일)이 아닌 4월 2일이 적당하다는 결론이 나와, 그렇다면 동생의 결혼도 다시 앞당기기로 하였다.
약혼식은 생략(省略)하고, 결혼식도 간소(簡素)하게 하며 이후 모든 절차(節次) 문제는 신부측에서 책임지기로 하였다. 나는 뜻만 맞으면 목사님의 축도(祝禱) 하나면 된다는 평소의 각오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모든 협의가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이루어졌다. 지체(遲滯)할 필요가 없었다. 곧바로 휘경동 언니의 안내로 아현동(阿峴洞) ‘세광가구점’으로 향했다. 나더러 선택(選擇)하라 했으나, 모든 것을 경제적이면서 실용적인 것으로 하라고 따라다니기만 했다. 짙은 갈색 호마이카(formica) 옷장 겸 이불장과 찻장을 사고, 화장대는 가구점에서 축하 선물로 받았다. 가구(家具)를 맞추고는 일행은 제2한강교로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사돈 어머니와의 상견례(相見禮)가 있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번 혼사(婚事)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며 만족(滿足)하다고들 했다. 아버님의 감사 기도를 끝으로 모두 돌아갔는데, 중매인 언니는 예복(禮服) 값을 내놓고 가셨다. 이튿날 광교 ‘미도사’로 가서 검정 양복(24,000원)과 코우트(19,000원)를 맞추었다.
나는 매일 밤 일기와 편지 쓰는 것이 일과(日課)였다. 19세기 풍의 낭만(浪漫)을 흉내 낸 것 같고, 사춘기(思春期) 소녀들의 감상적(感傷的)인 러브레터(love letter) 같기도 했으나, 짧은 시일 안에 오랜 교제(交際)를 한 것 같은 효과를 얻어야 했기 때문이다. 날마다 몸과 마음이 가까워질 수 있도록, 마침내는 몸과 맘이 자연스럽게 하나 되도록 순차적(順次的)으로 무지개 다리 교각(橋脚)을 세워나갔다. 3월 17일 답장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일곱 번 째에 첫 회신(回信)이 왔다. 결혼 준비에 매일 바쁘며, 학생(學生) 위치에서 배우겠으니 지도(指導)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달필(達筆)도 아니고 문장력(文章力)이나 철자법(綴字法)도 서툰 편이었다. 그러나 미숙(未熟)을 애교(愛嬌)로 여기면서 보다 더 친숙(親熟)해지도록 꾸준히 편지를 띄웠다.
3월 21일. 초특급 관광열차에 몸을 실었다. 차창 밖에 펼쳐지는 새봄의 훈기(薰氣)를 맛보며 順의 모습을 더듬어 보았다. 물결에 흔들리는 그림자처럼 희미한 실루엣(silhouette)으로 떠오르다가 열차(列車)가 덜커덩거리면 함께 흔들리다가 이내 사라져 버렸다. 땅거미가 조용히 내리는 7시 50분 난생 처음으로 부산역에 도착했다. 아가씨는 학(鶴)처럼 목을 빼어 나를 찾고 있었다. 학수고대(鶴首苦待)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일까? 나는 악수(握手)를 청하면서
“안녕하셨어요?”
하고 첫 인사를 하였다. 처녀의 손을 처음 잡아본 것이다. 아가씨는 홍당무가 된 얼굴로 우물쭈물했다. 날짜도 없는데 예행(豫行) 연습할 셈치고 팔짱을 끼며 걷자고 했으나, 그는 수줍어하며 그럴 낌새가 없었다. 광복동에서 케이크(cake) 한 상자를 사들고 택시로 보수동(寶水洞)으로 왔다. 집앞에는 ‘뉴문화양장점’이란 간판이 붙어 있었다. 양친, 두 언니, 형부, 대구 약혼녀에게 막 갔다 온다는 영수(永秀), 막내 동생 영헌(永獻), 조카 정근(正根)과 재익(在翼). 이렇게 대가족이 함께 식사를 했다. 10시가 넘어 우리 둘은 외출(外出)을 했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돌아가다 말고 순은 내 왼팔에 갑자기 손을 끼어 넣었다. 내 몸의 중심이 잠깐 흔들렸다. 서투른 보조(步調)를 맞추면서 국제시장 보석가게를 기웃거렸다. 좀 안다는 집으로 들어가 어머니와 언니를 불러내었다. 0.25케럿(carat)짜리 다이아(diamond) 반지와 6케럿짜리 스타루우비(star ruby) 반지(90,900원)를 샀다. 과분(過分)하지도 인색(吝嗇)하지도 않는다는 내 기본(基本) 방침대로였다. 예단 감으로는 30,000원을 현금으로 드렸다. 한편 나는 3돈중 짜리 금반지와 구두 값(3,300원)을 받고 시계는 예식장에서 교환(交換)하기로.
맞선본 후
맞선본 후로
마주볼 새가 있었나요.
낯도 익힐 겸
훌쩍 떠났지요.
창에 입김이 서렸으면
그려보기라도 할 걸.
차가 덜커덩거리면
이내 지워지던 얼굴.
멋쩍은 웃음 하나
사람 틈새로 비집고 나올 때야
아가씨로구나 했지요.
몰라본 척 하려다 웃었지요.
느닷없이 팔짱을 끼는 바람에
휘청했지요.
먼저 손이라도 잡아줄 걸
한 발 늦었지요.
(1970. 3)
3월 22일. 새벽 기도회를 다녀온 후 또 가정 예배를 드리고,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 먼저 주례(主禮)할 고(高)목사님으로부터 예식 절차를 설명 듣고, 시간을 엄수(嚴守)하라는 주의(注意)를 들었다. 順과 나란히 앉아 예배를 드리는데 順은 자꾸만 졸았다.
“쿵덕 쿵”
고개를 떨굴 때마다
“보리 닷 되는 찧었겠수다.”
하고 골려 주었다. 그는 안 잤노라고 시치미를 떼었다. 그럼 기도를 했나?
집에 돌아왔는데 언니는 키를 대보라고 하였다. 식장(式場)에서 하이힐(high heel)을 신을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등을 대고 책을 머리 위에 올렸다.
“네가 조금 작다 얘.”
점심을 먹고는 택시를 불러 송도(松島)로 나갔다. 바닷바람이 꽤 세었으나 물결은 높지 않았다. 하늘은 부옇게 흐렸지만 먼 수평선(水平線)을 바라보니 속이 탁 트인 것 같았다. 구름다리를 건너는데 몹시 흔들거려 모두 비틀거렸다. 핑계로 순은 내 팔을 붙들고 난 허리를 껴안았다. 사진사(寫眞師)들의 간청(懇請)을 따돌리고 조용한 바위 위에다 자리를 잡았다. 파도가 시샘하듯 우리들 바위를 치다 부서지고, 해초(海草) 냄새가 풍겼다.
“우리의 결혼은 장미(薔薇) 같은 짙은 향기가 아니라, 해초 같은 은근하고 소박(素朴)한 냄새일 거요.”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바람이 세차게 불어올 때마다 順은 내 몸에 기대었으며,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간지럽혔다. 결혼하기까지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이야기하면서 감사했다.
송도에서
걸터앉은 바위엔
굴 껍데기가 다닥다닥했는데,
당신에겐 따가비 하나 안 붙었소.
하늘 바다는 맞닿아
하나였는데,
우린 마주 보기보다
가없는 바다를 바라보았소.
소꿉장난 같이 만났지만
하나님이 지어준 짝이기에,
바닷물 가를 수 있으랴고
두 손을 모았소.
갯바람에 실려 온 미역 내음이
꽃향기보다 은은한데,
별로 할 말이 없어
이 냄새처럼 살자고 했소.
(19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