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년시절
빚진 죄인일까? 빚 준 죄인일까?
사회에 나와서 최초(最初)로 빚 준 죄인이 된 것은, 1956년 전ㅇㅇ선생에게 돈을 꾸어준 일 때문이다. 그는 충청도에서 교감으로 재직(在職)하고 있었으나, 자녀들 교육 문제 때문에 평교사(平敎師)로 서울에 전입(轉入)해 왔노라고 했다. 이사(移徙)를 해야 하는데 경비(經費)가 부족하니 돈을 꾸어달라는 것이다. 사회 초년생(初年生)인 나는 곧 갚겠다는 말 한 마디에 적지 않은 돈을 선뜻 주고 말았다. 그로부터 1년 후, 넌지시 꾸어준 돈을 달라했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금방 갚았지 않느냐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더 깊이 기억(記憶)해보라는 말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깨끗이 떼이고 말았다. 차일피일(此日彼日) 눈치만 보고 있다가, 그 순간(瞬間) 이렇게 내가 죄인(罪人)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도 오래 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망각(忘却)할 수도 있겠지만, 적은 돈도 아닌데 그렇게 시치미 뗄 수가 있을까? 배신(背信)당한 감정 때문에 경원(敬遠)하였고, 그 후 그는 주사(酒邪)까지 심하여 상종(相從)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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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은로학교로 복직하면서, 가정 경제를 빨리 회복(回復)하기 위해서 불철주야(不撤晝夜) 뛰었다. 봉급만 가지고는 저축(貯蓄)이 어려웠기 때문에 밤에 과외지도(課外指導)를 하는 것은 물론, 주일(主日) 성수(聖守)도 못한 채 아이들을 가르쳤다.
1971년도 10월 15일 현재 가계
봉급:38,500원, 과외 수입:25,000원, 이자:33,000원 합계 96,500원 *상수가 15,000원 보태줌.
어머니의 이자: 박선생→종오삼촌 2,500원(5%) 행자 2,000원(4%) 버드나뭇집 4,000원(4%)
남채 처남 4,000원(4%) 쌀집 12,000원(4%) 합계 24,500원
아내의 이자: 효선 언니 6,000원(4%) 냉천동→박선생 2,500원(5%) 합계 8,500원
그런데 모든 살림은 어머니께서 전담(專擔)하고 있었는데, 기본적인 생활비(生活費) 외에는 모조리 계(契)를 하거나 남에게 빚을 주었다. 이자를 받거나 곗돈을 받으면, 이를 다시 빚을 주고 계를 넣어, 명목상(名目上)으로는 굴릴수록 눈 덩이처럼 불어났다. 당시 월 4~5%의 이자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고리(高利)요, 우리는 고리 사채업자(私債業者)인 셈이었다. 이로 인해서 어머니는 복부인(福婦人)같은 대접을 받았고, 돈맛을 본 우리는 축재(蓄財)에 눈이 어두워졌다. 당시 나는 세 가지의 큰 목표가 있었다. 첫째는 교회 헌금을 위한 기금, 자그마한 집 한 채 사기 위한 기금, 어려운 학생의 장학금(獎學金)을 위한 기금 등 각각 100만원 목표로 월 35,800원짜리 적금을 각각 적립(積立)하고 있었는데, 이를 마련하기 위한 방법이 이자(利子)놀이요 곗돈 붓기였다. 5%의 이자만 가지고도 교회 십일조의 몇 배가 된다는 계산, 부동산 등귀율(騰貴率)보다 이자율(利子率)이 훨씬 높으므로 집을 사는 것 보다는 전세를 드는 것이 현명(賢明)하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고, 또한 가장 바람직한 선행(善行)은 장학사업(獎學事業)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제1차 경제개발(經濟開發)계획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는 사회 환경이 이런 희망(希望)을 불어넣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브레이크(brake)가 걸렸다. 외국 차관(借款) 사업들이 주줄이 도산(倒産)되면서, 그 연쇄반응(連鎖反應)이 우리에게까지 미쳤다. 이자는커녕 원금(元金)도 떼이고, 계는 모조리 깨진 것이다. 100만원 고지(高地) 문턱에서 보기 좋게 난파(難破)된 것이다. 흑석동교회로 이적(移籍)하면서부터, 어머니는 교인들과의 교제가 깊어지고, 돈 놀이를 통해서 위상(位相)이 높아지자 사탄(Satan)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가장 큰 덩어리는 J속장에게 35만원 빚 준 것과, 쌀집 전세금 30만원 꾸어준 것(월 이자 12,000원)과, 5만원 짜리 계 몇이 문제가 되었다. 조속장 남편은 사업에 실패하자 사기죄(詐欺罪)로 수감(收監)생활을 하게 되고, 계주(契主)인 노전도사와 김권사는 책임을 회피했다. 먹은 돈을 다 뱉어 내놓으라 하면, 다 먹어 삼켰으니 칼로 째서 꺼내가라며 배를 내미는 배짱이었다. 이런 적반하장(賊反荷杖)에 배신감(背信感)과 모욕감(侮辱感)에, 분통(憤痛)이 터져 식욕도 떨어지고 잠도 오지 않았다. 건수는 J속장 아들(H.P.) 패거리에게 얻어맞기도 하고, 상수는 교회에 나가지 말라고 충고했다. 이 문제로 교회와 우리 가정이 소란(騷亂)스런 상태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돈 보다는 교회 문제 때문에 실망(失望)하고 고민하다가, 없던 일로 잊어버리고 새 출발을 하자고 하였다. 1970년 9월 7일 J속장으로부터 간신히 10만원 되돌려 받고, 월 4,840원씩 8개월(38,720원) 되돌려 받는 것으로 일단락(一段落)되고, 곗돈은 푼돈 몇 번 받는 것으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내가 재물(財物)에 대해서 회개(悔改)하며 십일조 생활을 철저히 한 것은 이 때부터이고, 이로 인해서 교회를 모독(冒瀆)한 죄를 눈물로 회개하면서, 교회에 충성 헌신(獻身)하기로 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모든 것을 회개한 채, 두 손을 탈탈 털고 빈 손이 되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밧줄을 붙잡을 수 있었다. 잠도 잘 수 있고 입맛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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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명수대학교 시절이었다. 직원들끼리 R선생을 계주(契主)로 하는 계를 하고 있었는데, 나도 몇 구좌(口座) 들었다. 내 차례가 되어 10만원의 곗돈을 탔는데, H가 꾸어달라고 한 것이다. 그는 최초로 함께 상경(上京)한 동기 동창(同窓) 세 사람 중 하나로서, 성실(誠實)했고 신임(信任)이 두터운 친구였다. 내가 공부를 하고 있을 때 그는 과외 지도를 하고, 학부모들의 신임을 얻어 돈을 꽤 모으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향에 과수원(果樹園) 하나도 마련하고, 일찍 결혼해서 안정된 가정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자갈 채취선(採取船)을 구입하여 한강에서 자갈 채취하는 사업에 뛰어들고, 마침내 대구 수성천까지 사업을 확대해 나갔다. 부러울 정도로 재리(財利)에 밝아 사업가로서 변신(變身)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사업이 번창(繁昌)하다보니까,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없어 교직을 사임하고, 사업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에 자금이 쪼들려 내 곗돈을 가져갔는데, 처음 몇 달 동안은 이자를 잘 보내왔다. 이것은 계속 부어야 할 곗돈의 성질인 것이다. 그런데 번창한다는 사업은 속빈 강정이었다. 이자는커녕 종적(蹤迹)을 감추고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1973년에 들어서 2월 15일과 9월 18일 두 차례에 걸쳐 편지를 내봤으나 일언반구(一言半句)의 답장(答狀)조차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계가 끝날 때까지 봉급에서 곗돈을 부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꼴이
되었다.
그 후 우연히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중앙시장에서 제법 큰 건어물상(乾魚物商)을 한다고 했다. 돈은 갚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전화 한 통은 있음직 한데 그것이 아니었고, 거의 잊혀져 가고 있는 어느 날 딸 시집보낸다는 청첩장(請牒狀)을 보내왔다. 후안무치(厚顔無恥)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물론 이미 포기(抛棄)한 채 절교(絶交)를 했기에 모른 척 해버렸다.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그 외에도 몇몇 동창들에게 꾸어 준 돈을 떼이었다. 동창회(同窓會)를 등지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이런 금전(金錢) 문제 때문이었다. 누가 죄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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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말, 흑석동 교회에서 나는 전도(傳道)의 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많은 사람을 교회로 인도(引導) 하였는데, K라는 여자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대석이와 함께 교회 유치부를 다니는 아이의 학부모였기 때문에 교제가 있었고, 따라서 전도가 된 것이다. 그는 열심히 교회 생활을 했으며 곧 집사(執事)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여, 또한 전도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은행원 출신으로 외모(外貌)도 예쁜 편이고, 성격도 원만하고 활발했으며, 남편도 대우(大宇)건설 관리층으로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갖가지 사업을 하였다. 그리고 빚을 얻어서 썼다. 이 그물망에 아내가 걸려든 것이다. 이북(以北)에서 어렸을 적부터 절친(切親)했던 K.Y로부터 월3%의 이자를 주기로 하고, 200만원을 K집사에게 4% 이자로 놔준 것이다. 당시 200만원은 큰 돈이었다. 그러니까 1%의 차익을 위해서 모험(冒險)을 한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이자를 꼬박꼬박 주었다. 뿐만 아니라 냄비나 그릇 같은 주방용품(廚房用品)을 이따금 선물(膳物)로 주었다. 그런데 이것이 무너진 것이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이자를 내지 않고 버티었다. 그러나 친구에게는 3%의 이자를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불안하게 느낀 친구는 원금(元金)을 달라고 하였다. 그 많은 원금이 어디서 나온다는 말인가? 힘겨웠으나 신의(信義)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책임을 지고, 아이들 몫의 적금까지 긁어서 조금씩 다 갚아주었다. 그 후 우리는 반포로 이사하고 반포교회로 이적(移籍)을 해 와서 교제는 끊어졌는데, K집사는 여러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시달린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몇몇 채권자(債權者)들은 가재도구(家財道具)를 가져가고, 날마다 싸움판이 벌어지는데, 마침내 사기죄(詐欺罪)로 고발(告發)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채권자로서 공동 고발인(告發人)이 되어달라는 청원(請願)이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창피하기도 하고, 이미 포기한 채 원금을 갚아나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불응(不應)하였다. 그 후 몇 차례의 재판(裁判)이 있었는데, 피고인(被告人)인 K집사는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법정(法廷)에서, 방청석(傍聽席)에 앉아 있는 채권자들을 향해서
“이 가운데 내 이자 안 받아 먹고 산 사람 있으면 나와 보세요!”
하고 떳떳하게 변명(辨明)하더라고 했다. 어떻게 선고(宣告)가 되었는지, 얼마 후 그는 석방(釋放)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아내는 우연히 그를 노상(路上)에서 마주쳤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기 보다는 우선 측은(惻隱)한 마음이 들어, 장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테니, 조금씩 조금씩 빚을 갚으라고 권유했다. 그는 흔쾌(欣快)하게 여기고, 우리 집에서 앞치마를 가져갔다. 당시 대구 처남이 제품(製品)하고 있는 애프론(apron)을 아내가 조금씩 팔고 있었기 때문에 30벌을 그에게 넘겨 준 것이다. 물 먹은 하마(河馬)라 하듯이, 그저 하마처럼 그의 입에는 한없이 물이 들어갈 뿐 나오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 벌꿀 한 병 보내주는 걸로 인사를 치르고 또 종적(蹤迹)을 감추었다. 신자라면 어려운 사람에게 자선(慈善)하라는 배짱이었으리라. 이렇게 두 번 배신당하고 어안이 벙벙했다. 이
엄청난 일로 인해서 아내는 한 동안 수척(瘦瘠)했다.
신약(新約)에서 므나(mina)의 비유(눅19:23)나 달란트(talent)의 비유(마25:27)를 보면 변리(邊利)가 장려(獎勵)되어 있으나, 구약(舊約)은 동포들에게는 금하기도 하고(출22:25), 이방인에게는 허용하기도 (신23:20)하였다. 특히 기증(可憎)한 죄로 여기는 선지자(先知者)들의 글(겔18:8,13,17 렘15:10)도 있다. 아무튼 신앙양심(信仰良心)에 비추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탐심(貪心)이 분명했고, 기도 없이 하는 불신앙이 분명했다. 한편 받아놓았다 해도 무용지물(無用之物)이었겠지만, 차용증서(借用證書) 하나 받아놓지 못한 이 우둔(愚鈍)함을 누구에게 호소하랴. 이미 어머니와 나도 체험했던 일이요, 나의 묵인(黙認)하에 이루어진 일인데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아내를 위로하며 체념(諦念)하기로 했다.
앉아서 주고 서서 받는다는 속담(俗談)처럼, 그 이전에도 먼 사돈(J의 큰고모), L권사, B선생 등 여러 사람에게 돈을 꾸어주고, 이를 되돌려 받기 위해서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가? 모질지 못해서 딱한 애걸(哀乞)을 듣고는, 야박(野薄)하게 뿌리치지 못한 우리가 얻은 결론은, 빚진 죄인이 아니라 빚 준 죄인이라는 것과, 그저 떼일 셈치고 주고는 잊어버려야지 되돌려 받을 생각으로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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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 23일, 아내는 이사하는 잠실 막내 처남댁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녀왔다. 전세집(7,500만원)에서 사글세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2002년 2월 15일에 전세를 들었으니까 계약기간 만료전인 것이다. 사연(事緣)인즉 연체이자(延滯利子)를 갚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는 아연실색(啞然失色)하였다. 원금(元金)을 갚아나간다는 소식을 기다리는데...... 그 동안 사업이 잘 되지 않아 고전(苦戰)하고 있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으나, 전세금을 빼내어 연체이자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라면 이미 도산(倒産 )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는가? IMF 사태, 특히 노무현 정권 이후로 대부분의 사업들이 줄줄이 부도(不渡), 도산(倒産), 파산(破産)이라는 단어로 신문들이 도배되고 있는 경제불황(經濟不況) 속에서,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하는 허탈(虛脫)과 실의(失意) 속에서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간과 전립선에 이상이 생겨서 응급실에 실려 간 일도, 이와 무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용산 전자상가에서 새한데이타시스템(computer 관계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막내 처남에게, 1998년 4월 3일 우리 아파트를 담보로 한미은행에 채무(債務) 보증(保證)을 서준 것이다. 2억 원의 근저당(根抵當)을 설정하여, 당시 1억 7천만원을 대출 받고, 이후 2002년 1월 18일에 다시 3천만원을 대출 받았다. 보증을 설 때는 3년 거치(据置)후 이자를 내게 된다는 내용 때문에, 그 동안 열심히 노력하면 일어서지 않겠느냐는 안이(安易)한 생각과 곤경(困境)에 처한 형제를 돕겠다는 생각으로 허락한 것이다. 그런데 IMF 사태가 호전(好轉)되지 않고, 회사의 경영 상태가 더욱 악화(惡化)되어, 부득이(不得已) 긴급 수혈(輸血)을 한 셈인데, 내 판단으로는 미봉책(彌縫策)에 불과한 것이다.
아내는, 당분간 조카들은 우리 집에 와서 학교에 다니고, 처남 내외는 다른 생계 방법을 강구(講究)해야지, 전세금을 찾아 연채이자로 갚아서는 안 된다는 타개책(打開策)을 내놓기 위해서 방문한 것이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가 아니겠는가?
벌써 7년이 지났는데 언제 채무(債務) 변제(辨濟)의 독촉(督促)이 올 것인지 불안한 나날이었다. 이미 1996.8.31과 1999.10.15일 두 차례에 걸쳐 현금으로도 각각 1000만원이 그에게 건너갔다. 변리(邊利)로 준 것은 아니지만, 그는 T.V, 김치냉장고, 에어컨, 대석이 복사기 등속을 선물로 가져왔다. 솔직(率直)히 고맙다기보다는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원금의 일부라면서 현금으로 갚는 것이 받아도 떳떳하지.....
최종적인 방법으로 은행에서 경매(競賣) 통고가 오면 어찌할 것인가? 어쩔 수 없이 이 아파트는 팔아야만 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동생들은 어이없어 할 말을 잃고, 우리는 후회한들 이미 엎질러진 우유인 것이다. 아내는 아들 하나 더 두었다가, 장가보내어 세간냈다 생각하자고 하였다. 막상 우리 자녀들에게는 그의 절반도 주지 못한 채 세간낸 형편인데 말이다. 이런 상황이 오질 않기 위해 기도는 했지만,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우리가 알 수 없었다.
잠언6:1에‘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형제가 살아보겠다고 간청(懇請)할 때 강철 심장이 아닌 바에야 어찌 좌시(坐視)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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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1월 18일 부산 처조카에게 또 500만원을 송금해 주었다. 지금까지 모두 2,500만원이 간 셈이다. 학원(學院)에서 긴급하게 쓸 일이 있다고 해서이다. 부산 Y.M.C.A. 건물에 세 들어 학원을 경영한지 4,5년이나 되었는데, Y.M.C.A 측에서 건축 대금을 내지 못해서 시공(施工) 건설업자가 경매(競賣)에 붙이게 되자, 싼 가격에 낙찰(落札)되면 이득(利得)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생각이 달랐다. I.M.F.체제에서 모든 경기(景氣)가 침체(沈滯)되어 건물 사무실(事務室) 등이 나가지 않은 채 비어있고, 그래서 Y.M.C.A. 건물도 경매에 들어간 것이며, 설혹 싸게 낙찰 받았다 해도 은행 대부(貸付)를 받아야만 할 형편인데, 학원 경영이 적자(赤字)로 어려운 판에 부동산에 왜 투자(投資)하느냐는 것이다. 사업이 잘 될 때에는 부동산 가격도 오를 것이고, 은행 이자도 무서울 것이 없지만, 지금 형편으로 봐서는 아주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형제간에 어려울 때 조금만 도와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 동안 이자로 월 25만원씩 보내오다가, 대석 결혼 때 가까스로 원금 1,500만원을 갚아 이제 1,000만원만 남았다. 결국 2004년 2월 정근은 은행으로부터 신용불량자(信用不良者)로 판정(判定) 받고, 봉급도 압류(押留)당하였으며, 주택도 싸게 팔아 사글세로 입주하게 되고 경제적으로 몹시 곤경(困境)에 빠져 있어 안타깝다.
어느 누군들 사장(社長) 회장 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업에 대한 능력(能力)과 적성(適性)과 경험(經驗)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자기 자본(資本)이 없으면 어려운 일인데, 은행 빚 대부 받아다가 사업한다는 것은 무모(無謀)한 모험(冒險)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원래 재리(財利)에 밝지도 못하고, 과분(過分)한 욕심(慾心)도 없으며, 우리 3형제 모두 사업에 대해서는 전혀 무뢰한(無賴漢)인데, 아내를 비롯한 처가(妻家)쪽은 온통 사업에 관심이 깊다. 호황기(好況期)라면 혹 모를까 불황기(不況期)에는 까딱하면 부채(負債)를 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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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진 죄인이라 했듯이, 나도 죄수(罪囚)처럼 생활을 한 적이 있다. 1961년에 사직하고 공부하고 있던 3년 남짓, 생계(生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을 꾸거나 외상으로 거래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물론 살림을 도맡은 어머니께서 하는 일이었지만,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입에 풀칠만이라도 해서 빚 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를 뼈저리게 체험했다. 그리하여 복직과 동시에 빚 먼저 갚아나갔다. 나도 이런 체험이 있었기에, 웬만한 사람이라면 무이자로 돈을 꾸어주고, 보증 서준다면 얼마나 힘이 될 것인가? 그런데 남들은 하나같이 나 같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신한은행에서 대부(貸付) 받은 부채가 남아 있다. 2001년 7월 4일 대석이 결혼 때 전세방 얻기 위해서 5,000만원(6천만원 근저당)과, 2004년 5월 6일 대진 결혼 때 집을 사기 위해서 1억1천600만원 (139,200,000원 근저당)이 그것이다. 그리고 2005년 9월 집 수리를 위해 또 대부 받은 게 900만원이 있다. 이에 대한 이자만도 월 100만 원 정도인데, 대석의 전셋집 월세까지 월 35만원이 추가(追加)로 나가고 있으니, 이자만으로도 월 126만원이 나간다. 연금 가지고 사는 우리 살림으로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이 아파트를 담보로 해서 대출 받았으므로, 팔지 않고서는 다 갚을 수가 없다. 자녀들 모두 결혼시키면 이 아파트를 지니고 살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비싼 아파트를 가지고 살 필요도 없다. 그 때까지만 붙들고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2006년이 되면서 부채(負債) 문제가 현안(懸案)으로 부상했다.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대책은 소위 강남을 표적(標的)으로 하고 있었다. 강남에 사는 부유층이 부동산 값을 선도(先導)하고, 빈부(貧富) 양극화(兩極化)를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연거푸 강력한 부동산 대책을 발표하게 되었다. 곧 부동산 보유자(保有者)에게는 무거운 보유세와 종합부동산세를 물리고, 매도인(賣渡人)에게는 부동산양도세를 또 무겁게 물린다는 것이다.
당혹스러운 것은 우리다. 27년 전 반포로 이사를 오게 될 때는 투기(投機) 목적은커녕, 당시에는 반포 지역 부동산 값은 주목 받지도 않았다. 이후 강남 지역 부동산 값이 계속 뛰면서, 마침내 노무현 정부의 질시(嫉視)의 대상이 되어 소위 개혁(改革)의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가지고 있으려면 엄청난 종합부동산세를 내고, 팔면 또한 엄청난 부동산양도세를 내라는 것이야 말로, 모순(矛盾)의 극치(極致)가 아닐 수 없다. 퇴직을 하고 연금(年金)으로 살아가는, 우리 같은 연로(年老)한 사람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서 은행 빚을 내야 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극소수(極少數)의 투기(投機)꾼을 잡기 위해 애꿎은 대다수(大多數) 서민(庶民)들을 희생양(犧牲羊)으로 삼는 정책이야말로 교각살우(矯角殺牛)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냉엄(冷嚴)한 이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아파트를 팔기로 한 것이다. 지하철 9호선이 개통(開通)하면 집값이 보다 오를 것이라는 전망도 접고, 은진의 결혼까지 기다릴 수도 없어, 대진의 강력한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작정하였다. 2006년 3월 4일 12억 3천만원에 매매계약을 맺었다. 곧바로 3월 5일 대석을 위한 대출금(2001.7.4 신한) 5천만원과, 집수리를 위한 대출금(2005.9 신한) 9백만원을 상환하였다. 그리고 2006년 3월 20일 처남을 위한 대출 보증금(1998.4.3.시티) 2억원과, 3월30일 대진을 위한 대출금 1억1천6백만원(2004.5.6신한)을 상환(償還)하였다. 이것으로써 모든 부채는 완전히 해결하였다. 따라서 그 동안 우리를 짓눌렀던 무거운 짐-월 126만원의 은행 이자가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처남은 긴급하게 아내를 통하여 또다시 1,650만원을 달라고 하였다. 친구에게 진 빚을 갚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결국 아내는 긴급(緊急) 수혈(輸血)을 해주었다. 그리고 6월 3일로 만기가 되는 사글세 집을 내놓아야 하는데 또 오갈 데가 없다는 것이다. 깨진 항아리에 물 붓기란 말이 이런 때 쓰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