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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몸 되어 걷던 날

장년시절

by 최연수

부활주일 축하 예배를 마치고 보수동(寶水洞)을 나왔다. 順이 배웅을 나왔다. 시계가 없어 보였다. 없으면 싸구려 국산(國産) 시계 하나 사줄 걸 그랬다니까, 싸구려면 벌써 샀을 거라고 했다. 처형부(妻兄夫)가 사주신 특급침대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부산을 다녀온 나는 본격적인 결혼 준비에 들어갔다. 외사촌 동생들이 신방(新房) 도배를 해주고, 주문한 가구도 들여왔다. 광주 작은아버지를 비롯해서 가까운 친척들에게 편지도 냈다. 청첩장(請牒狀)은 내지 않고 결혼 통지서만 인쇄(印刷)해서 몇 사람에게만 전했다. 부산에서는 합동결혼(合同結婚) 한다는 청첩장을 인쇄(印刷)해서 보내왔다. 결혼 소문이 퍼지자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고 야단이었다. 어머니는 보약(補藥)을 다려 주셨고, 식욕도 좋고 숙면(熟眠)도 해서 체중 53Kg, 나의 건강은 최고로 좋은 편이었다.

3월 30일. 출근하니까 칠판에 ‘신랑 최연수 결혼 축하. 때:4.2.2시’ 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12시라고 했더니 진짜 몇 시냐고 물었다.

“ 진짜는 밤 12시지...”

라고 해서 교무실(敎務室) 안이 홍소(哄笑). 점심 때 와보니 또 ‘신랑 최연수 신부 허 말괄량이’이라고 써놓았다. 연가원(年暇願) 용지를 주어서 ‘장가원’이라 고쳐 써 또 한바탕 폭소(爆笑). 학부모들의 축하 방문(축의금 14,000원)이 있었으며, 동학년회에서 괘종시계(卦鐘時計)를 주고 ‘마지막 총각’ 기념사진도 찍었다.

3월 31일.

“어머니, 장가 잘 갔다 오겠습니다!”

거수(擧手) 경례를 하고 서울역으로. 심한 차멀미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어머니는 섭섭한 표정이었다. 11시 발차(發車) ‘은하호’를 탔는데 지정(指定) 좌석이 두 사람이 아닌가? 수원서부터 딴 자리에 앉긴 했지만 참 불쾌했다. 4월 1일 6시에 부산에 도착했는데 영수(永秀)의 마중을 받았다. 온 집안이 동분서주 정신이 없었다. 우리는 국제시장으로 갔는데, 나의 회색 춘추복(春秋服)을 맞추었다. 구두는 짐이 되므로 서울 가서 맞추기로 하고, 순의 손목시계를 사주었다. 상수(祥洙) 동생이 오고, 광주에서 작은아버지와 누이 영내(英乃)가 왔다. 밤은 여관(旅館)에서 작은아버지와 함께 지내었다.

1970년 4월 2일. 눈을 뜨니 방안이 훤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먼저 세탁소에서 구겨진 예복(禮服)을 다리미질했다. 식사 후 이발을 하고 작은아버지와 함께 釜山영락교회(永樂敎會)로 갔다. ‘축 결혼 최연수 군. 이영순 양, 이영수 군 김명옥 양’이라고 씌어 있었다. 내복(內服)을 갈아입으라고 했으나 사양하고 넥타이만 새로 사서 메었다. 은회색(銀灰色) 바탕에 흰 줄과 빨간 점이 있는 것인데, 나는 배색(配色)을 고려한 것이지만, 어떤 사람은 배색이 안 맞다고 했단다. 다방에서 상수 동생과 김원혁(金元赫) 교감 그리고 친구 연규(鍊圭) 종휘(鐘徽)를 만났다. 신랑 편 사람들의 전부였다. 처남 영수와 함께 흰 장갑과 가슴에 꽂을 조화(造花)도 받아 대기(待期)를 했다.

정오를 알리는 시계 소리와 함께 축혼가(祝婚歌)에 맞추어 나는 입장했다. 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하얀 천을 밟으며 걸었는데 누군가가

“좀 천천히!”

하는 소리가 들렸다. 500여명 축하객들의 시선(視線)이 집중되었으나 태연(泰然)했다. 준비 관계로 3,4분이 지나서야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신부가 입장(入場)했다. 하얀 드레스(dress)와 면사포(面紗布) 그리고 한 아름의 꽃을 안고. 왼쪽에 서있는 신부의 꽃다발이 가냘프게 떨고 있었다. 또 한 쌍의 입장까지 기다려야 했으니 퍽 지루했다. 고현봉(高賢鳳)목사 주례로 1시간 동안의 결혼 예식이 끝나고, 곧 아래층에서 피로연(披露宴)이 있었다. 빈자리가 없었으며 음식도 잘 차려졌다. 우리는 고목사님을 가운데 모시고 큰상을 받았다. 먹히지 않았으나 굶지 않으려고 했다. 아내는 먹는 척 마는 척 했다.

유치원 교사 사회로 레크레이션(recreation)이 있었는데, 누구냐고 해서

“최신랑입니다”

고 대답했다. 부산 처녀를 서울 총각이 훔쳐간 죄로 신부에게 큰절을 하라기에 거수(擧手) 경례를 했다. 노래는 비숍 곡 ‘sweet home'을 2중창으로 불렀다. 관심이 영수 쪽으로 옮겨간 사이에 아내는 초록 저고리와 빨간 치마로 갈아입었다.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어서 좋았으나, 짙은 화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념사진을 찍고 나니까 정말 결혼식이 끝난 것 같았다. 대머리 때문에 친구 종휘(鐘徽)가 교감으로 착각들을 했다는 뒷이야기.

한 몸 되어 걷던 날

꽃 비단 길 오기까지

서른 네 고개.

흰 너울 들추는데

서른 고개.

바들바들 떠는 손

건네 잡고서,

봉우리 가리키며

발맞추던 날.

이는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고,

서투르게 외울 때

문득 다가오는 십자가.

그 햇무리 같은 빛에

눈이 부시고,

그 달무리 같은 빛에

코끝이 시리고.


성경에 손을 얹고

굳게 다짐하던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 사랑 사랑.

아내는 내 팔을 끼고

나는 주님의 팔을 끼고,

한 몸 되어 걷던 날.

4월 초이틀.

(1970. 4)

이렇게 해서 첫선부터 한 달 만에 결혼을 한 것이다. 감겨진 5색 테이프(tape)를 걷어치우고 교회 뒷골목으로 빠져나갔다. 걸인(乞人)들의 행패(行悖)를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보수동으로 갔더니 서울 손님들이 다 와있었다. 예식이 경건하고 성대하게 잘 마쳤으며, 오누이의 합동 결혼식은 보기 드문 쾌거(快擧)였다고 했다. 영수 내외는 서울로 신혼여행을 떠나고, 우리는 처 형부의 안내로 해운대(海雲臺)로 향했다. 주위가 퍽 조용하고 깨끗하며 시설들이 좋았다. 극동(極東)호텔 313호실. 남쪽 해변(海邊) 쪽 창에 드리워진 황록색 커튼을 젖혔다. 오른쪽으로는 바다, 왼쪽으로는 산이 바라보였는데, 해조음(海潮音) 소리만 들릴 뿐 돛단배도 갈매기도 너울거리지 않았다. 아늑한 방안에 2m 간격을 두고 두 개의 침대가 놓여있었고, 머리맡 탁자에는 전등과 전화기 그리고 물병이 놓여 있었다. 서쪽 테이블(table) 위에는 라디오(radio) 한 대와 재떨이가 있었고, 망울진 매화(梅花) 가지와 하얀 칼라 꽃꽂이가 있었다. 옷장과 화장실은 북쪽 출입문 쪽으로 있었다. 안내원에게 팁(tip) 500원을 주면서 모든 것을 부탁했다.

처 형부는 곧 떠나고, 넓은 방에 덩그렇게 남은 우리는 모든 것이 싱거워 멋적게 싱긋 웃었다. 시장기가 들어 매운탕을 시켜 먹었다. 바깥 구경을 할까 했으나 고단해서 곧 돌아왔다. 어둠이 짙게 깔리고 좀 써늘해서 스티임(steam)을 넣었다. 샤우어(shower)를 하고 나오니 아내는 졸고 있었다.

“뭘 그리 늦게 하셔요?”

그러나 자기도 꽤 오래 했다. 나는 연두색 줄무늬의 파자마, 아내는 분홍색 슬립(sllip)을 입었다. 남들은 첫날밤 앞날을 설계(設計)한다고 했는데, 뭘 설계한다는 말인지. 고단한 걸로 해서는 딴 침대를 써야 할 것 같았으나 오히려 어색할 것 같았다. 첫날밤은 내가 기도하면서 둘이 예배를 드리려 했으나, 그는 먼저 기도하고 있었다. 나도 간단히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대로 부부(夫婦)가 된 것을 감사하며, 마련해주신 따뜻하고 포근한 보금자리에서, 한 몸 한 맘이 되어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을 감사했다. 중력(重力)이 너무 강하여 빛까지 빨아들인다는 블랙 홀(black hole), 우주를 창조한 최초의 대폭발(大暴發), 그리고 생명의 탄생.....천체물리학(天體物理學)의 용어들이 총동원된 아름다운 허니문(honeymoon)이었다.


양 파

희고 매끄러워

누르면 터질 것 같아

조심스럽구나.

한 껍질 두 껍질

벗기고 또 벗겨도

속을 드러내지 않는구나.

달콤 새콤 안 할 바엔

차라리 떫기라도 하지,

무슨 맛인지 모르겠구나.

햇빛에 바래지도

달빛에 젖지도 않았기에

미덥기만 하는구나.

하늘 이슬 흠뻑 마셨기에

흙 한 점 안 묻었으려니,

품 안에 꼬옥 묻고 있구나.

(1970.4)

4월 4일. 이틀 동안 우리의 사랑이 영글고 밀어(密語)가 무르익던 해운대를 떠나왔다. 장인 장모 어른께 큰절을 올리고 케이크 선물을 드렸다.

“첫아들 낳고 잘 살아야 한다”

고 하였다. 많은 친척들의 전송(餞送)을 받으며 9시에 집을 나왔다. 휘경동 언니의 승용차를 타고 부산을 떠났다. 아내는 한동안 흐느껴 울었다. 형부의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며 한창 건설 중인 경부 고속도로(高速道路)를 따라 서울로 돌아왔다. 꽃들은 아직 피지 않았지만 산과

들은 연두색으로 물들고, 먼 산과 언덕에서는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둥둥 떠 있었으며, 이따금 종달새가 치솟았다. 아내의 얼굴은 퍽 야위어 보였다. 웃음을 잃었고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표정이었다. 결혼이 앞으로 얼마만한 행복을 보장(保障)해줄지 모르지만, 정말 괴로운 강행군(强行軍)이 아직도 계속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나 하나에만 의지한 채, 고향과 부모형제를 떠나 미지(未知)의 세계로 끌려오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참 안쓰러웠다. 새삼스럽게 어깨가 무거워졌다. 성실(誠實)하게 인생을 살아야 하겠다는 것과, 힘껏 사랑을 해줘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서울에 돌아오니까 집에는 뜻밖에도 많은 손님들이 와 있었다. 교회 손님들이었다. 휘경동 언니 내외분은 이불, 옷을 챙겨주고 곧 떠났다. 친척들과 간단한 상견례(相見禮)를 드린 후 우리는 신방(新房)으로 들어왔다. 긴장이 풀려 졸음이 쏟아졌다. 아내는 생리(生理)기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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