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년시절
1.내 아들 큰돌(大石)
돼지 세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 중 어미돼지가 12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우릿간이 너무 비좁아 넓혀야만 했다. 광으로 들어가 톱과 망치를 찾아서 들고 나왔다. 켜고, 자르고...1월 5일 새벽의 꿈이었다. 돼지해를 맞이하여 돼지띠인 내가 돼지꿈을 꾸었다는 것은 길몽(吉夢)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올핸 집을 장만할 모양이군, 그렇다면 주택복권(住宅福券)을 사야지. 돼지가 모두 15마리였으니까 15장은 사야겠구나’
그 동안 모은 축구공 저금통을 터뜨렸다. 좋은 꿈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했지. 조용히 주택은행(住宅銀行)에 찾아가서 마감 직전에 15장을 샀다. 공교롭게도 15회분이 아닌가? 뭐가 척척 맞아 돌아가는 것이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아내와 함께 1월 11일 밤 부산행 열차를 탔다. 겨울 방학을 맞이하여 처가(妻家)를 방문(訪問)한다는 뜻도 있었으나, 아내는 첫 아이이므로 친정(親庭)에 가서 해산(解産)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18일 메리놀병원에 함께 갔다. 카톨릭에서 운영하는 큰 종합병원이다. 진찰(診察) 결과 별 이상은 없는데 혈액(血液)과 소변(小便) 검사는 이튿날 다시 받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20일 비를 맞으며 다시 병원에 가서 소변 검사를 하고 약(800원)을 지어 왔다. 그리고 24일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26일 복권을 추첨(抽籤)했는데 300원만 당첨(當籤)되었으니까 1000원 손해(損害)난 셈이다. 돼지꿈이 무산(霧散)되었으나, 29일 다시 가서 당첨된 300원에다 200원을 더 보태어 또 5장을 샀다. 길몽에 대한 미련(未練)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이런 얘기를 했더니 어머니는
“너답지 않구나. 수퇘지 한 마리만 낳아라. 아들 낳는다면야 집 한 채만 못하겄냐?”
라고 핀잔이다. 하기야 아들만 낳는다면 집 한 채에 비하랴. 작년 5월 5일에 마지막 멘스였다니까 2월 9일이 280일인데, 부산에다만 촉각(觸角)을 세우면서 날마다 기도를 했다. 예정일(豫定日)이 지나고 나서는 초조해지면서 꿈자리가 늘 뒤숭숭했다. 그도 그럴 것이, 12년 전 누님이 해산(解産)하다 세상을 떠났던 악몽(惡夢)이 가끔 떠올랐기 때문이다.
1971년 2월 14일! 기분 전환(轉換)을 위해서 목욕을 다녀오는데, 상수 동생이 부산 처남(妻男)으로부터 누나가 딸을 낳았다는 전화가 왔었다는 것이다.
“첫 딸은 살림 밑천이라니까 딸도 좋지.”
나는 곧 부산으로 전화를 했다. 이 날부터 부산은 107 지역(地域) 번호를 돌려 통화(通話)신청을 하게 된 것인데, 첫날이라 그런지 잘 걸리지 않아 초조했다. 드디어 장모님의 목소리가 들려서 얼른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새벽 1시 45분에 낳았다면서
“섭섭했디?”
하였다.
“딸도 좋아요.”
“아니야. 아들이야.”
“괜찮다니까요. 딸이 더 좋아요.”
“그게 아니구, 영수가 장난삼아 그랬디. 아들이야. 꼭 아빠 닮았더라.”
순산(順産)만을 바랐지만, 아들이라니까 더욱 기뻤다.
“다 끝난 뒤니까 괜찮아.”
이 말을 끝으로 수화기(受話器)를 놓는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난산(難産)임을 어렴풋이 짐작을 했다. 연령(年齡)으로 보아 각오는 했지만, 얼마나 고통을 겪었을까,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며 금방 날아가서 여윈 손이라도 어루만져주고 싶은데... 아무튼 하나님의 은총(恩寵)과 처가(妻家) 식구들의 수고에 감사했다. 내 기도가 너무 짧아 하늘에 닿을지 의문이었으나, 하나님은 곁에 가까이 계셔서 끊임없이 사랑해주심을 확실하게 느꼈다.
“머, 아들이라고?”
“..............”
“그러믄 그렇재. 우리 집에 경사 났네!”
“..............”
“인제 ‘애기 아범아’ 그래야 겠구나.”
어머니는 물론이고 동생들도 좋아했다. 곧 냉천동(冷泉洞) 할아버지와 휘경동(徽慶洞) 처형께 알려드렸더니 모두 기뻐하셨다. 곧 장모님과 아내에게 편지를 쓰는데, 내 생애(生涯) 가장 행복한 순간 같았다. 창 밖에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봄을 잉태(孕胎)한 겨울도 저토록 진통(陣痛)을 겪고 있구나. 머잖아 새 봄의 교향악(交響樂)이 온 누리에 울려 퍼지겠지.
그렇다. 내 아내는 모든 고통(苦痛)을 이겨내고 새 생명을 탄생(誕生)시킨 거룩한 어머니.
나는 새 생명(生命)의 아버지. 그리고 우리들 사랑의 열매. 하나님께 감사 기도드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주택복권은 한 조각 휴지(休紙)로 날아가 버렸지만, 어머니 말씀대로 집보다 더 좋은 돼지 한 마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선물(膳物)로 받았다.
나흘 후인 18일에야 장인어른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출산(出産) 당시의 상황(狀況)을 비교적 자세하게 적으셨다. 메리놀병원에서 9파운드 4온스(약4.2Kg)의 큰 애였으므로, 난산(難産)이 되어 큰 소동(騷動)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20일에 둘째 처형(妻兄)으로부터 또 편지가 왔는데 산모(産母)가 아직 퇴원하지 못하고, 아기도 간호원(看護員)이 돌봐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보다 소상(消詳)하게 적혀있었지만 궁금증은 더해 갔다. 이레가 되었는데도 퇴원을 못했다면 수술(手術)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인데, 어서 학년말(學年末) 휴가가 되어야지...하루가 몇 년 같았다.
24일 종업식(終業式)을 마치자마자 밤 9시 부산행 보통급행(1,140)에 몸을 실었다. 머리가 몽롱하고 가슴이 답답하여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새벽 5시에 눈을 뜨면서 부랴부랴 내리고 보니까 부산진(釜山鎭)역이 아닌가? 너무 일러 새벽 단잠을 깨울 것 같아 부산역까지 걸었다. 보수(寶水)동에 도착하니까 5시 30분. 선뜻 초인종(超人鐘)을 누르지 못하고 귀를 바짝 댄 채 집 안의 동정(動靜)을 살폈다. 아내의 신음(呻吟)과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지나 않을까 하고.
아버님은 벌써 새벽 기도회에 나가시고, 어머니는 준비 중이었다. 나를 본 아내는 이불을 둘러쓴 채 흐느꼈다. 퇴원(退院)은 했으나 얼굴이 파리하고 부은 게 건강이 안 좋은 듯했다. 금방 오지 못했던 게 얼마나 미안하고 안쓰러운지. 어찌된 일인지 열흘이 되었는데도 아빠가 나타나지 않아 화제(話題)가 되어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어머니로부터 해산의 경위를 들었는데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기적(奇蹟)이었다.
공휴일(公休日)이라 당직(堂直)인 인터언(intern)이 맡았는데, 경험(經驗)도 없고 기술(技術)도 미숙(未熟)해서 출혈(出血)이 심하여 사경(死境)을 헤맸다는 것. 앰블런스(ambulance)를 보내어 취침중(就寢中)인 과장을 깨어 불러다가 수술을 하고 수혈(輸血)을 하였는데, 아기도 사산(死産)하다시피 해서 낳자마자 응급실(應急室)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술이 잘 못 되어 재수술을 했는데, 너무도 실망(失望)이 커서 퇴원하면 책임지지 않는다는 경고(警告)까지 무시하고, 도망치다시피 집으로 왔다는 것이다.
까운(gown), 침대, 링거(Ringer)병...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쳐 다시는 종합병원(綜合病院)에 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고통(苦痛)이 너무 심해서, 25일 초량(草梁)에 있는 자선(慈善)산부인과 병원으로 다시 갔다. 두 번째의 수술 부위(部位)가 염증(炎症)이 생겨 긁어버리고, 다시 봉합(縫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세 번째의 수술을 하고 다시 입원을 한 셈이다.
엄마 곁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잠이 든 아기를 보니까 콧날이 시큰거렸다. 정말 크고 튼튼했으며 믿음직스러웠다. 출산 때의 고통 때문에 오른 쪽 머리가 약간 꺼져있었으나, 차차 일어난다고. 유달리 손발이 크고 고추가 크게 보였다.
날 때 이미 백일 된 아이 같았다니까, 병원, 교회, 시장에서 ‘큰애’로 불리어졌다.
까맣고 빛나는 눈과 벗어진 이마와 곱슬머리와 오똑한 코, 특히 긴 인중(人中).... 12일째 된 아기의 체중이 4.5kg, 신장60cm가 넘는 것 같았다.
더구나 순하여 잠을 잘 자며 울지를 않아서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함함하다면 좋아한다’지만, 정말 잘 생겼다. 우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며 하룻밤 새고 나니까 비로소 아빠가 된 기분을 실감하면서, 혈육(血肉)의 정이란 이런 것일까 생각해보았다.
수술 경과(經過)가 비교적 좋고 실내 온도가 높아 아내가 퇴원하기를 원해서, 의사의 양해(諒解)를 얻어 27일 퇴원(14,000원)을 했는데 이제는 살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밥도 먹여주고 대소변도 받아낼 정도로 꼼짝 못했다. 맥박(脈搏)이 1분간 90을 뛰기도 했으며, 자주 심장(心臟)이 울렁거려 산모의 건강이 썩 좋아진 것이 아니었다. 안색(顔色)이 창백(蒼白)하고 빈혈증세(貧血症勢)세가 있어 소민(500cc) 주사도 맞았다.
이렇게 호전(好轉)된 모습을 보지 못한 채, 3월 2일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닷새 동안의 일이 꿈결 같았다. 5일 전화를 걸었더니 앉아서 식사도 하고 대소변도 혼자 하는데 활동은 못한다는 것이다. 13일 토요일 3교시로 조퇴(早退)를 하고 오후 2시 통일호를 탔다. 추풍령 고개에선 굉장한 눈보라가 흩날렸다. 11일 만에 왔는데 이제야 수술 부위(部位)는 아물었는데 기침을 하였다. 아기는 약간 더 컸으나 울음이 늘고, 박쥐처럼 밤낮이 바뀌어 힘든다는 것이다. 별 이상은 없으나 설사를 좀 하고 설태(舌苔)가 끼어있었다. 더 지체(遲滯)할 수 없어서 입원비 20,000원을 드리고 떠나오는데, 입원비에다가 여비까지 붙여서 되돌려 주셨다.
20일 가게 일로 장모님이 오셨다. 아내는 이틀 전 최종 검사를 받았는데, 수술은 잘 되었으나 아직도 기침은 하며 입맛이 없다는 것이다. 아기는 업고 안아 달라는 버릇이 생겼으며, 우유보다 모유(母乳)의 비율을 높였다는 말씀을 하셨다.
25일 부산에서 아기의 3,5주 사진 8장을 보내왔다. 할머니는 최씨 집안에 장군(將軍)이 났다고 기뻐하셨다. 그러나 아내는 소화불량(消化不良)에 심장이 약해져서 계속 약을 먹고 주사를 맞는다는 것이다.
* *
3월 29일. 뜻밖에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황달(黃疸)기가 있어 종합진단(綜合診斷)을 받았는데 결과는 모레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산 집이 너무 복잡해서 서울에 와서 안정하며 치료를 하고 싶은데, 식모(食母)를 구했으면 하였다.
4월 2일. 결혼 1주년을 혼자서 맞이하였다. 새 가정을 이루고 첫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했다. 그런데 아내로부터 편지가 오기를 아기는 잘 자라는데, 자기는 급성(急性) 간장염(肝臟炎)과 황달로 인해서 치료를 받고 있으므로 상경을 연기(延期)한다는 것이 아닌가?
4월 3일. 오전 수업을 마친대로 서울역으로 갔다. 연휴(連休)가 되어 대단히 붐볐다. 입석(立席) 차표를 사서 발차(發車) 2분전에 열차를 탔는데, 대구에서 가까스로 자리에 앉았다. 19일 만에 다시 만난 아내는 눈알과 얼굴이 누렇고, 소변이 진한 갈색(褐色)으로 병색(病色)이 완연했다. 볼수록 좋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악화(惡化)되어가니 ‘이러다 가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튿날 주일 예배를 드리고 와서는 아내와 함께 병원 문을 열었다. 심장의 고동(鼓動)이 너무 심해 혈관(血管) 주사를 놓지 못하고, 다른 주사만 두 대 맞았다. 한의사(漢醫師)와 상담(相談)한 결과 환경이 더 좋고 여행에 무리만 없다면, 상경해서 안정하고 치료해도 좋다고 했다.
4월 5일. 큰 처형은 환자를 보내놓고 방심(放心)할 수 없어 상경을 만류(挽留)하였다. 환경을 바꿔보자며 세간을 내놓고 대청소를 하였더니 방이 좀더 넓어지고 밝아졌다. 아내와 오랜만에 한 자리에 있게 되어 여윈 손을 만져주며, 꼭 나을 것이라고 위로를 해주었더니 눈물만 흘렸다.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으며, 내 신세가 너무도 처량하여 탄식(歎息)이 새어나왔다. 결혼 1주년과 득남(得男) 축하 선물을 사주겠다고 해도 굳이 사양했다. 병원에 또 들러 주사를 맞고, 지금까지의 치료비(15,000)를 내었다. 이 날은 차표가 매진(賣盡)되어 서울에 가지 못하였다.
4월 6일. 서울에 올라왔다. 맥이 쭉 빠졌다. 속 모른 사람들은 얼마나 좋았기에 결근(缺勤)을 했느냐고 놀렸으나 기가 막혔다. 내 팔자를 원망해보기도 하였다.
“하나님 제발 생명만은 구해주세요. 그러면 여생은 하나님께 헌신하겠습니다.”
아마도 간절(懇切)히 눈물로 서원(誓願) 기도해보기는 이 때가 처음이었으리라. 사실 흑석동 교회에서의 문제가 있어 교회를 모욕(侮辱)하고, 이 교회 저 교회 떠돌이 예배를 드리며 기도생활을 하지 못했던 것도 회개하였다.
4월 17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오후 2시발 부산행 통일호에 몸을 실었다. 좌석(座席) 번호들이 중복(重複)되어 대단히 혼란했다. 밤 8시 15분에 도착. 아내를 불러내어 아버님의 생신 선물을 사 가지고 들어갔다. 아버님은 59회 생신을 맞이하셨는데 퍽 피곤한 낯빛이었다. 아내는 위장병, 심장병, 간염이 겹쳐 건강이 더 악화되어, 다시 종합진단(綜合診斷)을 받은 후 입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도 잡는다는 격으로, 약과 주사에 의지하느니보다는 기도로써 하나님께 간구(懇求)하자는 쪽으로 가족들의 뜻이 모아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새벽 기도회에서 간절히 기도하던 중, 고(高)권사님의 안수 기도를 받기로 하여 곧 모셔왔는데, 안수 기도 후부터 밥을 먹게 되고 손에도 체온(體溫)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아기 역시 그 때부터 밤잠을 잘 잔다는 간증(干證)을 하였다. 이 날도 안수기도를 받았다.
장로 권사가 되었어도 안수(按手) 기도로써 병을 낫는다는 걸 그 동안 회의(懷疑)해 왔는데, 이번의 체험으로 새로이 확신을 가졌다며, 온 가족이 뜨겁게 기도에 매달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어머님은 감사 헌금(10,000원)도 하셨다. 아기는 건강하게 잘 자랐다. 네 활개를 힘차게 치며 큰 눈을 말똥거렸다. 시선(視線)을 맞추고 얼리면 저도 따라서 뭐라고 옹알거렸다. 퍽 똘똘해졌다. 100마시던 우유를 150으로 올렸다고.
아내는 기도를 더 받고 다음 주에나 상경한다기에 나 혼자 보수동을 나왔다. 원피스(one piece)를 해 입으라고 5,000원을 주고, 아내의 옷 짐을 챙겨 가지고 이젠 살겠다는 희망을 안고 서울로 돌아왔다.
4월 24일. 처자식(妻子息)을 맞이할 준비에 바쁜 나날을 보냈는데 아무 소식이 없었다. 전화를 거니까 건강은 나아졌으나, 5월 1일에 있을 작은아버지의 목사 위임식(委任式)을 보고 오겠으며, 처남 영수도 득남(得男)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또 아무 소식이 없었다. 초조했다. 5월 7일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상경 준비를 위해 세탁(洗濯)하느라고 무리를 했더니, 건강이 다시 나빠져서 다음 주에 상경하겠다는 것이다.
5월 11일. 전화를 받고 서울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아내는 어머니와 함께 왔다. 부산에 간지 116일, 출산(出産)한지 86일 만이다. 아내는 좀 건강해졌으나 아직도 수척(瘦瘠)했으며, 아기만 보다 똑똑해졌다. 첫 손자를 안아본 할머니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으나, 무척 허약해진 며느리를 보고 혀를 찼다. 아기는 날 보고 까르르 웃었는데 소리 내어 웃는 건 처음이라고. 아빠를 알아본다 해서 모두 웃었다. 어찌나 머리가 크고 얼굴이 넓적한지 아빠보다 더 크다고들 했다. 낯선 사람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얘기를 하잔다.
낳은지 40일이 지났는데도 이름을 짓지 못하였다. 외가(外家)에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별로 부를 일이 없기도 하였지만, 산모(産母)의 건강 문제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큰애’로만 통했다. 메리놀병원에서부터 불리어진 이름이 교회로 시장으로 친척들로 널리 통용(通用)된 것이다.
좋은 이름을 지으려고 생각해보았으나 떠오르지 않았다. 작명가(作名家)들처럼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따져볼 수도 없는 일이고, 음양오행(陰陽五行)이니 항렬(行列)은 나무목(楨)을 따지자니 약간 낡은 생각 같았다. 요즘 유행하는 순 한글식 이름으로 하자니 너무 급진주의(急進主義)인 것 같고, 작명가에게 맡기자니 운명론자(運命論者) 같고...
쓰기 쉽고, 부르기 쉽고, 듣기 좋고, 뜻이 좋은 이름을 짓자는 원칙을 세우기는 했는데 막상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이다. 날 때부터 가장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킨 것은 큰 애였으니까 ‘大’자는 넣어야만 할 것 같은데 다음 글자가 문제다. 그 동안 외할아버지는 ‘石’자로 가끔 불러왔다. 돌처럼 크고 단단했다는 뜻도 있지만, 베드로가 반석(磐石)이듯이 우리 집안의 장손(長孫)인 이 애가 최씨네 가문(家門)의 베드로가 되라고 부르는 이름이다. 植,成,勳등이 흔히 쓰는 이름이지만, 원칙대로라면 역시 ‘石’이 가장 무난할 것 같았다. 돌 속에는 여러 가지 광물질(鑛物質)이 함유(含有)되어 있고, 이것이 지구의 지자기(地磁氣)를 전달해주며, 이것이 인체의 피를 타고 몸 안에 들어오면 사람이 건강해진다고 하지 않는가? 3월 30일 잠정적으로 이렇게 정했다가, 결혼 1주년을 맞이한 4월 3일부터 일기장에 ‘큰돌’이라 쓰기 시작했다. 부산에 내려가서 산모의 건강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4월 18일에야 정식으로 ‘大石’이라 부르기로 선언(宣言)하고, 이 날 이후의 일기에도 大石이라 썼다. 물론 애칭(愛稱)으로는 ‘큰돌’을 쓰기도 했으며.
대석이 86일 만인 5월11일에야 비로소 서울 집으로 올라왔는데, 부산 국제시장 연숙이네에서 1돈 짜리 금반지와, 다른 많은 선물을 받아왔다. 백일 선물을 미리 준 것이다.
대석은 온 식구들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붙잡아 세워두기만 하면 뛰느라고 팔다리를 가만 두지 않고, 서서 무릎 굽히기 연습을 부지런히 했다. 운동량이 많아지고 가끔 외출하여 맑은 공기도 마시며 햇볕도 쬐었다. 젖 먹는 횟수와 소변보는 횟수가 줄어들면서 오히려 잘 자랐다.
5월 22일부터 뒤집기를 시도하는 등 날마다 새로운 짓을 해서 귀여웠으나, 너무 뛰는 바람에 노동을 하고 말지 아기 보지 못 하겠노라 손사래하고, 특히 할머니는 견딜 수가 없노라고 아예 아기 볼 생각을 못하셨다.
2.내 아들 큰 보배 (大珍)
1973년 새 해가 밝았다. 2일은 대석을 데리고 아내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떠나려던 날인데, 눈이 많이 내려서 못 가게 되었다. 그 대신 부산에나 다녀올까 했으나 소한(小寒) 추위가 매섭고, 호주머니 사정도 여의(如意)치 않아서 단념했다. 겨울 방학이지만 숙직(宿直)하랴 학습 자료를 제작(製作)하랴 학교 나갈 일이 많았으며, 막내 삼촌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 입학시험 때문에 마음이 한가롭지 못했다. 더구나 방학과 동시에 만 2년이 되어오는 대석의 보모(保姆) 겸 가정교사 하는 일도 꽤 힘들었다.
먼저 식모(食母)가 있어야 했다. 상도동에서 데려온 아이는 몇 시간만에 되돌아갔다. 부모가 보고 싶어서 고향에 내려간다는 것이다. 싱거운 아이. 다시 냉천동 처 숙모님의 소개로, Y라는 24세 강원도 쳐녀를 데려왔다. 신학교 입학을 위해 학비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1월 17일. 흑석동 시장 안에 있는 은하(銀河)의원으로 가서 내진(內診)을 했다. 의사는 모든 것이 정상이나 태아(胎兒)가 좀 크다는 것이다. 아뿔사! 대석이도 커서 난산(難産)을 했는데... ‘작게 낳아서 크게 키워라’ 고 했거니와, 아내는 그 동안 배도 졸라매고, 운동량도 늘리며, 식사도 조절하면서 노력하노라 했는데 또 크다니, 아기보가 크나보다고 했다.
출산은 그 병원에서 하기로 결정하고 돌아왔다. 아내는 대석이 해산(解産)할 때 종합병원인 부산 메리놀병원에서 겪었던 그 악몽을 다시는 반복(反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정 집 온돌방(溫突房) 같은 병원에서 낳고 싶다는 것이다. 그 날 어머니는 초저녁잠을 주무시다가 흉몽(凶夢)을 꾸었다 하기에, 사탄을 물리치는 찬송을 힘차게 불렀다.
27일이 예정일인데, 24일 새벽 2시 반 아내는 양수(羊水)가 터지고 진통(陣痛)이 시작된 것 같다고 하였다. 증상(症狀)으로 보아 틀림없는 것 같았다. 나는 의학전서(醫學全書)를 뒤적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 했다. 자정에도 아내와 함께 순산(順産)을 위해 기도를 했으며, 그 후로도 틈만 있으면 기도를 했다.
너무 일찍 입원하면 지루하고 더 초조할 것 같아서, 진통(陣痛)이 본격화되면 입원하기로 하였다. 아내의 진통은 시간이 경과할수록 지속(持續)시간은 길어졌으나, 그 간격은 오히려 뜸했다. 아내는 조기파수(早期破水)가 아닌지 염려했으나, 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자면서, 될 수 있는대로 농담(弄談)을 하면서 아내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시장을 보러갔다 오신 어머니께서, 은하의원에 들렀더니 곧바로 입원해야 한다고 권유하더라는 것이다. 이 날도 숙직이라 학교에 갔는데, 6시가 좀 지나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무래도 입원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숙직은 김선생에게 부탁하고 곧 집으로 돌아왔다. 옷 보따리는 Y에게 들리고, 아내를 곁부축하여 병원으로 갔다.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이규하(李圭河)박사는 마취(痲醉)를 하여 10분간의 무통분만(無痛分娩)을 권유했다. 현재 나오고 있는 분비물(分泌物)은 양수가 아니고 이슬이므로, 오늘 밤중에나 내일 새벽에 출산할 것 같았다. 아내는 진통을 겪더라도 자연분만(自然分娩)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고통을 덜기 위해서 마취 분만하기로 내가 (說得)하여, 208호실로 들어갔다. 이 때가 7시. 의사는 나더러 들어오지 말라고 만류(挽留)했으나, 나는 고집스럽게 들어가야 한다고 했더니, 의사는 의아(疑訝)해 하면서도 묵인(黙認)하였다. 종합병원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첫 아이 대석이 때는 친정에 가서 낳겠다고 하여 묵인(黙認)하였었는데, 생사를 건 난산임에도 서울에서 방관(傍觀)만 해야 했던 과거가 늘 마음에 짐이 되어, 이번에는 함께 낳겠다는 비장(悲壯)한 각오였던 것이다.
사실, 아기 하나만 갖기로 했던 것이다. 큰애를 출산할 때 생사를 건 난산(難産)이었고, 그 때 의사가 심장이 너무 약해서 앞으로는 절대로 아기를 더 낳지 말라고 충고(忠告)했던 것이 아닌가? 다행히 산모(産母)를 위기에서 구출했기 때문에, 하나로 만족하고 큰 애 기르는 일에만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은 그 것이 아니었다. 첫애 돌이 지나고, 아내의 건강이 만 1년 만에 회복이 되고 나니까,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 우리가 나이 많아 일찍 세상을 뜬다면, 혼자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고, 외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만 더 가질 수 없느냐 하면서 기도했는데, 후에 안 일이지만 아내도 그랬다는 것이다. 아무튼 대석의 돌을 지내고 두 번째 임신을 하였다. 대석은 첫애였으니까 어려웠지만, ‘두 번째는 순산하겠지’ 라는 막연(漠然)한 기대를 걸고 스스로 위안(慰安)하면서 기도만을 열심히 했다. 다행히 아내는 입덧을 심하게는 안한 편이었다. 큰 애 때도 그랬듯이.
* *
7시 15분에 의사와 간호원은 일에 착수했다. 링거(Ringer) 주사 바늘을 꽂고 자리에 누웠다. 나는 아내를 껴안고 팔다리를 붙들어주면서 함께 기합(氣合)을 주었다. 아내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몹시 괴로워하였다. 나는 아내에게
“주님을 믿어요!”
하면서 수시(隨時)로 기도하였다. 의사는 태아가 거대아(巨大兒)인 것 같다면서, 고무장갑을 끼고 산도(産道)를 넓히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었으나, 좀처럼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이다. 산도에 열상(裂傷)이 생긴 듯, 진홍빛 피가 요 위에 흥건히 고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비지땀을 흘리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헛수고이었다. 아내는 기진맥진(氣盡脈盡)하였으며, 나도 힘이 빠진 것 같았다. 의사는 안 되겠다면서 간호원과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불길(不吉)한 예감이 들었다. 이윽고 기계(機械)분만으로 바꾸어야 하겠다고 하기에 그렇게 하라고 할 수밖에. 기계를 넣어 머리를 집었는데
“피시이”
공기 새는 소리만 들릴 뿐 기계가 그대로 빠져나온 게 아닌가? 첫 번째는 실패였다. 가운(gown)이 땀에 흠뻑 젖은 의사는 몹시 당황해 하면서 다시 기계를 넣었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입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아내를 격려(激勵)했다. 공기 새어나온 소리가 또 들린 것으로 보아 두 번째도 실패한 듯 했다, 드디어 태아(胎兒)가 나왔다. 7시 35분이었다. 그러니까 20분만이었다.
“으앙!”
두 다리를 치켜들고 엉덩이를 때릴 때야 비로소 외마디 소리만을 내더니, 이내 아무 소리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도 태아(胎兒)가 무척 컸는데, 몸뚱이가 약간 아연(亞鉛) 색이었다. 고통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치켜든 두 다리 사이로 고환(睾丸)이 유난히 크게 보였다. 또 아들이었다. 의사는 탯줄을 자르고 태반(胎盤)을 꺼내었다. 10분 만에 꺼내었다. 열상(裂傷)한 부분을 꿰매고 났을 때가 8시였으니까, 꼭 45분간의 초긴장이 계속된 셈이다.
그러나 출혈이 심했다. 양수가 대야에 거의 가득 나오고, 피와 양수가 옷은 물론 요를 다 적시고 방바닥에도 흥건히 흘러내렸다. 의사는 자궁(子宮) 수축(收縮)을 도우면서 지혈(止血) 작업을 30분간 했다. 아내는 출산 후에도 계속 신음을 했다. 그제야 무엇이냐고 물었다. 정신이 돌아온 듯 했다. 간호원이 아들이라고 했는데 표정은 그저 그랬다.
나도 정신이 좀 나자 아기에게 관심이 갔다. 담요에 둘둘 말다시피 해서 한 쪽 구석으로 밀어놓은 것이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우는 소리도 나지 않고 목욕시킬 생각도 안 하는 게 이상했다. 아기가 잘 못 되었느냐고 했더니 간호원은 머리에 상처(傷處)가 있어서 내일 목욕(沐浴)시킨다는 것이다. 좀 안심이 되었다. 아기의 모습이 떠올랐다. 진공(眞空) 흡입기(吸入器)로 머리를 집어 꺼낸 탓인지 머리가 대추씨처럼 길쭉했던 것, 속살이 통통했던 것...체중이 4.2Kg였으니까 형과 마찬가지였다.
저녁 식사를 한 것이 밤 11시 20분. 달걀 후라이와 미역국에 간장이 메뉴(menu)였다. 출혈을 막기 위해 누운 채로 식사. 11시 45분에 소염제를 복용. 비로소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했다.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참 기뻐하셨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악몽에서 깨어난 듯 했다.
아내는 소변을 시원하게 보지 못해서 밤새도록 몹시 괴로워했다. 힘을 주어 소변을 보려하면, 소변보다 피가 더 많이 나왔다. 나도 물론 소변을 걸레로 받아내느라고 밤을 꼬박 새웠다. 아내는 요도(尿道)를 잘 못 돌려놓은 것 아니냐면서 괴로워했다.
25일. 날이 새자 피 걸레들을 다 세탁하여 스티임(steam)에 말렸다. 학교를 경유 9시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현기증(眩氣症)이 나서 쓰러질 것 같았다. 아침 식사를 하고 어머니와 함께 병원으로 갔다. 의사는 아기 목욕을 시키고 산모의 지혈(止血) 상태를 점검(點檢)하더니 경과가 좋다고 하였다. 자궁(子宮) 속에 쑤셔 넣은 거즈(gauze) 덩어리를 실타래 풀듯이 다 꺼내
는데 한참 걸렸다. 덩어리가 아기만큼 큰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아기는 낳았지만, 밤새도록 거즈 덩어리를 자궁 속에 아기처럼 배고 있었던 셈이다. 지혈을 위해서 불가피(不可避)한 조치라고는 했으나, 일찍이 들어보지도 못한 일이다. 참으로 희한(稀罕)한 구경을 했다. 그제야 산모는 소변을 시원스럽게 보고 나서 이제 살 것 같다고 했다.
어머니께서 가져오신 김과 동침이 김치로 점심을 맛있게 들었다 식욕이 당긴 듯.
아기는 코가 납작하고 이마가 좁은 게 엄마 닮은 듯 했으며, 두 볼이 축 처져 오뚝이 모양이었으나, 속살이 토실토실 쪄서 백일 된 아기 같았다.
5시에 나만 집으로 돌아와 아내의 저녁 식사를 내려 보내고, 냉천동과 휘경동 그리고 부산으로 각각 전화를 했다. 휘경동 이모가 병원에 다녀갔다고 하였다.
아기가 밤에 잠을 안 자고 보챈 모양이었다. 젖이 이슬방울처럼 맺히긴 했지만, 아기가 배불리 먹을 수는 없고, 보리차를 먹이자니 밤새도록 간호원 신세를 질 수 없고... 둘이서 밤을 꼬박 새웠더니, 산모의 얼굴이 보다 창백하고 나도 현기증이 났다.
부산에서 외할머니가 올라오셨다. 하루 늦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외할머니도 대석이 때보다 순산을 해서 기뻐하셨다. 재익(在翼)이 닮은 것 같다 해서 웃었다. 미역 값으로 5,000원이나 내놓고, 곧 남대문과 평화시장으로 가셨다. 내가 도와드린다고 했으나 한사코 사양.
점심 때 집으로 돌아왔다. 대석은 얼굴이 창백하고 원기가 없었다. 설사를 하고 열이 있으며, 음식을 먹지 않았다. 마치 고아(孤兒) 같았다. 병원으로 데려갔다. 2일 만에 엄마를 본 대석은 외면(外面)을 하고 접근(接近)을 안 했으며, 아기를 곁눈질할 뿐 아무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어떻게 보면 갑자기 어른스러워 보였고, 달리 보면 동생에게 엄마 아빠의 사랑을 빼앗긴 게 측은(惻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기에 체(滯)했다는 진단이 나와 주사를 놓고 약을 지어주었다.
2,3일 더 입원할까 했으나, 그 경비(經費)면 차라리 영양제(營養劑) 주사를 맞으라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퇴원하기로 하였다. 12,000원 예산이 23,000원 나갔다. 하나님의 은총과 의사께 감사하면서 만 2일 만에 퇴원을 했다. 택시를 불러 탔는데, 밖에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람구멍을 막고, 주위 청소를 하였다. 아내는 여전히 잠을 못 이루었다. 대석은 그제야 엄마 곁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했으며, “아가야, 아가야” 하며 좋아한 듯 했다.
아내의 젖이 27일에야 나와 아기가 제대로 빨았다. 그래서인지 낮에는 비교적 잘 잤다. 아내도 수술 부위(部位)가 비교적 잘 회복된 듯 했다. 그러나 나흘째 되는 28일, 산모는 얼굴이 좀 붓고 심장이 가끔 헐떡거리며 기침기가 있었다. 아기도 황달(黃疸)기가 있고 설사를 하는 편이었다. 이 날은 출산 후 첫 주일이 되어, 어머니도 (2,000) 우리(3,000)도 감사 헌금을 하였다. 이튿날 은하의원으로 갔다. 아내의 증세를 이야기했으나 염려할 것은 못 되고, 방을 너무 덥게 해서 땀을 많이 흘리지 말고, 영양 있는 음식을 많이 취하라는 것이었다. 30일이 되어 산모의 부기는 좀 빠진 듯 했으나, 수술 부위가 따끔거린다고 해서 염증(炎症)이 아닌가 생각되어 다시 병원으로 갔다. 그러나 염려할 것은 없고 오히려 실을 뽑았다.
심장(心臟)이 약하여 약을 지어주면서, 의사는 앞으로 또 임신(姙娠)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택시를 못 잡아 걸어서 집에 왔는데, 산모는 땀이 나고 무릎이 쑤신 듯 하다고 하였다.
한 이레가 지나서 아기의 배꼽이 떨어졌다. 그 동안 젖이 적은 탓인지, 방안 온도가 높고 건조한 탓인지 아기는 깊은 잠을 못 자고, 한동안 밤낮이 바뀌어 박쥐 노릇을 했다. 얼마나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피로한지.....
대석은 소외감(疎外感)에 욕구불만(欲求不滿)이 있어 온종일 짜증을 부리고 심술을 부렸다. 싫다는 일만 찾아다니며 하는데 딱 질색이었으며, 떼를 쓰는 데는 겉잡을 수 없었다. 꼭 청개구리였다. 아기는 좋지만 아기 봐주는 건 싫다는 것이다. 게다가 피부병(皮膚病)이 재발(再發)하여 괴로워했다. 다시 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완치(完治)되지 않는 게 이상하다는 것이다.
2월 3일이 구정(舊正)인데, 평상시와 다름없이 출근하고 숙직. Y가 한 달만 채우고 나가겠다고 해서 문제가 생겼다. 마침 경순이 놀러 와서 다시 와달라고 간청을 했다. 이튿날 서대문에서 전화가 왔다. Y가 교통사고가 나서 차병선 정형외과에 입원중인데, 내일 회사와 운전기사가 오니까 내가 보호자가 되어 사건을 수습(收拾)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며칠 있으면 나갈 사람인데 별 일도 다 겪는다. 그 다음 날 병원으로 갔더니 골반(骨盤) 골절(骨折)로 입원했는데, 보상(報償) 문제를 처리해달라는 게 아닌가? 그런 경험이 전혀 없을 뿐더러 내가 친척(親戚)도 아닌데 입장이 참 곤란했으나, 사정이 딱하여 처녀가 하라는 대로만 하기로 허락했다. 그리하여 50,000원을 청구하기로 했는데, 회사측은 내일 합의서(合意書)를 작성하기로 하였다. 무엇보다 좋아한 사람은 운전기사였다. 보상금이 적어 처녀가 측은(惻隱)하였으나, 자기 스스로 기독교 정신으로 임하겠다 하니 더 개입(介入)할 수도 없었다.
이튿날 다시 병원에 갔다. 처녀는 병원을 옮겨주었으면 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합의를 못 보아 학교에 왔다가 다시 7시에 병원으로 갔는데 상황이 변했다. 문병(問病)온 사람들의 말에 따라 Y의 생각이 자꾸만 변했다. 나는 입장이 난처(難處)해지고, 운전기사는 초조해지고 회사측은 고자세(高姿勢)로 되었다. 옥신각신한 끝에 합의서가 작성되어 난 입회인(立會人)으로서 서명(署名)했으나 영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밤 11시가 지나서 난 손을 떼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다시는 할 일이 못 되었다. 신학교(神學校)에 갈 사람으로 기독교 정신으로 운전사를 용서하겠다고 하였는데, 생각해보니까 억울했으리라.
산모와 아기와 대석이 이 세 사람을 돌본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나마 막내 삼촌 대학 문제가 여의치 않은 데다가,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Y 교통사고 문제까지 겹쳐 나는 기진맥진(氣盡脈盡)할 정도였다. 체중이 50Kg도 미달이었으니...
경순이 다시 와서 있기로 했다. 취직(就職)하겠노라고 나갔는데, 집안 사정이 딱하고 또 우리의 간청(懇請)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 시름 놓았다. 아기보다는 피부병(丘疹性尋麻疹-昆蟲毒)때문에 고생하는 대석에게 더 손이 갔다. 짜증만 늘고 이 사람 저 사람 때리는 버릇이 생겼다.
아기는 클수록 제 형을 닮아갔다. 좁으면서 튀어나온 이마와 뒤통수, 귀두(龜頭)만 크고 뚜렷한 고추, 이것만이 형과 현저히 다를 뿐. 아직도 박쥐 노릇을 해서 늘 골치가 아팠다.
2월 14일이 큰돌의 두 돌인데 잔치는 주일로 미루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니까 아내는 세수도 깨끗이 하고 방도 깨끗이 치워놓았다. 세 이레를 맞는 둘째 녀석의 우는 소리, 두 돌을 맞이한 큰 녀석의 노래 등을 녹음(錄音)했으며, 큰돌은 버스. 아기 등 그림도 그렸다. 사진은 주일날 찍기로 하였다. 오랜만에 머리를 감은 아내는 감기에 걸린 듯 머리가 아프고 온 몸이 쑤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기도 열이 좀 있고, 혀와 입술이 아픈 듯 젖을 잘 빨지 못하고 보채었다. 마침내 60시간이나 변을 보지 않아 관장(灌腸)을 시켰다. 그래서 결국 생일잔치는 단념하고 아내는 감사헌금(3,000)만 하였으며, 2월 25일에야 큰아이 두 돌 사진과, 작은아이 만 1개월 사진만을 찍어주었다.
3월 새 학년도가 되어 전근(轉勤)을 했다. 다시 은로(恩露)학교로 되돌아온 것이다. 사무 착오(錯誤)인 듯 해 기분이 몹시 언짢았으나, 5년 간 재임(在任) 중 교가(校歌)를 작사(作詞)했던 학교로 집에서 가깝고, 또 교회도 가까워 하나님의 뜻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담담하게 부임했다. 지난 1년 동안 새로 부임해온 M교장과 뜻이 맞지 않아 갈등이 많았는데 앓은 이를 뽑은 것 같았다.
명수대(明水臺)교에 있을 때 아기 이름을 지어보라고 현상(懸賞)을 걸었는데, 별별 이름이 다 나왔으나 짓지 못했다. 이제 출생 신고도 해야 하므로 더 지체(遲滯)할 수도 없었다. 항렬(行列)은 아니지만 형과 같은 돌림자를 쓰기 위해서는 큰 대(大)로 하고, 다만 뒤의 한 자가 문제였다. 여러가지로 궁리한 끝에 부르기는 훈(勳)자가 좋아 보였으나, 한자로 쓰기가 너무 불편하여 부르기 쉽고 쓰기 쉬우며 뜻도 좋은 진(珍)자를 쓰기로 확정(確定)했다. 그러니까 大珍, 곧 ‘큰 보배’다. 짓고 나니까 아주 좋았다. 3월6일이었다.
3월 12일 밤 냉천동 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원근(李元根)장로님은 만83에 별세(別世)하셨는데, 장로님은 11년 전에 나를 전도하여 구원 얻게 하셨고, 3년 전에 손녀와 결혼을 시켰던 어른이시다. 호상(好喪)이셨지만 참으로 슬펐다.
3월 1일. 아내는 출산 후 첫 나들이를 했다. 대석을 데리고 변(卞)계단 권사 기도원에 다녀온 것이다. 이 때 전세 들고 있는 집(공군주택)을 갑자기 비우라는 통고를 받고 당황하던 참이었다. 평생 살아도 괜찮다고 했는데 사정이 생겼다는 것이다. 복덕방을 두루 돌아다녀본 어머니는 피로에 지치고 실망에 빠져 돌아오셨다. 독채 전세는 없고 팔 집만 있더라는 것.
살 바에야 값비싼 흑석동에 한정(限定)할 필요가 없어, 2동까지 여기저기 다녀보았다. 역시 팔 집은 더러 있었으나 마땅한 전세는 없었다. 집 비워줄 날이 가까워 일부는 태능(泰陵=큰 동생의 새로 지은 집)으로, 일부는 순병(淳炳=작은 동생 친구)의 집으로 임시 가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까지 있었다. 이제 두 달도 채 안 된 갓난아기를 안고 또 어디로 가야 할지 처량(凄凉)하였다. 다급해진 아내까지 나서서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흑석3동 동사무소 근처의 구본영(具本英)권사가 전세든 집으로 결정하였다. 많은 경합(競合)이 있었으나 100만원에 우리가 하기로 하고 10만원 계약금을 가지고 내려갔다. 막 나가는데 복덕방에서 전화가 오기를 85만 원짜리 전세 집이 나왔다는 것이 아닌가? 부랴부랴 알아봤더니, 우리가 비워야하는 바로 그 공군주택이었다. 싱겁게 웃어넘겼지만, 주인이 들어온다 했는데 전세를 내었다니 속인 것이다. 아무튼 계약을 하고 3월 말에 이사하기로 하였다. 어머니는 마땅치 않아 불평을 하고 아내는 공연히 일을 처리했나보다고 후회를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3.16 석양빛이 들어와, 대진이 발과 얼굴을 쬐어주었다. 태어나서 처음이다. 얼굴을 마주 치면 제법 쫑알대기도 한다. 그저 안아달란다.
3.19 대진이가 밤잠을 못 자고 보채어 식구들이 애를 먹었다. 할머니가 봐주시고, 나도 자노라고 했지만 깊이 잠들 리가 없다. 아마도 소화(消化)가 안 된 모양이다.
3.20 대진이 잘 자서 얼마나 감사한지. 발 버티는 힘이 세어 곧 설 것 같다.
3.24 대진 만 2개월 되는 날. 요즘 소화가 잘 안 되는 편이지만 큰 탈 없이 자란다. 사 람과 눈을 마주치면 웃고 지껄이며 안아달라고 짜증이다. 남어(喃語)를 녹음해두다.
3.31 대진 온종일 잤다. 박쥐다.
4. 1. 2부 예배 때 우리 대진이도 데려 갔다. 첫 나들이었다
5. 백 일
4월 2일은 우리들 결혼 3주년 되는 날이요, 할머니 기일(忌日)인데 이사를 하게 되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조퇴한 후 집에 오니까 일이 순조롭게 되지 않고 있었다. 일꾼들이 다치고,
들어가야 할 집에 짐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어두워져서야 대충 끝났다. 그러나 具권사 댁 이사가 9일이었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은 한 지붕 밑에서 서로 불편하였으며, 특히 아이들끼리 사이가 안 좋았다.
4. 9 박선생이 단풍나무를 주어서 대진이 출생 기념으로 심기로. 삐꾸가 가출해서 속상 하고, 호보까지도 앓는 소리를 하고...
4.10 이사 독인지 모두들 아프다고. 애들이 밤늦도록 잠을 안 자고 보채어 더 피곤하고 짜증이 난다.
4.12 대진은 뒤집으려는 듯이 폼을 재고, 대석은 큰 공을 새로 사서 설친다.
4.16 대석은 요즘 말솜씨가 늘어 웬만한 의사 표시는 다 한다. 대진은 큰 것 같지는 않 는데 똑똑 여물기만 한다.
4.24 만 3개월 되는 날. 소화가 좋지 못하여 은하의원에 가서 주사 2대를 맞고 약을 지 어 왔다. 처음 병원 신세진 것이다. 그 동안 큰 사고 없이 자라도록 보호해주신 주 님 은혜 감사하다.
4.25 대진은 약을 먹였는데도 좋아지지 않는다. 설사를 할 때마다 숨이 넘어갈 듯이 운 다.
4.28 대진의 설사는 차도(差度)가 있다는 얘기.
5월 4일이 대진의 백일이다. 잔치를 하지 않기로 했으나, 몇 가지 음식만 장만해서 먹었다. 대석과 비교해서 성장(成長) 발육(發育)이 좀 뒤떨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크게 앓지 않고 큰 사고 없이 이만큼 자라게 해주신 하나님 은혜 감사할 따름이다. 제 엄마를 알아보고, 안아주면 뛰는 것이 요즘 달라진 것. 아내는 바빠서 두 애들 옷을 사러 못 나갔다.
영등포 구청에 가서 미루어 오던 대진의 출생신고를 하였다. 이튿날이 어린이날이었다. 대석은 몹시 여윈 채 먹지 않고, 대진이만 아직도 대변(大便)이 새콤할 뿐 건강이 좋은 듯, 뛰고 웃고 하였다. 컬러(colour) 필름(film)을 사서 대진이 기념사진 몇 장 찍어주었다. 오후에는 예정대로 큰동생과 애인인 노(盧)양이 방문하였다. 첫 상면(相面)인데 인상이 좋았다. 대진의 백일복과 대석의 오리 모자를 선물로 사오고, 튜울립(tulip)과 종합선물 (롯테켄디)도 가져왔다. 부산 작은 처형으로부터도 백일 축하 편지가 왔다. 9일이 되어 사진을 찾아왔는데, 역시 대석은 사진을 잘 받는데 대진은 잘 안 받는다. 사진관에 가서 백일 사진 찍어준다던 예정이 자꾸만 미루어지고, 집에서 카메라(camera)로 찍어주기만 하였다.
14일에 부산 장모님이 오셨다. 턱을 다치셨다는데, 아직도 멍이 남아있었다. 대진의 백일 기념 반지를 사오셨다. 외할머니와 함께 기념사진을 또 찍었다. 대진의 백일 기념사진은 6월 18일 찍었으니까 사실은 134일 사진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백일 때 찍은 칼라 필름은 고장(故障)난 것 같다.
5.16 밖에 안고 나가는 것을 좋아하고, 누구 입이 큰지 입 벌리기에 장기를 가지고 있 다.
5.19 뒤집으려고 애를 쓰고, 소리 내어 웃는다.
5.24 만 4개월 되었다. 클수록 형 어렸을 때 모습을 닮아간다. 미열(微熱)이 좀 있으며, 역시 엄마의 소화 불량 때문에 아기도 소화가 잘 안 된 것 같다. 엄마를 보면 알아보고 떼를 쓸 때는 겉잡을 수 없다
5.25 대진의 잠투정이 대단하다.
5.26 대진의 소화제를 병원에서 갖다 먹였는데도 보챈다.
5.27 대진은 뒤집는데 드디어 성공. 만 넉달 만이다. 재미를 붙였다.
5.28 뮌헨행 월드컵 (world cup) 아시아 A조 결승전에서 한국이 이스라엘을 1:0으로 눌러 이기자, T.V를 보던 우리들이 환호(歡呼)하는 바람에 대진이 놀라서 울다.
5.31 대석은 여전히 식욕(食慾)이 없어 걱정이고, 대진은 기응환(奇應丸)을 사 먹이다.
6. 4 뒤집어서 노는 걸 좋아하고 큰 입을 벌려 웃는 걸 좋아한다.
6.12 대석은 다시 병원에 데려가고, 대진도 D.P.T와 소아마비 예방 접종을 시켰다.
6.23 아내는 친정 어머니와 함께 시장에 나가서, 난 두 녀석들을 봐주며, 되찾은 칼라 필름 으로 사진을 찍어주다.
6.24 만 5개월. 뭐든지 잡으려 하고, 기는 것도 시도한다. 제 형보다 등치는 작은데 더 똘 똘하게 생겼다는 게 중론(衆論)이다.
6.26 발 밑에 종이를 두고 비벼대는 것이, 제 형 하던 짓 그대로다. 밤만 되면 안 자고 보채는 것이 건강에 이상이 있는 모양이다.
6.28 대석은 문에서 다쳐 이마에 혹이 나고, 대진은 며칠 동안 보채더니 얼굴이 반쪽 된 채 체중이 내렸다.
7. 1 황을성(黃乙成)목사를 모시고 청장년회 헌신 예배를 드리는데, 대진이 소리를 질러서 아내가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대석은 다른 애들이 동생을 만지면 큰 눈을 부릅뜨고 “쌔끼 쌔끼”하면서 못 만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