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은로(恩露)와 명수대(明水臺)

장년시절

by 최연수

은로(恩露)와 명수대(明水臺→현 黑石)는 동작구 흑석3,2동에 각각 위치하고 있는 초등학교이다. 이 두 학교에서 13년 9개월 연임(連任)했으므로, 통산 41년 2개월 중 거의 1/3을 근무한 셈이다. 더구나 은로는 막내 동생 건수의 모교(母校)이고, 반포학교로 전학할 때까지 대석이가 3학년, 대진이가 1학년까지 다녔던 학교요, 서울로 이사온 사촌동생 형광과 재영이가 또한 이 학교 출신이다. 이 두 학교에 있는 동안 결혼하고, 두 아들을 낳았으니 각별(各別)히 의미 있는 학교이기도 하다.

(1)

1964년 6월 1일, 은로학교 발령을 받고 부임(赴任)했다. 거주지에 가까운 학교로 복직(復職)시킨다는 방침에 따라, 3년 3개월 만에 다시 교단(敎壇)에 서게 된 것이다. 다시는 분필(粉筆)을 잡지 않겠노라는 비장(悲壯)한 각오로 교문을 나왔는데, ‘송충이는 솔잎을 먹으랬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교문에 들어섰다. 이제 기아(饑餓)로부터는 해방되었다는 안도(安堵)의 숨과, 청운(靑雲)의 꿈을 접었다는 탄식(歎息)의 숨을 번갈아 쉬면서 말이다. 부임하자마자 6월 3일 계엄령(戒嚴令)이 선포되고, 6월 4일부터 7일까지 징병검사(徵兵檢査)를 받기 위해 장흥까지 다녀왔다.

전에 함께 근무했던 동료가 반갑게 맞아주어 소외감(疎外感)은 없었으나, Jㅇㅇ교감의 무언(無言)의 압력이 비위를 거스렸다. 통계 수치 하나가 틀렸대서 ‘그러니까 고시에 떨어졌지....’라고 빈정대는가 하면, 우리 반 아이들이 2층 층계를 뛰어 내려온다 해서 화장실까지 인솔(引率)하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복직을 했는데도 찾아뵙지 않아서 밉보였으리라. 그러나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한 처지에, 그런 아부성(阿附性) 인사치례를 해본 일이 없는 나인데, 쐐기처럼 쏠 수도 있었지만 자존심(自尊心)일랑 헌 신짝처럼 버리고 온 터에 그저 고개만 숙이고 다녔다. 자기는 원산 출신으로 동해(東海)의 맑은 물을 마시며 살았고, 오전에 근무하고 오후에 혼인 예식을 올렸다면서, 자칭 명경지수(明鏡止水)라고 거드름을 피웠다. 하지만 그의 뒤가 구리고 편애(偏愛)가 심하다며 헐뜯고 대드는 동료들이 있는 걸로 보아, 실력은 차치(且置)하고 한말로 덕망(德望)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외아들과 건수가 한 학년이었으므로, 글짓기대회 대표로 뽑아서 함께 인솔(引率)하는 등, 내색함이 없이 내 딴으로 성실히 지도하였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후 서래학교 2학년과 1학년을 담임했는데, 그는 이미 고인(故人)이 되었으나, 그의 손자와 손녀를 차례로 담임을 하게 되었다.

당시 최문환(崔文煥)교장은 무골호인(無骨好人)으로서, J교감과는 대조적(對照的)이었다. 한말로 덕망(德望)이 있는 분이었다. 학교 경영은 교감에게 일체 위임하고, 대외적인 일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교육청 장학사로 전출한 J교감의 후임으로 김요섭(金堯燮)교감이 부임했다. 본래 크리스천이었는데, 아들이 간질병을 앓게 되자 교회에 발을 끊었노라고 했다. 그러나 크리스천이면서, 고시(高試) 낙방생인 나를 이해해 주었다. 이제 교장 교감 모두, 권위주의(權威主義)가 아닌, 인화(人和) 중심으로 학교 경영을 해서 분위기가 180도로 바뀌었다. 그는 윙크(wink)를 하고 교실로 찾아와서, 그저 등을 토닥거리는 걸로 일감을 부탁을 했고, 나 또한 힘 들이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일을 맡아 했다. 타불로이드(tabloid)판 옵셋(offset) 인쇄로 학교 신문 ‘은로어린이’를 창간(創刊), 매월 발행해서 어깨동무학교(강화도 삼산교)까지 보내주고, 글짓기부를 지도하는 등 학교 일을 자원(自願)해서 많이 하였다. 미혼 교사들이 많아서 잘 어울렸는데, 5ㅊ (처녀.총각 결혼추진 총동맹 총재?)으로, 분위기조성부장으로 자처(自處)하면서, 화기애애(和氣靄靄)한 교무실이 되도록 윤활유(潤滑油) 구실을 하였다. 밤에는 과외지도를 하는 등 육신이 피곤한 면도 있었으나, 낙천주의자(樂天主義者)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교직생활 중 가장 즐거운 한 때였다. 상수 동생이 취직을 하게 되어 가정경제가 회복기(恢復期)에 접어든 것이 큰 몫 했을 것이다.

1967년 2월 26일은 최교장의 환갑(還甲)이었다. 사택(舍宅)에서 잔치를 벌였지만 교내 행사처럼 치르었다. 그의 송덕(頌德)을 기리기 위해서 내가 지은 축시(祝詩)를 우리 반 아이가 낭독을 하게 되었다.

축시

이월이라 스무엿새 꽃망울 망울지는데

푸른 하늘에 구름 동동 꽃구름 동동.

종달새도 구름까지 치솟아 큰절 꾸벅하고

금붕어도 하늘을 헤엄쳐 큰절 꾸벅하니,

얼마나 기쁘셔요, 얼마나 즐거우셔요?

환갑을 맞이하신 스승님 만운(晩雲)선생님.

서른 고개 마흔 고개 쉰 고개 예순 고개.

그 많은 고개 그 높은 고개.

고개 고개 넘을 때마다 소나무는 늙고 바위도 늙고,

그러나 젊어지는 할아버지 우리 교장선생님.

흰 머리 하나 싹틀 때마다 꽃처럼 피어나는 붉은 얼굴.

그 맑은 웃음 그 부드러운 목소리.

푸른 하늘에 구름이 동동 영원히 사라지질 않을 꽃구름.

단비 내려 새싹을 키우고 단비 내려 꽃들을 피우며,

오래오래 살고지고 길이길이 복을 누리소서.

1967년 7월 12일은 새 교가(校歌) 발표의 날이었다. 초청장학(招請獎學)을 겸해서 작곡가인 이계석(李癸石)장학사를 모시고, 그의 지휘와 신(申)선생의 반주로 전직원들이 교가를 익혔다. 물론 가사(歌詞)는 내가 작사(作詞)한 것이다. 신춘문예 당선자라는 경력(經歷)이 참고가 되어, 문교부의 정식 인가(認可)를 받은 것이다.

교 가

1. 우뚝 솟은 관악산 정기를 받아,

무럭무럭 자라나는 우리 나무들.

높으신 얼 이슬 되어 흠씬 내리니

이 겨레의 기둥감 자랑스럽네.

올바르고 씩식하며 사이 좋아라.

배움의 보금자리 은로 만만세.

2. 굽이치는 한강물 품에 안기어,

은혜로운 이슬 받은 우리 검은 돌.

한결 같이 갈고 닦아 더욱 빛나니

이 나라의 주춧돌 튼튼하구나.

슬기롭고 착하며 아름다워라.

배움의 보금자리 은로 만만세.

1900년이면 대한제국(大韓帝國) 말,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쓴 유길준(兪吉濬)은 미국 보스턴대학을 다녔으며, 귀국 후 내무대신까지 지내었는데, 한 때 개화당(開化黨)으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어느 날 꿈에 하늘에서 이슬이 머리 위로 흠뻑 내리는 꿈을 꾸게 되었다. 바로 그 날 그 누명(陋名)을 벗고 고종황제(高宗皇帝)로부터 사면(赦免)을 받아 출옥(出獄)했는데, 이 신원설치(伸寃雪恥)의 성은(聖恩)을 보답하기 위해서, 1908년 11월 1일 노량진 본동에 신식 학교의 문을 연 것이 곧 ‘은로소학교(恩露小學校)’이다. 그 후 이 학교는 일한합병(日韓合倂)으로 일인(日人)의 소유가 되어 현재의 흑석동으로 이전되고, 또한 광복(光復)과 더불어 서울시에 헌납(獻納)되어 공립학교(公立學校)로 인가를 받게 된 것이다. 역사가 오래된만큼 작사자 작곡가 모두 미상(未詳)인데다가, 가사와 곡조 모두가 현대 감각에 맞지 않으므로, 새 교가의 필요성을 절감(切感)하고 있는 차에, 개교 60주년을 맞이하여 내가 다시 지은 것이 현재의 교가이다.

1968년 2학기에 접어들면서, 최교장이 전출하고 H교장이 부임해 왔다. 한 마디로 돈 키호테(Don Quixote) 형 경영 스타일(style)로 학교가 온통 벌집 쑤셔놓은 것 같았다. 당시 특A급인 초등의 명문 덕수국민학교의 명교장 이규백(李揆白) 밑에서 교감을 했노라 자랑하면서, 전임자(前任者)의 방만(放漫)한 경영으로 무질서(無秩序)해진 학교의 기강(紀綱)을 바로잡겠다는 포부(抱負)를 밝히며 부임했다. 교감은 로봇(robot)으로 세워놓은 채 복지부동(伏地不同)한 교사들에게 시범(示範)을 한다고, 교문 앞에 나가서 호루라기를 불며 좌측통행(左側通行)을 손수 지도하기도 하고, 학교 스피이커(speaker)를 통하여 담임에게 일체의 봉투나 잡부금을 내지 말 것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교내장학(獎學)이라는 명목으로 메모(memo)장을 들고 예고 없이 교실에 들어와 수업을 참관(參觀)하곤 했다. 냉소(冷笑)적인 교사들은 뒷짐을 진 채 구경이나 하면서, 스피이커 선을 끊어놓기도 하고, 학부모들은 교장실로, 교육청으로 투서(投書)하는 일에 신바람이 났다. 나는 이듬해 명수대국민학교로 전출되어 한 학기만 겪었지만 결국, H교장은 당시 배를 타고 출퇴근해야 하는 뚝섬 학교로 좌천(左遷)되어 갔다. 자기 무덤을 판 결과요, 강하면 부러진다는 이치를 깨닫게 하였다. 그는 퇴임한 후 우리 이웃인 99동 아파트에서 별세할 때까지 거주하였는데, 그 옛날의 기개(氣槪)는 어떻게 꺾였는지, 꾸부정한 자세로 여름에도 마스크(mask)를 하면서 산책하는 모습에 측은(惻隱)한 마음이 들었다.

(2)

4년 9개월 만인 1969년 3월 흑석2동에 위치하고 있는 명수대국민학교(明水臺-현 黑石초등학교)로 전출했다. 은로학교에서 분리해간 신설(新設) 학교로서 ‘작은집’이라고 했다. 간판(看板)과 교장 교감만 다를 뿐, 교직원들이나 아동들 모두가 한 학교에서 있었으므로 전혀 낯설지 않았다. 4학년이 최고 학년이었으므로 복잡한 문제도 없었고, 모두들 새 마음으로 가르치고 배웠다. 초대 이한표(李漢杓)교장은 원만(圓滿)한 성품에 무난(無難)하게 학교 경영을 했으나, 2대 교장으로 부임한 C교장은 한 마디로 함량(含量) 미달(未達)이었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학교 경영을 김원혁(金元爀)교감에게 위임한 것까지는 좋은데, 아무런 교육철학도 학교 운영방침도 없이 그저 출퇴근만 하면서도, 이따금 사소(些少)한 문제로 신경질을 부리다가 혈압(血壓)이 올라 바들바들 떨곤 했다. 한 번 바른 말을 했다가 이렇게 떠는 모습에 혼쭐이 난 나는, 이후 일체 그를 외면한 채 상대를 안했다. 봉급날이면 본처(本妻)가 대기하고 있다가, 봉급을 가지고 내외(內外)가 쟁탈전(爭奪戰)을 벌이는가 하면, 어느 때는 교장이 미리 봉급을 챙겨서 담 넘어 도망(逃亡)하는 활극(活劇)을 펼쳐서 심심치 않는 구경거리였다. 사연인 즉 그 꼴에 바람을 피워 첩(妾)과 동거(同居)하므로, 본처(本妻)는 봉급만은 자기가 챙겨야 하지 않겠느냐며 우리들의 협조를 간청(懇請)했다.

그러나 이 무렵 나는 결혼을 하였고, 두 아들을 얻었다. 1972년 3월 2일 C교장의 정년퇴임으로, 영본(永本)교에서 M교장이 3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옥편에는 ‘빛날롱,환함롱(瓏)’이라는데 왜‘용’이라 부르는지 글자조차 생소(生疎)하지만, 한 마디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었다. 스스로 대교장(大校長?)이라는 레테르(letter)를 붙이고 부임해오는 것부터 거부감(拒否感)이 앞섰다. 그것도 서울 시내 교장 중 세단(sedan) 승용차를 굴리는 몇 사람 중 하나일 정도로 경제력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닌게아니라 부인은 미용사 출신으로 미용학원(美容學院)을 경영하고 있고, 흑석1동에서 고급 저택(邸宅)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줄곧 흑석동에서만 살고 있다니까 흑석동 터줏대감인 셈인데, 따라서 흑석동 주민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해방 직후 평북 선천에서 월남하여, 소위 カタ(어깨)로서 적산가옥(敵産家屋=일인가옥)을 침탈(侵奪)하다시피 들어가 살고 있는 집이라고 했다. 그리고 흑석동에 있는 당시 3류의 낙양(洛陽)중학교(현 중대부중) 출신인데, 어떻게 교장까지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런데 경기도 장학사를 지내다가 서울로 전입해서 교장이 된 것이다.

부임한 날은 마치 어사(御使) 출또를 방불케 하였다. 전 직원이 교문에 2열로 도열(堵列)하여 환영하자는 것이다. 나는 즉각 반발(反撥)했다. 상사(上司)에 대한 예우(禮遇)라는 간부진(幹部陣)들의 아부(阿附)가 몹시 싫었다. 교사(校舍) 2층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타기(唾

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택에서 걸어와도 15분이면 충분한데, 마중나간 간부들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흑석동을 일주한 후 예정보다 늦게 교문 앞에 도착했다. 도열한 교직원들에게 목례(目禮)만으로 답례를 하며 교무실로 들어오는 그 모습이 마치 개선장군(凱旋將軍)의 입성(入城)과 같았다. 기름기가 번지르르한 얼굴에 아래로 처진 입 꼬리며, 불쑥 튀어나온 배가 모리배(謀利輩)를 연상시켜, 그 첫 인상(印象)부터 혐오감(嫌惡感)이 생겼다.

이후 그의 학교 경영은 ‘짐(朕)이 곧 국가’라는 전재주의(專制主義)처럼, ‘장(長)이 곧 학교다’였다. 언변(言辯)을 좋아해서 수업 결손을 가져올 정도로 매일 조.종례(朝終禮)가 길었는데,

환경계(環境係)인 나더러 그 어록(語錄)을 학교 곳곳에 써 붙일 것이며, 아동 조회 때의 훈시(訓示)는 각급(各級)시험에 출제(出題)하라는 것이었다. 교장실 카아핏(carpet) 심지어 책상 위의 두꺼비 재떨이까지도 어느 교사가 선물한 것이라는 둥 자랑을 늘어놓는 바람에, 배앓이가 날 것 같아 아예 등을 돌렸다. 대화는커녕 상면(相面)도 싫었다. 이따금 교장실로 나를 불러, 재주꾼이라며 일전짜리 비행기를 태웠다가, 왜 학교 일에 비협조적이냐는 힐난(詰難)도 하였다.

“교장 선생님, 학교를 경영하려면 교장 선생님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교육 잡지라도 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모욕적인 말에 그는 회전의자(回轉椅子)를 돌려 앉아 줄담배를 피웠다. 당시 나는 음악계(音樂係)도 맡아, 의식(儀式)이나 행사(行事) 때는 노래 지휘(指揮)를 하고 있었고, 직원 합창 지도를 하고 있었는데, 나더러 방과후(放課後)에 어린이 합창.합주부를 만들어 지도를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나는 단연 이를 묵살(黙殺)해버렸다. 어린이 익사(溺死)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여름방학 중 한강변(漢江邊)에 나가 수상안전(水上安全) 지도를 하라는 지시로 인해서 논쟁(論爭)을 하기도 하고, 주일날 운동회를 하겠다는 방침에 반발(反撥)해서 이를 관철(貫徹)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간격(間隔)은 나날이 벌어진 채 사사건건(事事件件) 부딪쳤다.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출근할 때는 무사한 하루를 기원(祈願)했지만, 학교 앞 육교(陸橋)를 지날 때는 어김없이 그의 험상궂은 얼굴이 떠오르면서, 교문에 들어서면 출근 때의 다짐이 와르르 무너졌다. 다른 동료들은 한 두 사람씩 자택으로 초대했다. 식사 대접을 받고 온 그들은 한결같이 세뇌(洗腦)당하고 포섭(包攝)되어 말이 없었으나, 나만은 초대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초대에 응하지도 않았겠지만. 이 갈등이 최고조(最高潮)에 이른 것은 유신헌법(維新憲法) 통과를 위한 국민투표 때문이었다. 학교를 홍보실로, 교사들을 교도원으로 삼고자 하는 정부의 지시 때문이기도 했지만, 고양이 잡으라 하니까 호랑이 잡는 그의 과잉충성(過剩忠誠)에 신물이 났다. 그는 청와대를 무상(無常) 출입할 수 있는 ‘증(證)’을 가졌다고 내보이며,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명령불복종죄에 해당한다며 반 협박(脅迫)까지 했다.

L교감은 교장실에 불려가서, 고양이 앞의 쥐처럼 서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는데, 질책을 받는 것인지 기합을 받는 것인지 그야말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교감은 부교장(副校長)격인데, ‘副’는 곧 ‘腐’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였다. 나에 대한 화풀이를 교감에게 하는 것 같아서 그에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여간 불쌍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의 심각성은 그의 무식(無識)과 교양(敎養) 없는 언행보다는, 공공재산(公共財産)을 빼돌리는 횡령죄(橫領罪)를 범하고 있었다. 증축(增築)하기 위해서 들여온 자재(資財=시멘트, 벽돌, 목재)를 청부(廳夫)를 시켜서 야간에 자기 집으로 실어가고, 심지어 난방용(煖房用) 석유까지 빼돌리며, 동사(凍死)를 막는답시고 겨울방학이 되면 학교 화분을 모조리 실어가 자택 지하 온실(溫室)을 장식했다. 이런 사실은 숙직을 함께 하는 청부로부터 들은 정보였는데, 그렇다면 학교 경리(經理)에는 어떤 비리(非理)와 부정(不正)이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곤궁범(困窮犯)이 아닌 이욕범(利慾犯)의 전형(典型)이었다. 고발(告發)만 하면 파면(罷免)감이지만 그런 비겁(卑怯)한 일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 때의 1년은 내 교직생활 중 가장 괴로웠던 기간이었다. 그는 내가 전근한 후 곧 권고사직(勸告辭職)을 했다. 횡령이 아닌 학력(學歷)위조가 들통 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연히 어느 좌석에서 잠깐 상면(相面)했는데, 그 육중(肉重)한 체구(體軀)가 줄어, 양복이 외투(外套)처럼 헐렁거리는 게 그토록 처량할 수 없었다. 자칭 재벌(財閥)이라면 새 양복이나 맞추어 입지, 참으로 딱한 사람이었다. 상사 한 사람 잘 못 만나면 직장이나 직원들에게 얼마나 큰 불행을 안겨주는 것인지......

(3)

1973년 다시 은로학교로 전출하게 되었다. 4년 만에 떠나왔던 학교로 되돌아간 것인데, 사무착오(事務錯誤)임에 틀림없었다. 이제는 강북(江北)으로 들어 가야할 차례였으므로 몹시 불쾌(不快)했으나 긍정적으로 수용(受容)했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는 신앙적인 관점에서였다. 친정(親庭)에 왔다는 심정으로 홀가분하게 부임했다. 내가 지은 교가의 가사와 곡조가 웬일인지 변질되어 있어서 먼저 이를 시정(是正)했다. 그런데 부임하자마자 병역 관계로 문제가 생겼다. 기피자가 어떻게 재임용되었는지 의문스럽다는 뚱딴지같은 교육청의 조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K교장이 노발대발(怒發大發)이었다. 그는 명수대 M교장과 동향인(同鄕人)으로서 호형호재(呼兄呼弟)하는 사이라고 했다. 전출할 때 나에 대한 악평(惡評)이 인계(引繼)되었으리라는 점을 짐작했다. 다행히 병무청에서 소명(疏明) 자료가 올라와 곧 의문이 풀렸기 때문에, 그의 안하무인격(眼下無人格)인 태도가 180도로 달라졌다. 물론 나도 M교장과의 전철(前轍)을 밟지 않기로 다짐하였고, 특히 어려운 ‘자유교양대회’업무를 열과 성으로 추진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부모들의 여론이 좋아서, 나를 보는 그의 선입감(先入感)이 확연(確然)히 달라지고 신임을 하였다. 흑석동교회 교회학교 부흥을 위해서 총력 전도를 하고 있을 때여서, 그는 나를 ‘최전도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1974년 8월 K교장의 정년퇴임으로 박용국(朴龍國)교장과 김정한(金鼎漢)교감이 부임했다. 두 사람 모두 모나지 않는 성격이었고, 무난하게 학교 경영을 했다. 내가 승진(昇進)에 대해서 마음을 비우고 교회 일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주임(主任)에 대한 부담이 없어 그들도 마음 편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회갑 잔치 때도 파격적(破格的)인 협조로 축하를 해주었고, 대석이 입학을 하게 되어 1년 더 유임(留任)도 시켜주어서 5년을 근무하였다. 물론 나도 최선의 노력을 다 해서 맡은 일에 충성했다.

어느 날 예고 없이 문교부의 장학(獎學)이 있었다. 그 무렵 어떤 문제로 인해서 학교가 어수선했기 때문에, 교장은 엄한 질책을 받고 몹시 당황하였다. 그런데 급습(急襲)한 장학관은 공교롭게도 나와 사범 동기동창인 정용술(鄭用述)이 아닌가? 사실 내가 이 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것을 모른 채, 모종(某種)의 정보(情報)가 있어서 내방(來訪)한 것인데, 교장은 나와의 내밀(內密)한 연락이 있는 것으로 알고 원망하는 눈빛이어서 몹시 난처했다. 나의 조정(調整)으로 일은 잘 무마(撫摩)되었지만, 교장이라는 지위(地位)가 그토록 무력한 것인지 새삼스럽게 회의(懷疑)스러웠다.

keyword
이전 15화내 아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