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년시절
‘내 집’이란 꿈이었다. 남의 집 곁방살이, 세 들어 사는 일이 얼마나 서럽고, 이 집 저 집 쫓겨 다니다시피 이사하는 일이 얼마나 처량한가는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내가 결혼할 때까지 아버지께서 집 장만했던 일은 두 번이었다. 첫 번째는 전남 장흥(長興)읍 기양리(岐陽里)에 조그만 집을 장만해서 드라이크리닝(dry-cleaning) 세탁소를 차렸다. 그런데 화재로 잃었다. 두 번째는 서울 흑석동(黑石洞)에 이모부와 합자하여 집 장사 한답시고 조그만 집 한 채를 지었다. 살려고 지은 집이 아니고 팔려고 지은 집이니 사실은 우리 집 아닌 우리 집이다. 아버지와 이모부가 세상을 떠난 뒤, 우리가 팔아서 이종(姨從) 끼리 분배(分配)하고 빚 갚고 나니까 간신히 두 칸짜리 전세방 얻을 정도만 남았다.
내가 자랐던 전남 장흥에서 7번이나 이사를 했으니, 평균 1년 반 만에 한 번씩 한 셈이며, 서울에 온지 20년 만에 10번이나 이사를 했으니 평균 2년마다 이사를 한 셈이다. 더구나 중1때 살았던 셋집은 공비(共匪)들의 방화에 의해서 재만 남았고, 6.25때는 역시 셋집이지만 비워둔 채 몸만 피신을 갔으며, 모처럼 장만했던 세탁소 집이 또 화재가 났으니 집에 얽힌 이야기만도 책 한 권은 쓸 수 있으리라.
결혼할 당시에는 흑석동(3동) 79번지에 있는 속칭(俗稱) 공군주택에서 살았다. 대지(垈地)가 100평이고 건평(建坪)이 27평인데, 당시 겉보기에는 괜찮은 집이었다. 월급 38,000원하던 시절 60만원 짜리 전세(傳貰)였다. 여기에서 결혼했고 두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1973년 2월. 이 집을 갑자기 비워달라는 통고(通告)를 받았다. 몹시 당황했다. 평생 살아도 괜찮다고 했는데 사정이 생겼다는 것이다. 복덕방을 두루 돌아 다녀본 어머니는 피로(疲勞)에 지치고 허탈(虛脫)한 채 돌아오곤 하셨다. 독채 전세는 없고 팔 집만 있더라는 것.
살 바에야 값비싼 흑석3동에 한정(限定)할 필요가 없어, 2동까지 여기저기 다녀보았다. 역시 팔 집은 더러 있었으나 마땅한 전세는 없었다. 집 비워줄 날이 바싹 다가와 일부는 태능(상수동생의 새로 지은 집)으로, 일부는 순병(막내동생 친구)의 집으로 임시(臨時) 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제 두 달도 채 안 된 갓난아기(大珍)를 안고 또 어디로 가야 할지 처량(凄凉)하였다. 다급해진 아내까지 나서서 돌아다니다가, 마침 흑석3동 동사무소 근처의 구본영(具本英)권사가 이사를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물론 전세집이었다. 많은 경합(競合)이 있었으나 100만원에 우리가 하기로 하고 10만원 계약금을 가지고 내려갔다. 막 나가는데 복덕방에서 전화가 오기를 85만 원짜리 전세집이 나왔다는 것이 아닌가? 부랴부랴 알아봤더니, 우리가 사는 바로 그 공군주택이었다. 싱겁게 웃어넘겼지만, 주인이 들어온다 했는데 전세를 내었다니 야속(野俗)하기 짝이 없었다. 자기 친척(親戚)이 들어왔다. 아무튼 계약을 하고 3월 말에 이사하기로 하였다. 어머니는 못 마땅해서 불평을 하고 아내는 공연(空然)히 일을 처리했나보다고 후회를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주인 할머니는 내 집같이 알고 살고 싶을 때까지 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사한지 9개월 째 되던 12월, 성탄절(聖誕節)이 다가오는데 집을 또 비워달라는 것이 아닌가? 사정이 생겼다고 하는데 어이가 없었다. 맥이 풀렸다.
1년 가까이 내 집을 달라고 기도해오던 터였다. 쥐 꼬리만한 5만 원짜리 월급쟁이가 평생 집 장만하기는 이미 틀린 일이었으나, 전도(傳道)를 하기 위해서는 오두막이라도 내 집이 있어야 하겠기에. 예수를 믿으면 복 받고 잘 산다는데, 얼굴에 밥풀 하나 붙을 곳 없이 삐쩍 마른데다가, 달팽이 같은 집 한 채도 없으면서 무슨 예수냐고 냉소(冷笑)하는 것만 같았다.
“하나님, 집 한 채 달라니까, 이 추위에 갓난애를 안고 또 어디로 가라는 말씀입니까?”
이렇게 투정을 하였다. 그러나 원망한 것을 곧 회개하였다.
‘하나님께서 좋은 집을 주실 거야.’
막연(漠然)하나마 이런 믿음이 생겼다. 쉬지 않고 기도하며, 뜨겁게 전도하며 교회 일에 충성했는데 하나님께서 어찌 모르는 척 할 리가 있으랴.... 이제는 천막(天幕)이라도 내 집을 사야 한다는 것이 온 가족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새 해가 되고, 때마침 방학이라 우리는 본격적으로 집을 보러 다녔다. 복덕방(福德房) 할아버지를 따라, 어느 날은 하루 열 대여섯 집을 둘러보기도 했다. 비록 전세지만 넓은 집에서 살다보니까, 돈은 없으면서 눈은 높아 참으로 분에 차지 않았다. 괜찮은 것은 300만원이 넘고, 200만원 이하는 볼 것도 없고...
1월 8일 나는 과외 지도를 하고, 어머니와 아내가 흑석동을 일주(一周)하면서 여남은 집을 둘러봤는데, 200만원 정도의 중대부고(中大附高) 선생댁이 우리 분에 맞을 것 같다는 것이다. 숙직하러 가는 길에 나도 둘러봤는데, 낮은 지대(地帶)에 있으며 기와 한옥(韓屋)으로 약간 무리가 가지만, 우리 살기로는 적당할 것 같아 사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이튿날 양(楊)희균 집사가 소개한 제2의 집을 둘러본 어머니와 아내는 그 집이 싼 편이라고 하였다. 좀 높은 지대에 위치(位置)한 것이 흠이지만, 64평 대지에 건평 20평의 벽돌집이라고 했다. 그리고 넓지는 않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정원(庭園)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가보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주셨을 것이라고 믿고 곧 계약(契約)하기로 하였다. 3시에 가고파 다방으로 가서, 70만원의 주택 부금(15년 상환 중 5년 분 상환)을 안고 현금 200만원에 사기로 계약을 하였다. 이 집은 응암동에 사는 안영철(安永哲)씨가 집장사하기 위해 지은 것인데, 부동산 경기가 없어 몇 년 동안 팔지 못한 채 비워둔 집이었다.
그런데 아내는 아무래도 아래 먼저 집이 놓치기 아깝다는 것이다. 사두기만 하면 곧 팔아도 남는다고 전망(展望)하였다. 나는 사고 팔고 돈 벌고 하는 일에는 어둡지만, 아내는 그런 면에는 밝았다. 하나님께서 그 집도 주셨을 것이며, 아내의 전망(展望)도 신빙성(信憑性)이 있어 사기로 결정했다. 학부형인 중개인(仲介人)을 통해 202만원에 흥정이 되었다. 여기저기에서 돈을 얻어다 계약금을 치러주었다.
집 한 채 마련한다는 일이 그다지도 어려운데, 하루 두 채의 집을 계약(契約)했으니, 우리가 간(肝)이 부었거나,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거나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인데, 우리는 단연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집값을 마련하는 일에도 함께 하여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기도 생활하다보니까 그런 배짱이 생긴 것이다.
남에게 꾸어준 돈도 찾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빌려서 중도금(中度金)까지 어렵사리 치러주었다. 그런데 1월 27일 먼저 집을 팔라는 사람이 왔다. 교직(敎職)에 있어 지면(知面)이 있는 분으로, 자기가 사려고 했는데 우리에게 팔려서 몹시 서운했노라는 것이다. 하도 사정하고, 앞으로 자금 압박(壓迫)도 있어서 어차피 한 채는 팔아야 하겠기에, 당사자(當事者)가 있을 때 225만원을 제시(提示)했다가, 222만원에 팔기로 계약을 했다. 그러니까 소개비(紹介費) 등 여러 경비를 다 공제(控除)하고 22일 만에 실질적으로 14만원의 차익(差益)을 얻었다. 내가 언제 이런 큰돈을 이렇게 쉽게 벌어봤던가? 욕심(慾心)은 죄를 잉태(孕胎)한다는데 욕심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 분에 맞게 처리했노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제 제2의 집이 우리 집이다. 2월 7일에 처음으로 둘러보았다. 방은 넷인데 전세 낼만한 방이 없어 야단이었다. 한 집 살림하도록 꾸며진 집이다. 방마다 불이 고루 들어가지 않은 듯 했으며, 하수도(下水道)가 없는 것, 화장실이 두 방 앞에 있는 것, 부엌이 좁은 것 등...흠이 눈에 띄었다. 자금(資金) 때문에도 문제였다. 그러나 하는 수 없었다. 그러나 마룻바닥과 문짝이 튼튼했으며, 뜰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100% 마음에 들 리가 있으랴. 집 장사를 해온 외사촌 아우에게 수리(修理) 문제를 의논할 겸 보여 봤더니, 100만원은 벌었다고 하지 않는가?
대석의 세 돌을 지낸 2월 16일부터 서서히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용달차(用達車)는 한 대만 부르기로 하였기 때문에 자질구레한 짐들은 개미처럼 날마다 시간 나는대로 미리 날랐다. 그래도 짐이 조금도 무겁지 않고 힘들지 않았다. 2월 28일, 외사촌 아우들, 막내동생 친구들, 교회학교 교사들의 도움을 얻어 저녁때까지 이사(移徙)를 마치었다. 큰 동생의 살림도 함께 들어와 복잡하기는 했으나, 이내 의정부로 전근(轉勤)이 되어 이사 나갔다. 빚은 졌지만 내 집 마련의 꿈이 이루어진 이 순간은 정말 하나님께 감사했다. 결혼한지 만 4년만이요 대석이 세 돌, 대진이 첫 돌 지난 해였다. 이 날 일기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있다.
‘새 집에서 새 마음으로 새 사람 되어 새 살림을 하게 되어, 기쁨과 은혜와 행복이 가득한 집이 될진저.’
3월 1일, 소유권 이전 등기(登記)에 필요한 모든 서류를 넘겨받고 대금을 완납(完納)하였다. 그리고 4일 큰 동생 가정도 의정부로 이사를 떠났다. 8일, 청장년 믿음속은 韓경복 전도사 인도로 새 집에서 속회(屬會)를 보는데, 좋은 집을 싸게 샀다고 부러워했다. 봄이 되면서 갖가지 꽃들이 피면서 넓은 집에서 마음껏 뛰노는 아이들을 보니까 참 행복했다. 해동(解凍)이 되면서 우리 집을 팔지 않겠느냐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100만원 정도만 붙이면 금방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눈알이 팽팽 돌 정도. 오랫동안 동면(冬眠)하던 부동산 경기(景氣)가 기지개를 켜면서 뛰기 시작한 것이다. 불과 몇 달 만에 큰돈을 번 셈이다. 내가 평생 저축(貯蓄)해도 안 될 돈인데. 지난 겨울에 집을 비우라고 해서 집을 샀으니까 망정이지, 봄이었다면 살 엄두라도 낼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께 감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