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년시절
1. 7879
7월 8일은 분만(分娩) 예정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밤 2시 반에 아내가 깨웠다. 고무풍선 터지 듯 펑 소리가 나더니, 파수(破水)가 되어 양수(羊水)가 두 다리로 흘러내렸다. 의학전서를 보니까 조기파수(早期破水)였다. 난산(難産)의 예고 같아서 약간 불안해졌다. 먼저 예배를 드리자고 했다. 아내는 누워서 드렸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를 소리 높이 불렀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렸다. 우리들이 원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면 선물로 기꺼이 받겠으니, 순산(順産)하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불안한 낯빛
으로 어머니도 오셔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새벽 3시에 짐을 꾸려 가지고 아내를 곁부축한 채 집을 나섰다. 아내는 계(契)에 관계된 것, 돈 꾸어준 것 등 금전관계(金錢關係) 메모(memo)지를 넘겨주었는데, 나는 보는 척도 안 했다. 택시도 없어 걸어서 어둠을 뚫고 흑석동 성모병원으로 갔다. 그 처량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게 오히려 무방했다. 병원은 응급환자(應急患者)만 받았다. 4시 10분에 입원 절차를 밟아 산부인과로 올라갔다. 다짜고짜 내진(內診)하는 게 무례(無禮)하다는 아내와, 당연한 절차를 외면한 환자가 교양(敎養) 없다는 간호사 사이에 시비(是非)가 있었다. 난 아내더러 지시(指示)에 전적으로 순종(順從)하라 하고, 간호사의 이해를 구했다. 간단한 소변, 혈액 검사를 했다.
6시경에 피가 섞인 양수가 나오긴 했으나 아직 진통은 없었다. 7시가 지나서야 약간의 진통이 있었다. 직장을 결근하고 간호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오후 2시 50분에 링거 주사를 맞기 시작했는데 밤에는 위험하니까 빼었다. 밤 8시가 지나니까 6분 정도의 간격(間隔)으로 진통이 온 듯 했다. 김종순, 장경자집사가 다녀갔다. 10시가 지나서야 오렌지넥타를 마셨다. 밤이 깊었으나 분만(分娩)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늦게 입원한 부인들이 오히려 먼저 출산을 했다.
입원실에는 대여섯 분의 임산부(姙産婦)가 산모(産母)와 함께 있었는데, 진통이 있는 사람들의 비명(悲鳴)과 신음 소리가 고막(鼓膜)을 찢을 듯 신경(神經)을 날카롭게 하였다.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도 있었는데, 아내는 잘 참아주었다. 빨리 낳을 수 있느냐고 해도 아플 건 다 아파야 한다는 것이 간호사들의 대답이었다. 나는 복도의 벤치(bench)에 누워서 밤을 꼬박 새웠다. 시중들 일은 별로 없었으나 잠이 오질 않아, 눈만 뜨면 기도를 했다.
예정일이 지나고 이튿날은 주일이다. 공휴일인데도 특별히 과장님이 출근해서 내진(內診)도 하고 촉진제(促進劑) 주사도 놓아주었다. 노산(老産)에 하혈(下血) 가능성이 있어 특별히 봐준다는 것이다. 참 감사했다. 7시 반 1부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서 어머니께 그 동안의 경과를 말씀드렸다. 9시 15분에 아내와 둘이서 간단히 예배를 드리고 9시 45분에 아내만 분만실(分娩室)로 들어갔으며, 과장님은 10시 15분에 들어갔다. 가끔 아내의 신음 소리가 귓전에 부딪쳤다. 나는 복도 벤치에서 기도와 찬송과 성경 봉독(奉讀)으로 초조한 시간을 메우었다.
10시 30분에 아기 우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분만한 모양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출산이 빠른 것 같았다. 안도(安堵)의 숨을 쉬고 있는데, 어떤 할머니가
“또 아들인가 봐요”
하였다. 순간
‘3총사들이 법석을 떨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아들이건 딸이건 아내의 건강 상태만 궁금했다. 아기가 유아실로 들어간다고 해서 따라가 봤더니 벌써 문이 닫혔다. 유리창 커어튼(curtain) 사이로 들여다보니까, 침대 위에 누인 아기가 계집애 같았다. 아들이라 했으니까 다른 아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물러 나와 벤치에 돌아와 앉았다. 궁금증이 더 해갔다. 이미 낳아서 침대 위에 뉘어있는 애들에 비해서 유난히 크고 포동포동하다고 느껴졌는데, 그게 우리 아긴지 아닌지...
10시 40분이 되어서 과장님이 나왔다. 그러니까 출산 과정이 25분 동안인 것 같았다. 땀에 흠뻑 젖은 채
“아빠의 기도 덕분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어려운 수술이었노라고 한 걸 보아 난산(難産)한 모양이었다. 4.2Kg인 오빠들에 비하면 작지만 4.1Kg라면 역시 큰 아기였다. 이 때 비로소 딸인 걸 확인(確認)하였다. 아내는 링거 주사를 빼고 2시 30분에 입원실로 옮겼다. 그 때 나도 따라 들어
가서 수고했노라고 아내의 손목을 잡아주었다. 곧 어머니께 딸을 낳았노라고 전화를 걸었다. 잘 했다고 기뻐했다. 1978년 7월 9일 오전 10시 30분이었다. ‘7879’ 참 외우기가 쉬웠다. 아기도 정상(正常)이고 산모의 경과도 좋은 것 같았다. 밤에는 부산 처가에 전화로 알리고, 자세한 것은 편지로 써서 부쳤는데, 공교롭게도 ‘둘만 낳자’라는 비둘기 우표를 붙이게 되어 혼자 씽긋 웃었다. 10일 아침에 부산 장모님이 급히 오셨다. 전화만으로는 궁금해서 마침 막내 처남이 방학이 되자마자, ROTC 입대한 것을 보고 열차를 탔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뜻이라면
출근하여 옆반 김성규(金聖圭)선생에게 이야기했더니 유(兪)양근 친목회장에게 알렸다. 그러나 교장 교감 전직원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하고, 공식적인 축하금(祝賀金) 3,000원만 받았다. 또 동학년에서 알게 되어 5,000원을 주었는데 동학년 때 다과(茶菓)를 준비해서 대접했다. 교무실 칠판에 ‘축 득녀’라고 쓰는 것이 보통인데 적극 만류(挽留)했다.
밤에 대석 대진을 데리고 외할머니와 함께 병원으로 갔다. 대석은 엄마를 위로하는 편지를 쓰고, 과일 통조림을 각각 한 개씩 선물로 사들고 갔다. 여러 사람 보는 앞에서 먼저 예배를 드렸다. 장모님께서 감사 기도를 하셨다. 예배를 마치고 두 오빠들이 아기를 보고 싶다고 해서 유아실을 노크(knock)했다. 간호사는 커튼 사이로 아기의 얼굴만 잠깐 보여주었다. 토실토실한 두 볼이 쳐진 게, 얼굴 윤곽(輪廓)이 오뚝이 모양이었다. 다른 아기들보다 유난히 컸다.
7월 11일은 퇴원 예정일인데 경과를 더 두고 봐야 한다고 해서, 전화 연락을 하기로 하고 출근을 했다. 궁금해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데 림정자(林正子)집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나 곧 조퇴를 하고 버스를 탔다. 사당동에서 내려 택시를 갈아탔다. 투덜거리는 운전사를 달래어 퇴원 절차를 밟았다. 60,700원의 계산서(計算書)가 나왔다. 오후 3시였다. 나는 아기를 포대기에 싸안고, 장모님은 짐을 챙겨 산모를 곁부축하고 택시를 탔다. 빗방울이 떨어진 듯 만 듯 하늘이 흐렸다. 집에 도착하니까 오후 4시 20분.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고 마음이 홀가분했다. 할머니도 기뻐하고 오빠들도 신기해하며 좋아했다. 오빠들도 남자보다 누이동생을 낳기 원했다는 것이다. 한 돌 지난 앞집 세희를 귀여워하던 참이라 그러려니 했지만, 집안 어른들이 딸 낳기를 원하니까 저희들도 그랬으리라.
오빠들은 성급하게 안아보고 싶어 하며, 이름을 짓는답시고 강아지 이름 같은 이름도 지었다. 대석은 일기장에다가 그림일기도 썼다. 비로소 젖을 물렸다. 첫 젖은 좋다 해서 짜지도 않고 먹였다. 입술을 대는 둥 마는 둥 서툴더니, 이내 다부지게 빨았다. 교회에서 한(韓)전도사님이랑 권사님들이랑 심방 오셨다. 휘경동 처형도 다녀가셨다. 어쩌면 그렇게 뜻대로 되느냐고 모두들 기뻐했다. 우리보다 며칠 전에 같은 병원에서 다섯 번째 딸을 낳은 이웃집 이춘자(李春子)집사를 동정했다.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두 분이 시중을 들어주셔서 산모(産母)는 비교적 편했다. 그러나 오랜 가뭄 끝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첫 주일이 되어 감사 헌금을 300원 했더니, 비로소 축하 인사하는 분들이 많았다. 언제 임신했더냐는 사람도 더러 있었고, 기도를 많이 했기에 뜻대로 되었을 것이라면서, 딸을 길러보면 아들보다 훨씬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다고들 했다. 제2장년회 정길봉(鄭吉奉)회장이 와서 5,000원의 축하금도 전해주었다.
불안과 초조의 얼굴빛으로 짜증내던 아내의 얼굴이 가끔 떠올랐다. 임신 중절(中絶) 수술을 해야 하느냐, 그대로 분만(分娩)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이 사람 저 사람의 의견을 물으며 갈피를 못 잡아 고민하던 그 모습이 얼마나 측은한지...남편으로서 할 말을 잃은 나는 그저 기도만 했다. 두 아들로 만족하고 아내의 건강으로 봐서 또 아기를 갖는 것은 큰 무리였으므로, 피임(避妊)에 꽤 신경을 썼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절제(節制)하지 못한 나의 잘못을 용서해달라는 것과, 자연 유산(流産)이 안 되면 감당(勘當)할 수 있는 능력을 먼저 주시고, 순산하도록 도와 달라는 기도를 끊임없이 하였다. 실패작(失敗作)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모독(冒瀆)이요, 태아(胎兒)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생각이 들면, 오히려 용기가 솟기도 했다.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으니까 주셨을 것이 아니냐고...
막상 낳고 나니까 귀여웠다. 우리 아버지께서 43세, 어머니께서 39세에 막내(건수)를 낳았는데, 공교롭게 나도 43세 아내도 39세에 막내를 낳은 것이다. 자식은 내리사랑이라 했던가. 두 주일이 지난 후에 신문에 주먹만한 글자가 나타났다. 1978년 7월 25일 역사상 처음으로 시험관(試驗管) 수정(受精=IVF)아기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영국의 올담병원에서 브라운씨의 아기(2.6Kg)가 예정일보다 10일 전에 제왕절개(帝王切開) 수술로 태어난 것이다. 30세의 브라운여사가 나팔관(喇叭管) 폐쇄증(閉鎖症)으로 임신이 불가능해지자, 시험관에서 수정(受精)을 시켜 자궁에 부착(附着)시켰는데,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 이 ‘페트리샤’란 여아의 출생은 현대 과학의 기적(奇蹟)이라고 떠들썩하는가 하면, 한편 신(神)에 대한 도전(挑戰)이라고 들끓기도 한다. 우리 아기와 비교해 가면서 이 시험관 아기의 성장을 주시할 것이다.
* 그로부터 만 25년 후 “‘세계 첫 시험관 아기’ 25세 생일 맞아”란 신문 기사를 보게 되었다. 현재 우체국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지난 93년 자신처럼 시험관 아기로 태어난 쌍둥이를 안고 포우즈(pose)를 취한 사진과 함께 보도된 것이다.
* 그로부터 28년 후 ‘최초의 시험관 아기’ 엄마 된다”라는 기사가 ’06.7.12일자 신문에 보도되었다. 루이스 브라운은 자연스럽게 임신해서 내년 1월에 출산한다는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2007년 어느 날 신문에는 아기를 낳아 유모차에 태우고 가는 사진이 개재되었다.
3. 불볕 더위 속에서
이레가 되었다. 배꼽도 떨어졌다. 목욕도 시켰는데 울지 않았다. 포동포동한 게 100일된 아기 같았다. 할머니는 오랜만에 당산동 작은집으로 다시 가셨다. 제수(弟嫂)씨도 8월 말에 분만 예정일인데 한창 힘들 때이고, 계속되는 유산(流産)의 위험으로 마음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만 남아서 산모 시중을 들어주셨다. 휘경동 조카딸 교회 여전도회에서 주최하는 여름수련회가 사당동 총신대학에서 있었기 때문에, 왔다 갔다 하면서 일을 돌보아 주셨다.
36도를 웃도는 더위가 연일 맹위(猛威)를 떨쳤다. 기상관상대(氣象觀象臺) 생긴 이래 가장 높고 오랜 더위라니까 40년만의 더위인 셈이다. 높은 지대에 살면서 선풍기(扇風機)가 없어도 살 수 있는 집이지만 정말 더웠다. 산모는 몸조리를 못하고 짜증이었다. 이불을 덮으면 땀이 비 오듯 하고, 닭살처럼 땀띠가 솟아나서 못 견뎌 했다. 머릿속은 땀띠가 뭉쳐 종기(腫氣)로 되어 몹시 가려워했다. 따뜻하게 몸조리하는 일은 아예 틀렸다. 아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못 견뎌 보챌 것 같은데 그렇지 않는 게 신기했다. 뒤통수가 너무 나와 바로 눕지 않고, 꼭 오른쪽으로만 돌아누웠다. 그러고 보니까 오른쪽 머리에 땀띠가 뭉쳐 종기가 벌겋게 몇 개 났다. 며칠 동안은 보채었다.
까만 눈동자에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간 게 좀 매서워 보였지만, 낮은 코가 그나마 메주 볼에 파묻혀 오히려 고집은 없어 보였다. 쌍꺼풀이 되어 있지 않고 속눈썹이 짧은 게 오빠들하고 달랐다. 귀 바퀴가 예쁘다는 사람이 있고, 작은 입이 귀엽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얀 손가락이 유난히 길어 보이고, 왼쪽 발등에 몽고반점(蒙古斑點)이 있다. 젖꼭지가 약간 들어가 있고, 납작꼬추가 포동포동한 게 예쁘다는 사람도 있다. 얼굴 윤곽이 오뚝이 모양이라서 그림을 그려놓고 보면 미련하고 심술쟁이처럼 보였다.
“아니, 나이 든 분들이 아기를 낳는데도 아기는 포동포동하네요?”
앞집 할머니가 한 말이다. 쭈글쭈글한 늙은 아기를 낳을 줄 알았던 모양이다. 놀림을 받기 전에 선수(先手)를 써야한다. 미련하고 능청스럽게 교회에 가면 왜 축하 안 해주느냐고 떠들었다.
“늙은이가 창피한 줄도 모르고...”
“아니, 늙은이가 못할 짓을 했나? 창피하긴 뭐가 창피해. 나 같이 마흔 넘어서 아기 낳는 기술들 있어?"
하고 반격(反擊)을 했다. 자식 욕심 많다고 빈정대면
“아들만 낳고 딸을 못 낳으면 그것도 병신이라 하더라.”
고 목소리를 높였다. 함께 음식을 먹게 되면 산부(産父)에게도 더 많이 줘야할 게 아니냐고 사람들을 웃기고, 힘든 일을 시키려 하면 산부(産父) 몸조리해야 할 게 아니냐고 웃겼다. 아무튼 제2장년회의 막내둥이라는 둥, 다시 청장년회로 내려가라는 둥 한동안 화제(話題)가 끊이질 않았으며, 나만큼 젊어져보라고 우쭐대기도 했다. 아내는 화제에 오르지 않도록 잠자코 있으라 했지만, 내가 선수 쓰지 않으면 뒷좌석에서 더 수군거린다고 했다.
아내의 얼굴의 부기가 얼른 빠지지 않았다. 바람이 든 탓이라고 했다. 성모병원에 가서 이뇨제(利尿劑) 주사를 맞고 약을 먹으니까 소변이 잘 나와 약간 차도(差度)가 있는 것 같았다. 장모님은 4주일 만에 부산으로 내려가셨다. 더 계시기를 원했으나 막내 외삼촌이 ROTC 훈련을 마치고 귀가하기 때문에 가야한다고 하셨다. 역까지 배웅해 드렸는데 여간 죄송하지 않았다. 보기 드문 삼복(三伏) 더위 속에서 산모와 아기 시중을 들어주셨는데, 선물은커녕 여비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 큰돈은 아파트에 묻혀있고, 오히려 돈을 빌려 쓴 터였으므로 사정을 짐작 하셨겠지만, 참으로 서운해 할 법한 일이었다. 막내 처남 2학기 등록금도 보태주어야 할 형편인데, 어서 아파트 문제만 해결되기를 바랄 수박에 없었다.
4. 은혜로운 보배
학교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딸이니까 이번에는 이름 짓는 특권(特權)을 주겠노라고 했더니 생각해 본 일이 없으려니와 못 하겠다는 것이다. 낙서(落書)하듯 여러 이름을 써보았다. ‘恩’자는 꼭 넣고 싶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셨기 때문이다. 떠오르는 글자 20여 개를 써보았는데, 보배 진(珍) 자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작은오빠 大珍이와 끝 글자가 같아서 더욱 그랬다. 그래서 결정된 것이 ‘은혜로운 보배’인 ‘恩珍’이 되었다. 7월20일 학교에서 좀 일찍 나와 관악(冠岳)구청으로 갔다. 출생 신고 3통을 써서 제출했다. 접수(接受)한 계원(係員)이
“꼭 알맞게 낳으셨네요.”
하고 생긋 웃었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것이 요즘 표어(標語)인데 알맞다니... 어떻든 기분이 좋았다. 일주일쯤 후에 와서 초본(抄本)을 떼어보고, 동사무소에 제출하여 주민등록부에 올리라고 안내해 주었다.
‘은진. 은혜로운 보배’
이렇게 외우면서 구청을 나왔다. 그리고 우리 은진이를 위해서 기도했다. 봉천 네거리를 지나오면서 버스 매표소(賣票所)에 이르렀다. 마치 주택복권(住宅福券)을 팔고 있었다. 갑자기 복권을 한 장 사고 싶었다. 은진이가 복이 있으면 당첨(當籤)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무렇게나 한 장 뽑아들었는데, 0000079였다. 은진이 생일이 7월 9일인데 좋아 보였다.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큰오빠 출산할 무렵 돼지꿈을 꾸고 주택복권을 샀던 일이 있었으니 두 번째였나 보다. '恩珍'이로 출생 신고를 했다고 했더니, 아내도 무방하다고 했다. 그동안 제각기 하나씩 지어 부르다가 이제 하나로 통일해서 불렀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방송통신대학 2학년 1학기 출석수업(出席授業)이 있었다. 서초동 교육
대학에 가서 첫날 강의를 받았다. 나는 1반으로 편입(編入)되었다. 또 청일점(靑一點)이었다. 딸 또래 학생들과 함께 땀나는 공부가 시작되었다. 점심 시간에 우연히 서울신문을 보았는데 마침 주택복권 당첨 결과가 발표되었다. 나는 4등 3,000원이었다. 아쉽긴 해도 뜻밖이었다. ‘우리 은진이가 복이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기념품(紀念品)을 하나 살까 했으나 얼른 생각나는 게 없었다. 시장을 지나오면서 탐스럽게 보인 복숭아가 눈에 띄어 얼른 1,000원어치 사왔다. 좀처럼 사들고 다닌 일이 없는 나인데...아내도 뜻밖의 표정이었다. 자초지종(自初至終) 이야기했더니 모두들 웃었다. 우리 은진이 덕분에 복숭아를 맛있게 먹었다. 남은 2,000원은 출석 강의 받는데 필요한 여러 경비로 썼으니, 은진이 덕분에 한 학기 공부를 마친 셈이었다.
찜통 더위! 참 힘들었다. 반년 만에 다시 만난 동급생(同級生) 처녀들은 나더러 더 여위어 보인다고 하면서, 왜 강의만 끝나면 도망치 듯 빠져나가느냐고 했다. 늦동이 딸을 낳았다고 했더니 킬킬대면서 믿으려 하지 않았다. 자연과 강습을 받으러 온 사범 동창 오(吳)지수를 23년 만에 만났다. 잠깐 다방에 들러서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아이들 이야기가 나와, 그는 큰애가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 막내딸을 낳았다고 했더니 놀래면서 어떻게 기르고 가르칠 것이냐고 걱정을 하는 것이다. ‘공중에 나는 새도 농사짓지 않아도 먹여주시고, 들에 핀 백합화도 길쌈을 하지 않아도 입혀주시거늘...’ 성경 말씀을 대었더니 나더러 낙천적(樂天的)이라면서 웃었다. 2차 시험을 끝으로 10일간의 출석 수업을 마쳤다. 가장 공부를 안 하고 못했던 학기(學期)였다.
2학기 개학을 하니까 은진을 낳은지 벌써 1개월. 사람과 눈을 마주치면 옹알옹알했다. 당산(堂山)동 은진이 작은아버지가 왔는데, 자랑이라도 하듯이 더 재롱을 피웠다. 그네를 사주라고 10,000원을 내놓고 가서 4,000원짜리를 샀다. 유난히 까맣고 긴 머리카락이 두더지처럼 윤기가 났다. 클수록 작은오빠 어렸을 때 모습을 닮은 것 같았다. 어찌 보면 외할머니 닮은 것도 같고.
5. 씨 없는 수박
8월 29일. 학교에서 일찍 나왔다. 관악구청 안에 있는 보건소(保健所) 가족계획(家族計劃) 상담실(相談室)을 찾아갔다. 정관(精管) 수술에 관한 절차(節次)를 밟아, 곧 신림 네거리에 있는 지정 ‘개동외과’로 갔다. 대기실에서 두어 시간 기다렸다. 주의 사항 카드(card)를 읽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저 상식적인 말이었다. 수술대(手術臺) 위에 올라가니까 의사는 아이가 몇이냐고 물었다. 2남 1녀라고 했더니 알맞게 낳았다는 것이다.
“저 같은 40대 남자들도 더러 옵니까?”
하고 물었더니 50대도 많고 60대도 가끔 있다는 것이다. 난 웃음이 나왔다. 고환(睾丸?)에다 마취(痲醉) 주사를 놓은 후 메스(mes 네)를 댄 모양이었다. 난 지그시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기도와 찬송을 하였다. 수술이 끝나고 옷을 입었을 때가 6시. 그러니까 들어가서 나오기까지 1시간 좀 되었나 보다. 지어주는 약과 약방에서 산 약을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아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진이를 안아주는데 발로 차는 것이 딱 질색이었다. 불편해 할 때 아내는 치질(痔疾)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리라. 한밤중 소변을 볼 때 피가 한 줄기 주르륵 흐르는 정도 외에는 별 이상 없이 경과가 좋았다. 사흘 후에 실을 뽑았다. 사례로 1,000원어치 양말을 사드리고 나왔다. 그 후 1주일 동안 물도 묻히지 않고 먼 길을 걷는데 약 간 불편했다. 그런대로 견디었다.
‘ 이 나이에 얼마나 성생활을 하겠다고...’
하면서 정관(精管) 수술을 일소(一笑)에 붙였던 내가 중대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예닐곱 살 때 병원에서 손등의 1cm 정도의 살을 짼 수술 이후 처음이었으니까 두 번 째인 셈이다. 좀처럼 (注射)도 안 맞고 약도 안 먹는 성미인데, 이번에는 어렵지 않게 병원 문을 두드렸다. 남들처럼 복강(腹腔) 수술을 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수술이라면 죽는 것으로 꺼려하는 아내가 몹시 걱정을 해온 터인데, 내가 정관 수술을 했다는 것은 그에게는 하나의 복음이었을 것이다. 2주일이 지난 후에야 넌지시 이야기를 꺼내었는데 농담(弄談)으로 여기었다. 약 봉지를 내보여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접근(接近)하기 위한 술책(術策) 정도로만 아는 듯 했다. 큰 흉터나 보여주어야 믿을지...
“어떻게 그런 용기가 있었어요?”
한참 후에야 진실을 안 아내는 사전(事前) 의논도 없이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난 원래 큰 일 일수록 아무도 몰래 조용히 하는 사람이 아니냐고 했다. 이렇게 해서 씨 없는 수박이 된 것이다. 학교 동료들에게 난 고자(鼓子) 수술을 했노라니까 대단한 결단(決斷)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난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이다. 몸과 마음이 홀가분한 게 날아갈 것 같았다.
1978년 8월 13일. 이마가 벗어지도록 뙤약볕이 내리쬐었다. 우리는 은진을 데리고 전철(電鐵)을 탔다. 은진은 처음 바깥나들이인 것이다. 1년 전 사놓은 부천시 원미동 원미아파트에 갔다. 반포 아파트를 사기 위해서는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6. 그 무렵
그 동안 9월 8일에는 당산동 아우도 첫 딸 지현(智賢)이를 낳았으며, 은진이가 처음 교회에 출석하여 감사 헌금도 내었다. 은진은 만 두 달이 되니까 뒤집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뒤집었다. 작은오빠보다 2주일 빠른 셈이다. 그리고 성모병원에 가서 D.P.T.와 소아마비 예방 접종도 했다.
10월 8일. 충남 홍성(洪城)에서 강도(强度) 5의 지진(地震)이 발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40여 년 만에 처음 있는 강진(强震)이라 했다. 큰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많은 재산 피해를 내었으며, 한국도 결코 지진의 안전지대(安全地帶)가 아니라고 신문이 연일(連日) 떠들었다.
이튿날은 한글날 공휴일. 우리 교회 제2장년회에서 광릉으로 야외 예배를 가는 날이다. 나는 일찍부터 게임(game) 준비물을 챙기고, 어린이들에게 줄 상품을 준비했다. 10시가 좀 지나서 버스가 출발했다. 우리 교회 버스는 처음 타본 것이다. 80여명의 인원에 짐까지 싣고 보니 대단히 비좁았다. 더구나 金장로 가족과 崔권사 가족이 서대문에서 또 탔기 때문에 버스가 서울을 일주한 셈이 되었다. 두 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나니까 퍽 지루했으며, 은진이가 걱정스러웠다. 안 데리고 갈까 했으나 아내는 빠질 수 없다고 해서 갔는데, 다행히 칭얼대지 않았다. 교섭(交涉)을 해서 임업시험장(林業試驗場) 안으로 들어갔다. 예보대로 비가 오기 시작했다. 얼굴들마다 먹구름이 덮였다. 하는 수 없이 아내는 버스 안에 남았으며, 다른 부인들은 점심을 준비했다. 나는 방 하나를 얻어 아이들을 모았더니 37 명이었다. 우선 떡을 먹이고, 나서 점심을 먹였다. 그러고 나서 나도 점심을 먹었는데 참 맛있었다. 여러 가지 의견들이 많았으나 방 하나를 치우고 모든 회원들이 모였다. 6줄씩 앉히고 보니까 꽉 찼다. 鄭회장 사회로 예배를 시작했는데 具장로의 기도와 金장로의 설교로 진행되었다. 광고 시간에 수고한 몇몇 사람들에게 박수를 쳐주었으나 나에게는 없었다.
“마흔이 넘어 아기를 낳은 기술자에겐 박수(拍手)가 없어요?”
하고 멍청한 듯 둘레를 둘러보았더니, 갑자기 폭소(爆笑)가 터졌다. 그 동안 흐렸던 얼굴들이 맑게 개었다. 맨 뒤에 은진이를 안고 예배를 드리던 아내가 겸연쩍은 듯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렇잖아도 아기를 안고 따라온 것이 후회되었는데...그 때 구름이 걷히는 것이 창 너머로 보였다. 모두들 잔디밭으로 뛰어나갔다. 기념사진을 몇 장 찍은 뒤에 내 지휘로 게임을 벌였다. 남녀 각각 청백(靑白)으로 나누었다. 남자는 공 이고 달리기. 줄넘기 등 여자들 놀이를 시키고, 여자는 공 차고 달리기, 2인3각 등 남자들 놀이를 시켰더니 그 표정들이 어찌나 우스운지...아이들 게임도 준비했지만 늦어서 하지 못하고 버스를 탔다. 벌써 5시였다. 찬송가, 유행가, 동요들이 뒤섞여 버스 안이 떠들썩했다. 은진이는 아내와 나와 이집사님이 번갈아 안아주었더니 별로 칭얼거리지 않았다.
흑석동 도착이 7시. 껌껌했다. 회장 댁에서 저녁을 드는데 그 때 은진이가 떼를 썼다. 그래서 곧 집으로 왔는데, 고단했던지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계속해서 15일 주일에는 유,초등부가 과천으로 16일에는 유치부가 헌인릉으로 야외 예배를 가게 되어 바빴다. 그런데 당산동 어머니가 위독(危篤)하다는 전화가 왔다. 증세(症勢)를 듣고 나니까 식중독(食中毒) 같았다. 곧 가보니까 물조차 토하는 것이다. 하룻밤 경과를 보며 간호를 하고, 이튿날 가까운 병원에서 왕진(往診)한 결과 역시 식중독(食中毒)이었다. 링거 주사를 맞는데 어머니는 꼭 죽을 것 같다고 하셨다. 나는 기도하면서, 어머니께서 아직 사명(使命)이 있는 한, 더 오래 사실 것이라고 위안하며 격려하였다. 증세는 조금씩 차도(差度)가 있었으나 노환(老患)이라 회복이 더디고, 모든 가족들이 침울(沈鬱)한 가운데 은진이의 백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8. 백 일
“모두들 은진이 백일잔치를 벼르고 있는데 어떻거죠?”
아내는 가끔 내 뜻을 떠보았다. 그 때마다 나는 한 말로 하지 말자고 했다. 백일이다. 돌이다 그러니까 가야하고, 빈손으로 갈 수 없으니까 마음에 짐이 된다. 이런 도식(圖式)은 싫다. 손님을 청하는 쪽이나 초대받은 쪽 모두가 기쁘고 흐뭇해야지 조금이라도 짐이 된다거나, 잔치 끝나고 말들이 있다면 아니한 것만 못하다. 더구나 잔치한답시고 사람들이 북적대며 손님 접대(接待)에 신경 쓰다보면, 막상 주인공은 소홀하기 쉬운 게 십상이다. 얼굴엔 콧물을 바르고 기저귀는 제대로 갈아지지 않는 채 누구에 의해서 밖으로 업혀나가 있기가 쉽고, 마침내는 아프게 마련이며...
돌 같으면 몰라도, 그저 가족끼리 조촐하게 예배드리고, 사진이나 찍으며, 몇 가지 별식(別食)을 만들어 먹으면 된다는 것이 나의 평소 생각이다. 그래서 두 오빠들도 백일 잔치를 안하고 지나갔다.
“막내 외동딸인데...”
하는 아내의 아쉬워하는 마음을 짐작하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백일을 맞았다. 여느 때와 똑같이 서둘러서 출근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소풍을 가게 되어, 케익 두 상자가 들어왔는데, 그대로 보관했다가 토요일이나 주일날 가족끼리만 간단하게 축하 예배드리기로 마음먹었다. 부산 외할머니께 편지를 올렸다.
그런데 은진이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콧물에 기침기가 있었다. 며칠 전 병원에서 D.P.T 2차 접종을 하고 온 후로 열이 있고 좀 보채었다. 감기약을 먹인 탓인지 설사도 하기 시작했다. 남대문 시장에 가서 예쁜 옷이나 사 입힌다는 계획도 어긋난 채 토요일이 되었다. 속회를 보고 와서 아내와 몇 가지 과일과 우유 야구르트(yaghurt)를 사왔다. 케익(cake)을 자르고, 과일을 깎아서 차려놓고 예배를 드렸다. ‘예수님 찬양’ 노래에다가 은진이 백일 축하 내용으로 가사를 바꾸어 불렀다. 케스터네츠(castanets)도 치면서 흥겹게 부르니까, 함께 옹알거리던 은진이도 영문몰라한 표정이었다. 큰오빠가 창세기 21:8과 누가복음2:50을 읽고, 아빠가 기도를 했다. 은혜로 주신 선물, 튼튼하고 슬기롭고 바르게 자라도록 기원하였으며, 3남매가 기쁠 때 함께 기뻐하고, 어려운 일 있을 때 서로 도우며, 슬플 때 서로 위로하면서 의좋게 자라라고 기원했다. 엄마 아빠가 축가(祝歌)도 불렀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녹음(錄音)해두었다. 오빠들은 싫건 케익을 먹어서 이젠 조르지 않게 되었다.
주일이 되어 설사가 좀 멎은 듯 했으나 다시 푸른 변을 싸기 시작했다. 젖을 안 먹이고, 약을 먹인 탓인지 포동포동했던 살이 빠지고 기운이 없었다. 그나마 쓸만한 백일 옷을 사자면 남대문 시장 대도까지 나가야 하는데, 아내는 거기까지 갈 새가 없다고 한숨이었다. 하는 수 없이 백일 사진 찍는 일은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