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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와 며느리

장년시절

by 최연수

1. 고부간의 갈등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부모님께 순종(順從)하는 편이었다. 효도(孝道)라 하기보다는 내 천성(天性)이 유순(柔順)하였으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6.25와 같은 엄청난 환란(患亂)을 생각하면서 옥신각신 안 하자는 것이었다. 더구나 40대에 홀로 되신 후 10년 간 어려운 살림을 꾸려 오시느라고 고생하신 어머니요, 더구나 맏아들로서의 나의 위치가 더욱 그러했다. 그리하여 배우자(配偶者)의 선택권도 어머니께 우선적(優先的)으로 주어졌으며, 결혼한 후에도 몇 년간은 살림을 도맡아 하셨다. 대진을 낳을 때까지만 해도 고부간(姑婦間)의 갈등은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대진을 낳고 집을 사는 과정에서부터 그 갈등이 점차 노골화(露骨化)되었는데, 한 마디로 살림의 주도권(主導權)이 며느리에게 이양(移讓)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동안 어려운 살림을 꾸려 오신 어머니의 공도 컸지만, 한편으로는 실수도 있었다. 복직(復職)한 이후 6년 동안, 피가 마르고 뼈를 깎으며 과외지도로 벌어서 모은 돈들을 몽땅 날렸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묵인(黙認) 아래 이자(利子) 놀이를 하고 계(契)를 해서 명목상(名目上)으로는 수입(收入)이 눈 덩이처럼 불어나, 좋은 집도 거뜬히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는 꿈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그런데 이 모든 꿈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은 대단한 충격(衝擊)이었다. 사람들을 믿고 증서(證書) 하나 없이 그들 사기꾼들의 아가리에 고스란히 집어넣은 결과가 되었으니 참으로 눈앞이 컴컴하였다. 해결(解決)의 실마리가 전혀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젠 어머니는 회갑(回甲)이 되셨고,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된 아내도 주부(主婦)로서의 위치(位置)를 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있어, 서서(徐徐)히 살림을 맡기다가 완전히 옮겨짐과 동시에 시어머니로서의 주장(主張)과 간섭(干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더구나 막내 삼촌의 대학 문제가 뜻대로 되지 않고, 집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돈의 행방(行方)들을 자상(仔詳)하게 밝히지 않는데 대해서 색안경(色眼鏡)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몇 마디로 말하자면 며느리는 시어머니께 고분고분하지 않고, 살림을 알뜰하게 잘 못하여 낭비(浪費)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장가가더니 마누라에게 쥐어 살면서, 어머니와 동생에게 소홀(疏忽)히 한다는 것이다. ‘내 아들, 똥 한 덩이까지도 배릴 데가 없다’며 입버릇처럼 칭찬하던 어머니께서 변한 것인지, 정말 내가 변한 것인지.....하기야 장가가서 또 하나의 가정이 이루어지면 거기 걸맞게 새로운 질서로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게 내 생각일진데 변했을 법도 한다. 다만 이러한 말이야 흔히 들어온 이야기라고 흘러버려야 하거늘, 돈의 행방을 비밀(秘密)에 붙여 어머니를 속인다는 말은 견딜 수 없었다. 내 한 평생 어머니께 거짓말하고, 돈 때문에 양심(良心)을 속여 본 일이 없는데 이건 억설(臆說)이었다. 더구나 친정(親庭)으로 빼돌리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疑心)은 아내에게는 억울(抑鬱)하기 짝이 없는 폭언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무슨 행사처럼 트집을 잡고, 과거의 사소한 일을 되씹으면서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았으니, 한창 자라는 어린애들에게 어떤 상처(傷處)를 입혔을까? 아무리 해명(解明)을 해도 귀를 꼭 막고 몰아붙이는데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남들 같이 수완(手腕)이 좋아서, 어머니 앞에서는 며느리를 호통치고, 아내 앞에서는 어머니를 흉보며 달래면 그런대로 무난(無難)하게 넘어갔을지 모르나, 내 천성이 그렇게 간사(奸詐)스럽지 못할 뿐더러, 입은 삐뚤어졌어도 피리만은 바로 불려고 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내 나름대로 공정(公正)하게 시비(是非)만은 가려보려는 내 고지식함 때문에, 문제가 풀리기는커녕 더 꼬였는지도 모른다. 큰 빚은 졌지만 새 집을 장만해서 알뜰살뜰 살려고 하는 마당에, 특히 하나님 은혜 감사해서 심신(心身)을 다 바쳐 헌신(獻身)하는 마당에 참으로 착잡(錯雜)했다. 박힌 못은 빼어내도 자국은 남는 법인데.....이를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나는 이 때 흔들림이 없는 두 가지 지주(支柱)를 세웠다. 첫째는 부부(夫婦)간의 갈등(葛藤)이라면 몰라도 고부간(姑婦間)의 갈등으로 인해서, 파경(破鏡)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둘째는 마마보이처럼 어머니께 맹종(盲從)함으로 인해서 부부간의 갈등을 자초(自招)하여 가정을 파괴(破壞)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얼마나 나약(懦弱)하고 왜소(矮小)하며, 얼마나 무능 무력한가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결혼에 대한 후회(後悔)와 심지어 생(生)에 대한 회의(懷疑)까지도 해보았다. 뱃속에 주먹만한 응어리가 단단하게 손에 잡히고 소화(消化)가 되지 않았다. 체중은 점차 줄어 45Kg가 채 되지 않았다. 암(癌)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 당시 아우는 의정부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신접(新接) 살림이 넉넉할 리가 없었다. 어머니를 모시라는 것보다는, 나의 처지(處地)와 고민(苦悶)을 호소(呼訴)할 데는 아우 밖에 없었다. 입술을 깨물면서 붓 가는대로 편지를 썼다. 직언(直言)을 할 수 없어서 은유(隱喩)로 썼다. 그러나 막상 아우에게 부치려고 하니까, 받아 읽는 아우의 한숨과 눈물로 얼룩진 모습이 어른거렸다. 만약 그대로 부쳤다면 그 파장(波長)이 엄청났을 것이며, 그 오점(汚點)은 아마 어떤 세제(洗劑)로도 평생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 두 마리의 쥐를 발견했다. 한 구석으로 몰았다. 단번에 붙잡을 수 있지만 장난을 하고 싶어졌다. 쥐끼리 싸움을 붙이면 재미있는 구경도 하고, 마침내는 스스로 죽고 죽일 테니 가만히 앉아서 요기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쥐들은 구멍을 찾았다. 아무리 훑어보아도 달아날 수 있는 구멍이라곤 없다. 고양이는 가끔 쥐들을 건드려본다. 싸움을 붙여본다. 그러나 쥐들은 달아나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 할 뿐, 둘이서 싸울 생각은 없다. 오히려 눈길과 눈길로 꼭 함께 살아야 한다는 뜻을 주고받는다.

답답한 고양이는 으름장을 놓아본다. 쥐들은 생명의 위협을 더 가깝게 느끼면서, 그럴수록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된다. 나는 죽더라도 너만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서로 하게 된다. 한 마리의 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고양이와 맞서 싸워볼까 하기도 해봤다. 다른 한 마리가 잡혀 먹히기보다는 스스로 죽여 버릴까 하는 생각조차 해봤다.

이러는 사이에 고양이가 쥐를 한 바탕 할퀴었다. 쥐는 얼떨결에 고양이의 꼬리를 물었다. 피가 났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물린 고양이는 약이 바짝 올랐으나 껄껄 웃었다.

“너희들이 날 물어?”

“왜 먼저 할퀴었어요?”

“요것 봐라. 살고 싶으면 달아날 일이지 날 물어?”

“...........”

고양이는 분통을 참으면서 아니꼽다는 표정이다. 쥐들은 즉시 후회를 하였다. ‘그러나 구멍이 있어야 달아나지.’ ‘달아날 구멍이 있는 곳으로 몰고 쫓아야지 그럴 수 있단 밀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숨을 죽이고 있다.

고양이는 털 하나라도 뽑힐 수 없는 것인데, 꼬리를 물린 것을 바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양이는 고양이지 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쥐들은 고양이에게 용서를 빈다는 것이 부질없다고 생각한다. 또 고양이와 맞붙어 싸운다는 것은 더욱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어떻게 해서라도 달아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고양이가 졸거나 한눈을 팔기를 기다려본다. 쥐구멍은커녕 바늘구멍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구나.

지금 읽으니 더욱 측은하고 부끄럽다. 효도(孝道)란 무엇인가? 효자라고 알려진 내가 불효자(不孝子)라고 낙인(烙印) 찍혔으니 효와 불효의 차이는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나는 효(孝)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도 떠나셨고 나도 늙어서 시아버지가 되고 손자들도 보았는데, 지금 와 돌이켜보니 다 헛되고 헛된 것들인데. 지금만 같았으면 그런 우매(愚昧)함과 경솔(輕率)함이 없었을텐데.... ‘며느리 늙은 것 시어머니다’는 말은, 고된 시집살이 한 며느리가 더 시집살이 시킨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그 때 우리는 그런 부질없는 갈등으로 짧은 인생을 소진(消盡)하지 않는 시부모가 되겠노라고 다짐을 단단히 하였다.

2. 어머니의 회갑잔치

그 동안 옥신각신 다툼은 잦았으나, 자식(子息) 된 도리(道理)는 해야 하는 것이고, 또 그럼으로써 쓰라렸던 상처(傷處)들이 아물 수 있으리라는 기대(期待)를 안고, 정성껏 어머니의 회갑 잔치를 하기로 하였다. 10월 7일 그 동안 회갑연(回甲宴) 몫으로 들었던 적금 100,000원을 찾았다. 10월 8일 부산 장모님이 오시고, 강진에서 숙부님과 사촌 누이 금희도 왔다.

10월 9일은 갑자기 날씨가 서늘해지고, 다행히 흐리던 날씨가 개었다. 한글날이자 어머니의 회갑 날(음8월 24일)이다. 큰 잔칫상을 차리고 큰절을 하는 격식(格式)들은 생략하고, 준비한 음식을 먹으면서 어머니의 만수무강(萬壽無疆)을 기도했다.

* *

어머니는 전남 강진(康津)군 칠량(七良)면 송정(松汀)리 송촌부락의 소작농(小作農) 집에서,풍양 조씨(豊壤 趙氏)네 문중, 조동래(趙東來)와 박인순(朴仁順)을 부모로 1남3녀 중 장녀(長女)로 태어나셨다. 만 19세 때 23세인 최종민(崔鍾敏)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는데, 46세에 홀로 되시고 이어서 출가(出家)한 딸을 잃었다. 세 아들을 의지하며 꿋꿋하게 사시면서 모두 결혼을 시켰다.

벽지(僻地)에서 학교 문 앞에 가본 일이 없었으나 어깨 너머로 한글을 깨우쳤으며, 정치운동(政治運動)을 한 남편의 영향을 받아서, 정치 문제에 민감(敏感)하고 꽤 유식(有識)한 편이었다. 다만 경제적(經濟的)으로 어려워 기를 펴지 못하며 살았지만, 자존심(自尊心)이 강하고 다부지며 좀 급한 성격이었다.

50대에는 기독교에 귀의(歸依)한 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여 집사(執事)까지 되었고(’75.1.5), 73세 때(’87.7.19)는 명예권사(名譽權師)가 되셨다. 50평생 역경(逆境)과 환란 속에서 고생하다가, 아들들이 장성하고 취직하며 결혼한 이후에야 허리를 펼 수 있었다.

이 때 교회에서는 북성교회 최홍성 목사님을 모시고 가을 부흥회(復興會)가 열렸다. 낮 집회가 끝나는 대로 부흥사 점심 대접한다는 명목으로 몇몇 교인들을 초대했다. 40여명이 오셨다. 정목사님의 사회로 예배를 드렸는데, 어떻게 소문이 나서 10,000여 원의 축의금(祝儀金)이 들어와 고스란히 감사헌금으로 바쳤다.

두 외사촌 동생들도 왔으나 놀지는 못했으며, 두 이종사촌 동생들도 성경을 선물로 가져왔다. 휘경동 처형은 이불을 선사했으며, 의정부 큰 아우는 금목걸이와 20,000원을 내놓았다.

이튿날 10일에는 체육대회 지구별 예선 관계로 출장(出張)이었으나 나는 집으로 와버렸다. 낮 집회(集會)가 마음에 걸렸으나, 모처럼 먼 곳에서 오신 숙부님에 대한 예우(禮遇)로 국립묘지(國立墓地)구경을 시켜드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금희랑 대석도 데리고 동작동으로 갔다. 두 달 전 8.15 광복절 기념식전에서 저격(狙擊)당해 피살(被殺)된 대통령 영부인(令夫人) 고 육영수 여사의 묘를 마지막으로 구경하고, 산 위의 화장사(華藏寺=현 호국지장사)로 올라갔다. 그런데 칠성각(七星閣)을 기웃거리던 대석이 발을 헛디뎌 층계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큰 바위 사이로 난 가파른 층계인데, 뒷머리를 다쳐 피가 나고 볼도 긁혔다. 나는 정신없이 대석을 업고 후문으로 나와 병원으로 뛰었다. 1년 전 가을 부흥회 때 대진이 다쳤던 악몽(惡夢)이 되살아나서,

“하나님, 제 잘못을 용서해주세요.”

이 말을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병원으로 들어갔다. 진찰(診察)을 한 의사는 대단치 않으니까 안심하라고 했다. 천만 다행이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하나님의 징계(懲戒)인 줄 알고 회개하였는데, 이런 심정(心情)을 숙부님이 알랴?

4시부터는 예정대로 학교 직원들이 모여들었다. 30여명이었다. 교장. 교감선생이 먼저 큰 절을 올리고 모두들 함께 인사드렸다. 친목회 5,000, 장.감3,000, 직원 일동 20,000, 동학년 10,000 등 파격적(破格的)인 축의금도 내놓았다. 감사했다. 취기(醉氣)가 오르자 김철동선생의 사회로 여흥(餘興)이 시작되었는데, 어머니도 춤을 추시고 나도 춤을 추며 우리 내외(內外)가 노래도 불렀다. 7시 반에 끝났는데, 참으로 즐겁고 기쁜 날이었다. 잘 차렸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이 음식 장만에는 청장년회 안미영, 박만옥, 이정랑씨의 도움이 컸으며 장모님과 인삼 할머니의 수고도 컸다.

이어서 8시부터는 이웃들 10여명을 초대하여, 음식을 나눔으로서 공식적(公式的)인 잔치는 모두 끝났다.

8시 반에 부랴부랴 교회에 갔는데, 모두들 재미있는 설교에 은혜를 받고 있었으나 나는 졸음이 조류(潮流)처럼 밀려왔다. 긴장이 풀린 탓이었으리라. 난 잔치를 마치고, 어머니께 기념품 대금으로 20,000원을 드렸다. 금 서돈 정도의 패물(佩物)을 생각했으나 10여 만 원을 잔치 비용으로 쓰고 나니까 여유가 없었다. 이 북새통에 잉꼬가 가엾게도 굶어죽고, 삐꾸는 주책없이 새끼를 낳았다. 대석이가 다치고, 대진이가 병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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