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시절
상수(祥洙) 동생은 부모님 밑에서 시골 장흥(長興)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고등학교만은 시골에 둘 수 없었다. 그래서 서울로 불러와 성남(城南)고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성남은 당시 한강 이남의 경기(京畿)라고 했다. 기율(紀律)이 엄격하고 운동이나 교련(敎鍊)에 중점을 둔 스파르타(Sparta)식 교육을 했다. 그리하여 삼군(三軍) 사관학교(士官學校)의 진학률이 전국 최고였으며, 명문 대학 합격률도 높았다.
그가 와서 자취(自炊)일을 도맡아 주었으므로, 나는 6학년 아이들의 진학 지도와 나의 공부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다만 그의 학교 공부에 지장이 있어 몹시 안타까운 일이었다.
누님도 결혼하고, 동생도 서울로 데려왔으니 고향에는 어린 동생과 부모님만 남았다. 웬만하면 생계(生計) 문제로 걱정될 것은 못 되었다. 1958년 2월 27일. 고향에서 편지가 왔다. 누님과 합자(合資=36만圜)해서 세탁소(洗濯所)를 경영하는데 이미 시설(施設)이 완료되어 3,4일 후면 개업할 것이라고 했다.
‘이제 우리 집도 살 날이 오는 것일까?’
그 당시 지방에는 드라이크리닝(dry-cleaning) 세탁업(洗濯業)이 없어서 전망이 좋은 업종(業種)이었다. 마침 집 옆으로 맑은 개천이 흐르고 있어서 안성맞춤이었다. 3월 15일 농업은행(農業銀行)으로 갔다. 30만圜을 송금하였다. 이전에도 가끔씩 송금은 했지만 거금(巨金)이었다. 미관말직(微官末職)으로 취직한지 3년 만에 이런 돈을 저축한 것은, 실로 허리 띠 졸라맨 채 쓸 것 쓰지 못하고 벌어 모은 것이다. 세탁뿐만 아니라 염색(染色)과 탈색(脫色)도 겸해서 온 식구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며, 영업이 낙관적(樂觀的)이라는 소식이 전해왔다. 이제는 집안 걱정 안하고 마음대로 공부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뜻밖의 비보(悲報)가 날아왔다. 개업한지 100일 만에 세탁소에 화재가 나서 우리 집이 전소(全燒)했다는 것이다. 종업원(從業員)인 김현중씨가 술에 취한 채 휘발성(揮發性) 솔벤트(Solvent)를 잘 못 취급해서 일어난 실화(失火) 사건으로 신문에도 보도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집은 물론 연이어진 이웃집들도 연소(延燒)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소방대가 출동(出動)했으나 기계가 작동(作動)하지 않는 채 손도 써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낮에 일어났으니 망정이지 한밤중에 일어났다면 생명도 잃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망연자실(茫然自失)!
곧 달려가야 했으나 8월에 있을 첫 고시(考試)를 앞두고 그야말로 건너 마을 불 구경만 하였을 뿐이다. ‘피안(彼岸)의 화재(火災)’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당장 가족들은 어디서 어떻게 거처(居處)한다는 말인가? 위로의 편지를 낸들 어디로 주소(住所)를 쓴다는 말인가? 참으로 착잡(錯雜)했다. 이어서 날아온 소식은 참으로 비극(悲劇) 그대로였다. 가산(家産)을 잃은 이웃집들은 매일 같이 욕설(辱說)과 폭행(暴行)으로 윽박지르고, 이에 분통(憤痛)한 아버지는 음독(飮毒)을 했다가 친구들에 의해 구출(救出)했다는 이야기였다. 응시원서를 내놓고 이 무슨 *불카누스 신(Vulcan)의 장난인가?
여.순(麗.順) 반란사건 직후에는 공비(共匪)들의 방화(放火)로 가산(家産)이 전소되었고, 생명만 간신히 구한 6.25 전쟁의 참화(慘禍) 속에서도 희망만은 잃지 않았는데, 이것은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무조건 잿더미만 남았을 그 빈터를 주소로 써서 편지를 부쳤다. 첫째는 그 수모(受侮)를 계속 당할 수 없고, 둘째는 화마(火魔)가 우리를 노리는 그 곳에서 재기(再起)할 희망이 없다는 이유였다. 아버지는 선뜻 허락을 안 하셨다. 20여 년간 고향처럼 정든 곳, 청년 운동과 정치 운동을 통해서 피로 맺어진 동지(同志)들과 차마 헤어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한창 고시 공부를 하고 있을 아들에게 부담(負擔)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었으리라.
아무튼 여러 번 권유(勸誘)한 끝에, 고시를 열흘 앞둔 8월 7일 온 가족이 눈물의 상경(上京)을 하였다. 우리의 자취방에 걸인(乞人)이 된 채로. 공부보다는 실의(失意)에 빠진 부모님을 위로하고, 피로에 지친 심신(心身)을 회복시켜드리는 일이 급선무(急先務)였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첫 고시를 본 것이다.
10월 24일 아버지는 노량진 본동(本洞) 시장 안에다가 식료품(食料品) 가게를 내었다. 큰 자본이 들지 않고, 투기(投機) 아닌 비교적 안정된 업종(業種)이라고 생각해서 시작을 한 것이다. 이 때부터 다시 분가(分家)되어 우리는 자취로 돌아갔다. 첫날 매상은 1,600환(圜)에 순이익이 200환. 어처구니없었다. 1주일이 지났어도 전망이 흐렸다. 아버지는 30만환만 차용(借用)해서 세탁업을 다시 해보고 싶다 했지만, 그 많은 돈을 어디서 빌릴 수도 없으려니와, 나는 영업에 관심이 없었다.
이 무렵 아버지께 폭행을 한 윤이하(尹二夏)씨는 우리를 상대로 손해배상(損害賠償) 청구 소송(訴訟)을 제기하였다. 종업원 김씨, 합자한 자형(姉兄), 아버지를 공동 피고(被告)로 해서 제소(提訴)한 것인데, 물론 尹의 교활(狡猾)한 표적(標的)은 자형(姊兄)의 전답(田畓)이었다.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재판이 있을 때마다 고향을 왕래하였다. 우리는 자형과 합자한 사실이 없으므로 자형은 피고가 될 수 없으며, 종업원의 행위는 중과실(重過失)이 아니며, 원고는 화재보험금(火災保險金)을 받았으므로 실질적인 손해가 없다고 항변(抗辯)하였다. 판사는 화해(和解)를 종용(慫慂)했으나 팽팽하게 맞선 재판은 계속 열렸다. 결국 고등법원까지 공소(控訴)하여 일부 승소(勝訴), 일부 패소(敗訴)의 판결을 받아, 잿더미밖에 남지 않은 우리는 줄 것도 빼앗길 것도 없었지만, 자형은 전답 일부를 빼앗겼다.
이듬해 1월 3일, 가게를 우리 숙소(宿所) 옆 신길(新吉)동으로 옮겼다. 시장 안에서는 적은 자본으로 경쟁(競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패배감(敗北感)에 사로잡힌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으며, 나도 우울할 대로 우울(憂鬱)했다. 그런데 외상이 문제였다. 상경(上京)한 전라도 출신들이 꽤 살았는데 외상일 때는 우리 가게로 오고, 현금(現金)일 때는 이웃집 가게 (이북 출신)로 간 것이 아닌가? 참으로 간사(奸邪)하고 치사(恥事)한 사람들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홉 달 만에 가게 문을 닫았다.
* 불카누스(Vulcan)...그리스 신화에서 대장간의 불을 관장하는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