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머리

새우타령

by 최연수

첫선 본 날이 엊그제 白露(백로)인데

벌써 머리에 서리가 희끗거린다니,

아직 장가들지도 않았는데

검은 머리가 파 뿌리 되었다니...


뒷머리를 긁적이는 나에게

거울이 물었다.


“흰 댕기를 땋아내린 白鷺(백로)가

우아하다 하지 않았나?

白雪(백설)이 쌓인 白頭山(백두산)이

장엄하다 하지 않았나?”


머쓱해진 나에게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


“여보게, 남들은 돈 들여서

노랑·검정 머리 물들인데,

자넨 거저 흰 물감 들였는데 뭘...”


고개 끄덕이며 하늘 쳐다보는 나에게

속삭이는 말씀.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늙은이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




백세 시대라고 한다. 이렇게 고령화 시대가 되었다는데 백발 노인들 보기가 힘들다. 홍안백발(紅顔白髮)은 간혹 보이지만, 모두들 검정 염색 을 했거나, 심지어 가발까지 쓰기도 한다. 오는 세월 막지는 못하지만 늙기가 싫고 젊음으로 돌아가고픈 심정 난들 없으랴. 한창 젊은 나이에 새치가 나는게 여간 귀찮지 않았다. 보이는대로 부지런히 뽑았다. 한 개 뽑은 자리에서 두 개가 난다고들 했으나, 세 개가 나더라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머리에 서리가 내렸다는 둥 살구꽃이 피었다는 둥, 젊은 나이에 딱하다는 표정들이 언짢았다.

인생 지각생인 나는 서른이 훨씬 지나서 선을 보기 시작했다. 남들은 꽃 피는 양춘가절(陽春佳節)에 이미 스윗 홈을 꾸렸지만, 나는 인생 가을 철 문턱, 그러니까 첫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白露)에야 혼담이 오갔다. 늦깎이 노총각이 결혼할 때는 이미 머릿속에 새치 아닌 흰 머리가 슬며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검은 머리 파 뿌리 되도록 백년해로(百年偕老)하라고 축사와 덕담을 해 주었는데, 얼마나 머쓱했으랴.

아들 결혼식 때는 검게 염색을 해보았다. 얼굴 주름살은 다리미질할 수 없어도, 머리만은 젊은 티를 내고 싶었다. 그러나 혼줄이 났다. 염색약 알레르기 때문인지 대머리가 안된게 다행이었다. 그 후 백발의 텃세에 검은 머리가 끼어들지 못했다. 100세 나이로 태어났는데, 나이를 먹으니 줄어들어 지금 이 나이가 되었노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하고, 백발로 태어났는데 점점 검은 머리가 나더라고 우스갯소리로 얼버무리기도 하였다.

거울이 백로(白鷺)가 우아하고 백두산(白頭山)이 장엄하다 했던 옛날을 생각해보라 하였다. 최연소(最年少)라는 별명을 좋아하지 않느냐고도 했다. 그래서 변명을 생각했다. 비싼 돈 들여 노랑·검정 머리 엽색을 하는데, 나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의롭다 여긴 것처럼, 값없이 희게 염색 을 해줬지 않았느냐며, 일부러 어깨를 으쓱거린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 관이라.(잠16:31) 늙은이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잠22:29)를 외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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