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쉬고 생각하고
보라매! 그 해에 난 새끼를 길들여 곧 사냥에 쓰는 ‘매’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이 보라매가 공군사관학교를 상징하는 새란다.
한여름 지리한 장마철. 반짝 햇빛이 나서 지하철 7호선 보라매역에서 내렸다. 300여m 걸어서 서문 인공폭포 앞에 도착. 중앙에 느티나무, 양쪽으로 은행나무가 줄지어선 시원한 길을 따라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에 오면 의례 귓가에 맴도는 ‘빨간 마후라’ 노래가 절로 나온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구름 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
아가씨야 내 마음 믿지 말아라/ 번개처럼 지나가는 청춘이란다....
60년대 어린애들 까지도 입만 벌리면 즐겨 부르던 말하자면 국민가요였으니까. 4 명의 인기 남성중창단 쟈니 부라더스가 불러 히트한 노래였다. 이어서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신상옥 감독의 영화로도 최고의 히트 상품이 되었지. 지금도 공군 군악대나 공군 관계의 행사에는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노래가 아닌가?
’58년 진해에서 올라와 ’85년 청원으로 옮겨갈 때까지의 공군사관학교 대방동 켐퍼스였는데, 그 터에 ’86년 보라매공원을 조성한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 공군의 역사와 공군사관학교 켐퍼스를 보여주는 조형물과 사진을 전시해 두었다. 흰 V자 모양의 성무대에서 방향을 꺾으면 관리사무소. 그 앞 넓은 에어파크에는 8 대의 각종 비행기가 전시되어 있어,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만져보곤 한다. 중앙바닥분수에서 시원스레 쏘아대는 물 기관총과 맞싸우는 어린이들이 귀엽다. 옛 사열대 위에 서있으니 넓게 펼쳐진 보람중앙 잔디광장에 속이 탁 트인다. 안쪽 잔디밭에서는 땅이 좁아라 하며 맘껏 뛰어노는 어린이 나라이고, 바깥쪽 트랙에는 조킹하는 젊은이들의 세계이다. ‘청소년은 새 시대의 주역이다....’로 시작되는 청소년 헌장비가 무색하지 않도록 보라매청소년수련관 시설이 잘 정비되어 있고, 여기저기 마련되어 있는 운동장과 체육 시설들이 청소년들의 보금자리를 이루고 있어 참으로 가슴 흐뭇하다.
순국열사 김마리아선생상 앞에서 걸음을 잠깐 멈추었다가, 보라매가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충효 호국비천상을 지나 동문에 이르렀다. 포플라가 하늘을 찌르며 늘어서있는 길 앞으로 농촌 체험장. 과수원과 논․밭에 벼를 비롯한 여러 작물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어, 아닌게아니라 도시 속의 농촌이다. 남쪽 널따란 연못으로. 20m가 넘는 왕버들이 특이한 모습으로 연못가의 능수버들을 사열하고 있다. 싱그럽게 자라고 있는 연잎 사이로 잉어들이 보라매가 되어 물속을 나는데, 시원하게 춤추는 음악분수와 장기판을 바라보는 노인네들의 얼굴엔 시간이 멈춰있다. 바둑 두는 신선들을 넋을 잃고 구경하느라고,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이 나왔다던가? 이곳 노인들도 3000년만에 한 번 베푼다는 곤륜산 불멸의 여신 서왕모의 잔치에 초대받아 온 신선들 같다. 나 또한 이 잔치에서 천도 복숭아 같은 불사약 얻어먹고 불로장생하려다가,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었지. 해가 설핏해서 화다닥 일어나 가을에 다시 오기로.
늦가을. 예정대로 다시 왔다. 이번에는 지하철 2호선 신대방역에서 내려 남문 쪽으로. 도림천을 따라 M학교를 지났다. 60년대 초 근무했던 곳. 그 땐 개천이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가 되어, 우리는 이 변두리를 서울보통시라고 하였다. 이 길을 지나면 쓴 웃음이 나오는 깊은 사연이 있지. 울타리도 없는 미니 학교에서 숙직이 잦았다. 도둑이 극성을 피워, 학교로 들어오는 전선․운동장 철봉․현관의 종, 심지어 급식용 분유․교무실 라디오․진열장 도서....닥치는대로 훔쳐가는 것이다. 이른바 생계형 곤궁범인데 산등성이 너머 경찰지서에 신고해도 속수무책이었다. 불려다니며 조사만 받았을 뿐, 내부 소행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할 정도.
야트막한 산등성이 너머엔 공군사관학교. 삼군사관학교 체육대회 철이 되면응원 연습하는 함성이 들리고, 산마루에 올라서면 먼 발치로 훈련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 당시 증축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밤이 깊으면 자재를 빼돌리는 개미부대가 활보했다. 시멘트․목재 등을 지게에 짊어지고 학교 운동장을 지나가는 것이다. 경찰이 이 정보를 모를 리 없었다. 이제는 80대 노인이 되어 지난 날의 아픔을 곱씹으며 지금 이 곳을 산책하지 않을까?
두 장애인종합복지관을 지나면 놀이터. 가을 소풍을 온 어린이집 아이들이 노랑 병아리 되어 즐겁게 놀고 있다. 낙엽이 진 나무들이 앙상해서 을씨년스럽지만 산책객들은 오히려 여름보다 더 붐빈다. 잔디 보호를 위해 잔디광장반쪽은 출입금지로 썰렁하고, 연못에도 물억새만 하늘거릴 뿐 음악분수대도 긴긴 동면으로 들어갔다. 팔각정 언덕의 가을 풍광만이 그나마 쓸쓸함을 덜어주었으며, 산업재해희생자위령탑이 산업 현장의 실정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씨는 자라서 하늘이 된다’는 박종웅 시인상과 시비, 한국학생건국운동공적비와 통일기원비 등 색다른 비석이 서있다. 함께 다정하게 서있는 김구선생의 ‘반탁승리’, 이승만대통령의 ‘남북통일’ 휘호 돌비가 돋보인다. 각종 운동장과 체육시설․인공암벽등반대에는 청소년들이 떠들썩하게 계절을 잊고 있었다. 옷소매로 기어드는 찬 바람이 걸음을 재촉하는군. 겨울 채비를 하는 보라매야, 내년 새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질 때 다시 창공을 날으렴.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