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쉬고 생각하고
지하철 6호선 월드컵공원역에서 내렸다. 2002년 FIFA 월드컵 대회가 열렸던 경기장이 우뚝 서서 맞이한다. 방패연을 형상화 한 경기장이라고 하였지.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짝”
지금도 그 함성이 들리는 듯 하여 귀가 먹먹하다. 붉은 악마들을 따라 시청앞 광장은 물론 동네 골목에서도 집안에서도, 온 국민이 하나 되어 열광하지 않았던가? 기뻐 뛰던 그 장면들을 떠올리며, 먼저 북쪽 매봉산으로. 첫 발걸음이다. 울창한 녹음 속에 옛 모습대로의 풀무대장간이 있었다. 치동이란 마을이 있었다고. 그 때의 유물들을 살펴보고 정상으로. 조망대에서 바라보니 북한산․인왕산․안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뚜렷하다. 웅장한 경기장을 내려다보며 능선을 따라 흙길을 걸었다. 매미의 노랫소리에 맞춰 제비나비․호랑나비가 길라잡이를 하는구나. 그 당시 또 하나의 수훈 자원봉사자들처럼.
다시 하늘공원으로. 15년 동안의 서울 쓰레기 약 9,200만t을 묻었다니, 난지도가 먼지․악취․파리의 삼다도로 불렸을 법하다. 100m가 넘는 이 매립지를 폐쇄하여 이루어진 대역사였으니, 청계천과 더불어 서울의 명물이 되었다. 연간 180만 여 명이 찾는 휴식 공간으로, 나아가서는 환경 관계의 외국인사들이 꼭 둘러보는 곳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맹꽁이 전기차가 있으나 걷기로. 290여 개의 계단을 쳐다보니 아찔하다. 이전엔 안 그랬는데 나이 탓이겠지. 지그자그로 나있는 가파른 나무데크 계단을 오르면서 성경의 야곱의 하늘 사다리를 생각했다. 길을 따라 기다란 매립가스 이송관로가 있고, 표집한 이 가스를 열재생산공장으로 보내진다고.
입구의 ‘하늘공원’ 비석 앞에서 여러 갈래 길로 갈라진다. 가을 축제를 손꼽아 기다리는 억새와 띠(삐삐) 풀들이 넓은 초원을 이루고 있다. 어렸을 적 뒷산 언덕에서 삐삐의 새하얀 어린 줄기를 뽑아먹던 추억이 새록새록 난다. 지금은 키 크느라고 팔을 활짝 펴들고 발돋움을 하며 파도 타기 연습이 한창이다. 귀화식물원. 미국자리공 등 20여 가지의 화초들이 이름표를 세우고 선을 보이고 있다. 여태까지 토종 식물로 알고 있었던 것들이 귀화식물이라니, 단일 민족이라며 자랑하는 우리도 순수한 혈통이 과연 얼마일까?
갈색 구슬 돌로 이루어진 맨발산책로. 양말을 신은 채 걸으면서도 기우뚱거리는 아가씨들, 겁 없이 뛰다가 불붙은 발바닥을 붙들고 오만상을 찌푸린 아이들....만만하게 보았던 나도 몇 발자국 못 가서 두 손 들고 말았지. 어렸을 적에는 맨발로 뜨겁게 달아오른 시냇가 자갈밭도 걸어다녔고, 억센 풀밭도 마구 뛰어다녔는데.... 암석원 바위에서 잠깐 쉬었다. 산마루에는 5 개의 풍력발전기가 바람가비 되어 열나게 돌아가는구나. 이 곳 전력은 이렇게 마련해서 사용한다는 것. 요 모양 저 모양으로 장대 끝에 달랑 매달린 저 새집들은 전세난을 다 해결할까 궁금하구나.
터널에는 관상용 호박과 수세미들이 주렁주렁 열리고, 원두막 지붕에도 흥부의 박덩이들이 소담스럽게 앉아 있다. 수박서리 하다 들켜 도망치던 일, 원두막 시아버님께 새참 내가던 일, 훠이 훠이 새끼줄 흔들며 새 쫓던 어린 시절 일....그 옛날 원두막 시절의 추억을 더듬으며 쉬고 있는 어른들 머리에는 하얀 서리가 내렸구나. 맹꽁이차로 올라왔겠으나 여기까지 왔다는 것 만으로도 결승선을 통과한 것이다. 하늘 아래서 가장 높다는 하늘공원의 이런 풍경화와 풍속화를 둘러보는 재미와, 숨이 턱에 차도록 끙끙거리며 올라온 비지땀이 아까워서일까, 도무지 내려가려는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낯선 시설이 우뚝 들어서있다. ‘하늘을 담는 그릇’이라는 전망대이다. 임옥상의 작품으로 여기에서도 가장 높다면 정말 하늘을 담을 것이다. 그릇 아래쪽에서 들어가 5층까지 올라갔다. 햇빛․구름․바람을 모두 담고 있으니, 내가 과연 깊은 하늘 속에 풍덩 빠진 것이 아닌가? 여기에도 ‘소원’을 써서 주저리주저리 메달아 놓고, 사랑의 자물쇠를 채워놓았군. 공원 전경은 물론 비단 천 깔아놓은 듯한 한강과 걸쳐있는 다리, 이쪽 저쪽 남산․북한산․관악산과 그 아래 펼쳐진 서울 시가를 바라보며, 그 속에서 복닥거리는 사람들의 얼굴들을 상상해보는 즐거움이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박충흠의 ‘산-하늘문’. 분화구를 가진 웅대한 화산을 조형화 했다는 것. 1만 여개의 조각으로 퍼즐처럼 이어진 외관은 산맥을 상징한다고. 한복판에 놓인 원형 의자에 앉았다. 열려있는 하늘을 쳐다보니 과연 푸른 하늘꽃이 활짝 피었구나. 퍼즐 조각 창 사이로 새어든 햇빛이 유난히 눈부시다.
3개월만에 다시 찾아왔다. 마침 열 번째 ‘서울억새축제’가 열려 남녀노유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었다. 과연 은빛 억새들이 파도 타기를 하고, 파도 위로 사람들의 머리들만 쪽배 되어 둥둥 떠다닌다. 억새밭 이리저리 뱃길을 만들어 놓았는데도, 제 멋대로 새 길을 내었구나. 사람은 곁길을 좋아하는 본능이 있는 걸까? 하기야 좌초할 걱정은 없으니까. 야외무대는 저렇게 낮잠을 나른하게 자고 있다가, 밤이면 노래와 춤으로 화끈하게 달아오르겠지.
지난 여름에는 내려오는 아스팔트 길이 퍽 지리했는데, 이번에는 길가에 만발한 국화들이 환송을 해주어 발걸음이 가벼웠다. 벤치에 잠깐 쉬는데, 곁에 앉은 분이 말을 걸어왔다. 왜 내외가 함께 오지 않았느냐? 나이에 비해 피부가 아주 곱고 젊다나? 빈 말이라도 기분 좋더라. 까닭 없이 칭찬하는 건 경계해야 하지만, 속담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지.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대회에서도 목이 터져라고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짝”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