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라이킷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올림픽공원

걷고 쉬고 생각하고

by 최연수 Jan 28. 2025

 지하철 5호선 올림픽공원역에서 내렸다.  동2문으로 들어섰다. 끝이 아스라한 광장 느티나무 길을 지나면서, 산책 코스를 머릿속에 그렸다. 자칫하면 곁길로 빠져 헤맬지 모르니까.  

 ’88년이면 벌써 32년 전이다. 대한민국 최근세사의 큰 획을 그은 이 화려한 드라마는, 우리 국민에게는 자부심을, 평화를 사랑하는 온 세계인에게는 경이로움을 선사했다. 뜻하지 않게 어머니께서 병석에 누워 우리 온 집안은 먹구름으로 가득 찼으나, 이 넓은 벌에서는 월계관을 향한 젊음이 지축을 흔들고, 열광하는 지구촌 사람들의 환호가 충천하지 않았던가? 마음대로 TV 중계도 보지 못해, 죄인처럼 이따금씩 훔쳐보는 극적 장면마다, ‘훔쳐 먹는 떡이 더 맛있다’는 속담을 실감했었다.  

 그 때의 감격적인 파노라마를 회상하며,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웅장한 경기장 건물을 이리저리 쳐다보았다. 체조경기장과 펜싱경기장을 양쪽으로 끼고, 드넓은 88마당 파란 잔디밭을 바라보며 몽촌성 길로 접어들었다. 먼저 움집터전시관에 들렀다. ’88년 당시 발견된 4개의 움집터와 저장 구덩이를 발굴 조사한 당시의 모습 그대로 전시한 곳이다. 백제 초기(BC18-AD475)의 유적․유물이다. 전시관을 나와 계속 능선을 따라 걸었다. 오른쪽으로는 넓게 펼쳐진 야생화 학습장, 왼쪽으로는 시원한 분수가 솟구치는 호수를 굽어보면서 걷었다. 길 양족으로 늘어서있는 굵직굵직한 소나무가, 더위에 시들시들한 내 원기를 재충전해 주었다. 

 오르락 내리락 산책 길로는 안성맞춤이지만, 백발의 노인들만 땀을 훔치며 삼삼오오 산책을 즐길 뿐, 젊은이들은 저 산 아래 평지에서만 북적거렸다. 정상에서 무거운 다리를 잠깐 쉬었다. 출입이 금지된 낮은 잔디광장 한복판에는, 멀찍이 아름드리 나무 한 그루가 점잖게 서 있다. 은행나무가 아닌가 짐작하는데 외톨이 또는 왕따 나무라고 부른단다. 종이가 없었던 시대 푸른 대의 껍질을 불에 구워 푸른 빛과 기름을 없애고, 그 위에 붓으로 사실을 기록한데서 청사(靑史)란 말이 유래 했거니와, 몇 백 년은 묵었을 저 고목도 당시의 청사를 가지마다 잎사귀마다 또박또박 적어놓았으리라.  몽촌성까지 길이 나있었으나, 아래쪽 길로 방향을 틀었다. 몽촌역사관에 들렀다. 최근 서울 지역 여러 곳에서 석기가 채집되어, 구석기인들이 살았던 곳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지금부터 8,000년 전 한반도에 신석기 시대 문화가 꽃피기 시작한 여러 유물과, 유적 모형들이 잘 전시되어 있었다. 올림픽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것이지만, 이러한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문화의 터에 뿌려진 씨앗들이, 올림픽 개최국이라는 현대사의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 것이 아니겠는가? 

 가로수로 가꿔진 각종 무궁화꽃길과 성내천 생태계를 끼고 올림픽공원으로 들어섰다. 아쉽게도 음악 분수는 쉬고 수변 무대도 텅 비어 있는데, 건너편 국기광장에서는 당시 참가했던 160 개국의 국기가 힘차게 펄럭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상징물 가운데, 깃발만큼 마음을 뒤흔드는 게 또 뭐가 있을까? 메달은 메달대로 개인의 영예를 빛내는 것이지만, 깃발은 깃발대로 나라의 위엄을 온 천하에 떨친 것이었다. 저 깃발을 온 몸에 휘감고 뛰던 모습과, 저 깃발이 하늘 높이 올라갈 때 조국의 영광을 노래하며 흘리던 감격의 눈물이 오버렙 되어, 내가 지금 월계관을 쓰고 태극기를 쳐다보며 애국가를 부르는 선수처럼 흥분하고 있다. 

  평화의 광장으로 들어서면서 조각 공원으로 올라갔다. ‘엄지 손가락’ ‘대화’등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200여 개의 멋진 조각 작품들이 울창한 수목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인류의 평화에 대한 염원과, 올림픽 정신을 구현하는 상징물들이다. 섬세한 손끝으로 빚어지고 다듬어져, ‘보다 아름답게, 보다 질서있게, 보다 튼튼하게’라는 표어를 내걸고, 움직임 없는 또 하나의 올림픽 잔치가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 시원한 그늘 아래서 잠깐 쉬는데, 다람쥐 한 마리가 마을나왔다. 반가워 손을 번쩍 들었더니, 잽싸게 나무 꼭대기로 올라갔다. 요 놈 봐라! 올림픽 표어를 몸으로 익혔네. 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힘차게....  

 평화의 문으로. 실은 이 문이 트레이드 마크이다. 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에서 내리면 먼저 만나게 된다. 청룡․주작․백호․현무 등 사신도가 산뜻하게 그려져 있다. 오륜기 마아크를 이마에 붙이고 두 팔을 번쩍 쳐든 채, 5대양 6대주의 60억 세계인을 다 보듬을 듯 반가이 맞이한다. 정면에는 ‘인류에 평화를 민족에 영광을’이라 새겨진 돌이 있다. 좌우 양쪽으로는 60 개의 열주탈이 줄을 서있다. 원기둥 위의 청동제 전통 탈은, 우리 조상들의 자화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 

  우리금융아트홀 앞에는 젊은이들의 장사진이다. 역도경기장이 전문 뮤지컬 공연장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88 올림픽을 한낱 전설로만 듣고 있을 이들이다. 7년 후에 있을 평창에서의 동계 올림픽의 주인공들은 그대들이 아닌가? 

젊은이들이여! 흰 설산․설원과 은반 위에서 또 하나의 눈부신 역사를 엮어나갈 그들의 가슴 속에, 지금 붉은 피가 용솟음치고 있는가? 그 때는 통일 조국의 7천만 민족이 하나 되어, 남․북극의 빙산도 녹일만큼 열광하며 응원할 준비는 되어 있는가? 삭풍이 휘몰아치는 눈발에서 힘차게 나부낄 태극기와 오륜기를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떠나왔다.

이전 15화 하늘공원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