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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공원

걷고 쉬고 생각하고

by 최연수

7월 폭염이 기염을 토할 때, 지하철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로 환승 선유도에서 내렸다. 이름에서 보듯이 조선시대는 선유봉이 있어 신선들이 놀았다고 한다. 중국 사신들이 정상에서 빼어난 경치에 도취되어 시를 짓고, 많은 묵객시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일제 강점기에는, 대홍수 이후 한강 제방을 쌓고, 여의도 비행장을 닦느라고 채석하는 바람에 선유봉이 깎이기 시작, 다시 양화대교를 놓을 때 드디어 산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서울의 수돗물 공급을 위한 정수장이 들어섰다가, 2000년 폐쇄되면서 현재의 생태화공원으로 탈바꿈했다.

2004년 미국 조경가협회에서 주는 우리나라 첫 번째 우수상을 받았음을 비롯하여, 최근 국내 유명 건축가와 건축학 교수 등 전문가들의 설문 조사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물’ 1위로 뽑혔다. 외형으로 튀려 하기보다 주변과의 조화를 중시하고, 땅에 깃든 역사를 반영하는 건물로서 가장 잘 되었다는 찬사를 받은 공원! 생명이 살아 숨 쉬는 도심 속의 휴식 공간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낙원이다.

먼저 온실로. 각종 수생식물들이 생육하고, 이곳의 다양한 식물들을 번식시키고 있었다. 이어서 약품 침전지의 구조물을 개조한 수질정화원에서, 여러 수중․수상식물의 성장과 물을 정화하는 과정을 직접 둘러보았다.

“너희들은 복도 많다!”

청정 물속에서는 올챙이․개구리․소금쟁이 들이 생을 찬미하고, 물 밖에서는 내가 자연을 찬미하고. 모든 생물은 자라는 환경이 얼마나 귀중한가? 환경물놀이터로. 아름다운 조형물 바닥 위로 야트막한 물줄기가 흐르고, 옆에 모래판까지 곁들여 있다. 질소․인 등 오염 물질을 완전 정화시킨다니, 어린이들이 행복을 만끽하며 놀 수 있는 선유도는 낮에는 유유도(幼遊島)로 변신한 셈이다. 문득 김홍도의 단오 풍속도가 떠오른다. 여기에도 야삼경이면 은하수 물이 흘러들어, 구름을 타고 내려온 선녀들이 저 창포 우린 물로 머리를 감고 달빛에 말리겠지. 낮의 유유도가 밤엔 선유도로 되돌아가겠군.

선유정에서 쉬었다. 옛 정자를 복원한 것이라고. 발 아래 넘실거리는 한강에 선유선착장이 있어, 유람선을 타고 한강을 오르내릴 수 있다.

옛 정수지는 지붕을 걷어낸 후 30여 개의 기둥만을 남겨놓았는데, 그 위로 담쟁이덩굴이 기어 올라가 살아있는 녹색 기둥이 참으로 인상 깊다. 마치 다소곳한 안방에 와 있는 것처럼, 도란도란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싶은 곳.

그 옆 수생식물원. 위로는 수로가 있어 맑은 물이 흐르고, 지하로 내려가면넓은 수생식물 정원을 이루고 있다. 옛 여과지를 재활용한 것으로 수변식물을 비롯하여 습지․정수․부엽․침수식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생식물이 모습을 선보이며, 생장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함초롬히 피어있는 연꽃앞에서 나는 석고상이 되어버렸다. 불가에서는 속세에 물들지 않은 고결함이 극락세계를 상징한다는 꽃인데, 저 요염한 교태는 당나라 양귀비가 여왕으로 환생한 게 아닌가? 또한 촉나라 백미는 새하얀 수련 꽃으로 환생하여 궁녀가 되고, 궁중 무희들은 보라색 부레옥잠으로 환생하여 태평무를 춤추고 있구나. 잠시나마 이 선정적인 몽환세계에 숙취 될뻔 했다.

미로 같은 길을 걷다가 시간의 정원으로. 약품 침전지였는데, 이를 재활용하여 각기 다른 주제를 가진 8개의 작은 정원으로 꾸며놓았다. 담장에는 담장이덩굴과 줄사철이 뒤덮고, 각종 나무들과 화초들이 이름표를 달고 있다. 울창하진 않지만 오랜만에 대나무 숲을 거닐었다. 대나무 꺾어 활과 물총을 만들고, 눈 오는 밤 대밭에서 참새 잡던 소년 시절의 향수에 젖기도 하며, 비움과 맑음, 곧음과 숨어 있음을 의미하는 조석진의 ‘죽림칠현도’의 그림 속으로 잠입하기도 하였다. 누군가도 이 곳을 거닐면서 종이에 추억을 담아 대나무에 걸어놓았군 그래. ‘고기 없이는 밥을 먹을 수 있으나 대나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고 한 옛 중국의 시인 소동파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농축조와 조정조를 재활용한 휴식과 놀이의 문화공간으로, 환경놀이터․환경교실․원형극장등이 마련되어 있으나, 평일이요 더위 때문인지 보여야 할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취수 펌프장을 재활용한 카페테리아 나루와 선유교 전망데크에서는 발 아래 자연 초지를 내려다보고, 망원경을 통해 한강은 물론 서울 시가와, 멀리 인왕산․남산․북한산 등도 코 앞에 다가와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올해 들어 첫 매미 노래를 들었다. 순간 더위가 싹 가신 듯.

80일 만인 가을, 양화대교와 성산대교를 양쪽에 끼고 아치형 선유교를 건넜다. 전번과는 반대 방향으로 산책하는데 고향에 돌아온 느낌. 지난 여름보다 산책객들이 부쩍 많아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울시 창작공간 페스티벌’이 있었다고. 벌․나비 들을 초청하여 꽃잔치를 벌였을 화초들이 설거지를 하고, 노릇노릇 물들기 시작한 나뭇잎들이 가을을 배웅한 게 못내 아쉬웠다. 머지않아 휘휘한 벌판은 흰 눈을 덮고 깊은 잠자리에 들겠지. 이번에는 지난번에 지나쳤던 산책길을 걸었다. 자작나무 등 각종 나무들이 줄을 서서 반겨주어 고마웠다. 길가 돌비석에 선유도의 내력이 그림과 함께 새겨져 있어, 이를 적는 메모지에 잠자리 한 마리가 살포시 앉아 큰 눈을 두리번거린다. 온실에서는 참개구리 한 마리가 불쑥 나와 반가웠는데. 안내센터 앞 광장에 마련된 양쪽 녹슨 철판 벽에는 온통 낙서로 어지럽다. 모두 남녀의 사랑 사랑...그런데 자연을 사랑하여 프로포즈 하는 글귀는 눈을 씻고 봐도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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