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쉬고 생각하고
지하철 5호선 오목교역에서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파리공원으로. 정문이 아닌 뒤쪽 출입구로 들어서면서 공원에게 인사.
“봉쥬르! 상샹떼!”
추석 명절이라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로 북적대었다. 벤치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공원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 아담한 공원이다. 첫 인상이 청순한 귀염둥이 소녀 같다고 할까?
’86년 한․불 수교 100주년을 기념하고자 조성했다고 한다. 파리 코로니아 아파트 단지 내에 서울광장을 조성한 답례로 마련한 것이라고. 프랑스는 6.25전쟁 때 UN군으로 참전하여 도와준 우방일 뿐만아니라, 앞으로도 문화를 교류하고, 경제발전의 동반자로서의 관계를 더욱 두텁게 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있다.
바로 코앞에는 어린이 푸울같은 자그마한 못이 S자 모양으로 펼쳐 있다. 못 이쪽 주위에는 17 개의 은회색 원기둥이, 저쪽에는 20 개의 빨간색 각기둥이 각각 반원을 그리며 줄서 있다. 빨간 기둥은 커다란 초록 벚나무와 보색관계가 되어 잘 어울린다. 야트막한 푸울에는 하늘이 살포시 내려와 밑바닥에 깔려, 눈이 시릴만큼 푸르고 맑다.
때마침 잔잔한 음악에 맞추어 매끈한 팔 다리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물속으로 잠겼다 한다. 물줄기가 현란한 싱크로나이즈를 보여준 것이다. 이어서 늘씬하고 귀여운 발레리나들이 호수 위에서 사뿐사뿐 우아하게 춤을 추니, 씩씩한 발레리노들이 휙휙 공중을 날았다. 분수의 발레 ‘백조의 호수’ 를 보았다. 모두들 숨을 죽이며 무대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푸울 바깥쪽을 향해 물줄기를 뿜었다. 개구쟁이 분수가 못가에 서있던 아이들에게 장난을 거는 것이다. ‘장난감교향곡’은 아닌데.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도 분수가 되어 하늘 위로 퍼져나갔다. 잠깐 멈추는가 했더니 다시 계속된다. 이번에는 발랄한 치어걸들이 운동장에서 역동적으로 율동을 하는 것이다. 훌륭한 공연들이었다.
분수 공연이 끝나자 서울광장으로. 벽천 분수를 감돌아 걸었다. 타일 벽면은 세 개의 일월오봉도로 꾸며져, 한국적인 병풍의 멋 그대로다. 이제야 정문이 나타났다. 문이라야 청․백․적 3색의 각기둥이 축구장 골대 모습으로 서 있고, 위로 조그마한 아치가 머리 리본처럼 붙어 있는 아주 심플한 디자인이다. 입구에는 ‘파리공원’ ‘Pare de Paris'라는 두 기둥 간판과, 태극기와 3색기가 나란히 그려진 현판이 붙어있다. 이 공원이 조성된 경위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넓은 한․불마당으로 들어섰다. 한 쪽에선 농구․게이트볼 하는 청소년들이, 안쪽에서는 자전거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어린이가 많았다. 파리마당에는 스킬자수 같은 프랑스식 자수화단이 아기자기하다. 이걸 카페트 삼아 뒹굴고 싶다. 산책길로 들어서려는데 아름다운 꽃밭 속에 에펠탑과 개선문이 나타났다. 비록 1/25로 줄인 미니 조형물이지만 실물처럼 섬세하다. 처음 에펠탑은 파리 경관을 망칠 쇳덩어리 흉물이라고, 20년 후에 철거하기로 했다는 게 아닌가? 그런데 무선전신 발신기로, 방송 전파 발사체로 기능을 발휘하면서, 이제는 유럽을 상징하는 최고의 조형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 위에는 파리의 문장인 범선 마크가 있다고 한다. 세느강이 폭풍에 요동쳐 키가 꺾이고 돛이 찢어져도, ‘파리’라는 범선은 가라앉지 않고 꿋꿋할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한편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개선문도 곡절이 많다. 오스테를리츠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맞이하여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완공을 못 보고 엘바섬으로 유배되고,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숨진지 19년만에야 관에 실려 이 문을 통과했다고 한다.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정과 자부심이 뭉쳐 있는 문이다. 그런데 프랑스의 류관순이라는 잔다르크와 역사적 영웅인 나폴레옹의 조형물은 없나? 그리고 크로비스왕의 꿈에 나타났던, 3송이의 꽃창포가 수놓아진 방패 때문에 나라꽃이 된 아이리스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졸지에 친불파가 되었구나.
또 하나의 측문 출입구. 정문과 비슷하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두 나라 국기의 공통인 백․청․적색을 주조로 공원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 당시의 3색기는 각각 자유․평등․박애를 상징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국민주권의 상징이 된 세 가지 색은,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넓은 장미원의 장미와 담장 위의 수국들은 이제 퇴색이 되어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음을 느낄 수 있다. 만남의 장소 안에 사람들은 별로 없고, 모두들 바깥 느티나무와 등나무 그늘 밑 벤치에서 쉬고 있었다. 아름답게 꾸며진 지붕의 야외무대가, 별이 빛나는 밤을 기다리며 조용히 쉬고 있구나. 지금은 여운만 남았지만 아코디언의 연주에 맞춰 그 옛날 샹송이 흘러나올 것 같다. 한 때 우리들은 샹송 가수 현인의 ‘신라의 달밤’ ‘베샤메무쵸’를 얼마나 좋아했던가? 산책길로 들어갔다. 600m의 짧은 거리에 오르막길이 없어, 노약자들이 쉽게 걸을 수 있다. 갖가지 나무가 우거져 있지만, 막상 파리 가로수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는 플라타나스와, 프랑스 화가들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사교계의 귀부인 같은 우아한 마로니에는 너덧 그루밖에 보지 못했다. 정작 프랑스인은 보이지 않은 파리에 와서, 친불 문화사대주의자요 파리지앵이 된 하루였다. 이제는 파리여, 아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