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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호수공원

걷고 쉬고 생각하고

by 최연수

태풍이 북상하고 또 비가 오리라는 예보. 지하철 8호선 석촌역에서 하차. 5분 정도 걸었다. 20여년 만인가 보다. 소나무로 뒤덮인 장송마당에 석호정이 있는데, 2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하나는 송파구문화재연구회장의 ‘송파의 유래’와, 또 하나는 송파구청장의 ‘송호정’이다. 그 옛날 송파강 나루는 황포돛배와 뗏목을 통해, 상류와 한양 도성의 물류의 교류지였다. 따라서 국내 상권을 쥐었던 보부상과 5일장을 누비던 장돌뱅이 도부꾼들이 북적거리던 송파장이 유명했다 한다. 한편 송파 가면극의 전통을 이어온 곳이기도 하다.

’70년 대 잠실벌을 휘돌아 흐르던 송파강을 매립하면서, 잠실동과 신정동을 만들었는데, 이 때 물길이 끊어져 곧 석촌호수가 되었다고. 20년 동안 초라한 호수로 있다가, 2001년 송파나루공원 명소화 작업을 시작, 2004년 전통과 현대의 자연의 숨결로 재탄생했다고 한다. 콘크리트 호안 시설과, 생태호안 시설을 설치하고, 놀이마당을 곁들여 석초호수공원으로서의 콘텐츠를 한층 풍성하게 한 것이다.

송파대로의 호수교를 경계로 두 호수로 나뉘는데 먼저 동호 쪽으로. 호수에는 갈대․부들․물억새들이 무성하다. 우레탄으로 포장된 산책로를 걷는데, 호숫가로는 1000여 그루의 왕벚나무와 오른쪽으로는 이팝나무․칠엽수․계수나무 등 갖가지 나무들이 두 줄로 터널을 이루어 반가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듣건데 봄철의 벚꽃 길은 장관이란다. 호수를 따라 줄을 이은 벤치들이 연인끼리는 꿈과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도록, 친구들과는 옛날의 추억을 더듬어 보도록, 인심 좋게 서로 자리를 내어주는구나. 뜻밖에 호수의 낭만과는 한참 먼 듯한 ‘조국의 미래 청년의 책임’이라는 구조물이 서 있다. 삼청공원에서 보았던 문구다. 그리고 우리들 기억 속에서 지워진지 오랜 의사자 권용필과 최진희의 흉상이 나타났다. ‘나’만이 아니라 이웃 사랑도 한번 쯤 생각해보라는 메시지겠지.

나무에 귀엽게 매달린 여러 시구들이, 행여나 마음이 들떠있다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잔잔한 호수에 차분하게 제 모습을 비춰보라고 속삭인다.

얼굴 하나야 / 손바닥 둘로 / 폭 가리지만 //

보고 싶은 마음 / 호수만 하니 / 눈 감을 밖에

문득 정지용의 시 ‘호수’가 물그림자 되어 호수 위에 어른거렸다. 그 여러 시 중에 이 시는 호숫가에 꼭 게시되어 있을 법 하건만.... 넓고 깊은 그리움이요 사랑이기에 저 호수만 할 테지. 그러나 그 옛날 나에게는 호수는커녕 대야만한 마음의 연못조차 없었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젊었을 때 자주 불렀던 김동명 시 김동진 곡을 허밍으로 노래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그림자라도 안고 옥같이 부서질만큼 ‘그대’가 나에게 있었던가? 흙탕물 둠벙에 빠진 채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허우적거리며 반생을 살아온 나의 마음이, 어찌 넓고 깊고 맑은 저 호수 같았으랴.

서울 도심지에도 이렇게 넓은 호수가 있다니... 녹수청산이라 했듯이 수심 5.4m의 청록색 호수가 진공청소기가 되어, 모든 세상풍진을 다 빨아들이고 있다. 어느덧 다리를 지나 서호에 들어섰다. 고요했던 동호와는 별천지다. 6 마리의 백조가 유유히 노닐고, 유람선 보트가 물살을 가르며... 아기자기하게 화려한 모스크 사원과 중세 성곽에서, 신나게 놀이기구를 타는 사람들이 왁자지껄했다. 롯데월드의 MAGIC ISLAND이다. 차분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산책하던 사람들도 덩달아 발걸음이 빨라진 것 같다.

동호와 같이 여기에도 수변무대가 마련되어 있었으나 낮에는 한가로운 듯. 각종 민속공연이 펼쳐지는 서울놀이마당은 큰 규모의 한옥이다. 야외객석에 잠시 앉아보았다. 포도부장․신주부․무당할미들이 번갈아 등장할 것만 같았다. 나도 취발이 탈을 가져와 마당 한복판에 들어가서, 그들과 한데 어울려 굿거리 장단의 허튼춤이나, 타령 장단의 깨끼춤을 한바탕 신명나게 추고 싶었다. ’25년 대홍수 때 송파 마을이 없어지면서 송파산대극도 시들해졌는데, ’70년대 연희자들의 노력으로 복원․전승 되었다고. 봉건 사회의 유물인 신분적 특권․관념적 허위․남성의 횡포를 해학으로 고발하면서, 새로운 가치관을 요구하는 민중의식이 가면극으로 싹튼 것이 아닌가?

수변무대의 여기저기 객석에는 백발 노인들의 장기판이다. 호숫가를 따라 2.5Km의 산책길과 420m의 지압보도를 걷고 나니 발이 무겁구나. 호반의 벤치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니, 이제야 내 마음도 호수가 된다. 원추리․비비추․구절초 등 야생화들이 시나브로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해도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말이다. 저녁이 되면 동호에 1척, 서호에 2척의 황포돛배가 뜬다고 한다. 그 옛날 경제적 호황을 누렸던 송파진의 정취를 맛볼 수 있다지만, 하루 나그네인 나도 이제 떠날 채비를 하여야지. 스페인 민요 ‘친구의 이별(Juanita)’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편의 달이 호숫가에 질 때에 / 저 건너 산에 동이 트누나

.....친구 내 친구 잊지 마시오.’

하루 동안 정들었던 나의 길벗 석촌호수여, 다시 만날 때까지 이제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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