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새가 깐 알
210일풍이라고 했다. 춘분으로부터 210일째 되는 때는 어김없이 태풍이 불어온다는 것이다. 이 해 가을의 210일풍도 대단했다. 태풍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마다 몹시 어지러웠다. 남산에 사태가 나서 오두막 집 한 채가 무너진 것을 비롯해서, 축대가 무너지고 흙담이 주저앉은 집이 여럿 있었다. 한길에는 꺾인 나뭇가지들이 엉성하게 엎드러져 널려 있고, 날카로운 양철 지붕 조각과 깨진 간판 조각도 바람에 날려 뒹굴고 있었다. 뿌리 채 뽑힌 큰 나무들과 전봇대도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날이 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람이 자고, 밝은 해가 솟았다. 하늘은 씻은 듯이 더욱 맑아졌다. 재호는 문득 하세가와 집 감나무가 머리에 떠올라서, 아무도 몰래 가 보았다. 마침 대문이 빠끔 열려 있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렸으나 인기척이 없어, 살금살금 들어갔다. 아닌게아니라 많은 풋감들이 떨어져 있었다.
재호는 떨리는 손으로 주섬주섬 감을 주워 담았다. 위아래 호주머니가 불룩하게 담고도 또 저고리 옷자락까지도 담았다. 제법 묵직해지자 잽싸게 밖으로 나오려는데, 그만 기꾸장에게 들키고 말았다. 기꾸장은 ‘죠센징’이라며 뭐라고 부모에게 일러바치는 것 같았다. 일본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을 깔볼 때는 흔히 ‘죠센징(朝鮮人)’이라 했고, 중국 사람들에게는 ‘시나징(支那人)’이라고 했다. 하세가와네는 재호네 바로 뒷집인데, ‘제중의원’이란 병원을 하고 있었다. 이 집에는 기꾸장과 요시오라는 오누이가 살고 있었는데, 마치 인형처럼 예뻤다.
일본 아이들은 ‘아사히(旭日)공립국민학교’에 따로 다녔는데, 그들은 항상 깨끗하고 단정하며 명랑했다. 온순하지만 서케가 하얀 머리를 쥐꼬리 같이 묶고 다니는 순이, 노래는 잘 부르지만 곧잘 토라지며 변덕이 심한 송자, 억센 욕지거리로 남자들에게도 잘 덤비는 춘자와 추자 쌍둥이, 특히 추자는 재호에게 ‘가시내’라는 별명을 붙여 약올려주곤 했다. 기꾸장은 이런 조선 여자아이들하고는 사귀려 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업신여기는 말투를 곧잘 했다. 재호 역시 이런 동네 계집애들에게는 호감을 갖지 못 했다.
재호네 근처에는 하세가와네 외에도 가또 변호사, 스모카와 시계포, 가네무라 목욕탕, 마에다 식료품상 등 일본 사람들의 집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특별하게 멋진 일본식 집에서 부유하게 살았다. 애국반 반장을 하는 마에다 노인 내외분 외에는 조선 사람과 교제하려 들지 않았는데, 자기네들끼리는 참으로 친근하게 지냈다.
재호는 옹동이를 꺼내어 차곡차곡 감을 넣었는데, 아귀까지 꼭 찼다.
“ 소금을 넣어야 잘 울어나지야 .”
어머니도 거들어 주었다. 한 보름쯤 지나면 떫은맛이 다 울어날 것이다. 재호는 벌써 군침이 돌고 가슴이 설레었다.
“ 재호야!”
방문이 열리며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쨍 울렸다. 심상치 않은 목소리임을 느낀 재호는 주눅이 든 채 우뚝 섰다.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더니
“ 그 감, 싸게 갖다 둬! ”
하고 소리쳤다. 재호가 우물쭈물하자 또 다시 불호령이 떨어졌다.
“ 아니, 우리가 왜놈들 쓰레기나 묵고 사냐? ”
“ ..................”
“ 우리가 허천드렸냐? 핑 갖다 놓지 못해? ”
할아버지는 긴 담뱃대로 기둥을 탁탁 쳤다. 재호는 맥이 빠진 채 감을 다시 호주머니에 건져 담았다. 옷이 척척했다.
“ 왓따메 아부님도...그 에린애가 멀 안다고 아침부터 그래싸요? ”
어머니는 못 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 허허. 저 말 대꾸한 것 좀 봐! ”
“ 시상이 변했는디, 그란다고 누가 알아줍디까? 목구녕에 거무줄 치믄 뭣은 못 묵는다요? ”
“ 저 버르장머리 좀 봐. 시아부지한테 못할 말이 없구마 잉.”
할아버지는 발을 동동 구르며 흥분했다. 재호는 감을 기꾸장네 마당 안에 집어던지다시피 하고는 돌아섰다.
“ 고지끼! 도로보! ”
순간 기꾸장 오누이의 목소리가 재호의 뒤통수를 매몰차게 때렸다. 거지, 도둑놈이라고 골려대는 것이 아닌가?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 풋감은 떨어! 풋감은 떨어! ”
노랫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리며 뛰어서 되돌아왔는데, 그 동안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청은 높아진 채, 서로 지나간 일까지 들추며 큰 싸움으로까지 번지고 있었다.
“ 가미타나 걸어 놓고 일본 귀신한테는 조석으로 절을 한 년이, 니 시어무니 위패에다는 절이라도 한 번 곱게 해봤냐? ”
“ 아따, 혼이 살았으믄 그러크롬 무심하다요? 지사상 잘 받으실라믄 자손들 잘 살게나 해주시재. 저도 시상 살기 너무 팍팍해서 그래라우”
“니가 시아부지를 시퍼보는 모양인디.......”
재호는 어머니의 손목을 잡아 흔들면서 그만 입을 다물라는 시늉을 했다.
“ 신주 치레하다가 제 못 지낸답디다.”
어머니가 비웃적거리며 내뱉은 이 가시 돋친 말에 할아버지는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두루마기만 걸치고는 훌쩍 나가 버렸다. 물론 작은집으로 갔을 것이다.
“ 재호 너도 따라가그라. 니 엄니 아부지한테....”
어머니는 방바닥을 치며 큰 소리로 울었다. 재호는 아직도 뒤통수가 얼얼한데, 이제 가슴까지 꽉 막혔다. 풋감 반 조각도 먹지 않았는데 입안이 몹시 떫고, 가슴에 얹힌 것 같았다.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치고 나서 어머니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 엄니 울지 마. 내가 잘 못했어.”
“.....................”
아버지의 소식이 끊긴 후, 어머니와 할아버지는 자주 말다툼을 하였다. 천황 내외분 사진을 벽에 걸 때, 가미타나와 국기함을 걸때는 특히 그랬다. 애국반에서 지시한대로 천황께 충성하고 천조대신을 정성껏 모시자는 것이 어머니의 주장이었으나, 조상님네 시어머니 제사 정성스럽게 지내고, 정화수 떠놓고 아버지의 무사를 비는 일에나 치성을 드리라는 것이 할아버지의 주장이었다. 이왕 일본 국민이 되었으면 일본의 법대로 따라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 어머니의 말이었으며, 일본 놈들에게 굽실거리지 말라는 것이 할아버지의 말이었다.
이 두 가지 말은 늘 팽팽하게 맞서서, 누구의 말이 옳고 그른지 재호의 머리를 이따금 뒤숭숭하게 만들곤 했다.
‘ 우리 나라는 일본이란 말인가 조선이란 말인가? ’
재호에게 속 시원하게 말해 주는 사람도 없었으려니와, 웬 일인지 물어 보는 것도 거리낀 일이었다.
학교 현관에는 커다란 일장기가 한 가운데 붙어 있고, 그 양쪽에는 ‘내선일체(內鮮一體)’와 ‘미영격멸(米英擊滅)’이라는 한자 현판이 붙어 있었다. 내선일체란 일본과 조선은 하나요 차별이 없다라는 뜻이라고 했는데....
1) 애국반(愛國班)...왜정 때 있었던 반상회
2) 위패(位牌)...신주를 나무에 새긴 것
3) 가미타나(神棚)...신궁대마(神宮大麻)를 넣어 벽에 붙인 작은 감실(龕室),닫집
4) 내선일체(內鮮一體)...일본과 조선은 차별 없이 하나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