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건 다 산 거라지만
산 건 다 푸르다지만,
바람 없는 날에는 저런 주검들.
산새들이 뿜어 놓은
비눗방울 같은 노래마저,
터뜨리지 못한 그 잎 그 숨결이
파릇한들 검푸른들.
푸른 건 다 산거라지만
산 건 다 푸르다지만,
어차피 흙에 묻힐 뿌리라면
바람이나 일어야 일어 불어야.
생명의 나무는 푸르다. 3,4월의 신록(新錄)이건 6,7월의 녹음(綠陰)이건 생명이 약동(躍動)하고 충일(充溢)한 나무들은 짙푸르다.
그러나 바람 한 점 없는 삼복(三伏) 더위 속의 나무들을 보고 있으려면, 몸이 으스스할 정도로 전율(戰慄)을 느낀다. 잎사귀 하나 까딱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서 있는 나무를 보면 마치 시신(屍身)을 보는 것 같다.
바람이 일어 잎사귀가 팔랑거리고 잔 가지라도 흔들려야 살아 있는 것 같지, 제아무리 잎이 무성(茂盛)해도 움직이지 않으면 죽어 있는 것 같다. 베어낸 나무가 검푸른들 생명체가 아니지 않는가? 역시 생명체는 동물처럼 움직여야 하나보다.
한 곳에 깊이 뿌리를 박고 움직일 줄 모르는 식물성(植物性) 인간. 행동 반경(半徑)이 짧고, 활동 무대(舞臺)가 비좁다. 근시안(近視眼)이 되어 시야(視野)가 좁다.
스스로 양분(養分)을 만들어 생명을 유지할 뿐, 다른 생명체에 기생(寄生)하거나 침탈(侵奪)하지 못한다. 생태학적(生態學的)으로 생산자(生産者)이지 소비자(消費者)가 아니다. 그래서 언뜻 보면 평화주의자다. 그러나 무기력(無氣力)하니까 평화주의자지.
자기를 알라고 했다. 과연 나는 누구냐? 현미경(顯微鏡)을 놓고 나를 해부(解剖)해 본다. 그렇다. 식물성 인간이다. 자기를 안다는 것이 이처럼 처절(悽絶)할 줄이야...
정지(停止) 상태의 물체에 힘이 가(加)해져야 관성(慣性)에 의해서 계속 운동을 하듯이, 나에게도 외부적(外部的)인 힘이 있어야 움직일 모양이다. 바람이나 일어야 움직이지 내 힘만으로는 까딱할 수 없다. 푸르니까 청춘(靑春)이라 한다면, 푸르러도 움직여야 살아있는 생명체지, 미동(微動)도 못 하는데 어찌 생명체라 할 수 있으랴. 인격전환(人格轉換)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