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장 - 기억은 나를 구성하는가, 방해하는가
카페 디알로고스의 오늘 커피 향은 유난히 익숙했다.
진우는 그 향을 맡는 순간,
아주 오래전 겨울 방 안 풍경이 떠올랐다.
기억이란 그런 것.
부르지도 않았는데 문을 열고 들어온다.
첫 번째 손님은 존 로크.
단정한 셔츠, 손에는 작은 일기장.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나란 존재는 기억의 연속성 안에 있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과거의 나와 동일한 사람입니다.
기억이 없었다면,
‘나’라는 말도 성립하지 않겠죠.”
라빈이 주문을 받으며 물었다.
“그럼 기억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지는 건가요?”
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분적으로 그렇습니다.
자아는 기억을 통해 연결되니까요.
단절은 곧 자기 상실입니다.”
곧이어 마르셀 프루스트가 들어섰다.
조용한 외투, 은은한 향수, 약간 멍한 눈빛.
“기억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건 감정이 섞인 재구성이고,
때로는 상상이기도 하죠.
나는 홍차에 적신 마들렌 한 조각에서
잊고 있던 세계 전체를 떠올린 적이 있습니다.”
진우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정말 유명한 이야기이긴 하죠...
그런 기억도 나를 진짜로 구성하나요?”
프루스트도 진우와 닮은 온도의 미소로 웃으며 말했다.
“기억은 진실보다 진실 같기도 하니까요.
우리는 기억 속에서 과거를 사는 게 아니라,
기억 속에서 현재를 다시 빚어내는 거죠.”
그때 마지막 손님, 올리버 색스가 들어왔다.
수수한 셔츠, 의학서와 문학서를 함께 든 손.
“기억은 기록이 아닙니다.
그건 재생이라기보다 ‘재창조’에 가깝죠.
우리 뇌는 감정과 의미를 기준으로
과거를 다시 쓰는 재능이 있습니다.”
라빈이 물었다.
“그럼 기억은 왜곡인가요?
아니면 재창조에 가까운 자서전인가요?”
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둘 다입니다.
기억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과거를 편집한 이야기예요.
그게 우리를 구성하기도 하고
가릴 수도 있습니다.”
로크가 말했다.
“그럼에도 나는...
기억이 없는 나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프루스트가 덧붙였다.
“때로는 기억이 고통스럽더라도,
그 기억 없이 사랑도, 상실도, 나도 없겠죠.”
잠시 카운터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던
진우는 언제든지 지울 수 있고 새로 쓸 수 있게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연필을 깎아 노트에 적었다.
‘기억은 나를 만든다.
그러나 때로 나를 오해하게도 만든다.
그럼에도 나는 그 기억 안에서 살아 있고
어쩌면 그 안에서만 진짜 내가 된다.’
밖에선 바람이 불었고,
이윽고 눈이 내렸으며
카페 창문엔 김이 맺혔다.
진우는 조용히 그 위에,
'사랑합시다'라는 문장을
본인이 아는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로 적었다.
친절하게도 카페를 지나는 사람들이 읽기 쉽도록
거꾸로 적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 이 글을 읽고 지나치는 잠깐의 순간이
누군가의 소중한 기억이 되기를 바라며...
다시 창문에 김이 서리면 글씨는 희미해지겠지만
그 안에 숨겨진 글씨는 다시 쓸 수도
언제든지 고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