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만이 줄 수 있는 것

by 천세곡

늦더위가 한창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대로 가을이 오나 싶을 정도로 선선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날씨는 변덕을 부리는 중이다. 낮의 햇살은 다시 따가워졌고 밤바람도 제법 후덥지근하다.


처서를 지나고부터였던 것 같다. 그때쯤 태풍이 지나고 나서부터 부쩍 날이 서늘해졌었다. 밤낮 가리지 않고 돌려대던 에어컨의 코드를 뽑아버렸다. 선풍기 마저 틀지 않아도 될 만큼 시원해져서 여름내 설쳤던 밤잠이 깊어지는 중이었다.


그런데 9월이 되면서 다시 무더워진 것이다. 8월 말 불어왔던 선선한 바람은 잘못 배달된 택배처럼 반송되어 버렸다. 어제는 밤에도 덥고 끈적해서 선풍기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돌아온 열대야는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기 바빴다.


한껏 가을을 기대하게 했던 날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기분이다. 차라리 쉬지 않고 줄곧 더웠다면 더 나았을까. 제법 시원했던 날들 이후 맞이하는 늦더위라서 마음을 더 지치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잠시 시원하게 불어왔던 바람은 여름이 끝났다는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였던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여름이 길어졌음을 받아들이려니 못내 미련이 남는다. 길어진 딱 그만큼, 가을이 짧아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최근 들어 실제로 여름이 계속 길어지고 있다고 한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 때문에 그럴 것이다. 꼭 심각하게 이상 기후의 관점에서 말하지 않더라도 가을의 날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은 아쉽기만 하다. 가을은 나를 차분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가을은 나로 하여금 잠시 멈추어 생각하게 도와준다. 숨을 고르고 오롯이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나를 이끈다. 마치 그러한 것이 가을의 속성이라고 말해주고 싶은 듯, 기분 좋은 바람으로 계속 속삭인다.


다른 계절 속에서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닐 테지만, 봄은 너무 설레고, 여름은 열정만 앞서며, 겨울은 위축되기 쉽기에 가을이 적기이고 제일 잘할 수 있다.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가을이 좋다. 적당한 온기와 선선함이 공존하는 계절.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밤잠뿐 만 아니라 생각도 깊어지게 해 준다. 가을만이 줄 수 있는 힘과 정서를 놓치지 않고 충분히 즐기고 싶다.




*사진 출처: Photo by Alisa Ant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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