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의 글쓰기 - 74번째
남은 날을 세어보았다. 오늘을 빼고 딱 여덟 번의 출근이 남았다. 순수 근무일 기준으로 일주일 정도 일하고 나면 마지막 출근하는 날이 온다.
디데이가 한 자릿수가 되니 괜히 마음이 바빠지는 요즘이다. 미뤄왔던 인수인계서 작성도 시작했다. 회사에 퇴직 의사를 밝힌 바로 그날, 해당 양식들은 받아 놓았었다. 파일을 열어 작성하려 해도 어쩐지 지지부진했다. 시작만 했지 도통 속도가 나지 않았다.
마침, 우울증 약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던 시기였기에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잘 안 되는 것 억지로 붙들고 있지 않기로 했다. 남은 시간들이 꽤 많았었으니까. 그때의 내가 꼭 하지 않더라도 곧 머지않은 미래의 내가 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기대에 완벽히 부응하며 오늘의 내가 열심히 이어서 해내고 있는 중이다. 먼저, 그동안 만들어 놓았던 파일과 폴더들을 천천히 훑어봤다. 업무를 받아서 하게 될 사람이 알아보기 쉽도록 정리부터 했다.
내가 업무를 시작할 때 받았던 인수인계서와 업무 매뉴얼들을 번갈아 보며 고칠 것은 고치고 새로 만들 것은 만들었다. 예전에는 했지만 지금은 하지 않는 내용들은 삭제하고, 새로 생긴 업무들은 추가해 넣었다.
‘맞아 내가 이 업무도 했었지.’ 인수인계서를 작성한답시고 이것저것 들춰서 보다 보니 그동안 해왔던 업무들이 차례대로 떠오른다. 사람은 죽기 직전에 자기 인생을 파노라마처럼 본다던데, 내가 죽어본 적은 없지만 비슷한 느낌일 듯하다. 이곳에서 내가 보내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러고 보면 퇴사는 죽음과 비슷해 보인다. 천세곡이라는 존재가 이곳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퇴사하기 위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행위들은 사실 회사 곳곳에 남아 있는 나의 흔적 지우기에 가깝다.
9년의 세월을 보낸 만큼 책상 위와 서랍 안에는 내 물건들도 많이 쌓여있다. 인수인계서를 마무리 짓는 대로 짐정리도 좀 해야겠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빠듯한 것 같기도 하다. 이곳에서의 나는 이제 시한부와 같아서 미래의 나에게 미룰 수도 없다.
열심이 필요한 때이다. 역시 결심 만으로 되는 일은 없다. 퇴사할 결심을 먹은 지 한 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퇴사할 열심을 내고 있다.
*사진출처: Photo by Michael Soledad on Unsplash